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7화. 이 영감탱이가 (1)
더 큰 게 기다리고 있다는 내 말에 은하연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다른 언 동생들은 숨을 죽였다.
…아 당옥기는 따지고 보면 청죽관 생도가 아니긴 한데.
녀석이 들어서 문제가 될 건은 아니거니와.
‘애초에 우리 이야기를 남들한테 할 녀석도 아니라.’
나는 다음 말을 기다리는 녀석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맹주님께서 청죽관에 합격진(合擊陣)을 전수해 주시기로 하셨다.”
“어? 합격진이면 언 형이랑 회장님 그리고 고 부장님께서 근래 들어 한창 머리를 싸매고 계시던 화두 아닌가요?”
“맞을걸? 용운 형님이랑 경룡 형님이 이야기 나누시는 거 나도 얼핏 들은 것 같은데?”
내 말에 하성이 놈과 소릉이 녀석은 호들갑을 떨었다.
그리고 당옥기는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 기숙사 합격진 없었어?”
한데 듣고 보니 뭔가가 이상해서 나는 이상한 부분을 바로 짚었다.
“너희는 있지. 당옥기 너 향란관 소속이잖아.”
“마, 말이 잘못 나왔어! 척하면 척 좀 해!”
“아무튼 청죽관은 없다.”
그렇게 이상한 부분을 짚는 사이, 은하연이 캬악거리는 당옥기를 다독이며 청죽관의 실태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응, 옥기야. 우리 기숙사는 대대로 내려오는 합격진이 없어. 연감을 보면 맨 처음에는 있었던 것 같기는 한데, 중간에 실전이 된 모양이더라. 노삼 교수님도 본인이 지니신 일신의 무위는 뛰어나시지만… 아시고 계신 합격진이라고 해봐야 개방의 타구합벽진인데, 이건….”
그런 은하연의 말을 정현이 조금 거들었다.
“제대로 시전하려면 사실 걸인들만 할 수 있는 합격진입니다. 그런 부분을 제외하고 보면 팔짱을 끼고 어깨를 겹쳐 들이받는 진에 불과합니다. 물론 개방의 십만 방도를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무시무시한 합격진이긴 하나, 대항전에서 응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뭐, 아무튼.
그렇게 청죽관의 실태를 자조한 은하연은 나를 향해 질문을 던져왔다.
“백련검과 합격진. 딱 지금 청죽에 가장 필요한 것들이긴 하네요. 근데, 이래도 되는 거래요?”
“일단 절차적인 문제는 없을 것 같소. 먼저 백련검의 경우 맹주님께서 본인 돈 그리고 개인 자격으로 무림맹에 불하를 받아서 지원할 거라고 하셨거든.”
“…아. 그럼 검진은요? 맹주님께서 청죽관까지 오셔서 저희들 붙잡고 하나하나 알려주실 정도로 한가하신 분은 아니실 텐데요?”
“그것도 걱정할 건 없소. 왜 얼마 전에 있었던 무림맹의 해금방 토벌 건 있잖소?”
그 해금방 토벌 건에 멀리서 관여한 관련인 중 하나가 은하연이었기에 당연히 모를 리가 없었다.
은하연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계속해 말을 이었다.
“무림맹의 맹칙상 보통 그런 험한 일을 하고 오면 휴가를 주도록 되어 있다고 하오.”
“아. 그건 저희 상단도 그래요. 포상의 의미도 있지만, 표사들이랑 상인들도 고된 상행을 하고 나서 푹 쉬어주지 않으면 아무리 강호인들이라도 골병이 들기 마련이니까요. 아! 그럼 그 휴가 기간을 이용해서 저희를 지도해 주신다는 건가요?”
“맞소. 맹주님 본인은 아니고. 타격대의 각주님 중에 한 분이신데, 명태성 각주라고 어제 내게 방문표를 주셨던 분이오. 뭐, 그런고로 절차나 맹칙이나 학칙상으로 문제 될 것은 없소.”
맹주님 돈 맹주님이 쓰시는 거고, 명 각주가 자기 휴가 자기가 쓰는 것이니.
내돈내산에 자휴자쓰인 것이다.
“진짜 잘됐네요! 아. 근데 명태성 각주면 그 며칠 전에 언 공자께 방문표를 직접 주신 분이죠? 입관 시험 전부터 침을 발라 뒀다던 말씀을 하셨던? 근데 그 침을 발라 뒀다는 이야기는 뭐예요?”
“그때 아마 명 각주님이 용운 형님을 영입하려고 찾아오셨을걸요? 맞죠 형님?”
얼결에 튀어나온 이야기.
뭐, 하성이 녀석이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어. 맞아.”
“와. 그럼 진짜 진짜 만분의 일 정도는 언 공자가 입관을 하지 않으셨을 가능성도 있었던 거네요? 학관에 돌아가면 후원 이야기 말고 그 이야기도 회장님한테 전해 드려야겠어요. 어떤 표정을 지으실지 벌써 궁금한데요? 흐흫.”
그에 은하연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혼자 피식거렸는데.
그런 은하연과 다르게 몇몇은 어째선지 안도의 숨 비슷한 것을 내쉬었으니 순서대로 우소릉, 당옥기, 정현이었다.
한데, 개중에 정현이 뭔가 내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왜. 뭐.”
“아. 맹주님의 후원이 문제가 없다는 사실은 이해를 하긴 했는데, 빈도가 느끼기엔 그렇다손 치더라도 조금 과한 감이 있습니다.”
“계속해봐.”
“예. 저희가 따로 무림맹의 소속으로 세운 공이 있는 것은 아닌데 선물이 조금 과하셔서 혹여라도 언 소협께 부담이 되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무슨 부담?”
“예컨대 맹주님께 편애를 받는다 하는 뒷말이 돈다든지, 아니면 언 소협께서 홀로 맹주님과 부담스러운 약속을 하고 오셨다든지 뭐 그런 생각들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그런 정현을 향해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가만히 있어도 망나니 소리를 듣는데 그런 게 부담이 왜 되겠냐.”
“…그래도.”
“됐으니까 그 이야기는 거론하지 말고. 뭐, 사실 맹주님께 부탁을 하나 받고 오긴 했다. 그러니까 공을 세우지 않은 것은 아닌 거지, 일종의 선불 뭐 그런 거다.”
공손무결의 부탁은 정무학관의 학사 일정 중에 견학 연휴가 끝나면 훌쩍 다가오는 중간고사 이후에 실시되는 대민 지원 시기에 맹을 위해 간단한 일 하나만 해달라는 것이었는데.
부탁 자체도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다.
‘산서금붕, 그러니까 내 외할아버지에게 한번 다녀와 달라는 것이었으니까.’
그 일을 나한테 부탁하는 이유는 다른 것은 아니었고.
내 외가 쪽 선산이 도굴을 당했는데, 범인의 종적을 아직도 못 찾았음에도 무림맹의 조력을 저쪽에서 한사코 거절하니, 곧 있을 생신연에 혈육인 내가 가서 분위기를 좀 살펴달라는 것이었다.
‘맹주님은 해금방의 일도 있고 해서 찝찝하다고 하셨지.’
뭐, 이 건은 어차피 원작에서도 다뤄지는 사건이었다.
또 청죽관의 지속적인 재정 확보 건과 크게 관련이 있어서 기실 내 쪽에서 먼저 가겠다고 나서려 했던 일이었기에 고민할 것이 없었다.
아무튼 다음 학사 일정의 일이라, 당장에 언 동생들에게 시시콜콜 맹주의 부탁에 관해 늘어놓을 필요는 없었다.
하여 나는 딱 필요한 말만을 골라 입을 열었다.
“당장은 자세히 말해주기가 좀 그렇고. 다들 나중에 학관 밖으로 좀 나갔다 올 일이 있을 것 같다 정도로만 알아둬라. 그때 가서 손들 좀 빌리자, 괜찮지?”
그런 내 말에 언 동생들이 저마다 입을 모았다.
“뭘 그런 걸 물으시고 그러십니까. 제가 필요하다 하시면 빈도는 불문곡직 도산검림을 가자 하셔도 따를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용운 형님! 저도 그 불문? 도산 뭐시기 그겁니다!”
“저도요!”
“상재가 필요하신 일이면 몰라도 검술을 익힌 지가 얼마 안 돼서 도움이 될까 싶습니다만, 언 공자가 필요하시다 하시면 기꺼이 따를게요.”
“뭐, 기일이 제법 남았소. 중간고사를 치르고 난 뒤의 일이라. 인선은 그때 가서 생각해 봐야지.”
“…난.”
“근데 당옥기 너는 안 데려가. 연구해야지. 백독단의 시제품은 대관절 언제 나오는 거냐? 거기 들인 돈이 얼만데.”
“누, 누가 따라가고 싶대? 그것도 곧 나올 거야! 약왕 어르신께서 맞게 잘하고 있다고 확인해 주셨거든?!”
* * *
한편 그렇게 언용운의 방에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한창인 이때.
강호인들에게 소무후, 그러니까 작은 제갈공명이라 불리는 제갈설지는 군사부(軍師府)란 현판이 내걸린 건물의 가장 깊숙한 공간에서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호록-
당연히 군사부가 아무렇게나 놀러 올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제갈설지는 정식으로 방문 신청을 하고 온 것이었다.
한데도 눈앞에 앉아 있는 고운 외모의 중년 여인은 묵묵히 자신의 앞에 놓인 서간만을 살피고 있었으니.
사사로이는 제갈설지의 고모 되는 여인이자, 공적으로는 무림맹의 대군사이며, 뭇사람들은 앉아서 천리를 본다고 좌견천리(坐見千里)라 부르는 제갈혜가 바로 그녀였다.
딸각-
뭐, 아무튼.
그렇게 제갈설지가 홀로 차만 홀짝이고 있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고모님!”
어느 순간 제갈설지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아미를 와락 구겼다.
“계속 그렇게 서간만 들여다보고 계실 거세요? 저는 지금 고모님의 조카가 아니라 정무학관의 견학 생도 자격으로 여기에 앉아 있는 건데요?!”
나름대로 정당한 주장이었다.
하나 논리에 틈이 없지는 않았다.
제갈혜는 딱 그 틈을 헤집었다.
“성질머리하고는. 근데 그건 확실히 하자, 설지 네가 지금 정무학관의 견학 생도 자격으로 여기 와 있는 거면 고모님이 아니라 호칭을 대군사님이라고 해야지. 그리고 그렇게 함부로 감정도 내비치면 안 되고. 내가 네 그릇을 재보는 중일 수도 있잖니?”
“아니시잖아요!”
뭐, 이러나저러나 제갈설지라고 매일 남들보다 많은 시진을 부여받은 것이 아니었다.
하니, 다른 부서 견학에 사용해도 되는 귀한 시간을 군사부에 사용하고 있는 것만큼은 명백했다.
그에 제갈혜는 한 수를 물러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미안. 근데 어차피 너는 고모가 일하는 곳이 뭐 하는 곳인지, 또 얼마나 바쁜지 다 알잖아? 알면서 온 거잖니? 그래서 나는 그냥 쉬러 왔겠거니 했는데?”
하지만 세가에 있을 적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콧대를 높이던 제갈설지가 저리 씩씩거리는 이유가 무엇일지 짐작이 가긴 해서 웃음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웃지 마세요!”
“그래 이것도 미안. 아무튼 네가 이해를 좀 해주렴. 다른 생도들이 찾아오면 그동안 서간을 못 보는 시간이 생기니 조카인 네가 이해를 좀 해. 너도 어차피 하소연 같은 거 하러 온 거 아냐?”
“하소연까지는 아니고요.”
“아무튼 이거 보면서도 귀담아들어 줄 수 있으니까. 네 이야기나 해보렴.”
그런 제갈혜의 음성에 제갈설지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꼭 넘어서고 싶은 상대가 있는데, 알면 알수록 너무 커 보여요. 고모님도 이런 상대가 있으셨나요?”
“큽. 그거 언용운 생도 이야기지?”
“맞아요. 근데 왜 아까부터 자꾸 왜 그렇게 웃으세요?!”
“내가 예전에 네게 해준 말 기억 안 나니? 강호에는 기인이사가 많아서, 항상 뛰는 자 위에 나는 자가 있으니 자만하지 말라고. 내가 그 말 했을 때. 설지 너 나한테 뭐라 그랬어?”
“…저는 항상 나는 사람일 거라고요.”
“큽.”
“…….”
제갈혜 입장에서는 웃음이 나오지 않으려야 나오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으다.
하나, 더 웃었다간 제갈설지가 단단히 삐칠 것 같았다.
“그래, 진짜 난놈을 만나보니까 어때?”
“솔직히 제가 뛰고 용운 님이 나는 정도까지의 차이는 아니에요. 비유하자면 음. 벽? 그래 딱 높은 벽 정도겠네요.”
“그럼 함곡관보다 높은 벽이겠네. 소식 날아온 거 보니까 내내 졌다며? 입관 시험에서도 지고, 무술학개론 시간이랑 대련에서는 그 의동생 격인 정현한테도 졌다며? 아, 심지어는 바둑도 졌다지?”
말로 사람을 잡는 촌철살인이 바로 이런 것일까?
“…바둑은 고모님이 두셔도!”
제갈혜의 말에 제갈설지는 발끈을 하려다, 그간 언용운에게 겪어온 패배의 순간들이 떠올라 속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치는 바람에 말을 다 맺지 못했다.
근데 심지어 제갈혜가 열거한 패배 중엔 사실 단강제일객잔에서 겪었던 비공식 패배가 빠져 있었다.
제갈설지는 갑자기 숙소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차 잘 마셨습니다. 고모님.”
“알았어. 그만할게. 어디 보자, 커 보이는 상대라. 머리 좋은 걸로는 네 할아버지가 계셨고, 사람 좋은 것으로는 네 아버지가 계셨지, 거기에 나는 검술 같은 것에는 젬병이라 강호의 다른 고수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학관에서 교편을 잡고 계신 작은 오라버니한테도 검술이 밀렸지.”
“그런 거 말고요. 동년배나 동기 중에서요.”
“할아버님한테 지는 건 당연하고 동기이자 동년배인 언용운 그 친구한테 지는 건 말도 안 되는 거니?”
“…….”
“그거 잘못된 생각이야. 네가 그 친구에게 진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 그런 생각도 네 패배를 부르는 데 크게 일조를 했겠구나. 설지야. 와신상담은 아무 곳에나 가져다 붙여도 되는 전가의 보도가 아니란다. 와신상담을 하려면 네가 언용운 생도에게 졌다는 그 사실부터 제대로 인정하렴.”
그러고 보니 그랬다.
입관 시험 때는 제갈설지 자신이 안전한 선택을 한 덕에 운 좋게 수석을 차지한 사람이라 여겼고,
이후로도 직접 검을 맞댄다면?
바둑판에서 싸운다면?
갖은 이유를 찾아가며 자신이 언용운에게 질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앞의 패배를 합리화했다.
내심으로 언용운을 인정하긴 했으나, 이기고자 하면 이길 수 있는 맞수 정도로 여겼다.
심지어 방금도 그랬다.
나는 사람이라는 비유에 어쩐지 울컥하는 마음이 들어서 벽이니 어쩌니 하는 소리를 했다.
실제로는 맞수는커녕 붙는 족족 다 깨졌음에도.
‘…수, 수치스러워.’
그에 미뤄뒀던 수치심이 한꺼번에 제갈설지의 얼굴로 몰려들어 그녀의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제갈혜는 피식 웃었다.
‘향상심은 좋은 감정이지. 뒤쫓아갈 목표가 가까이에 있는 것을 보니 설지가 복이 있구나.’
그때였다.
그렇게 제갈혜의 입에 흐뭇한 미소가 걸린 이때.
새로 잡아든 서간에 쓰인 문장이 제갈혜의 미소에 금이 가게 만들었다.
“남궁욱 이 늙은 너구리 같은 영감탱이가 지금 뭔 짓을 하려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