제112화. 일 번으로 만들어 드릴 수도 있는데 (2)
내가 그렇게 주먹을 풀며 다가가자, 염진회는 흠칫하며 걸음을 뒤로 물렸다.
“이건 나와 사적으로 형님 동생을 하는 북관의 수문장의 동패이다! 그리고 이것은 네놈이 감히 똥 의원이라는 소리를 했던 변 의원의 동패이다. 약왕당이라 쓰인 글자가 보이느냐?! 네놈의 견습 딱지를 떼고 붙이는 데 큰 힘을 쓸 수 있는 사람이지!”
하나 그러면서도 뉘우치는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소매춤을 뒤져 알량한 인맥을 상징하는 동패들을 주섬주섬 꺼내 들고 목청을 높여왔다.
“보시다시피 나는 오늘부로 네 녀석을 낙양 밖에 나앉게 만들어 줄 수도 있다! 근데 그런 나를 네놈이 지금 겁박하려 드는 것이냐? 지금 당장 무릎을 꿇어라! 무릎을 꿇고 내가 치는 뺨 석 대를 받아내면 내 꺼낸 패들을 다시 소매 속에 집어넣는 것을 고민해볼 것이다!”
와.
이 양반 진짜 안 되겠네.
- 우물 안 두꺼비 주제에 제 배를 부풀리며 독을 뿜고 있구나, 처맞아야 정신을 차릴 자로다.
‘사부님이 보시기에도 그렇죠?’
사실 처음에는 정말로 실력을 행사할 생각은 없었다.
내 기도에 적당히 겁을 먹고 물러나면 앞으로는 이러지 마시라는 말과 함께 돌려보내 드릴 생각이었다.
‘나는 어차피 딱 하루만 있다가 가는 사람이니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안 그래도 바쁜 혜민각에 괜히 일거리가 늘어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고.
어쨌거나 무공을 모르는 사람에게 무작정 참교육을 시전하기도 좀 그랬다.
하여 뉘우치는 기색이 있으면 적당한 선에서 그칠 생각이었다.
하나 방금부로 생각이 바뀌었다.
“겁박은 당신이 하는 게 겁박이지. 겁박이 꼭 힘을 앞세워야만 겁박인 줄 아시나? 당신처럼 남의 밥줄을 두고 염병을 떠는 것도 겁박이오.”
무공을 모른다 하여 악인이 아닌 것은 아니다.
대저 악인이란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언제든지 짓밟을 각오가 된 사람이면 악인인 것이다.
뭐, 생각은 여기까지.
“용운 형님! 무슨 일이십니까?!”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
나와 같은 견습 호위 역할을 맡고 있는지라 어느새 달려온 은하성과, 우소릉.
녀석들이 도착한 것을 확인한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은하성, 우소릉, 한종, 곡준평. 지금 당장 진실의 벽을 쳐라.”
그런 내 말에 한종과 곡준평은 조금 어리버리하게 굴었다.
“음? 진실의 벽?”
“그게 뭔데?”
하나 하성이 놈과 소릉이 녀석이 있었다.
“종이 준평이 그것도 못 알아듣냐? 하긴 너희들은 용운 형님을 곁에서 모신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형님의 의동생인 내가 친절하게 알려주마. 형님의 말씀은 저 인간 도망 못 치게 하라는 거야. 이렇게 넷이 에워싸라고.”
“보는 눈들이 있으니 겸사겸사 좀 가리자는 뜻도 있으시겠네요!”
뭔, 저런 걸로 뿌듯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 말을 알아들은 네 사람이 동시에 염진회를 에워싸니 어느새, 사람으로 이루어진 독 안에 든 쥐가 된 염진회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이, 이러고도 무사할 성싶나?!”
“무사할 성싶소. 나는 지금 당신을 어찌하려는 것이 아니라 조금 치료해드리려는 것이니까.”
“주, 주먹을 쥐고서 말이냐?!”
“어릴 때 배앓이를 한 기억이 없소? 모친께서 배를 쓸어주며 이 손이 약손이다. 뭐, 그런 이야기를 해줬을 텐데?”
“그건 또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이 손이 바로 그 약손이거든. 이 손으로 사람 여럿 고쳤소. 영 좋지 않게 된 사람도 있긴 하지만.”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이! 이놈들이 사람 잡는다!”
그런 내 말에 염진회는 억울하다는 양 발악을 했다.
그에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소매춤을 뒤졌다.
“다 떠나서 그런 동패가 있으면 뺨 석 대쯤은 쳐도 되는 듯이 말한 사람이 본인 아니시오?”
그리고 일찍이 받아 놨으나 딱히 쓸 일이 없어서 고이 간직하고만 있었던 두 개의 동패를 꺼냈다.
하나는 직속 타격대의 제일 각주 명태성의 동패였고.
다른 하나는 무림맹주 공손무결의 동패였다.
“…무, 무림맹주 님의 도, 동패…? 그, 그게 왜 거기서?”
“변 의원이란 사람이랑 북관의 수문장의 패로 뺨이 석 대였으니까. 나는 한 천 대쯤 쳐도 되나?”
“…어법.”
“거 농담이오. 농담. 천 대까지는 나도 바빠서 안 되고. 그 목에 들었다는 담이 도망갈 정도로만 두드려 드리겠소.”
“…어버버.”
“많이도 안 걸릴 거요 한 일다경? 아, 근데 이는 꽉 물도록 하시오. 자칫 강냉이가 날아갈 수 있거든. 참고로 강냉이는 이빨이오.”
* * *
그렇게 염진회가 물리 치료를 받는 모습이 일종의 경고장이 된 것일까?
이후로는 아침부터 기다렸는데 왜 자꾸 다른 사람을 먼저 봐주냐며 위급 환자들과의 형평을 논하던 사람들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일종의 일벌백계가 된 건가?’
뭐, 아무튼.
그런 사람들의 수가 상당히 많았기에 내가 맡고 있던 일에 여유가 생겼다.
여유가 생긴 김에 나는 소반 하나와 지필묵을 빌려 서류 작성에 들어갔다.
다른 서류는 아니었고 무림맹에 염진회를 발고하는 서류였다.
‘이런 건 당금수석이라는 별호를 달고 다니는 내가 작성해야 일 처리가 빨리 되지.’
어려울 것은 없었다.
전생 그중에서도 미미했던 시절에 질리도록 해본 보고서 작성에, 청죽관의 자치 부회장으로 있으면서 이 시대의 문서엔 무엇이 들어가고 무엇이 빠져야 하는지까지 은하연을 통해 어깨너머로 배운 나였으니까.
‘어디 보자. 사건의 개요를 우선 쓰고? 그 과정에서 확인된 사실들 겁박에 혜민각의 업무 방해. 증인으로는 은하성, 우소릉, 한종, 곡준평 그리고 지근거리에 있었던 병자들. 마지막은 변 의원이랑 북관의 수문장의 동패를 들고 있는 것을 보니 뒤가 구린 것 같다는 의혹으로 마무리.’
크.
중원 사람 다 됐다.
다 됐어.
그때였다.
내가 써놓은 발고서를 보며 내가 감탄을 하고 있는 이때.
위급도가 하(下)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늘어선 줄의 맨 뒤에 서 있던 절름발이 노인 하나가 절뚝절뚝 나를 향해 걸어왔다.
그런 절름발이 노인의 걸음에 내 뇌리에 어떤 생각이 번뜩 스쳤다.
‘약왕 어르신인가?’
원작에서 이르기를 약왕은 역용술과 축골공, 변장 같은 잡기에도 능해 다른 사람으로 분하면 알아채기가 어렵다 했다.
‘그리고 병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랬지.’
그저 저렇게 되어 있었을 뿐 어떤 병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기에, 의식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안중에서 아예 지우고 있었는데.
이제 보니 저 절름발이가 범인….
아니 약왕 어르신인 것 같았다.
‘묘하게 분위기가 비슷한 사람을 오전에 본 것 같은데 그 사람은 절름발이가 아니었지.’
오전에 본 그 사람과 눈앞의 절름발이는 동일인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다리를 절던 노인은 어느새 멀쩡하게 걷기 시작했고.
자글자글한 주름이 가득하던 얼굴이 위엄 있는 백발노인으로 변하더니 내 앞에 도착했을 때는 굽어 있던 허리마저 바짝 세워져 있었다.
그렇게 본 모습을 되찾은 약왕 오균천을 향해 나는 황급히 포권을 취해 보였다.
“견습 각내 호위 언용운이 약왕 어르신을 뵙습니다.”
그러자 약왕 오균천의 입이 호선을 그으며 한마디 말이 새어 나왔다.
“무림맹에 매여 있는 몸이긴 하다만 사실 나는 무림인이라는 족속들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하나, 네놈은 좀 마음에 드는구나.”
* * *
맹주실의 방문표를 견학을 나온 생도들에게 손수 걸어준 순간부터 생도들의 안위를 일차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사람은 무림맹주가 되었다.
하여 생도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사실 거의 실시간으로 공손무결에게 보고가 되도록 되어 있었는데.
첫 보고는 여러 가지로 중요했기에 밀직원장 국도진이 직접 공손무결을 찾아와 입을 열었다.
“맹주님.”
“왔는가?”
“우선 언용운 외 열아홉. 모두 혜민각으로 갔습니다.”
“거보게. 내가 그 친구라면 분명히 혜민각으로 갈 것이라 그랬지? 그 태호에서 퇴기들한테 약재를 베푼 일을 보면 알 수 있다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군사부에서는 생각보다 이해득실에 밝은 친구 같다고 바로 약왕당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라 보지 않았습니까? 그 예측이 틀릴 줄은 몰랐습니다.”
“틀렸다기보다는 언용운이라는 친구를 잘 몰라서 그런 것이지. 군사부 사람들이 만날 들여다본 첩보 서류라고 해봐야 제일 두툼하게 쌓인 게 망나니 시절 행적이니, 좋은 머리들을 백날을 굴려봐도 종잡기가 힘들 수밖에 없지.”
“예. 남궁욱 부회주의 심계를 간파해낸 명석함과 그 앞에서도 아닌 건 아니라 할 수 있는 강단을 가진 친구구나 했는데, 가장 먼저 혜민각을 찾는 것을 보니 확실히 협의까지 지닌 것 같습니다. 근래 보기 드문 재목이더군요.”
“그래. 이래서 다른 건 몰라도 사람만큼은 직접 눈으로 봐야 하는 걸세.”
“한데 맹주님께서도 견학 인원 전원이 혜민각으로 갈 줄은 예상 못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운매, 향란, 윤국, 청죽의 생도들이 다른 기숙사 생도의 주장에 고분고분 따르는 모습은 쉬이 상상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으니까.
하나 예측이 틀려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건 나도 예상을 못 하긴 했지. 누가 알았겠나. 제갈가의 보옥이 스스로 한 수를 접어주고, 남궁가의 적장자를 저리 초조하게 만들 수 있는 녀석이 있을 줄.”
“예. 저도 다른 모든 면모보다 그게 가장 대단한 것 같습니다. 얼렀든 달랬든 어쨌거나 따르게 한 것은 따르게 한 것입니다. 학문이나 무예는 후천적으로 갈고 닦을 수 있어도 남을 따르게 하는 재능은 그야말로 타고나는 것 아닙니까?”
“자네도 어지간히 그 친구가 마음에 들었나 보구만. 자네의 입에서 후기지수의 칭찬이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은데?”
“제가 그리 칭찬에 인색하였던가요?”
“그랬네. 아. 한데 보고를 하면서 그 앞에다가 우선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았나? 뭐 더 보고할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지?”
“예. 혜민각에서 발고장이 왔는데 작성자가 언용운이라길래 겸사겸사 보여 드리려고 우선 적으로 이리로 돌렸습니다.”
“이리 내 보게.”
공손무결의 말에 국도진은 언용운이 작성한 발고장을 내밀었다.
공손무결은 즉시 종이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한데 하도 많은 서류를 결재하는지라 어지간한 서류도 순식간에 파악을 끝내는 공손무결이 오늘따라 한 장의 종이를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에 국도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보기에 문제 될 게 없던데, 맹주님께서 보시기엔 문젯거리가 있는 겁니까?”
“아니, 내가 보기에도 문제가 없네. 위력과 인맥을 앞세운 협박에, 혜민각의 행사 방해, 이것만 해도 해오던 거래를 끊고 장을 칠 일 아닌가? 혜민각 사람들이랑 견학 생도들 말고 병자들의 증언도 있다면서?”
“예. 그렇습니다.”
“거기다 맹과 낙양 관내의 인사들과 비리가 의심된다? 이건 장에서 그칠 일이 아니군. 그러고 보니 염진회 이 사람 민간에서 들어온 투서도 있지 않나?”
“예. 보니까 맹과의 납기일은 맞추지 못한 적은 없는데, 맹진항 일대의 하역꾼들이 임금을 체불했다고 투서를 넣었던 적이 있습니다. 염진회가 소명 자료를 제출하고 하역꾼 쪽에서 취소해서 일이 흐지부지되긴 했습니다만.”
“이 맹염상단이라는 곳 대체할 상단은 있지?”
“예. 세 곳을 추려 여기 정리해 뒀습니다.”
“그럼 일단 이 사람은 날려버리게. 예전의 투서 건이랑 지금도 체불이 있는지, 그리고 비위 관해서도 더 파보고.”
발고장의 조치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하나, 국도진의 의문은 남았다.
대저 밀직원장의 업무는 무림맹주와 심중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 자리.
떠오른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국도진이 입을 열었다.
“한데 왜 그리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십니까?”
“아. 발고장을 너무 잘 써서 말이야. 직속 타격대에 새로 들어온 신입들은 한 달이 됐는데도 이렇게 못 쓰던데.”
“…….”
“왜. 뭐.”
“솔직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하게. 그러라고 있는 밀직원장 아닌가?”
“…조금 팔불출 같으십니다. 누가 보면 언용운 생도가 맹주님 아드님인 줄 알겠습니다.”
“장가도 안 간 사람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건 한번 해보자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러실까 봐 미리 양해를 구한 것입니다.”
잡담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일순 낯빛을 바꾼 공손무결이 심중의 이야기를 국도진에게 털어놓았다.
“하여 어떤가. 조만간 산서금붕께 생신 사절을 보내는 일을 언용운 그 친구에게 맡겨보면?”
“그 친구가 맡아주기만 한다면 더할 나위 없는 적임일 것입니다. 다만 그러려면 군사부의 조언에도 귀를 기울여야겠지요.”
“흠. 그 말은?”
“이해득실에 밝은 면모가 분명히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꼭 그 일을 맡기고 싶으시다면 그에 상응하는 선물을 맹주님께서도 준비를 해두시는 게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