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화. 담금질의 때 (3)
제자인 언용운과 계약이라는 것을 맺고 난 이후 위철진의 기감은 생전의 그것보다 예리해지게 되었다.
예컨대 단순히 상대의 성취를 짐작하는 과거의 수준을 넘어서, 상대가 사람깨나 잡아본 무인이라면 혼백에 말라붙은 피 냄새가 느껴지는 식이었는데.
그처럼 발달한 기감은 위철진 본인에게도 적용이 되었다.
‘…흠. 곧 있으면 용운이 녀석이 말한 내 뜻대로 실체를 드러낼 수 있는 날이 오지 싶은데.’
언용운은 위철진에게 혼이 회한이라는 검 속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고 나면, 위철진의 뜻대로 혼을 드러내거나 하는 일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했었다.
원리는 별것 아니었다.
백여 년간 고립돼 있던 위철진의 혼이 인간사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겪다 보면 자연히 자리가 잡히는 모양이었다.
‘아니지, 별거라면 또 별거이려나?’
위철진은 백여 년간 인간사와 단절돼 있었다.
사실 백여 년 전 살아서 천하를 활보하던 시절에도 딱히 희노애락을 느끼며 살지는 않았다.
물론 노(怒), 그러니까 분노야 해봤다.
하나 다른 감정들과는 딱히 인연이 없었다.
그러다 회한에서 눈을 뜬 이후로는 제자로 받은 언용운 덕분에 이것저것 겪어보는 중이었다.
‘용운이 녀석의 성취를 이루는 순간이 내가 성취를 이루던 순간보다 기쁠 줄이야.’
스스로의 성취를 이룰 때 느꼈던 감정이 새로운 벽을 마주한 자가 느끼는 갈증이었다면, 언용운의 성취를 이루는 순간을 목격하는 순간에 느껴온 감정들은 분명한 기쁨이었다.
그뿐이랴.
누가 언용운을 업신여기면 늘 나 있던 화가 더욱 크게 일었으며.
‘못 먹고 못 입어 구천을 떠도는 자들에게 위령제를 올릴 때는 기특했느니.’
그 기특함은 괜스레 스승인 만박두타와 자신의 유년 시절을 떠올리게 하여 일말의 서글픔을 느끼게 했다.
‘따지고 보면 슬픔이겠지.’
즐거움이야 따로 꼽기도 힘들 만큼 많았다.
그러다 보니 슬슬 언용운이 언급했던 위철진의 혼이 완전히 자리를 잡는 때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이 확실하게 들었다.
‘…한데, 이놈이 하필이면 여기서 깨달음의 순간을 맞았단 말이지.’
위철진이 겪어본 바에 의하면 깨달음이 찾아오는 방식은 크게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완전히 심상 속으로 빨려 들어가 누가 부르거나 말을 걸어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초집중 상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도 초집중 속에서 이루어지긴 했으나, 이건 주로 생사의 위기에서 발현되는 것으로 사지를 빠져나가고자 하는 의지 속에서 찾아오곤 하는 것이었는데.
‘후자가 찾아왔구나.’
필살의 묘리를 바탕으로 설계된 채작진의 날갯짓 속에서, 혼몽한 표정으로 이래저래 동공을 움직이며 활로를 찾고 있는 용운의 모습은 아무래도 후자의 형태의 깨달음이 든 것 같았다.
‘…흠. 내가 등을 좀 밀어주고 싶은데.’
딱 이런 상황에서만 익힐 수 있는 파천검법의 초식이 있었다.
최소한의 조건도 검기를 뜻대로 능히 다뤄내 검사를 뽑아낼 수 있는 절정고수였으니, 언용운의 경지와 오성이라면 충분히 소화해낼 터였다.
한데,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말로만으론 해서는 알아먹기는커녕 찾아온 깨달음의 때를 방해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렇다고 이 시점에서 무리해서 실체화를 시도하면, 그간 유검이탈(?)을 하기 위해 쌓아온 희노애락의 공든 탑이 무너질 것 같다는 것이었다.
‘고민이 되는 문제로다.’
위철진 개인의 사욕으로 인한 고민은 아니었다.
사실 검에 들어가 있으나 나와 있으나 위철진 본인은 별 차이가 없었다.
경치 구경을 조금 더 자유롭게 하고, 맛난 음식을 발견하면 흠향을 조금 더 편하게 하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하여, 이 고민은 오롯이 어떻게 하면 제자 놈에게 도움이 될지를 고민하는 스승의 고민이었다.
‘조금 무리를 해서 쌓은 희노애락의 탑이 주춧돌의 형태로 돌아가더라도 여기서 한 수를 보여주는 것이 맞는가, 아니면 내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우선하는 것이 맞는가.’
고민은 깊었으나 답을 내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저 깨달음이라는 녀석은 재채기와 같은 법.’
와락 쏟아내야 할 때를 놓치고 나면 비슷한 상황을 만들어 놓고 같은 수련을 한다고 다시 깨달음이 찾아든다는 보장이 없었다.
‘지금 밀어주는 게 낫겠구나.’
그렇게 위철진의 내심에선 결단이 내려졌다.
하나, 아직 확인할 것이 남아 있었다.
‘용운이 이 녀석은 정신력과 집중력이 남달라서 한 번씩 내 말을 못 들을 정도로 집중을 해버리더란 말이지.’
그런 상황이라면 위철진이 굳이 무리해서 실체를 드러낼 필요가 없었다.
그것을 확인하고자 위철진은 입을 열었다.
- 용운아.
‘사부님 제가 지금 뭐가 보일 것 같거든요? 중요한 말씀 아니시면 조금만 미뤄주시면 안 될까요?’
하여간에 괘씸한 녀석.
이 순간.
위철진의 생각 속엔 딱 너 같은 놈을 제자로 받아 보라시던 스승의 옛말을 떠올랐다.
스승님 당신의 말이 씨가 됐나 봅니다.
- 안 그래도 네놈이 지금 보고 있는 경치에 관한 이야기를 좀 해주려 불렀다. 길이 보이긴 보이는데 한 백 갈래쯤으로 보이지?
‘어? 예.’
- 네 녀석도 알기에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그중 대부분은 끝에 가서 곤마(困馬)에 빠지는 길이다. 내가 이 사지를 벗어날 수 있는 단 하나뿐인 파천의 길을 보여주마.
대화는 여기까지.
검마 위철진이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 * *
억겁처럼 늘어난 찰나 속에서 채작진이 깨어 낼 수 있을 것 같은 길이 수십 수백 개는 보였다.
하나, 채작진이 어쭙잖은 합격진이 아닌지라, 그중 대부분은 활로로 보이는 함정이었다.
나도 조금 전까지는 저 채작진이라는 녀석을 익히고 있던 사람 중 하나였기에 그 점을 누구보다 잘 알수 있었다.
하여, 저 중 어느 길을 선택해야 잘 선택했다고 소문이 날까를 한창 고민하고 있는데.
우웅-
우수에 들린 사부님께서 대뜸 자신이 길을 보여주겠다고 말씀하시더니.
회한이 전에 없이 울기 시작했다.
우우웅-
이 순간.
나는 단박에 사부님께서 무슨 생각으로 어떤 결정을 내리셨는지를 이해했다.
‘참 내.’
하여간 만날 툴툴거리시면서 한 번씩 사람 기분 이상하게 만드시는 재주가 있으시다니까.
뭐, 아무튼.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채작진을 이루고 있는 동기생들의 검격이 다시금 지척까지 다가왔는데.
챙! 챙!
채채챙! 캉!!!
지척에서 번뜩이는 백련검들은 바쁘게 쳐내.
잠시간의 여유를 만들어 내니.
- …….
어느새 검마로서의 모습을 되찾으신 사부님께서 멋쩍은 표정으로 농 아닌 농을 해오셨다.
- 그러고 보니 사람이라는 것이 본디 팔다리가 달려 있는 것이었지? 내 네 녀석의 사기에 홀라당 넘어가는 바람에 회한 속에 갇혀 있다 보니 이 몸이 어색할 지경이구나.
이에는 이.
농에는 농.
‘그게 마검에서 검마로 돌아온 소감이십니까? 아주 귀한 소감이라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해야겠으니, 입장을 조금 확실히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부님.’
- …그놈의 주둥이는 하여간에 한마디를 안 지는구나. 아무튼. 이런 쪽의 방술은 용운이 네 녀석이 나보다 한참 위이니 네가 더 잘 알겠지만, 이 모습을 오래 유지하고 있지는 못하겠구나.
뭐, 사제 간의 농은 여기까지.
- 딱 한 번이 될성싶구나. 잘 보고….
‘잘 배우겠습니다.’
- 오냐.
굳이 이러실 필요 없으셨다거나, 감사하단 말은 따로 하지 않았다.
사부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런 겉치레가 아니라 내가 자신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어받는 것일 테니.
’지금은 사부님의 모습을 눈에 담는 것만 신경 써야 해.’
그러니 감사는 나중으로 미룬다.
내가 그렇게 마음을 다지는 사이.
어느새 완연한 검마의 모습으로 돌아간 사부님께서는 검기를 가닥가닥 뽑아 검사의 형태로 검에 감기 시작했다.
사부님 정도 되면 검사가 아니라 검강 아니 그 이상의 수준도 가능하실 테지만, 아무래도 내 수준에 딱 맞추어 주시는 모양이었다.
뭐, 아무튼.
그렇게 우수에 드신 검에 검사가 제대로 감기고 나자, 사부님께서는 저벅저벅 걸음을 옮기시더니. 검무를 추듯 검을 펼쳐내기 시작했다.
나는 모든 신경과 정신을 할애하여 그런 사부님의 모습을 쫓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홀린 듯이 땅을 박차 먼저 걸어 나간 사부님의 모습에 내 모습을 겹치기 시작했다.
‘사부님이 보여주신 모습에 나를 겹친다.’
챙! 채챙!
카앙!!!!
겹치고.
채채챙! 챙챙채채챙!
캉! 카앙! 캉!!!
또 겹치고.
그렇게 내가 미숙하나마 사부님의 걸음걸음을 쫓아낸 지 얼마나 되었을까?
캉!
카아아앙!!!
어느 순간 날 조여오던 채작진의 압박감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야야야. 일단 뒤로 좀 비켜나 봐!”
“너랑 나랑 비켜나면 어떻게 해.”
“그럼 검이 부러졌는데 어쩌라고?! 내 검 날아간 거 안 보여?!”
백련검이 부러진 생도들이 뒷걸음을 치기 시작하며 길이 활짝 열린 것이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는 활짝 젖혀진 길을 질주하여,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간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은하연의 목덜미에 천천히 회한의 검면을 가져다 댔다.
그에, 검날이 전해주는 차가움에 정신이 돌아온 은하연의 입에서 항복의 말이 나왔고.
“…하, 항복. 항복이요. 졌어요.”
나는 회한을 거두어들여 허리춤의 집에 채워 넣었다.
그러고 나니.
사부님께서 한마디를 전해오셨다.
- 그것이 파천학무(破天鶴舞)다. 딱 한 번 본 것 치고는 제법 그럴싸하게 해내더구나.
‘파천학무. 이게 파천검법의 다섯 번째 초식인 겁니까?’
- 아니. 여덟 번째다.
‘왜 오륙칠을 건너뛰고 팔 번이 튀어나왔습니까?’
- 내가 스승님께 배운 초식이 아니라 그렇다. 소림의 땡중들이 무려 백여덟 명이 찾아와 패악을 부리던 때를 떠올리며 고분에 있던 시절에 초식으로 정립한 것이다.
‘아하.’
- 하여 순번으로 치면 후삼초라 여덟 번째가 되는 것이지, 하여간에 파천검법도 제 놈 성질머리처럼 이상한 순서로 얻어 가는구나,
‘……?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시니까 또또 착한 제자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나시는군요.’
- 본래의…? 착한…?
‘?’
더 드릴 말씀이 없었다.
나는 사부님의 마지막 말을 못 들은 체를 하며 주변을 스윽 훑었다.
사부님의 모습을 쫓긴 하였으되 나름대로 손속에 사정을 두었기에 몸이 다친 사람은 없었는데.
마음이 다친 사람은 몇 보였다.
개중에 대표적으로 두 명만 꼽으면 우선 나랑 눈이 마주치자마자 귀신을 본 것처럼 구는 소릉이 녀석이 그랬는데.
“히익!”
소릉이 녀석은 근처에 있던 경룡이 형이 다독여 주었고.
“우 후배. 심호흡하게. 그럴 수 있네, 그럴 수 있어. 나도 한 번씩 용운 동생의 눈을 마주치면 때때로 그런 기분을 느낄 때가 있네. 크게 심호흡을 하게. 그럼 괜찮아진다네.”
궤가 다르긴 했지만 하성이 녀석도 그랬는데.
“…나는 역시 약했을지도?”
녀석의 경우는 근처에 있던 정현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이건 은 소협이 약한 게 아닙니다. 저도 순간적으로 투신이 청죽관의 연무장에 강림한 줄 알았습니다.”
그러고 있으니.
단상에서 지켜보고 있던 명태성이 손뼉을 짝짝 치며 내려와 입을 열었다.
“다들 잘했네.”
그런 명태성의 말에 은하연이 그건 정말로 말이 안 된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아미를 좁혔다.
“언 공자 한 명한테 개박살이 났는데 잘했다고요? 혼내셔도 괜찮으니 그냥 그런 말보다는 혼을 내주세요.”
하나 명태성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는 길에 정현 생도의 말을 들리던데, 그 말이 딱 맞네. 이건 자네들이 못한 게 아니라 언용운 생도가 잘한 거야.”
“그치만. 한 명이었다고요. 한 번에 붙을 수 있는 인원이 다섯씩이긴 했지만, 이쪽은 몇 겹에 달하는 인원이었는데요?”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주장이긴 했는데.
그런 말을 하는 은하연의 어조와 표정을 보니 여기서 가장 놀란 사람은 사실 우소릉도 은하성도 아니고 은하연인 모양이었다.
그에 무슨 말을 해줄까 하다가 괜히 역효과가 날 것 같아서 가만히 있었는데.
그러는 사이 명태성의 입이 재차 열렸다.
“물론 경험이 많았다면, 그리고 경지들이 조금씩 더 높았다면 이렇게 와르르 무너지지는 않았겠지. 하나, 자네들의 채작진은 방금 알을 깨고 나왔네. 어찌 방금 알에서 나온 새끼 새가 처음부터 날려고 하는가?”
“…….”
“깨질 수밖에 없고, 또 깨져봐야 해. 그런 경험들이 정말 위험한 순간에 자네들을 구해줄 걸세.”
나름대로 명태성의 말이 위로된 모양인지 은하연의 표정이 조금 전보다 한결 나아졌다.
그렇게 은하연을 다독인 명태성은 이제 시선을 내게로 옮겼다.
“자네는 더할 나위가 없더군. 사실 해줄 말이 딱히 없을 정돈데.”
음.
이건 조금 멋쩍었다.
“과찬이십니다.”
그도 그럴 게.
분명 깨달음의 순간 같은 것이 오기는 했다.
하지만 사부님이 그 순간에 적절히 등을 떠밀어 주시지 않으셨다면 항복 소리가 은하연이 아니라 내 입에서 나왔을 수도 있었다.
“다른 생도들이 모두 다 자네를 한 수 위로 치는 것 같으니 나도 마음 놓고 이런 말을 해보자면 그야말로 군계일학이더군.”
하니, 이런 이야기를 들으려면 최소한 아까 미뤄둔 감사 인사를 전해야 했다.
“가르침이 좋았을 뿐입니다.”
나는 명태성을 향해 말을 하면서도 머리로는 사부님을 떠올리며 포권을 취했다.
그에 사부님께서 흥 하시는 소리를 내셨고.
명태성은 껄껄 웃었다.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