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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언가 망나니-121화 (121/444)

제121화. 초대하지 않은 손님. (2)

출발할 때부터 흙냄새가 평소보다 심하게 올라오는 게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나는 예정했던 거리보다 짧은 거리에서 오늘의 이동을 중단한 뒤 인근의 야산에서 야영지로 삼을 만한 곳을 찾았다.

“지반은 단단하네. 근데 비가 좀 많이 올 것 같으니까, 소천이 형이랑 천장호 그리고 용명아. 오늘은 구덩이 파면서 아래쪽으로 물이 빠지게 좌우로 물꼬도 좀 내놓자.”

“알았다!”

“알겠수!”

“예! 형님!”

그리고 꼼꼼하게 야영 준비를 시작했다.

“하성이랑 남궁윤. 정현이랑 한종. 너희들은 각각 짝을 지어 목말을 태운 다음에, 이 천막 좀 벼랑 높이 달아. 그다음에 끈으로 저 앞에 나무에 한쪽씩 묶어 지붕 역할을 해야 하니까 천막에 물 고이지 않도록 비스듬하게.”

그렇게 부산하게 야영 준비를 하고 있으니.

청죽관에 합격진을 전수해 주고자 휴가를 내서 함께하고 계시던 명태성 각주가 혀를 내두르며 말을 걸어왔다.

“차수막(遮水幕)을 칠 모양이군? 하기야 이런 날에 미리미리 비막이를 쳐놓지 않으면 밥도 지어 먹기 힘든 법이지. 야영에 이골이 난 표사나 쟁자수처럼 대처가 아주 매끄럽구만. 쓰흡. 역시 자네는 아무리 봐도 우리 타격대에 딱 맞는 인재야.”

아, 안 사요.

아니, 안 가요.

“아. 이 말을 하려던 건 아니고. 그래. 내가 도울 것은 없겠나?”

“당장은 없습니다.”

“당장은 없다. 그 말은 조금 뒤에는 있다는 말인데?”

“예. 그 맹주님께서 전수해 주시겠다고 한 합격진이 채작진(彩雀陣) 아닙니까?”

“맞네.”

“비 오는 날은 먼지도 잘 안 날리고 하니, 차수막을 다 치고 나면 애들을 좀 굴릴… 아니 정신을 재차 가다듬는 조촐한 시간을 가질까 하는데. 그때 각주님께서 채작진의 기본 원리를 생도들에게 전수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런 내 말에 명태성은 턱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내 귀엔 열세 명의 청죽관 생도들뿐 아니라, 다른 기숙사 출신 생도들도 함께 지도해 달라는 말로 들리는데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나?”

“예. 맞습니다.”

“흠. 내가 자네를 따라가는 이유는 다른 기숙사와 달리 청죽관은 대대로 내려오는 합격진이 없기에 그 불리함을 해소해주기 위함인데. 다른 기숙사 생도들에게 채작진의 기본 원리를 알려줘도 괜찮은 건가?”

당연히 괜찮았다.

명태성은 정무학관의 추계 기숙사 대항전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하나, 내 목표는 단순히 추계 대항전의 우승이 아니었다.

‘그건 그냥 거쳐야 할 과정이자 관문이고.’

그런 관문들에서 차곡차곡 쌓이는 성장 요소들을 나와 주인공 세대들이 적절하게 나누어 받아, 궁극적으로 앞으로 닥쳐올 위기와 환란들을 헤쳐나가야 했다.

‘그러니까 상관없다.’

아니 상관없는 정도가 아니라 사실 반드시 가르쳐 놓아야 했다.

그도 그럴 게 애초에 원작에선 청죽관이 채작진을 배우는 사건 같은 것이 없었다.

‘원작에선 딱 주인공 세대라 불리는 녀석들만 배우는 것이 채작진이니까.’

채작진의 특성상 원리가 풀린다고 해도 힘 대 힘, 그러니까 정공법으로 누르는 것 외에 딱히 다른 파훼법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더더욱 그랬다.

물론 원작이니 어쩌니 하는 말을 명태성에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적당한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

“학관 안에서야 경쟁을 하는 관계지만, 결국은 정무학관이나 정의맹 더 나아가 백도 무림이라는 이름 아래에서는 모두 동료이고 전우가 될 텐데, 어찌 감히 맹주님의 후원을 사리사욕을 탐하듯 독점하려는 생각을 갖겠습니까?”

“…….”

”맹주님께서 딱 청죽관에게만 가르쳐 주라고 하신 게 아니라면 저는 상관없습니다.”

그런 내 말에 명태성 각주는 잠시 입을 쩍하고 벌리더니.

알아듣기 힘든 말을 홀로 중얼거렸다.

“이제 보니 자네는 타격대에 딱 맞는 인물은 아니군.”

“예?”

“…위. 훨씬 더 위가 어울리겠어.”

“…예?”

“아닐세. 얼결에 나온 말이니 귀담아듣지 말게, 음. 맹주님께서는 자네와 상의해서 알아서 하라고 하셨으니 이쪽도 상관없네, 자네 뜻이 그렇다면야 내 가르쳐 주도록 하겠네.”

뭐, 아무튼.

그렇게 차수막이 설치되었다.

나는 그 아래에서 오랜만에 빨간 모자를 다시 쓰고 기강을 다지기 시작했다.

“다른 동기생들은 무림맹에 오고 싶어도 인원이 제한되어 있어 오지 못했다. 하니, 올빼미 제군들은 그들의 의지를 잇는다는 각오로 사명감을 가지고 견학 일정을 수행해야 함에도 감히 하루를 쉬겠다는 삿된 생각하에 나 몰래 백본회에 방문 신청을 하는 등 기강이 해이해진 모습을 보였다.”

그런 내 모습이 익숙한 청죽관의 동기들은 ‘저 빨간 모자는 항상 들고 다니는 건가?’ 같은 소리를 중얼거림과 동시에 ‘올 것이 왔구나.’ 하는 표정들을 지어 보였다.

“이에, 본 교관은 실망했다. 이 실망감이 걷힐 때까지 올빼미들의 얼을 되찾는 시간을 갖겠다. 모두 옆 사람과 어깨동무를 하고, 앉으면서 정신을. 서면서 차리자.”

하나, 모두가 내 말을 고분고분하게 따른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제갈설지의 경우는 적극적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자, 잠깐만요! 저는 백본회 견학 같은 거 신청한 적 없는데요? 말씀하신 날엔 군사부에 가 있었다고요?”

하나 내게는 무적의 논리가 있었다.

“어허. 제갈 올빼미. 동기는 하나요! 연대 책임이라는 개념부터 배우셔야겠군! 정신을 차리기에 앞서 동기가 하나라는 사실부터 각인해야겠구려! 제갈 올빼미 덕분에 과정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구호를 바꾼다. 하나에 앉으면서 동기는. 둘에 서면서 하나다. 하나!”

“도, 동기는!”

“둘!”

“하나다앜!!”

* * *

그렇게 기강을 좀 잡은 뒤.

명태성 각주로부터 채작진의 방위 점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한데, 여행용으로 챙겨온 천막의 크기가 이열 횡대를 이루어 어깨동무를 하기에는 충분했지만, 열아홉 인원이 동시에 합격진을 펼치기엔 좀 좁았다.

하여, 인원을 나누어 아홉 명은 채작진에서 개개인이 방위를 점하는 법을 배우고, 열 명은 끼니를 준비하는 등 다른 일을 하고 있기로 했다.

내가 맡기로 한 역할은 그중 식자재를 구해오는 것이었다.

하여, 정무학관에서 기념품으로 받은 피풍의를 우의 삼아 둘러쓰고,

산토끼 몇 마리와 먹을 수 있는 버섯 같은 것을 따서 야영지로 돌아가는데.

- 웬 놈들이 있구나? 혼백에 눌어붙은 피 냄새도 그렇고, 복장과 풍기는 기도도 그렇고, 살수를 업으로 하는 놈들 같은데?

사부님의 말마따나 장대비 사이로 웬 시커먼 놈들이 숨을 죽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에 나는 혹여라도 지나가는 산짐승이 있으면 더 낚으려고 죽이고 있던 기척을 더욱더 죽였다.

그리고 동시에 사출계 흑마법.

암흑 동화를 시전했다.

사하악-

암흑 동화.

이 흑마법은 문자 그대로 어둠이 몸과 내가 쥔 물건들에 스미어 주변의 어둠에 내가 묻히는 은신술의 일종이었는데.

‘그러고 보니 사부님 모시러 가는 길에 산적들 피할 때 요긴하게 써먹었는데.’

단순히 모습이 감춰질 뿐 기도나 기척이 없어지는 것은 별개여서, 이 세상에서 제대로 쓰려면 여러모로 잡기가 필요했는데.

‘쥐꼬리만 한 내력을 아껴가며, 조심조심 발소리를 죽여가며 사용하던 그때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제대로 쓰게 됐네.’

제법 들어찬 단전 안의 내력은 이 정도 흑마법을 사용하는 데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도록 도와주었고.

검기성사의 경지에 이른 무위는 기척과 기도를 안으로 갈무리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물론, 기를 다루는 수준이 완벽하다고는 말할 경지는 절대 아니니, 기감이 예민한 자들은 능히 눈치를 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초대하지 않은 손님들한테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지.’

흑립을 뒤집어쓴 놈들은 신경이 오롯이 야영지가 위치한 위쪽에 쏠려 있는지, 내가 서 있는 뒤쪽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추적추적 내리는 장대비가 그들의 기감을 더욱더 무디게 만들며 내가 내는 미세한 소리를 감춰 주기까지 했다.

그에 나는 소리 없이 그들 중 가장 선임자로 보이는 자의 근처로 다가설 수 있었는데.

스릉-

때마침 눈 앞의 사내가 조심스럽게 검을 뽑았다.

애초에 모든 행태가 수상했지만.

빛이 반사되는 것을 막기 위해 검면에 재를 듬뿍 먹인 살수들 특유의 검이 모든 의혹을 확신으로 바꿔주었다.

눈앞의 흑립인들은 살수가 맞았다.

그에 나는 암흑 동화를 서서히 거두어들이며 입을 열었다.

“아. 그거 뽑지 말지.”

그런 내 음성에 눈앞의 사내가 흠칫 고개를 돌렸다가.

어둠 속에서 서서히 나타나는 내 모습에 귀신을 마주하기라도 한 듯 ‘히익!’하고 뒷걸음질을 쳤다.

나는 그런 녀석의 얼굴을 향해 지체 없이 쓰고 있던 모자를 집어 던져 시야를 차단했다.

그리고 곧바로 파천의 내력을 운용하며 발차기를 내질러 놈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뻐억!!

“컥!”

그에 걷어차인 흑립인이 당옥기의 철질려(鐵蒺藜)가 기다리고 있는 구덩이를 향해 붕 떠서 날아가기 시작한 이때.

나는 목에 걸고 있던 호각을 입으로 가져가 불어 재꼈다.

삐이익-

삐이이이익-

내가 분 호각은 우리 편에게는 적습을 알리는 신호요, 흑립을 쓴 자들에겐 걸렸다는 신호가 되었는데.

“들켰다! 공격! 모조리 죽여라!”

흑립인들도 완전히 어중이떠중이는 아니었는지, 일행 중 우두머리 격으로 보이는 자가 당했음에도 당황하지 않고 곧바로 야영지를 향해 몸을 던졌다.

그에 나도 바쁘게 회한을 뽑아 들고 야영지를 향해 뛰어들었다….

- 음? 너까지 안 나서도 되겠는데?

‘어. 그러게요?’

…가.

잘 싸우고 있는 동기들의 모습에 잠시 행동을 멈췄다.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당신들은 뭐죠?!”

“그것도 모르나? 딱 봐도 살수 아닌가?”

“정말 몰라서 한 말도, 윤님에게 한 말도 아니니까 말 걸지 마세요. 마지막 번호 생략하라는 거. 그거 하나를 못 하셔서 쌩고생을 하게 만든 사람이 누군데요?!”

“아니 정작 시킨 사람은 따로 있는데, 그걸 왜 나한테….”

“말 걸지 마시라 했어요. 청죽관 동기들이 다치면 용운 님이 분명히 펄쩍 뛰실 테니까 저는 서쪽으로 갑니다. 동쪽이나 잘 맡으세요.”

“…알았다.”

잠시나마 올빼미 생활을 한 덕분인지.

약간이나마 채작진을 배운 덕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내 교통정리 없이도 역할 분담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었고.

어설프게나마 합들이 맞았다.

아, 물론.

어설프다는 것은 합격진의 형태가 그렇다는 것이지.

촤악!!

“컥!”

동기들의 무위가 어설프다는 것은 아니었다.

채채챙!!

촥!

“끄악!”

특히나 원작에서 주인공 세대로 불리었던 녀석들과 초절정고수인 명태성 각주의 무위에 기습의 이점을 전혀 살리지 못한 살수들이 하나둘 주검이 되어갔다.

‘크. 이게 자동 사냥이지.’

할 게 없네, 할 게 없어.

이대로만 자라다오.

아,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닌가?

하지만 그런 주인공 세대 중에서도 구멍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언용명. 천장호.’

무위가 문제는 아니었다.

한쪽은 언가권으로 유명한 진주언가의 권법종을 제대로 계승한 녀석이었고.

다른 한 놈은 개방 역사상 손에 꼽히는 오성을 지닌 녀석이었으니까.

‘문제는 마음가짐이지….’

용명이 녀석은 기본적으로 성정이 선해서, 천장호는 사람을 때리고 죽이는 것에 거부감이 있는 놈이라, 원작에서도 이따금 고구마를 먹이는 놈들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녀석들 근처에 있던 살수 중 두 놈이 검을 버리고 무릎을 꿇자.

“항복!”

“항복하겠소!”

두 녀석이 약속이라도 한 듯 손속을 멈췄다.

그 순간.

무릎을 꿇은 살수들이 뒷허리춤에서 비수들을 끄집어냈다.

‘역시는 역시네.’

하지만 해볼 만했다.

애초부터 내가 그쪽을 구멍이라 생각하고 주시하고 있었으니까.

쌔애애액!!

나는 예견했던 순간이 벌어지자마자 살수 중 한 놈을 향해 파천의 내력을 실은 회한을 집어 던졌고.

푹!!

“컥?!”

이어서 비영파천보를 시전하며 다른 한 놈을 향해 땅을 박찼다.

그리고 항룡유회를 시전했다.

빡!!!!

“꺽?!”

그에 한 놈은 심부가 회한에 꿰뚫려서, 다른 한 놈은 등뼈가 꺾이며 절명했는데.

그러자마자 언용명과 천장호의 입이 동시에 열렸다.

“형님!”

“아니! 이게 무슨?!”

이어 붙어온 말은 없었지만, 두 녀석의 어조나 표정을 보면 항복한 자들을 왜 죽이셨냐는 투였다.

“쯧”

나는 나오는 혀 차는 소리를 참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둘 다 머릿속에 꽃이 피었네. 도망이라면 혹시 몰라도. 살수가 항복이라니?”

그리고 발로 죽어 나자빠진 살수들을 뒤집어 손에 쥐어져 있는 비수를 가리켰다.

“방금 니들 죽을 뻔했다.”

그에 언용명과 천장호가 꿀먹은 벙어리가 된 이때.

다른 곳의 싸움도 끝이 났는지 들려오던 단말마들이 뚝 멈췄다.

그리고 동기들이 호흡을 고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주변을 쓰윽 둘러보니.

찰과상을 입은 녀석들은 몇 있어도 죽거나 치명상을 입은 녀석들은 없었다.

‘크게 다친 녀석은 없나?’

내가 그렇게 눈대중으로 인원 파악을 하는 사이, 피를 뒤집어쓴 하성이 놈이 다가와 입을 열었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그런 질문을 하기 전에 먼저 니 꼴과 내 꼴을 비교 좀 해 봐라.”

“음? 괜찮으시네요. 그래서 이놈들은 다 뭡니까?”

“그건 지금부터 알아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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