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4화. 담금질의 때 (1)
견학을 다녀온 정무학관의 생도들은 의무적으로 수상록을 제출해야 한다.
‘미래로 치면 일종의 레포트나 답사기 정도 되려나?’
한데 수상록은 단순한 견문록이 아니다.
그 자체로 정무학관의 일 학기 중간고사 첫 시험 과목이었다.
나름대로 학과 성적에서도 최상위권을 노려는 보고 있는 나로서는 절대로 허투루 넘길 일이 아니었다.
뭐, 어려울 것은 없었다.
‘나야 워낙 공사다망했으니까.’
단순히 겪은 일이 많기도 했고, 어쩌다 보니 이래저래 포장할 수 있는 요소도 제법 많이 있었다.
나는 그런 요소들을 하나하나 상기하며 수상록을 작성했다.
서론에는 전례를 깨고 운매와 향란 윤국의 생도들에게도 무림맹 견학 인원 자리를 베푼 이유로 청죽관의 정신을 거론.
본론에선 무림맹을 갔다 오며 겪었던 일 중에 동기들과 협력했던 일들을 중점적으로 적었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에서 정무학관의 정신인 안에선 경쟁해도 밖에서는 정무의 이름 아래 하나라는 말로 마무리를 했더니.
똑똑-
“총장님의 직속 연구동에서 나왔네.”
“들어오십시오.”
“중간고사 공부들 하고 있었구만.”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됐네, 됐어. 인사도 됐고, 일어나지도 말게, 보던 책이나 마저 보게. 시험공부 한다고 고생들이 많네, 다른 일은 아니고 수상록의 채점 결과가 나와서 전해주러 왔네.”
“연구동에서 계시는 선배님들 앞에서는 명패도 못 내밀 고생이지요…. 그, 차라도 한잔 드릴까요?”
“고맙네만, 보시다시피 다른 기숙사의 자치회에도 채점한 수상록들을 전해줘야 하네, 또 오늘 중으로 분류해야 할 비급이 좀 많이 쌓여 있어서 마음만 받도록 하겠네.”
“…아.”
“…오지 말게.”
딱히 주어는 없었지만 어디를 오지 말라는 것인지 그 의지만큼은 분명하게 전해졌다.
“…예.”
아무튼.
붉은 안료로 만점이라는 표시가 된 수상록이 그렇게 내게 돌아왔는데.
“그리고 축하하네. 그럼 나는 이만.”
“살펴 가십시오.”
홀연히 우리 자치회실을 떠난 비색 무복의 대학원생 선배님을 배웅하고 나니.
좌석에서 몸을 길게 뺀 하성이 놈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뭘, 축하한다는 겁니까?”
“수상록 채점 결과가 나왔는데, 채점 결과가 좀 잘 나왔네?”
“얼마나요…? 어? 용운 형님? 그 채점된 수상록에 적히신 붉은 안료로 적힌 글자. 가득 찰 만(滿) 자 아닙니까?”
“하성아, 너 설마 천자문도 못 뗐냐? 그건 소천이 형도 뗀 건데?”
“아뇨. 당연히 글자야 읽을 줄 알죠! 제 말은 갑점(甲點)이 최고점 아닙니까?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요 누님?”
“학칙에 보면 기본적으로는 갑점이 최고점이지만, 채점하는 교수님의 재량에 따라 일정 비율의 학생에게 만점을 줄 수도 있다고 되어 있어. 음. 점수로 치면 갑점이 백 점? 만점은 백오 점쯤?”
그렇게 은하성에게 만점과 갑점의 차이에 관해 설명한 은하연은 시선을 내게 옮기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만점짜리 수상록이라니 언 공자가 쓰신 거 저도 한번 볼 수 있을까요? 어떻게 써야 만점을 받나 구경 좀 하고 싶네요.”
“별거 없는데. 보려면 보시오. 여기 소저 본인 것도 가져가시고.”
그렇게 내게서 수상록 두 장을 받아 간 은하연은 양쪽의 종잇장을 넘기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는데.
“와. 언 공자의 수상록을 보고 나니 제가 작성한 건 수상록이 아니라 그냥 상행단의 결산 보고서였다는 걸 알겠네요. 이렇게 써야 하는 거였구나….”
그런 은하연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소릉이 녀석과 하성이 놈이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역시 언 형이세요! 이러다 그 제갈설지 소저를 누르시고 중간고사에서까지 수석을 차지하시는 거 아니에요?”
“가능성이… 있어! 제갈 소저가 소무후니까. 그럼 용운 형님은 대무후?!”
“…야 이. 은하성아. 제갈 소저는 작은 제갈공명 같다고 소무후라고 부르는 건데 대무후가 어떻게 있을 수 있냐? 그리고 설레발은 죄악이야 둘 다 호들갑 그만 떨어.”
거기다 대고 한 소리를 하고 있으니.
곁에 앉아 있던 정현이 원시천존을 찾았다.
“왜. 오늘은 또 무슨 도를 찾았는데?”
그에, 뭔 소리를 하려고 그러나 싶어 물었더니.
“본디 달은 차면 기운다 하였지만, 언 소협께서는 내심에 자만심이 깃드는 것을 경계하고 또 경계하시니 사람 자체가 참으로 초승달 같으시다 그런 생각을….”
더 들을 필요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끄트머리에 앉아 귀를 틀어막고 필기한 것을 보고 있던 당옥기를 가리켰다.
“너희 근데 시험공부 안 하냐? 저기 당옥기 본 좀 받아라.”
“부수와 부신 부담에서 가장 중요시해야 할 것은 부담…? 왜? 뭐? 뭔데? 가, 갑자기 다들 왜 쳐다보는데? 내 이야기했어?”
“너 공부하는 거 보기 좋다고. 본 좀 받으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 그럴 리가 없잖아! 지금 나 놀리는 거지?!”
저것도 썩 본받을 녀석은 아니네.
아무튼.
그런 내 핀잔에 은하연과 정현은 머쓱해하며 각자의 공부거리로 눈을 돌렸다.
한데, 하성이 놈과 소릉이 녀석은 씨익 웃으며 공부하라는 내 핀잔에 반박을 해왔다.
“옥기 누님이랑 형님은 내일 저희랑 시험 치는 과목이 다르시지 않습니까?”
“그거랑 너희가 공부 안 하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그래서 모르시나 보군요. 후후. 저희 시험은 공부 안 해도 되는 과목입니다.”
“맞아요!”
정현이나 은 소저면 몰라도 저 둘이 시험 준비가 만전일 것 같지는 않다.
“……? 공부를 안 해도 될 만큼 쉬운 과목이 학관의 교과 중에 있었다고? 금시초문인데?”
“저희 과목은 교수님께서 서책을 펴놓고 쳐도 좋다고 하신 시험이거든요!”
아.
오픈북?
“…그거 피똥 쌀 텐데.”
그런 내 말에.
눈앞의 두 화상과 허리춤의 사부님이 동시에 의문을 표해왔다.
“왜, 왜요?”
- 그래. 나도 궁금하구나. 서책을 펴놓고 시험을 치면 땅 짚고 헤엄을 치는 것과 진배없지 않으냐? 그게 왜 피똥을 쌀 일이 되느냐?
“형님. 방금도 제가 말씀을 드렸지만, 저 그래도 소천 형님 수준은 아닙니다. 글자는 읽을 줄 알고 뜻을 되새길 줄도 압니다. 서책을 읽으면 잠이 오긴 하지만 아무리 저라도 시험 시간에 자겠습니까?”
물어오는 사람이 세 사람이라, 사부님께서는 알아서 가려 들어줄 것이라 믿고, 나는 하성이 녀석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서책을 펴고 시험을 치러도 좋다는 교수님의 말을 풀어내면 ‘서책을 펴도 너희들은 못 풀 것이다, 우매한 중생들아.’라는 말이다.”
“……!”
“…….”
“아무튼. 기말시험까지 빨간 모자를 쓰고 있는 나를 보고 싶으면 어디 평균 학점 을(乙)점 밑으로만 받아와 봐. 학관 생활 아주 재미있어질 거야.”
그런 내 말에.
마른침들을 삼킨 하성이 놈과 소릉이 녀석이 허겁지겁 서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날 밤.
자치회실의 촛불들은 동이 터 오르는 바람에 쓸모가 없어지고 나서야 꺼졌다.
* * *
그렇게 정무학관의 중간고사 기간이 시작되었다.
시험 기간에 접어든 정무학관의 생도들의 모습들은 성별을 가리지 않고 대개 개방의 방도의 몰골과 비슷해진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잠을 줄여가며 공부를 하다 보니 첫째로 얼굴들이 퀭해진다.
거기다 빡빡하게 시간표를 채워놓은 사람은 심할 경우, 머리 감을 시간과 낯을 씻을 시간까지 아끼기 위해 세면을 생략하고 대충 머리덮개가 달린 피풍의를 뒤집어쓰고 시험장을 찾아 돌아다니는 자들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특히나 청죽관 생도들은 더더욱 그랬는데.
‘우리는 남들보다 일정이 하나 더 많으니까.’
다른 기숙사의 생도들이 낮에는 시험을 치고 저녁에는 공부를 하는 딱 두 가지 일정만 소화할 때.
청죽관 생도들은 짬짬이 명태성 각주에게 합격진까지 배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작정 싸고 들려고 해서는 안 돼! 채작진(彩雀陣)은 학익진이 아니야! 날개의 역할에 들어간 자들은 짧고 둥글게! 언제든지 꼬리나 머리의 역할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꼬리의 역할에 들어간 자들도 마찬가지야. 언제든지 날개나 머리의 역할을 맡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움직여야 한다!”
그 바람에 청죽관 생도들의 몰골은 그야말로 거지꼴이 되었다.
- 어디 가서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노삼 그 그지새끼가 사감으로 있는 기숙사의 생도임을 알아들 보겠구나.
‘……?’
- ?
하지만 그간 내게 들들 볶이며 쌓아 올린 독기와 춘계 기숙사 대항전에서 우승기를 따낸 경험이 좋은 양분이 된 것일까?
눈빛들만큼은 살아들 있었는데.
그처럼 살아 있는 눈빛이 유지된 지 어언 열흘여가 지나.
“좋네! 좋아! 처음보다 훨씬 나아졌군!”
일 학기 중간고사 기간이 슬슬 끝나갈 무렵이 되자.
명태성의 입에서 드디어 봐줄 만하다는 평이 나왔다.
“이제는 합격진이라고 부를 만하겠어! 그래 채작진의 날개는 그렇게 펼쳐야 하는걸세!”
그렇게 입을 연 명태성은 청죽관 생도 중 몇 명에겐 특별히 격려의 말을 전해왔다.
“진경룡 생도는 견실하군. 꼬리 머리 날개 어느 곳에 들어가도 제 몫을 해. 통솔력도 제법 있고.”
“헉. 헉. 흐억. 감사합니다! 선배님!”
“정현 생도는 열거한 진경룡 생도의 장점에 넓은 시야까지 갖추고 있는 듯 하고.”
“과찬이십니다. 하나 빈도의 재주는 언 소협의 그것에 비하면 보름달 앞의 반딧불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하. 그렇긴 하지. 말이 나온 김에 언용운 자네는 앞선 두 사람의 장점에 더해 채작진의 성패를 가르는 기본 원리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군. 정말 감탄을 금할 수가 없네.”
그런 명태성의 말에 우수에 들린 사부님께서 한마디를 전해 오셨는데.
- 흥. 꼴에 보는 눈은 있구나.
사부님까지 저런 소리를 하시니. 좀 쑥스럽기도 했고, 또 명태성이 은근슬쩍 영입 제의를 해오는 느낌도 살짝 들어서 나는 적절히 겸양의 말로 선을 그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한데. 누누이 드렸던 말입니다만. 그렇게 금칠을 해주셔도. 당장은 타격대에 지원할 생각이 없습니다.”
하나, 명태성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알고 있네. 그리고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 아닐세, 채작진은 불가나 도가 문파의 합격진과는 다르네. 무엇이 다른지 알겠나?”
그리고 나를 향해 질문을 던져왔다.
원작에서 주인공 세대가 채작진을 운용하던 모습을 읽기도 했고, 또 검수로서의 감각을 통해 받는 느낌도 있었기에 답은 어렵지 않았다.
“채작진은 실전에서 적을 주살하는 것을 목표로 만든 것 아닙니까?”
그런 내 답에 크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명태성.
“정확하네. 근데 그렇다고 연습 중에 동료를 상하게 해서도 안 되니, 살검(殺劍)에 대한 이해가 있지 않으면 아무리 오성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방위나 역할을 일일이 짚어주고 나서야 진을 유기체처럼 이끄는 핵(核)의 역할을 해낼 수 있다네. 한데, 자네는 그걸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아서 하더군. 꼭 처절한 싸움을 경험해 보기라도 한 사람 같이 말이야.”
명태성은 그렇게 계속해 말을 이어내더니.
“뭐, 아무튼. 자네 셋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합격진의 원리가 몸에 익은 듯하니, 조금 본격적으로 해보도록 하지.”
본격적으로 해보자는 말을 했다.
그리고 나, 경룡이 형, 정현에게 채작진을 공격하는 대항군(對抗軍)의 역할을 맡겼다.
그 바람에 졸지에 우리를 적으로 마주하게 된 소릉이 녀석이 동공을 떨며 물음을 던져왔다.
“그, 언 형? 살살해주실 거죠?”
말은 우소릉의 입에서 나왔지만, 다른 생도들도 기실 같은 마음인 듯했다.
‘이해는 간다.’
우선적으로 이쪽에 선 세 명이 청죽관 생도들 중 가장 강한 전력이기도 했고.
‘뇌리에 심긴 추억들이 있을 거야.’
휘주에서부터 굴러온 하성이 녀석은 말할 것도 없고.
입관 시험부터 쭉 함께해온 동기생들도 두말하면 입이 아플 것이다.
선배님들의 경우에도 동윤관에서의 단란했던 추억이 강렬하실 테지.
하지만 이해가 간다 뿐이지 살살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야 나한테도 또 저들에게도 득이 될 게 없으니 말이다.
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소릉아. 네 눈에는 내가 봐주고 그럴 사람으로 보이냐?”
그런 내 말에 우소릉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니요?”
“그래. 바로 맞췄어.”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는 비영파천보를 시전하며 단숨에 자리를 박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