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5화. 그거 내가 해주면 어떻겠나? (1)
나는 이야기 좀 나누자는 팽소진을 제쳐두고 먼저 우소릉을 향해 입을 열었다.
“소릉아.”
“예. 언 형.”
“저기 모퉁이 돌면 우물 있던데 거기 가서 물 한 바가지만 퍼다 줄래?”
“옙!”
그런 내 행동에 팽소진이 고운 이목구비를 구기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내가 누난데 들은 척도 안 해주는 거니?”
어쩐지 조금만 다그쳐도 물기를 머금을 것 같은 음성.
팽소진을 무시하기 위해 우소릉에게 물 좀 떠오라고 한 것은 아니었기에,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제대로 들었습니다. 한데 말로만 나눌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아서, 수분 보충 좀 해두려고요. 누님이야말로 땀에 전 제 모습이 눈에 들어오시지 않는 겁니까?”
“…아.”
표정을 보니 정말로 눈에 안 들어왔던 모양이다.
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정신이 없겠지.’
원작의 팽소진은 지금보다 훨씬 오랜 기간을 고민하고 방황한 끝에 도를 꺾고 검을 쥔다.
기간이 긴 만큼 속을 끓인 시간도 길었다.
‘하나, 그만큼 심마에 사로잡히게 되는 과정도 서서히 이루어졌다.’
심마라는 녀석을 내리는 비에 비유하자면, 원작의 팽소진은 가랑비가 내리는 길목을 천천히 걸어오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어느새 옷이 다 젖은 느낌일 것이다.
‘반면 눈앞의 누님은 짧은 시간이긴 하나 장대비가 쏟아지는 소나기의 한복판에서 오도카니 서 있던 꼴이지.’
원작에 비하면 심마에 빠진 기간은 비할 수 없을 만큼 짧았지만, 팽소진의 심상에 결정적인 충격을 준 인물이 어린 시절부터 보아온 데다 커서는 망나니 소리를 듣고 있는 나라는 점이 달랐다.
‘거기다 내가 검이 어울린다고 직접적으로 이야기까지 했으니.’
모르긴 몰라도.
팽소진의 가슴속에 솥이 있다면 그 솥이 까맣게 타도록 속을 끓였을 것이다.
그러는 중에 약왕 어르신께 금침 대법을 받았으니, 무림맹 견학에 따라오라는 한 이유가 이것 때문인가 싶었을 것이다.
‘소천이 형이었다면 오! 하고 거기서 고민이 끝났겠지, 하지만 소진 누님은 같은 날 같은 시에 같은 배에서도 났어도 팽소천과 전혀 다른 성정을 지닌 사람이니.’
곧바로 내가 막연하게 성장할 길을 알려주게 해주겠다 한 것이 아니라, 명확하게 도보다 검이 어울린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금 심마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독심술이나, 관심법까지 갈 것도 없었다.
당장에 팽소진의 눈동자 속에서 휘몰아치고 있는 복잡한 감정들이 내 말이 맞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슬슬. 소진 누님의 등을 조금 더 밀어드릴 때가 됐다.’
소나기는 굵지만 짧다.
이제 그녀의 고민을 끝내줄 때가 됐다.
박수도 손뼉이 맞아야 나온다는데, 결심이 서지 않은 팽소진을 공손무결 앞에 데려가서는 두 사람 사이에 사승이라는 연결고리를 만들어 주기가 쉽지 않을 테니까.
“언 형! 여기 물 떠왔어요!”
“고맙다.”
뭐, 생각은 여기까지.
나는 우소릉이 가져다준 물을 벌컥벌컥 마신 뒤.
스르렁-
곧바로 회한을 잡아 뽑았다.
그리고 연무장의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내 모습에 팽소진이 입을 열었다.
“뭐, 뭐 하자는 건데?”
“대화하자면서요?”
“그래 대화하자는데 검을 왜 뽑아?”
“말만 하는 것보다 느끼게 해드리는 게 더 효과적일 것 같아서요.”
“뭐?”
“약왕 어르신께 금침대법을 받고 나오신 뒤로부터 누님께서 풍기는 분위기랑 여태 차고 다니시는 허리춤의 직도를 보니, 자칫 잘못하면 제 말을 잘못 이해하실 것 같아서요. 누님도 허리춤의 도, 뽑으세요. 어릴 때처럼 대련 한번 합시다.”
언가와 팽가는 두 지붕 한 가족 같은 끈끈함을 가진 집안인지라, 팽가네 쌍둥이와 언가네 형제들은 어린 시절 많이도 어울려 놀았던 것으로 원작에 나온다.
무가의 자녀들이 어울려 노는 방식이야 뻔하다.
대련 아니면 전쟁놀이.
당시만 해도 맹호지체의 특성이 발현되지 않은 팽소천, 진득한 수련보다 노는 것을 좋아하는 전(前)용운, 나이도 어리고 성정도 얌전한 언용명에 비해 팽소진의 무재가 월등했다.
‘하여 전쟁놀이를 하면 누님이 장군이었고, 대련을 하면 자연히 지도 대련의 형태가 됐다는 묘사가 있었지.’
그러니까.
어릴 때처럼 대련 한번 하자는 내 말은 팽소진의 귀에 지도 대련을 하자는 말로 들렸을 것이다.
‘물론 작금의 성취는 내 쪽이 위임을 춘계 기숙사 대항전에서 확인을 했으니.’
정확히는 이번에는 내 쪽에서 가르쳐 드리겠다는 것으로 들렸겠지.
아니나 다를까.
“…너!”
팽소진의 표정이 울컥하는가 싶더니, 그녀의 허리춤에 달려 있던 직도가 뽑혀 나왔다.
스렁-
한데 따로 수선을 하지 않았는지 회한을 막다 이가 나간 부분이 여전히 그대로여서 잘 뻗은 새카만 도신에 티가 있었다.
- 네게 패배한 직후로 고치지도 버리지도 않았으니 기실 저 직도 자체가 팽가의 여식 아이에게는 미련이구나.
그런 것 같아서 아주 부러뜨려 버리려고요.
* * *
어릴 때처럼 대련 한번 하자는 언용운의 말에, 어째선지 팽소진의 가슴속에서 불길이 일었다.
그 불길에 몸을 맡기니 어느새 도를 뽑아 언용운을 향해 거리를 좁혀 들어가고 있는 자신이 보였다.
쌔애애액!!!
물론 분기탱천하여 아무렇게나 휘두른 도는 아니었다.
춘계 대항전 당시 확인했던 언용운의 기량을 상정해 매섭고 빠르게 뻗어낸 일도였다.
캉!!!
하나 그런 팽소진의 일도를 언용운은 여유 있게 막아냈다.
수준을 맞춰 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검사를 검에 감지도 않았고, 그러고도 여유가 있는지 말까지 걸어왔다.
“그래서 저랑 나누려고 하셨던 말씀이 무엇입니까?”
언용운은 그러면서 수세만을 취했다.
하여 팽소진에게도 여유가 생겼다.
카캉! 챙!!
나누려고 했던 말?
“…약왕 어르신의 대법이 무림맹에 따라오라고 한 연유냐고 물으려 했어.”
“혹시 저랑 합을 섞고 계신 분이 소진 누님이 아니라 둔갑한 소천이 형 아닙니까?”
당연히 팽소진은 팽소천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저 말은 바보냐는 소리였다.
언용운의 말에 팽소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너!”
사실 팽소진도 내심으론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언용운은 무림맹을 따라오면 벽을 넘을 수 있다고 한 것이 아니라, 도보다 검이 어울린다고 말했었다는 것을.
팽소진은 팽소천이 아니어서 그 사실을 까먹을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알면서도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는 심정으로 물어보려 한 것이었다.
약왕 어르신께 대법을 받을 것을 염두에 둔 게 아니라면 정말로 도를 손에서 놓으라는 거였다.
‘그래서야 인생이 부정당해.’
뭐가 그리 급한지 날 때부터 바짝 따라 나온 동생에게 뒤처지고 싶지 않아서, 남들은 놀기도 할 때 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손발이 부르트고 부르트도록 휘두른 도였다.
‘근데 그게 틀렸다고?’
특히나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언용운이라고?
안돼.
그러지 마.
‘용운아. 네가 그런 말을 하면 나는 스스로를 경멸하게 돼.’
하북의 모든 이들이 언용운 더러 언정웅이라는 범이 개를 낳았다고 입을 모으고 망나니라 손가락질을 할 때.
팽소진도 같은 생각을 했었다.
자신은 수련할 시간이 날마다 부족한데 하루가 멀다고 언가와 팽가를 뒤집어 놓는 짓을 하는 언용운의 모습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한데, 이제 와서 보니 그 모든 것이 연기였던 것 같았다.
정무학관에서 확인한 무위나 바둑 실력 같은 것만 봐도 그러했다.
거기다 견학 생도가 되며 지켜본 언용운의 진면목은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몸에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야영에 대해 빠삭한 모습이나 일사불란하게 동기들을 지휘하는 모습.
남궁욱이나 염진회 같은 자들 앞에서도 굽히지 않던 모습.
일말의 고민도 없이 혜민각으로 가자던 모습.
모르긴 몰라도 그녀가 연무장에서 도만 휘두를 때, 언용운은 망나니를 자처하며 남몰래 세상을 배운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누나가 되어서 뒤에서 혀나 차며 미련하게 도만 휘두르고 있었는데, 도마저 틀렸다고?’
그럴 수는 없어.
그래서는 안 돼.
그때였다.
그렇게 팽소진의 의식이 깊숙한 심마의 수렁으로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그때.
언용운의 음성이 팽소진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누님. 손에 쥐는 날붙이의 형태 좀 바꾼다고 굳은살이 박인 손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심상의 벽을 넘어보고자 했던 몸부림이, 익혀온 투로가 모두 없던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
“누님이 도를 휘둘러 온 세월 전체가 틀린 게 아닙니다. 그저 길을 잘못 드셨을 뿐입니다. ”
그리고 언용운의 검이 흐느끼듯 우웅- 대더니.
이가 나가 있던 팽소진의 도와 크게 맞물렸다.
챙강!!!!!
그에 두 동강이 나버린 팽소진의 직도.
무엇보다 소중히 여겼던 애병이 못 써먹게 된 순간이었지만.
팽소진의 마음엔 어째선지 홀가분함이 들어찼다.
“…정말 그럴까?”
“망나니가 하는 장담에 안심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보증합니다,”
반만 남은 현철직도를 팽소진이 내던지는 순간이었다.
* * *
한결 홀가분해진 표정이 된 팽소진을 보며 나는 우선 우소릉을 향해 전음을 날렸다.
[소릉아. 좀 전에 날아간 칼날이랑 소진 누님이 방금 던진 자루 쪽이랑 딱 챙겨놔라.]
[예! 언 형!]
그에 맞추어 우수에 들려 있던 사부님께서 혀를 차셨다.
- …이 순간에도 그런 게 신경이 쓰이느냐? 지독하다 지독해!
그런 거라뇨, 사부님.
‘저게 저래 봬도 현철이 야무지게 들어간 건데요. 고철로 팔아도 되고, 녹여서 다른 걸로 만들어도 되고 아무튼 쓸모가 무조건 있습니다.’
그런 사부님을 검집 속으로 모시며 대꾸를 하고 있는데, 허리춤이 허전해진 팽소진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래서 나는 이제 뭘 하면 되는데?”
“쉬세요. 아까 진맥할 때 들어보니까. 약왕 어르신께서 누님도 심신이 지쳐 있다고 금침대법만 받고 쉬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남궁윤 보다는 증상이 약하신지 머리에 침은 안 꽂으셨지만요.”
“…그렇긴 한데.”
“내일부터는 각자 가고 싶은 부서로 가라고 무리를 흩을 생각인데, 누님은 백본회 거기 신청하세요.”
“백본회를? 거기에 나한테 검을 가르쳐줄 사람이 있어?”
“아뇨. 방금 쉬시라고 했는데 못 알아들었습니까? 진짜 소천이 형이 둔갑했나?”
“다른 것도 아니고 돼지 머리를 나한테 갖다 대? 아까도 진짜 열받았는데 다시 생각났네!”
“아무튼 내일은 백본회 골라서 쉬시라고요. 정무학관에서 생도들이 왔는데 당파 싸움 하는 모습 보이고 싶지는 않을 테니, 별거 없을 겁니다. 회의장 구경 한번 하고 다과 좀 먹고 그러고 끝일 거예요. 검을 가르쳐 드릴 분은 제가 추후에 자리를 마련하도록 할게요.”
“…후. 알겠어.”
그렇게 약왕당에서의 하루가 지나갔다.
꼬끼오-
그리고 찾아온 다음 날.
무림맹주를 알현하는 순번 중 첫 번째가 나였기에, 의관을 반듯하게 하고 무림맹의 한가운데 우뚝 치솟은 건물의 가장 높은 층을 찾아가니.
“맹주님. 언용운 생도 들었습니다.”
“들여보내게.”
무림맹주 공손무결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왔나. 이리와 앉게.”
“옙.”
“그래. 간밤에 잠자리는 편안하였는가?”
“맹주님께서도 신경 써 주시고, 약왕 어르신께서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신 덕분에 개운하게 잤습니다. 맹주님께서는 안녕히 주무셨는지요?”
“나도 오랜만에 웃으면서 잠들어서 그런가? 잘 잤네.”
“뭐,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기특하게도 견학을 나온 생도들이 혜민각부터 달려간 일이 있었지.”
아.
난 또 뭐라고.
“별일 아닌 것처럼 웃지 말게. 내가 취임하고는 자네들 같은 견학 생도들이 없었다네. 퍽 듣기 좋은 이야기였어.”
“그래도 맹주님께 그런 소리를 들으니까 좀 많이 쑥스럽습니다.”
“쑥스러울 게 뭐 있나. 만났을 때 열 번째 자네 소식은 제자로 삼아달라는 청을 기대한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일 학년이 부회장이 된 걸로 열 번, 청죽관을 우승시킨 것으로 열두 번, 견학조를 고르게 배분한 것으로 열세 번, 여기 와서는 혜민각에 간 것으로 열네 번을 채웠네.”
그렇게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가며 나를 추켜세우던 공손무결은 턱수염을 매만지며 은근슬쩍 제자가 될 생각은 아직도 없는지를 물어왔다.
“하여 아직도 내게 검을 배워볼 생각은 없나?”
그때나 지금이나 내 마음은 같았지만, 화두 자체는 기다리던 화두였다.
“외람된 말씀인데 그러는 맹주님께서는 혹시 저 말고 다른 제자를 들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음? 완곡한 거절인가? 아니면 진심으로 누군가를 추천하고 싶어 그런 말을 하는 것인가?”
“감히 제가 맹주님께 누군가를 추천할 자격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단은 후자입니다.”
자칫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는 부탁이었으나, 공손무결은 어지간히도 내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인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실제로 제자로 들일지 말지를 판단하는 것은 다른 문제지만 추천할 자격은 충분하네. 그래서 그 친구가 누군데? 같이 견학을 나온 생도 중에 있나?”
“팽소진 생도입니다.”
“…패, 팽 선배의 장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