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화. 담금질의 때 (4)
“다들 고생했네. 이 정도면 훌륭한 시작이야. 다들 채작진에 대해 얼추 이해한 것 같으니, 내일부터는 여러 가지 상황을 상정해서 수련하도록 할 걸세. 정현 생도의 건의대로 대항군의 역할도 돌아가면서 해보고, 오늘은 대항군의 수가 적었지만, 채작진 쪽의 수가 적은 경우도 연습해 보고 그럴 걸세.”
그렇게 청죽관의 생도들을 다시 한번 다독인 명태성은 한 가지 당부와 한마디 덕담을 건네왔다.
“병장기가 부러진 생도들은 자치회에 이야기를 해서 재교부를 받도록 하고. 아. 오늘 오후에 신입 생도들은 중간고사의 마지막 시험 과목인 무술학개론 시험이 있다고 들었는데, 다들 좋은 성적을 거두기를 응원하겠네. 이상.”
그것으로 오늘의 합격진 수련은 끝이었다.
우리는 명태성을 향해 일제히 포권을 취해 보임과 동시에 입을 열었고.
“수고하셨습니다!”
명태성은 그런 우리의 인사를 손을 휘휘 저어 받아준 뒤 자리를 떠났다.
나는 생도들을 해산하기에 앞서 명태성이 당부한 부러진 병장기들에 관한 건을 처리하기 위해 관련 간부들을 찾았다.
“은 소저. 하성아. 소릉아.”
그런 내 부름에 해당자들이 한 걸음씩 내게 다가섰는데.
그중 내가 무엇 때문에 불렀는지를 직감한 은하연이 한숨을 폭 내쉬며 입을 열었다.
“생도들 병장기 교체해 주라고요?”
“맞소.”
“…그러게 적당히 좀 하시지.”
어쩐지 샐쭉한 은하연의 음성에, 측은함이 드셨는지 허리춤의 사부님께서 한마디를 해오셨다.
- …검은 네가 부수고. 일은 하연이가 하는구나…. 불쌍한지고.
‘…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사부님은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안 되시는 분 아닙니까? 제 등을 떠밀어주신 분이 누구신데요?’
-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내 입으로 불쌍하다는 말도 못 하느냐? 그리고 네 녀석이 조금 더 검을 정갈하게 다뤄냈다면, 검을 그리 많이 부숴 먹지도 않았을 것이다. 정진 또 정진하거라.
참 내.
조금 전에는 딱 한 번 본 것을 그럴싸하게 해냈다고 뿌듯해하셔 놓고는?
뭐, 은하연의 샐쭉함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입장에선 나 한 명에게 채작진이 박살 나며 놀란 게 방금이었다.
그리고 뒤로는 무술학개론의 시험도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거리가 추가되었으니.
이런 상황에서 어깨가 축 늘어지지 않을 사람은 천하에 몇 없을 것이다.
그에 나는 나름대로 심심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오. 나도 반쯤은 넋이 나간 상태로 그런 거라.”
그런 내 말에 은하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그냥 해본 소리예요. 그 순간에 뭔가 깨달음을 얻으신 거죠? 하아. 언 공자께서는 간신히 몇 걸음 쫓아갔나 싶으면 수십 걸음 멀어지시는 것 같네요.”
“수십 걸음까지는 아니고. 딱 한 걸음 정도인 것 같소. 그렇게나 내디뎠다면 검을 이렇게 많이 부숴 먹지는 않았겠지. 은 소저는 잘하고 있소.”
그리고 그 끝에 축하의 말을 뱉었다.
“아무튼 성취를 축하드려요.”
“축하드립니다 형님!”
“저두요!”
축하는 여기까지.
총무부장의 얼굴로 돌아온 은하연은 곧바로 백련검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백련정강 무기들은 아직 재고가 넉넉하긴 한데, 무림맹의 특성상 또 이런 규모의 후원을 해주실 수 있다는 보장이 없고. 있다고 해도 내년의 일일 테니, 그럼 부러진 병장기들은 인근의 대장간에 수선을 맡기도록 할게요?”
“한데, 그 양반들 완제품 말고 수선비도 눈탱이 엄청나게 치는 양반들 아니오?”
“그렇긴 한데 딱히 대안이 없어요. 제가 계산을 해봤는데 단강구를 벗어나면 운임이랑 도난을 막기 위한 인건비가 추가돼서 아슬아슬하게 그냥 여기서 눈탱이를 맞는 게 싸겠더라고요.”
“…확. 대장간을 하나 인수를 해버리든가 해야지, 돈 몇 푼이 문제가 아니라 심보들이 고약한 것 같소.”
“동의는 하는데 당장에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건 아시죠? 텃세는 별개고 내외로 허가 받아야할 사안이 엄청나게 많은 건이에요 그거.”
“물론이오. 일단 수선만. 소저의 말대로 하기로 합시다.”
내게서 구두 결재를 받아 간 은하연은 곧바로 은하성과 우소릉을 시켜 방금 결정 난 사안을 깔끔하게 처리했다.
“자치회에서 전해 드립니다! 총무부장님이 금일 수련 중에 병장기가 부러지신 분은 조각들을 수습해서 자치회실로 오시랍니다!”
“예! 확인한 다음 교체를 원하시면 재교부해 드리고 손에 익은 게 좋으신 분은 수선비를 드릴 거래요!”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사부님께 한마디 항변을 전했다.
‘저렇게 시키는 족족 깔끔하게 해내는데, 어떻게 제가 일을 맡기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 …나는 한 번씩 너를 제자로 만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거꾸로였다면 어휴.
* * *
그렇게 내일의 합격진 수련을 위한 일거리를 먼저 쳐낸 우리는 찝찝하면 공부가 안되는 사람은 목욕을 하고, 공부가 부족해 씻는 시간을 아끼기로 한 사람은 피풍의를 뒤집어쓰고 자치회실에 다시 모였다.
그리고 중간고사의 대미를 장식할 무술학개론 시험공부를 시작했다.
“하연아 그거 알아? 오라버니가 그러시던데 작년에는 도검과 창(槍)의 차이에 관해 논하라는 문제가 나왔다던데?”
“아. 그건 나도 들었어. 작년에는 너희 작은 오라버님이 유효 참격 범위에 관해 논하셔서 만점을 받아 가셨다며?”
“응, 알고 있었구나? 하. 진짜 공부하기 싫네. 시제가 그런 식으로 나오면 인간적으로 범위가 너무 넓은 거 아냐? 차라리 중간고사도 대련으로 치렀으면 좋겠다.”
“나는 아직 대련은 좀 서툴러서 논술이 더 좋은데?”
“…얄미워.”
“얄밉기는. 대련에 자신 있는 옥기 너랑 다르게 나는 여기서 점수 못 벌어 놓으면 기말고사 때 진짜 큰일 나.”
무술학개론은 대대로 중간고사는 그간 배운 것을 토대로 제시된 시제에 관한 생각을 적어 내는 논술 시험을, 기말고사는 대련을 통한 실기 시험을 치렀는데.
“검이랑 창을 비교하라는 소리에 저는 길이밖에 안 떠오르는데, 유효 참격 범위가 뭔가요?”
“빈도가 아는 바를 최대한 쉽게 말씀드리자면 쉽게 말해 날의 길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정거리는 창이 길어도 날 자체는 검이 길지 않습니까? 아마 당소저의 오라버님 되시는 분은 그 점에 대해 논하셨던 모양입니다.”
뭐, 논술 시험이라는 게 결국 배운 바에 자신의 생각을 더해 풀어내는 것인지라 나로서는 자신이 있었다.
수업 시간에 교수님들이 한 말들은 그날그날 이해가 될 때까지 공부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던 나였고.
나름대로 말주변은 자신 있는 나였다.
이번엔 그걸 입이 아니라 손으로 풀어내면 되는 것이었다.
하여, 나는 서책이나 필기 책을 들여다보는 대신 아침 녘에 보았던 사부님의 모습을 가만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되새겨 놓자.’
지나가는 말씀으로 조금 더 정갈하게 휘둘렀으면 다른 생도들의 검을 그렇게 부숴 먹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하셨지?
‘…그 말이 맞아.’
그러고 보니 사부님이 떨쳐내듯 검을 휘두르셨다면 나는 찍어 누르듯 휘둘렀었다.
‘늘 곁에 계시는데도 그렇게나 멀구나.’
그렇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취할 것 같은 사부님의 검을 점심도 거르고 되새긴 지 얼마나 되었을까?
“언 공자? 시험 치러 가야죠.”
어느덧 무술학개론의 시험 시간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에 시험장으로 선정된 강의실에 들어가 앉으니.
커다란 두루마리에 적힌 시제가 도르륵- 펼쳐졌는데.
<공(空)>
시제가 비움에 관한 것이었다.
내려놓음 혹은 비움.
이 시제는 무술학개론을 담당하시는 여러 교수님께서 무리를 깨쳐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며, 수없이 많은 비유를 통해 강조했던 주제였다.
하여 다른 동기들의 붓이 미친 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그중 제일은 제갈설지였다.
그녀의 머릿속엔 장서각이 있는 모양인지, 남들은 손톱도 깨물고 괜시리 허공도 봐가며 식은땀을 뻘뻘 흘려가며 답안지로 사용되는 두루마리 한 장을 간신히 채워 나갈 때.
“조교 선생님? 답안지 한 장 더 받을 수 있을까요?”
“물론이다.”
제갈설지는 일필휘지로 두 장의 두루마리를 빽빽하게 적어 넣더니 제출마저 가장 먼저 마쳤다.
“여기 올려두고 나가면 되죠?”
“답안지를 두 장이나 받아 가더니 벌써 다 썼나? 그래 거기 올려두고 나가면 된다. 수고했다.”
그렇게 답안지 제출을 마친 제갈설지는 시험장을 나가면서 내 쪽을 응시했다.
한데, 나는 아직 답안지 작성을 미루고 있던 터라 두루마리가 깨끗했다.
제갈설지는 그걸 보며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나갔다.
‘무슨 생각으로 웃었는지 알 거 같네.’
관심법을 익힌 적은 없지만 제갈설지의 심중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래도 학과 시험에서는 자신이 이겼다.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겠지.’
지금 제갈설지와 나는 서로 다른 과목에서 각각 두 개씩의 만점을 얻은 상황에서, 나머지 과목들은 모두 갑점을 얻은 이른바 동률의 상황이었는데.
남은 시험 시간과 내 답안지의 상태를 보고 제갈설지는 아마 자신이 이겼다 확신을 하는 모양이었다.
‘…….’
하나 나는 적을 것이 없어서 이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배운 것들을 그저 조리 있게 적어 넣는 것쯤 나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물에 애꿎은 붓만 치대고 있었던 이유는?
반나절 내내 사부님이 검을 펼치던 모습을 떠올리고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시제 자체가 조금 다르게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각은 딱 여기까지.
나는 한참을 치대고 있던 붓을 들어 답안 작성용 두루마리로 옮겼다.
* * *
무술학개론의 시험을 끝으로 중간고사가 끝이 났다.
그로부터 며칠 뒤.
강시학개론의 수업이 있는 날.
다른 녀석들이랑은 수업이 겹치지 않았고, 당옥기는 제 연구실로 달려가서 자치회실에서 홀로 일을 보고 있는데.
눈 밑이 시커먼 대학원생 선배님이 채점한 무술학개론의 답안지라며 돌돌 말린 두루마리 한 묶음을 자치회실에 가져다주셨다.
“아. 그 학관생 광장에 놓인 흑판에 생도들의 등수를 매긴 석차도 나붙었네. 아직 안 봤으면 가서 보게.”
그리고 학관생 광장에 놓인 네 개의 흑판에 학년별 학과 시험의 석차가 나붙었다는 소식을 알려주셨다.
그에 등수부터 확인하자 싶어 광장으로 나가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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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학년 일 학기 중간고사 석차.
1. 언용운
2. 제갈설지.
3. 은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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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위에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결과가 이렇다면 무술학개론 시험에 내가 낸 답안지가 만점을 받았다는 소리였다.
‘나름대로 확신을 갖고 적어 낸 답지였지만.’
솔직히 영점 처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조금은 있었다.
그런데 최고의 결과가 나왔다.
그에 나도 모르게 입이 열렸는데.
“촉이 좋군.”
내가 그렇게 한마디를 중얼거리고 있는 그때.
석차가 나붙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정현과 은하성이 흑판에 붙은 석차를 보고 한마디씩을 전해 왔다.
“…와. 항상 형님을 믿고 있었지만, 솔직히 학과 시험에서까지 제갈설지 소저를 누르실 줄은 진짜 몰랐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야말로 문무를 겸하시게 되셨군요. 이제 누가 감히 언 소협의 이름 앞에 붙어 있는 당금수석 소리를 부정하겠습니까?!”
그렇게 두 녀석이 호들갑을 떨고 있는 이때.
하성이 놈과 정현보다 조금 늦게 현장에 도착한 제갈설지가 입술을 파들거리며 내 소매자락을 잡았다.
“용운 님…. 그, 실례가 안 된다면 무술학개론의 답안지를 제가 한 번만 구경할 수 있을까요?”
그런 제갈설지의 등장에 마른침을 꿀꺽 삼킨 하성이 녀석이 정현을 향해 귓속말을 전했다.
“…부정할 사람이 나타난 거 같습니다 정현 도장.”
“…그렇군요. 빈도가 제갈 소저를 깜빡을 했습니다.”
귓속말치고는 목소리가 너무 컸다.
하지만 문제 될 건 없었다.
그 말을 들은 제갈설지가 입장을 확실히 전해 왔으니까.
“…그. 일전처럼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이러는 게 아니에요. 순수하게 견식하고 싶어서 그래요. 귀찮게 굴지 않을게요. 안 될까요?”
“정말로 보기만 할 거라면 안 될 건 없소만.”
“예. 정말로 용운님을 귀찮게 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바둑 결승 때처럼….”
할아버지의 이름을 걸겠다고?
뭐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딴소리를 하지야 않겠지.
“할아버님의 이름은 됐소. 소저의 약속을 믿을 테니 따라오시오. 보여 드리겠소.”
그렇게 제갈설지와 정현 그리고 은하성을 이끌고 청죽관의 자치회실로 돌아온 나는 내 답안지를 찾았다.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가장 위에 올려져 있는 두루마리를 딱 집어 들어 도로록 펼쳤는데, 그게 바로 내 것이었으니까.
붉은 안료로 쓰인 만(滿) 자라는 표시 아래 딱 여섯 글자.
청죽관(靑竹館).
언용운(彦龍雲).
그러니까 학관과 성명만이 적혀 있는 답안지.
적어 낸 답안지가 맞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그 두루마리를 건네기 좋게 살짝 접어 제갈설지에게 내밀었는데.
“여깄소.”
“감사해요.”
이 순간.
떨리는 손으로 내 답안지를 받아 펼친 제갈설지가 헛숨을 삼키며 동공을 키웠다.
“배, 백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