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화. 약왕 오균천 (1)
“…….”
네놈은 좀 마음에 든다는 약왕 어르신의 입에서 나온 말에 일순 혜민각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됐다.
‘이게 그 유명한 고백으로 혼내주는 건가 뭔가 하는 그건가?’
특히나 의생들과 의녀들이 반응은 경악에 가까웠다.
“…서 의녀. 방금 큰 스승님께서 언 견습을 두고 네놈은 좀 마음에 든다고 하신 게 맞지요?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
“제대로 들으신 게 맞아요. 저도 똑똑히 들었어요.”
“…허허, 학관에서 나온 견학 생도를 두고 마음에 든다고 하신 게 도대체 얼마 만이지?”
“마음에 든다는 말을 하신 건 아예 처음일걸요? 어지간한 무명을 쌓은 무림인도 질색을 하시고 가문의 후광만 믿는 후기지수들은 질색을 넘어 팔색을 하시는 분이시잖아요.”
“그러고 보니 그렇긴 하군요. 시침이나 영약을 베푼 후기지수가 이따금 있긴 하셨지만.”
“그러면서 하셨던 말씀은 기껏해야 그나마 네놈은 정신머리가 박혀 있긴 하구나 정도였죠.”
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본인이 말했듯 약왕 어르신은 무림인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약왕당과 혜민각의 의생과 의녀들은 그런 오균천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며 그의 의술과 지식을 배우는 사람들이니 그런 어르신의 성정을 누구보다 잘았을 것이다.
‘그러니 저런 반응들이 나온 것도 무리는 아니지.’
당장에 나도 좀 얼떨떨하니까.
‘의생과 의녀들이 왜 저리 호들갑을 떠는지는 이해가 가도 어르신의 마음은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원작의 정현에게 약왕 어르신은 이런 말은 하지 않았다.
거기다 내가 한 것이라곤 반강제적으로 동기들을 혜민각으로 이끌고 온 거랑 각내 호위 역할을 차질 없이 수행해 냈다는 정도?
‘각내 호위의 역할이 사실상 잡역부에 가까워서 이래저래 의생들이 손이 필요하다 하면 피고름도 받아내고, 말썽부리는 사람이 나오면 어르고 달래기도 하다 보니 나름대로 바쁘긴 했지만.’
다른 녀석들도 맡은 바를 열심히 했다.
‘특히 당옥기는 허리 펼 새도 없이 병자들을 봤지.’
하여 조금 얼떨떨했다.
그래서 어떤 말을 돌려 드려야 하나 고민이 됐다.
한데 그사이 약왕 어르신의 입이 먼저 열렸다.
“혜민각이 문을 닫아걸고 나면 동무들을 이끌고 약왕당으로 오너라.”
음.
이러면 고민할 필요가 없지.
약왕당을 찾고 혜민각에서 구른 이유가 바로 저 말을 듣기 위해서였으니까.
“그리하겠습니다.”
나는 곧바로 포권지례를 약왕 어르신에게 올렸고,
그는 손을 휘휘 저으며 혜민각을 벗어났다.
그런 약왕 어르신을 보며 허리춤의 사부님께서는 한마디를 하셨다.
- 저러고 가는 것이냐? 병자들 좀 안 봐주고?
‘제자분들을 믿는 거죠. 그리고 약왕 본인이 나서면 제자들은 어디서 경험을 쌓습니까? 뭐 약왕께서 직접 나서야 할 정도로 위급한 병자나 전염병의 조짐은 없는 듯하기도 하고요?’
뭐, 아무튼.
내심 깊숙한 곳에는 혹여라도 안 나타나셔서 헛고생한 꼴이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조금은 있었는데 그게 해결이 됐다.
나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다시 각내 호위의 일을 시작했다.
“은하성!”
“예. 용운 형님!”
“너는 약방문 쓰는 쪽에 가서 거기 일 좀 도와. 당분간 한산할 것 같은 분위기라 여기는 나랑 소릉이 둘만 있어도 될 것 같다.”
“옙!”
“소릉이 너는 정 의원님한테 가서 마감 준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아 오고.”
“넵!”
혜민각은 그저 문에 걸쇠를 걸기만 하면 영업이 끝나는 동네 의원이 아니었다.
하여, 문 닫는 것도 일이었다.
괜히 기다리는 사람들이 없도록 병자들의 경중을 신중하게 분류해 받을 사람은 받고 돌려보낼 사람은 달래서 돌려보내야 했고.
약재들의 재고 파악과 나간 약재와 약방문 간에 오차가 없는지도 살펴야 했으며.
각내 청소와 사용된 약탕기와 천 그리고 침구들을 빨아 너는 것도 꼭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 모든 일을 다 끝내고 나니.
‘솔직히 하루 중에 제일 힘들었다.’
혜민각에 들기 전까지만 해도 어디 내놔도 헌앙하다 소리를 들었을 동기들이, 내가 왕년에 이끌었던 시체 군단과 비슷한 몰골이 되었다.
하나, 보람은 있었다.
어쨌거나 우리가 흘린 땀이 사람을 살리는 데 쓰이는 것이었고.
“고생 많았네.”
“매일 이런 전쟁을 치르시는 분들이 고작 하루 맛만 보고 가는 저희한테 고생이라뇨. 그 말은 오히려 저희가 드려야 할 것입니다. 늘 고생 많으십니다.”
“언 견습. 왜 스승님께서 자네를 마음에 들어 하셨는지 알겠군.”
“예?”
“아무것도 아닐세. 아무튼, 고생이 무슨 벼슬도 아니고 내 혜민각에서 보낸 세월이 길다고 자네들의 고생을 낮출 수는 없지. 내 이곳에서 침을 놓은 지 제법 오래되었는데, 오늘처럼 일이 편했던 적은 처음이었네. 이렇게 열과 성을 다해 우리를 도와줬던 생도들은 없었거든. 언 견습. 아니 언용운 생도. 그리고 다른 생도들도 모두 고생했고 고마웠네.”
“생도 여러분 고생하셨습니다!”
혜민각의 의생들과 의녀들도 진심으로 우리의 도움에 감사를 표했으니까.
“그리 말씀하신다면. 받겠습니다. 많이 보고 배우고 갑니다.”
“많이 보고 배우고 갑니다.”
그에 우리도 답례를 돌려 드리니, 마침내 작별의 때가 되었다.
“의원 된 자가 또 보자는 말을 함부로 입에 담아서는 안 될 일이고. 이따금 들려올 정무학관의 소식에 귀를 기울이며 그대들의 무운을 빌고 있도록 하겠네.”
그렇게 혜민각의 일을 마무리 지은 우리는 약왕당으로 돌아왔다.
“고생하셨습니다. 갈아입을 의복과 목욕물을 마련해 뒀습니다. 여생도분들은 우측의 사랑채로, 남생도분들은 좌측의 사랑채로 가 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렇게 약왕당을 다시 찾으니 혜민각을 안내해 주었던 의녀님이 목욕물과 의복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하기야, 약왕 어르신을 만나면 진맥도 받고 각기 다른 대법도 받고 그럴 텐데 이런 몰골로는 무리지.’
그에 우리는 잠시 동안 헤쳐서 따스한 목욕물에 몸을 담가 피로를 녹이고 의복을 정비했다.
그리고 다시 모이니 한 무리의 시체 병사 같았던 몰골들이 다시금 정무학관의 용봉들로 바뀌었는데.
“다 오신 건가요?”
“아직 한 명 덜 왔습니다. 당옥기!”
“잠깐. 잠깐만!!”
“다들 기다린다!”
“진짜 다 됐어! 나갈게! 다들 미안!”
이것저것 챙길 것이 많았던 당옥기를 마지막으로 스무 명이 다시 모이자, 의녀님은 우리를 약왕당의 응접실로 안내했다.
약왕당의 응접실은 검박했다.
흔한 도자기나 족자 하나 없이 십장생이 그려진 병풍과 스물한 개의 소반만이 놓여 있을 뿐이었으니까.
그 소반이 각자의 자리이겠거니 싶어서 하나씩 끼고 앉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약왕 어르신이 지필묵이 올려져 있는 소반을 든 의녀님과 함께 응접실에 도착했다.
그에 모두가 기립하니, 약왕 어르신이 쓰흡 하는 소리를 내며 눈을 부라렸다.
“다들 앉아 있거라.”
누구의 말이라고 거스를까.
약왕 어르신의 말에 우리는 다시 궁둥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러자 어르신의 음성이 계속해 이어졌다.
“다른 부서에 가서 견학을 하고 수장을 알현하는 시간을 맞았다면, 앞에들 놓인 소반에 따끈따끈한 음식이 놓여 있었겠지, 하나 네놈들이 최초에 이곳을 찾은 이유가 약 냄새 나는 늙은이랑 밥이나 한술 뜨자고 온 것은 아닐 것 아니냐?”
솔직히 맞는 말이었다.
하나 그렇다고 맞다고 하기엔 좀 그래서 가만히 뭔 소리를 하시려고 저런 말씀을 하시나 기다렸는데, 어르신의 입에선 곧바로 본론이 튀어나왔다.
“소매들 걷거라. 맥 좀 짚어보자.”
거, 원작에서 뵈었던 대로 화통하시구만?
나는 누구보다 빠르게 소매를 걷어붙였다.
* * *
소매를 가장 먼저 걷어붙인 사람은 나였다.
하지만, 약왕 어르신이 진맥을 하는 순서는 본인과 가까운 순서였다.
한데 나는 동기들이 한사코 상석과 근접한 자리를 양보하는 탓에 병풍 앞의 상석과 가장 가까이 앉아 있었던 터라.
‘어쩌다 보니 맨 마지막 순번이 되어버렸네.’
뭐, 상관은 없었다.
약왕의 진맥은 선착순으로 좋은 물품이 나가는 상점의 행사 같은 것이 아니라, 생도의 맥과 체질 등을 고려해 알맞은 진단과 처방을 내려주는 것이었으니까.
“어디 보자. 옥녀공을 익혔구나? 검후의 제자이렷다?”
“예. 제 사부님이십니다.”
“흠. 옥녀공을 익히기 전에 섭취했으면 모를까. 이미 익힌 이후로는 성질에 맞는 영약을 섭취하는 게 중요하다.”
“그렇습니까?”
“오냐. 한데 애석하게도 차가운 성질의 영약이나 영단은 현재 약왕당에 없구나. 네 사부를 졸라 보타문의 것을 주워 먹든지, 아니면 정무학관에서 북해빙궁에 생도를 보내는 일이 있거나 하면 지원해서 거기 가서 졸라 보거라.”
“…그렇군요.”
“대놓고 시무룩해하기는. 조금 있다가 놓아 주기로 한 청점금침대법만 해도 기연이다 이것아. 내가 아무에게나 금침을 놓아주는 줄 아느냐?”
확실히 기연이긴 했다.
청점금침대법은 화타의 제자들이 남긴 비전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약왕 오균천이 익힌 시술법으로, 그 시술을 받은 무림인은 영약을 흡수하며 경맥에 쌓인 탁기가 뽑혀 나가고 오장과 육부가 강해지고, 평범한 사람이 맞으면 장수한다고 원작은 말했다.
쉽게 말해 강남상왕 은정길이 내게 구해줘서 마셨던 담천약수랑 효과가 비슷했다.
‘물론 금침대법 쪽은 시전자가 약왕이라 일말의 부작용도 없고 체내의 탁기가 모조리 빠져나간다는 점에서 월등하긴 하지만.’
아무튼 약왕의 진맥은 계속되었는데, 은하연처럼 금침대법만 약속을 받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백고단이라는 영약을 선물받은 정현 같은 사람도 나왔고.
“네 녀석은 사천당문 사람인가 보구나? 음. 얼굴을 보니 기억이 나는구나. 아까 혜민각에서 견습 의생 노릇을 하고 있던 녀석이지?”
“예. 어르신.”
“너도 청점금침대법만 놓아주도록 하마, 본가가 의가(醫家)이고 네 녀석 스스로도 의술에 조예가 있어 보이던데, 네 체질은 네가 잘 알 터, 탁기는 뽑아 줄 테니 영약은 당가타에서 알아서 주워 먹던지 하거라.”
“예! 어르신! 한데 실례가 안 된다면 소녀에게 조금 있다가 짬을 조금 내 주실 수 있으신지요?”
“짬은 왜?”
“아, 제가 하고 있는 연구가 있는데, 맞게 하고 있는지 고민이 되어서요.”
“당문의 늙은이들한테 물어볼 것이지 나한테 왜?”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안 봐주시거든요! 근데 제가 볼 때는 분명 쓸데가 있거든요! 그리고 제가 중점적으로 사용하고자 재료가 혈수만독주의 실타래와 청점(青黏)이라서요.”
“혹 연구 개요를 적은 서류 지금 가지고 있느냐?”
“네! 여기 있습니다!”
“…흠. 흐음. 흥미롭구나. 이론상으론 말은 되는 것 같은데? 알았다. 내 짬을 내주도록 하마.”
영약을 선물 받지는 못했지만, 지도 편달을 약속받은 당옥기 같은 녀석도 나왔다.
물론 당옥기가 약속받은 지도 편달은 내게도 호재였다.
‘이거이거 만독단의 토대가 되는 백독단이 개발될 냄새가 솔솔 나는구만.’
그리고.
내가 그렇게 무언의 쾌재를 부르고 있는 사이, 내 바로 앞 순번에 해당하는 남궁윤의 차례가 되었다.
“너는 안면이 좀 많이 익숙한데?”
“남궁가의 윤입니다. 예전에 작은 할아버님과 함께 뵌 적이 있습니다.”
“아. 남궁가의 장손?”
“예. 맞습니다.”
“뭐, 손이나 내 보거라.”
“이렇게 내어드리면 되겠습니까?”
“오냐. 음?”
“제, 제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입니까?”
“그건 한 가지 더 확인을 해봐야 알 것 같구나.”
한데 남궁윤의 차례에 이르러서는 어째 분위기가 묘하게 흐르더니.
“내가 지금부터 네 가슴팍 주변을 이리저리 눌러볼 것인데 아프면 참지 말고 소리를 내거라.”
“아! 아!! 아!!!!”
“젊은 놈이 벌써부터 홧병의 조짐이 보이는구나.”
“예?”
“아까 팽가의 여식아이도 속에 응어리가 조금 있더니만. 젊은것들이 왜 이렇지? 한데 네 녀석이 훨씬 심한데? 남궁가의 장손쯤 되는 놈이 이렇게 홧병이 날 일이 뭐가 있을꼬?”
“…….”
“아무튼 네 녀석은 지금 영약이나 대법을 받는 것보다 치료를 해야겠다. 금아 침통 좀 다오.”
“예. 어르신.”
“자 이렇게 머리꼭지에 한 대.”
약왕 어르신은 남궁윤의 정수리에 다짜고짜 기다란 장침을 피뢰침을 꼽듯 푹 하고 꽂았다.
그리고 남궁윤에게 당장에 앞섶을 열 것을 요구했다.
“한 대는 가슴의 한복판에 놓아야 하니 앞섶을 좀 열거라.”
“여, 여기서 말입니까?”
“이놈이 급하다는데 쓰잘 데 없는 내외를 하는구나. 화병이 우스우냐? 고금을 막론하고 내로라하는 기재들도 홧병으로 많이들 죽었다.”
“여, 열겠습니다.”
푸욱-
“가슴에도 한 대. 그러고 좀 있거라, 그리고 정심탕의 약방문을 써줄 테니 당분간 아침 저녁으로 달여 마시거라. 하나 이건 임시 조치일 뿐이다. 홧병은 스스로 해결해야 하니 하루라도 빨리 마음의 평화를 찾도록 하거라.”
남궁윤은 딱히 아무것도 받지 못하고 우스꽝스러운 몰골만 얻었다.
‘뭐, 원작의 남궁윤도 이 시점에선 약왕 어르신께 금침대법을 받지 못하는 녀석이니 문제 될 건 없지.’
아무튼.
그렇게 내 차례가 찾아왔다.
“네놈도 손을 내 보거라.”
그리고 내 맥을 짚어본 약왕은 눈을 크게 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