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8화. 이 영감탱이가 (2)
하루 쉬어갈 심산으로 백본회에 견학 방문을 신청한 언 동생들.
녀석들에게 학관에 복귀하면 더욱 열심히 살도록 굴려… 아니 도와주겠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 앞에 했던 하루쯤 여유 있게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말 또한 진심이었다.
‘원래부터 하루 정도는 오롯한 휴일을 주려고 하긴 했으니까.’
백본회를 방문하면 사실상 휴일을 누릴 수 있다는 정보를 알자마자 합심해서 나 모르게 얼른 방문 신청을 한 부분은 아주아주 살짝 괘씸하긴 하지만.
내게 물어보면 ‘안 돼!’ 소리를 들을 것이라 예상하고 제 놈들 딴에는 저질러 놓고 보자는 심산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뭐, 그치만 애초에 각자 가고 싶은 곳으로 가도 좋다고 한 사람이 나였고, 애초에 청죽관의 자치회 임원들은 같은 날에 백본회에 방문일을 잡아 하루쯤 휴식일을 가지려 했다.
하여 나는 기왕지사 일이 이렇게 된 김에 애초에 생각하고 있던 나들이 계획을 앞당기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무튼 맹주님께서 그렇게 후원을 해주시기로 했으니 그리들 알고. 일다경 줄 테니 다들 외출복 챙겨 온 걸로 갈아입고 이 앞으로 다시 모여.”
그런 내 말에 은하연이 귀를 쫑긋 세웠다.
“그 말씀은?”
“하루 쉬는 것으로 하겠소. 인근의 명승지도 가보고. 그 뭐냐. 씹을 거리도 내 사주겠소.”
소릉이 녀석도 질문을 해왔다.
“맛있는 거 사주시나요?”
“군것질 너무 많이 하면 밥을 맛있게 못 먹을 테니 한 사람당 당호로 한 개씩 사주마.”
그런 내 말에 허리춤의 사부님께서는 혀를 차 오셨다.
- …저저. 굳이 구질구질한 이유를 붙여가며 굳이 한 개씩이라고 콕 찝는 것 좀 봐라…. 에라이.
“외출복 입고 소리 질러! 그럼 누님들 빨리 나가십쇼! 저희 옷 좀 갈아입게!”
“예. 저희도 저희지만 두 분도 갈아입고 오셔야지 않습니까? 언 소협의 성정이 칼 같으시니 여생도 숙소에 가셨다가 오셨을 때. 늦게 도착하시면 먼저 출발하실지도 모릅니다.”
“확실히 그건 그렇네요.”
?
사부님도 그렇고, 다들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큼. 그럼 저희는 옷 좀 갈아입고 올게요? 가자 옥기야.”
“그, 근데 언용운.”
“왜? 당옥기.”
“나도 가도 되는 거야?”
“뭔 당연한 소리를 묻는 거냐? 아. 가기 싫다는 이야기면 안 가도 되긴 하지?”
“아니. 싫다는 게 아니라! 니가 아까부터 왜 여기 있냐고 자꾸 그러니까!”
“그걸 여태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고? 심지어 지가 먼저 나한테 사기 쳤네 어쩌니 했던 소리는 홀라당 까먹고?”
“…….”
“하여간 당옥기가 당옥기 했네. 그냥 하는 말이지 인마. 물론 연구 열심히 하라는 말은 진심이고.”
“아! 그건 하고 있다니까!”
“알았으니까 빨리 옷 갈아입고 와. 지금도 시간은 가고 있다.”
하지만 나도 사부님께 할 말이 있었다.
‘그리고 사부님.’
- 뭐.
정작 당사자들은 좋아하는 것 같은데 왜 사부님이 그러십니까?
- 그러니까 말이다…. 너도 너지만 그걸 또 좋아하는 저놈들도 참 저놈들이구나….
‘그리고 제가 쓸 때는 쓰는 사람입니다. 진짜 군것질 많이 하면 밥맛이 뚝 떨어져서 한 개씩만 사주려는 겁니다.’
- 오냐. 오냐. 네 말이 다 옳다. 다 옳아.
뭐, 아무튼.
나는 금세 옷을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온 언 동생들을 이끌고 경비부에 가서 외출 의사를 밝혔다.
내가 정한 목적지는 관림(關林)이라는 곳이었다.
관림은 삼국지의 주역 중 한 명인 관우(關羽)의 머리가 묻힌 무덤이었다.
관우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 무성(武聖)이자 의리의 화신이며 재물의 신이고 심지어 도가에서도 추앙받는 인물.
하여 관림은 견학을 온 김에 둘러보기에는 그야말로 합당한 명승지였다.
위치 또한 무림맹의 본부와 지척이자, 유적지 내 경비를 무림맹에서 돕고 있었기에 안전 문제도 없어서 외출증은 별문제 없이 바로 나왔고.
그렇게 우리는 가는 길에 늘어선 노점 중 하나에서 당호로를 하나씩 사서 빼먹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도착한 관림.
관림은 무덤이라고 하여 풀이 무성한 봉분 하나만 띡! 있는 게 아니라 각종 전각과 문루들이 백여 개가 위치한 곳이라 그야말로 규모를 조금 축소한 궁궐처럼 느껴지는 곳이었는데.
언 동생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관림 구경을 시작했다.
의리! 를 외치는 은하성.
그걸 따라 하는 우소릉.
사천에 있는 무후사와 규모를 비교하는 당옥기.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관우와 관련된 고사와 일화 여러 글귀를 줄줄 외는 정현.
그리고 오랜만에 찾아온 휴식 자체를 만끽하는 은하연.
각자의 방식대로 관광을 즐기고 있는 녀석들 중 나는 은하연에게 말을 걸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오?”
“좋죠. 얼마 만에 쉬어보는 건데요. 아까 백련검 얻어 오셨다고 하셨을 때만 해도 그렇게 많이 가져오신 줄 몰라가지고, 기쁘면서도 내심 이거 분배를 또 어떻게 해야 하나 여기까지 와서도 나는 일을 하고 있구나, 내심의 자아가 비명을 질렀는데, 넉넉하게 얻어 와주신 덕분에 반나절이나마 마음 편히 쉴 수 있게 됐네요. 고마워요, 언 공자.”
“고맙다는 말은 받지 않겠소.”
“예? 왜, 왜요?”
“사실 은 소저가 도와줘야 하는 일이 좀 있거든.”
그런 내 말에 은하연은 무언가를 직감했는지,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백자처럼 하얗게 질렸다.
“이, 일이요?”
“그 왜 청죽관의 지속적인 재원 확보에 관한 건으로 내게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라서 말이오.”
그에 내심에서 미안함이 조금 솟긴 했지만, 이건 은하연 말고는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일이었다.
“얼마 전에 소천이 형이랑 소진 누님과 이야기를 하다 알게 된 것인데, 하북에 계신 아버님이 팽재혁 교수님과 팽가의 전서응을 통해서 우리 소식을 전해 듣고 계신다는 게 아니겠소? 내 생각엔 이걸 사업화를 하면 괜찮을 것 같소. 학관의 주요 소식들과 각 가문의 자제들의 소식들을 돈을 받고 세가에 보내주는 것이오.”
“으.”
“그러려면 여러 가지가 필요할 것 같은데, 우선 필력 좋은 주필(主筆)은 마침 딱 적절한 인선이 여기 무림맹에 있소. 예해수 선배라고 심지어 청죽관 출신으로 파견을 나와 있는 분인데, 이 사업의 개요를 설명하며 학관에 복귀를 하라고 하면 아마 이 학기에는 돌아오시지 않을까 싶소. 예 선배를 소저가 따로 좀 만나 주시오.”
“윽.”
“아마 그게 가능하냐고 물어 오지 싶은데 강남은 은휘상단의 전서구망을 사용하고 하북은 내 외가 쪽인 태원상단의 전서구망을….”
“으아악!”
“왜? 별로요?”
“아뇨. 발상 자체는 괜찮은 것 같아요. 아니 괜찮은 게 아니라 좋아요. 할게요. 하게 해주세요. 그런데.”
“그런데?”
“하늘을 좀 보세요. 날씨가 좋지 않나요? 그런 이야기는 조금만 미루자고요.”
그에 걸음과 말 그리고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보니 은하연의 말처럼 날씨 한번 좋았다.
“뭐, 그럼 이 뒤의 이야기는 나중에 하는 것으로.”
“네. 좋아요!”
나는 일거리들을 잠시 접어놓고, 맑은 하늘과 관림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잠깐 정도야 괜찮겠지.
* * *
그렇게 관림 관광을 마친 우리는 무림맹의 정문께로 돌아왔다.
한데, 낯이 익은 중년인이 정문 앞에 서 있었다.
안력을 돋아 그 익숙한 낯을 살피니 지근거리에서 무림맹주를 수행하는 밀직원장 국도진이었다.
우리는 바쁘게 걸음을 옮겨 밀직원장 앞에 선 뒤 일제히 포권을 취했다.
“밀직원장님을 뵙습니다.”
그런 우리의 인사를 가볍게 받아준 국도진은 곧바로 입을 열었다.
“거두절미하고. 일이 좀 생겼네.”
그런 국도진의 음성에 나와 언 동생들은 서로의 얼굴을 살폈다.
뭐 사고 친 거 있냐는 암묵적인 물음이었으나 딱히 걸리는 것이 없는지 모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에 나는 국도진을 향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짚이는 바가 없습니다만, 무슨 일이 생겼기에 밀직원장님께서 저희를 다 기다리고 계시는지요?”
“백본회의 부회주가 특별 약식 감사를 요청해왔네.”
특별 약식 감사?
그건 작중의 무림맹에 등장하는 제도로 일종의 징계 위원회 같은 것이었는데.
일반적인 징계 위원회는 여러 관계인을 제외하고도 백본회의 상원과 하원까지 관여하고 여러 번에 걸쳐 사례를 심사하기에 필연적으로 시간이 오래 걸리니, 급박히 맹원의 처우를 논의해서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겼을 때.
그런 복잡한 절차들을 모조리 건너뛰고.
관계인과 무림맹주, 대군사 그리고 백본회 부회주가 모여 사안을 처리하는 제도였다.
‘근데 감사를 당하는 사람에게 너무 불리한 제도라 원작에선 닥친 일이 재해에 가까울 때나 튀어나왔던 것 같은데?’
예컨대 마교의 발호나 사도련의 준동 쯤 되는 사태가 터져야 튀어나오는 제도였다.
“특별 약식 감사면 강호에 급박한 일이 생겼을 때에나 실시되는 제도 아닌지요?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입니까?”
“그랬으면 내가 자네들을 기다리고 있을 여유가 없었겠지.”
“아. 그건 그렇겠습니다.”
“하, 그 정도 일이 터졌으면 그래도 이토록 어이가 없지는 않았겠군. 강호는 잠잠하네. 한데도 특별 약식 감사 요청이 들어왔네, 그것도 언용운 생도 자네한테.”
“예? 저한테 말입니까?”
“그래. 일단 가면서 이야기하세.”
국도진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를 듣고 나니 말 그대로 어이가 없다는 말이 딱 맞았다.
백본회 부회주 남궁욱.
그 여우 같은 영감탱이가 나를 두고 특별 약식 감사를 요청하는 게 가능했던 이유는 세 가지였는데.
첫째. 무림맹주에게 방문표를 받으며 내 신분이 전환되어 지금 나는 무림맹 소속이라는 점.
둘째. 당장은 무림맹 소속이긴 하지만 수일 내로 정무학관으로 돌아가는 게 예정된 사람이라, 나를 두고 논해야 할 거리가 있으면 급박하긴 하다는 점.
셋째. 급박한 상황에 사용되는 제도였기에 재량을 높여두기 위해 별다른 조건이 붙어 있지 않은 맹칙이라, 저런 억지스러운 이유를 들더라도 약식 감사를 여는 것 자체는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하나, 무림맹주, 대군사, 백본회 부회주쯤 되면 어떤 일을 접하더라도 경중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들일 것임을 애초에 가정하고 만든 맹칙이라, 어이가 없는 것은 없는 것이었다.
어찌나 어이가 없었는지.
“이래도 되는 겁니까?”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자부하는 나도 진심 어린 헛웃음이 새어 나왔을 정도였고.
언 동생들은 저마다 할 말이 많지만 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눈으로 욕을 뱉고 있었다.
그에 국도진이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미안하네. 선대의 사람들도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별다른 제동 조항을 마련해 놓지 않았고, 우리도 예상하지 못해서 일이 이렇게 되었네.”
“밀직원장님께서 미안해하실 일은 아니시고요.”
“그래도 미안하네. 단 약속할 수 있는 건 별일은 없을 것이라는 걸세. 당장에 특별 약식 감사가 열리는 것을 막을 조항은 없지만 일단 감사가 개최되고 나면 맹주님께 거부권이 있네. 대군사님께도 있고.”
“흠.”
“자네는 아직 못 만나 봤겠지만 대군사님께서도 이런 일을 용납하실 분이 아닐세. 벌써 맹칙 개정안을 만들어서 감사장에 오셨네. 귀찮은 일에 휘말리게 만들어서 미안하네만, 자네에게 해가 가는 일은 없을 걸세. 그냥 잠시 자리만 채워주면 될 거야.”
뭐, 그렇긴 했다.
나를 예뻐하는 무림맹주 공손무결은 물론이고, 원작에 나온 대군사 제갈혜의 성정을 고려하면 국도진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하여, 나는 그래 이 여우 같은 영감탱이가 무슨 꿍꿍이로 이런 앙큼한 짓을 벌였나 들어나 보자는 심산으로 감사장으로 향했는데.
감사장에는 관계인으로 불려 나온 동기생들이 배석한 가운데. 이마를 싸쥐고 있는 공손무결, 사람 좋은 척 웃음을 보이고 있는 남궁욱, 그리고 제갈설지가 곱게 늙으면 저렇게 되겠구나 싶은 여인이 팔짱을 낀 채 뭐 씹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분이 대군사님이시겠고.’
뭐, 아무튼.
그렇게 내가 감사장에 들자.
“시작하시지요.”
어지간하면 선배님 소리나 상대의 직책을 꼭 붙여 부르는 공손무결이 할 말만 냅다 뱉어버린 것을 효시 삼아 백본회주 남궁욱이 내 혐의라는 것을 읊기 시작했다.
“견학 생도 언용운을 이 자리에 불러세운 이유는 금일 무림맹주를 알현하기로 되어 있던 언용운, 남궁윤, 곡준평 그리고 군사부를 방문한 제갈설지. 이 네 명의 생도를 제외한 다른 생도들이 백본회를 방문하였는데, 방문 과정에서 언용운 생도가 다른 생도들을 인솔해 낙양으로 오는 과정에서 남궁윤 생도에게 가혹한 대우를 하였음이 밝혀졌기 때문이오.”
그렇게 운을 뗀 남궁욱은 삽질을 시킨 일을 시작으로 호랑이 똥을 건넨 일 같은 것들을 차례차례 말하기 시작했다.
비상시국을 위해 만든 제도를 사용해 호랑이 똥 재판을 열다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와중에 허리춤의 사부님께서 질문을 해오셨다.
- 한데, 무림맹주나 대군사 둘 중 한 명만 거부해도 무효로 돌아간다면서? 저 늙은 너구리는 왜 굳이 이런 짓을 하는 것이냐?
‘일종의 으름장이겠죠. 이제 저희가 현재 무림맹 소속이다 보니, 복귀할 때는 형식적으로 무림맹주가 인솔자를 새로 임명해 주시거든요? 맹주님께서 저를 이뻐하시는 걸 알고 그걸 남궁윤을 시켜 달라고 압박하려고 저러는 걸 겁니다.’
뭐, 아무튼.
그렇게 사부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보니 어느새 내 혐의를 밝히는 일이 끝이 났는지 남궁욱이 말을 멈췄다.
“이상이오.”
그에 공손무결과 제갈혜의 입이 말을 토해내려 뻐금하려는 데.
동기들이 배석한 자리에서 남궁윤이 시뻘건 얼굴로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고함을 내지르듯 말을 뇌까렸다.
“작은할아버님! 그만하십시오! 소손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실 요량이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