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0화. 초대하지 않은 손님. (1)
무림맹의 땅 아래에는 만년한철이나 만년현철을 두드려 펴 벽으로 삼은 비동들이 수없이 마련되어 있다.
물론 각 부서마다 중요한 것이 다르기에 비동들이 자리한 이유는 저마다 다르다.
예컨대 군사부의 경우 일급 기밀들을 담고 있는 문서들이 가득하고, 재경부의 경우 금은보화와 귀보 등이 있는 식으로.
하면 무림맹주가 관장하는 본전(本殿) 혹은 본부(本部)의 지하에 자리 잡은 비동에는 무엇이 있을까?
정답은 아무것도 없다.
그도 그럴 게 이 비동은 무림맹이 공격당하는 유사시에 무공을 배우지 못한 노약자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기에 그랬다.
때문에 평시에는 무림맹주의 직속 타격대가 단체 훈련용으로 사용되는 보안 등급이 높은 연무장으로 인식되는 곳이었으나.
근 며칠간은 그 직속 타격대의 훈련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일남일녀가 검에 대해 논하고 또 직접 부딪히고 있었으니.
“네가 나름대로 평생을 휘둘러 온 도에 견주자면 이 검이라는 병장기는 도처럼 필요 이상으로 힘껏 휘두를 필요가 없다.”
챙!
쌔애애액!!
“그렇지!”
챙!
채채챙!!
“방금은 아주 좋았다. 검은 도와 달리 강하게 베어내는 방식으로 상대를 튕겨 나가게 만들지 않더라도 방금같이 찌르는 동작을 초식과 초식 사이에 섞는 것으로 내 허점을 방비함과 동시에 상대의 동작을 견제할 수 있다. 잘했다.”
“후하. 흐하. 아닙니다 사부님. 제자가 아둔하여 사부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야 간신히 찌르기를 떠올려 냈어요.”
다름 아닌 무림맹주와 견학 생도에서, 사부와 제자로 관계를 재정립한 공손무결과 팽소진이었다.
“아니 잘한 건 잘한 것이다. 평생을 휘둘러 온 습관이 있고, 내가 아직 헌원검의 검초를 알려주지 않았으며, 방금 한 조언이라곤 검은 도처럼 힘껏 휘두를 필요가 없다는 것뿐. 심지어 내가 몰아세우고 있던 순간이었으니. 사고가 제한되었을 텐데, 스스로 사활의 문제를 해결한 꼴이니 칭찬받아 마땅하다.”
“가, 감사합니다.”
“네 재능에 관해 말한 것인데 감사는 무슨. 아무튼 확실히 도보다는 검 쪽에 재능이 있구나. 특히나 내 검술과 아주 궁합이 좋아.”
그렇게 말을 맺은 공손무결은 자기도 모르게 내심의 한마디를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언용운 그 친구는 단박에 이걸 알아봤다는 것인가? 소진이야 남매 비슷하게 자랐으니 안다고 쳐도, 헌원검은 그때 객잔에서 딱 한 번. 그것도 잠깐 본 것이 다일 텐데? 허. 이곳저곳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녀석인 줄은 알았지만 남의 자질을 보는 눈까지 갖췄다고?”
하나 금세 팽소진을 앞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생각의 방향을 바꿨다.
“아, 소진아 미안하다. 내 잠시 다른 생각을 했구나.”
“괜찮습니다 사부님. 저도 용운이는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진심이었다.
그도 그럴 게 팽소진의 마음도 공손무결과 같았다.
이제야 딱 맞는 옷을 입은 것 같다는 기분을 팽소진 스스로도 느끼고 있던 차였다.
그저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사람이 언용운이니 공손무결이 언용운의 이름을 언급한다 해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나쁜 게 아니라 기꺼웠다.
“그리고.”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용운이에게 미안해요. 녀석의 속내도 모르고 망나니라서 편하겠느니 어쩌느니 하는 말을 하기도 했고, 도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에 발끈해서 심지어는 무림맹에 와서까지도 귀찮게 했거든요.”
하지만 기꺼운 마음만큼 부끄러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과거에 용운이에게 씌워져 있던 망나니라는 멍에를 벗겨줄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내가 이런 분에 넘치는 기회를 받아도 되는 걸까?’
무림맹주의 제자가 될 기회는 언용운이 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 단순히 가질 수도 있었을 게 아니라 원하기만 했다면 반드시 그렇게 됐을 터였다.
언용운은 그런 기회를 자신에게 양보해준 것이었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구나. 검을 휘두를 때는 세상 밝아 보였는데, 갑자기 이러는 것은 원인이 언용운 그 친구라는 것이겠지?”
“…예. 누나가 되어서 받기만 받은 것 같아서요. 아직 미안하단 말도 사부님을 만나게 해주어서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 했는데 벌써 견학 일정이 끝나는 날이 되어 버렸네요.”
그런 팽소진의 넋두리에 공손무결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언용운 그 친구는 그런 거 마음에 두고 있지도 않을걸? 내가 아는 언용운이라는 인사는 그런 것은 진즉에 잊고 어렵게 검을 쥔 누님이 대성하는 것만을 바라고 있을 사람이야. 그러니 소진이 너는 지금처럼 내게서 검을 배워가는 일에 매진하면 된다.”
“예. 사부님.”
“뭐, 아무튼 심법은 전수가 끝났고, 검이라는 병기의 특성도 이해하게 된 것 같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내게 헌원검의 초식만 배우면 되겠구나. 한데.”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모래시계의 남은 모래를 보니 이거 벌써 시간이 제법 흘렀구나. 소진이 네 말마따나 정말로 견학 일정을 끝낼 때가 되었어. 견학 기간 연장을 신청한 너를 제외한 다른 생도들은 채비를 해서 모여 있겠구나.”
“…아!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뭐, 언용운 그 친구의 내심이야 어떻든 소진이 네 마음속에 그리 미안한 마음이 가득해서야 검이 갈 곳을 잃기 마련이다. 오늘은 이쯤 하고 생도들 배웅이나 하러 가자꾸나. 내 적절히 동기들과 이야기 나눌 시간을 줄 것이니 그 자리를 빌려 할 말을 전하도록 하거라.”
* * *
나는 무림맹에 도착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보고를 시작했다.
보고를 하는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무림맹주 공손무결 이고 뒤에는 동기들을 뒀다는 사실은 같았다.
“견학 기간 연장 신청을 한 팽소진 생도를 제외한 언용운 외 열여덟. 정무학관으로의 복귀 준비를 마쳤기에 무림맹주님께 신고 드립니다.”
하나, 맹에 도착했을 때와는 달라진 것도 있었으니, 당시 마중을 나왔던 사람과 지금 배웅을 나온 사람들의 구성이 달라져 있었다.
- 남궁욱? 그 백본회의 부회준가 무뇌충인가 하는 너구리가 안 보이는구나?
‘와병을 핑계로 빠졌습니다. 대신 처음에는 아랫사람을 보내왔던 군사부랑 약왕당에서 대군사님이랑 약왕 어르신이 직접 나오셨네요?’
뭐, 아무튼.
그렇게 내 보고가 끝나자 맹주님을 시작으로 마중을 나온 사람들이 한마디씩을 하기 시작했는데.
가장 먼저 운을 뗀 사람은 당연히 내 보고를 받아주는 사람인 무림맹주 공손무결이었다.
“고생했네. 이곳에서 보낸 칠일여가 자네들의 성장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길 바라겠네.”
의례적인 인사말로 운을 뗀 공손무결은 견학을 나온 생도가 학관으로 복귀할 때 선물로 제공하는 정의맹(正義盟)이라는 글자를 가슴팍에 수놓은 피풍의를 내게 둘러주며 전음을 보내왔다.
[백련정강으로 만든 병장기들은 대략 선별이 끝났으니 수일 내로 호북으로 가는 정기 상행단을 통해 보내주겠네, 그리고 합격진을 가르쳐 주기로 한 명태성 각주는 공식적으로는 자네들과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 이미 휴가계를 내고 자네들보다 먼저 맹을 나갔다네, 낙양성을 나가 관도에 몸을 올리면 ‘우연히’ 마주칠 수 있을 것이야.]
그렇게 피식 웃으며 내주시기로 한 선물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 공손 무결은 씨익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리더니.
바로 뒤에 선 제갈설지를 비롯한 다른 동기들에게 피풍의를 둘러주기 위해 자리를 떴다.
그렇게 비게 된 내 앞은 대군사 제갈혜가 채웠다.
“만나서 반가웠어.”
그녀는 우선 적으로 나를 향해 형식적인 짧은 인사를 건네왔는데.
“예. 저도 반가웠습니다. 대군사님.”
이어서 은밀한 목소리로 본론을 전해왔다.
“…너. 이 다음에 한판 더해.”
바둑을 말하는 거겠지?
하지만 나는 짐짓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런 내 음성에 왜인지 모르지만 뒤에 서 있던 제갈설지의 입에서 ‘풉.’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설지 너!”
그리고 제갈혜의 아미가 와락 구겨짐과 동시에 판돈이 올랐다.
“…두 배로 쳐줄게.”
“그러시다면. 나중에 기회 될 때 또 뵙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 다음은 약왕 어르신이셨다.
“며칠 사이 신수가 훤한 게 내어 준 약의 약발이 잘 받는 모양이구나.”
“다 흡수한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저랑 잘 맞는 것 같습니다.”
“흥. 누가 내어 준 건데? 당연히 잘 맞지! 아무튼 내가 했던 말 잊지 말거라!”
“아. 그 사람을 살리는 검을….”
“거. 남사스러운 말을 사람들 많은 곳에서 하고 그러느냐! 그거 말고! 의술에 관심이 있으면 제자로 받아주겠다는 말 말이다. 내 명이 붙어 있는 한, 제안은 유효하니 언제든 그 숭악한 날붙이를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거든 나를 찾아오너라.”
아니, 언제는 자기가 주점에 남기는 술동인 줄 아냐고, 하기 싫으면 말라면서 일없으니 나가라고 축객령 내리셨던 분이?
뭐, 아무튼.
그렇게 이른바 거물급 인사들의 작별 인사가 끝났고.
“본래라면 퇴맹식은 이렇게 마치면 될 것이나, 이번 기수의 견학 생도 중엔 견학 연장 신청을 하여 무림맹에 조금 더 남기로 한 생도가 있으니, 동기생들끼리 인사를 나눌 시간을 좀 주고자 하니, 일이 많으신 분들은 가셔서 일을 보셔도 무방하겠습니다. 제가 책임지고 배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맹주님의 배려 덕분에 우리는 근몇일 간 무림맹주님께 무학을 전수받는다고 코빼기도 마주치기 힘들었던 팽소진과 몇 마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얻었는데.
가장 먼저 나를 찾아온 팽소진은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말을 고르는가 싶더니 더듬더듬 한마디 말을 해왔다.
“…그. 고마워.”
뭔 말을 하려고 저러나 했는데 고맙다는 말이었나?
음.
팽소진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고맙기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당장에 저 인사를 그냥 받아들여서는 수지가 맞지 않았다.
하여 나는 적절한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
“누님.”
“응?”
“이제 시작입니다. 결국 백부님께 인정을 받으셔야 하잖아요. 고맙다는 인사는 그때 가서 받겠습니다.”
“…….”
그때 가서 받으면 원작의 그것처럼 하북팽가의 비전 영단인 웅패환이 딸려올 테지.
“그때까지 제가 누님을 도와드렸다는 사실만 잊지만 말아 주세요.”
“어떻게 잊겠어. 절대로 잊지 않아.”
“그럼 됐습니다.”
* * *
정무학관의 견학 생도들이 낙양을 벗어난 지 사흘째 되는 날인 오늘.
투둑- 투둑- 투둑-
하남 일대에 부슬부슬 빗줄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雨)라는 것이 가뭄에 찌든 농부들에겐 바라고 바라던 녀석일지 모른다.
하나 다른 직군의 사람들에겐 썩 반가운 녀석이 아니다.
특히나 여행 중인 행객(行客)들에겐 더더욱 그렇다.
체온을 낮춰 고뿔에 걸리게 만들며, 흙을 질척하게 만들어 길을 없애고 노숙을 어렵게 만드니까.
하나, 그런 행객을 노리는 살수들에게는 퍽 반가운 친구였다.
행객들을 피로하게 만들고, 기척과 냄새를 지워주며, 시커먼 먹구름은 날붙이에 반사되는 빛을 원천 봉쇄를 해주니, 살수에겐 그야말로 최고의 환경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도 그런 살수들이 있었다.
시커먼 흑립으로 시작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먹칠을 하다시피 한 차림의 살수들.
그들이 저마다 쥐 죽은 듯 숨을 죽이고 있는 가운데 멀찍이서 걸어온 같은 차림의 흑립인이 살수들중 가장 급이 높은 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조장. 정무학관의 샌님들이 모조리 인근의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런 흑립인의 음성에, 조장으로 지칭되는 자가 낮게 웃었다.
“큭큭. 하늘이 우리를 도우시는구나. 하기야 점점 빗줄기가 굵어지는 이런 상황에서, 가까운 마을이 없으니 동굴이나 벼랑 밑이라도 찾아보는 수밖에 없겠지.”
그 웃음 소리에 곁에 있던 다른 흑립인이 안광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따라갈까요?”
하나, 앞서 조장이라 지칭된 사내는 때가 됐다는 듯이 웃음을 지었던 방금과는 달리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이다. 우리의 목표는 이번 기수의 무림맹 견학 생도들의 몰살. 서두르는 것보다 확실하게 가는 게 중요하다. 지금 들이쳐서야 아주 약간의 이점만 얻을 뿐이다. 비 냄새와 구름의 모양으로 짐작건대 빗줄기는 점점 더 굵어질 테니 완벽한 때를 노리자.”
결과적으로 조장이라는 사내의 판단은 맞았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져 급기야 장대비로 변모했으니까.
쏴아아-
쏴아아아-
“지금이라면 분명 그 녀석들이 허둥거리고 있을 것이다. 가자.”
그 장대비를 효시 삼은 살수들은 목표한 무림맹 견학 생도 몰살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생도들이 기어들어 간 산을 기민하게 오르기 시작했다.
한데, 샌님들의 야영지를 목전에 둔 지금 조장 사내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물꼬?’
횃불이 반사되는 야영지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자연적으로 생기기가 힘든 모양의 물이 빠져나가게 만든 골이 있었던 것이다.
‘…뭔가 이상하다.’
그에 조장 사내는 급히 중지 신호를 내리려 했다.
하나, 내리는 장대비는 이쪽의 신호도 전달이 어렵게 만들었다.
그 탓에 이제 와서 멈추는 것은 불가능했다.
조장 사내는 어쩔 수 없지를 속으로 중얼거리며 검신을 숨기기 위해 날에 재를 듬뿍 먹인 검을 뽑았다.
그런데 이때.
뒤에서 흘러나온 한 청년의 나직한 목소리가 조장 사내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아. 그거 뽑지 말지.”
그에 목소리가 새어 나온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악귀의 형상이 새겨진 피처럼 붉은 모자를 쓴 청년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입꼬리를 뒤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