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8화. 담금질의 때 (5)
내 답안지를 펼쳐 본 제갈설지가 헛숨을 삼키며 동공을 키우자.
근처에 있던 은하성과 정현이 더는 참지 못하고 별로 친하지도 않은 제갈설지 좌우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백지? 제갈 소저 대관절 그게 무슨 소립니까? 나도 좀 봅시다.”
“빈도도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렇게 제갈설지보다 조금 늦게 내 답안을 확인한 두 녀석도 동시에 눈을 키웠는데.
그중 먼저 입을 연 녀석은 은하성이었다.
“어? 정말로 백지를 내셨습니다? 우리 기숙사 명칭이랑 성명. 딱 여섯 글자 말고는 안 적으셨네요? 이러고 만점을 받으신 겁니까 용운 형님?”
“나는 그냥 저렇게 내는 게 시제와 가장 어울리는 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랬더니 만점을 주셨더라.”
그런 내 말에.
은하성은 쌓여 있는 답안 두루마리를 뒤져 자신의 것을 급히 찾아내더니 우리 쪽으로 촥- 펼쳐 보이며 입을 열었다.
“아니, 저랑 한 끗 차이신데 학점이 왜 이렇게까지 차이가 나는 거죠?”
그에 녀석의 답안 두루마리로 시선을 옮겨 보니.
“존경하는 교수님. 공은 비우는 것입니다. 그것은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이랄까요? 배움이 부족하여 그 이상의 답을 찾지 못했으나 생도 된 자로서 감히 백지를 제출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이렇게 편지를….”
편지를 적어 낸 모양이었다.
나는 금나수를 응용해 하성이 녀석의 두루마리를 번개처럼 빼앗아 말아 쥔 뒤.
“에라이!”
녀석의 목 위에 달려 있는 장식품을 후려쳤다.
“아!!”
“저걸 답안이라고 냈냐? 답안이라고 냈어?”
“앜! 악!”
불시에 타격을 허용한 하성이 녀석이었지만, 이런 상황에 제법 이골이 난 녀석은 재빨리 정현과 제갈설지 뒤로 숨으며 입을 열었다.
“억울합니다!”
“네가 억울하면 세상에 억울하지 않은 사람이 없겠다. 내가 그렇게 누누이 공부 좀 하라고 했는데, 편지를 적어 놓고 네가 뭐가 억울한데?”
“저도 처음에는 그냥 어쭙잖게 몇 자 적어 내느니 그냥 깔끔하게 백지를 낼까 하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근데 선배님들이 답을 잘 모르겠어도 아는 데까지 쓰고 교수님께 편지라도 쓰라고 해서 쓴 겁니다. 그러니까 사실 저도 만점의 가능성이 있던 거죠!”
그런 하성이 녀석의 항변에 깊은 빡침이 몰려오는데.
“은 소협.”
“저, 정현 도장?”
이 순간을 맞추어 정현이 한 걸음을 비켜서더니 하성이 녀석을 제 손으로 꽉 붙들어 포박해 내 앞에 세우며 입을 열었다.
“완전히 다릅니다.”
“예?”
“언 소협께서는 비움이라는 시제를 깊이 고찰하신 뒤에, 비운다는 것을 논하는 데엔 아무것도 적지 않는 것보다 나은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렇게 한 것이고, 은 소협께서는 정말로 모르시지 않았습니까?”
“…….”
“교수님들이 허술하신 분들이 아닙니다. 아마 똑같이 백지를 제출하셨다고 하시더라도 은 소협은 만점을 받으시지는 못하셨을 겁니다. 수업 중에 행한 질의응답과 내주셨던 과제, 각종 학사 일정들에서 보인 모습을 바탕으로 저 백지 답안이 완성된 것일 테니까요.”
그런 정현에게 은하성은 재빠르게 협상을 시도했다.
“그, 좋은 말씀이십니다 정현 도장. 근데 이건 좀 풀어주시고 계속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용운 형님의 눈에서 안광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다 저 죽습니다. 그건 정현 도장께서 항상 찾는 도(道)가 아닐 텐데요?”
나름대로 정현의 가치관을 찌른다 싶은 말이었는데, 의외로 정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도가 맞습니다. 그것도 선도입니다.”
“이 사람! 도사 포기했네!!”
“대저 옷에 묻은 때도 지워내려면 빨랫방망이로 두드리는 법입니다. 조금 전에 은 소협께서 뱉으신 생각과 말에서 묻어나는 때를 지워내려면 적절한 선도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도가와 불가에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참선 시에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수련자에게 죽비로 경책을 하는 행위를 해오곤 했지요. 그러니까 이건 도가 맞습니다.”
“악! 아앜! 으악!!”
그렇게 정현의 조력을 받아 하성이 녀석에게 도를 직접 주입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그러고 보니 잠시 잊고 있던 사람이 생각났다.
하여 고개를 돌려보니.
아직도 내 시험지를 멍한 표정으로 보고 있는 제갈설지가 있었다.
“…….”
그런 제갈설지의 모습에 허리춤의 사부님께서 한마디를 전해 오셨는데.
- 제갈설지 저 녀석은 백지로 낸 네 답지에 뭐 볼 게 있다고 저러고 있느냐?
그 말을 듣고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조금 전에 귀찮게 하지 않겠다고 한 약속을 덮어놓고 또 인정하지 못한다 어쩐다는 소리를 하려고 저러는 건가?’
하기야, 하성이 녀석도 한 끗 차다 어쩐다는 소리를 하는 판국이다.
‘승부욕 귀신 제갈설지라면 인정이 안 될 수도 있겠지.’
똑똑한 머리로는 내 답안지가 충분히 만점을 받을 만하다 이해를 해도, 내심의 승부욕이 그 머리를 부정하는 게 바로 제갈설지라는 인간이었으니까.
하나, 제갈설지가 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정현부터 넘고 오겠다 이미 몇 번이나 공언했고.’
할아버지의 이름을 담보로 소원권도 하나 잡혀있는 그녀였다.
하여, 나는 아무런 부담 없이 과연 그녀가 무슨 소리를 하나 들어나 보자는 심산으로 말을 던졌다.
“제갈 소저? 거, 적어 놓은 거라곤 이름 석 자와 청죽관 석 자밖에 없는 답지를 뭐 그렇게 오래 보고 계시오?”
한데, 내 물음에 제갈설지의 눈에 그렁한 물기가 맺히기 시작했다.
“……? 우는 거요?”
하여 한마디를 더 던졌더니.
이제 입술까지 파들거리기 시작했다.
- …왜 애를 울리고 그러느냐.
‘아니 제가 뭘 했다고 그러십니까? 사부님이 저한테 물어보신 거 그대로 입으로 옮기기밖에 안 했는데요?’
- 그 뒤에 한마디를 더 하지 않았느냐?
무슨 한마디요?
아, 우냐고 물어본 거 말씀하십니까?
- 그래! 본디 울고 싶을 때 ‘야 우냐?’ 소리를 들으면 더 속상한 법이니라!
그때였다.
그렇게 사부님과 잠시간의 실랑이를 버리고 있는 이때.
“…후우.”
잠시 천장을 응시해 눈가의 그렁함을 잠재운 제갈설지가 파들거리는 입술을 짓씹는가 싶더니, 다시금 시선을 내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큰 마음을 먹은 듯 ‘후.’ 하고 긴 숨을 토해내며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졌어요.”
응?
내가 시킨 것도 아니고.
굳이 그렇게까지 패배 선언은 안 해도 되는데?
‘아니 애초에 제갈설지가 본인 입으로 저런 말을 할 녀석이 아닌데?’
그도 그럴 게.
흙밭을 구르고 탈진을 하면서도 자긴 아직 지지 않았다는 소리를 하던 게 제갈설지였다.
‘무림맹에 갔을 때 제갈혜 대군사를 만나고 오더니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나?’
알 수 없었다.
하나, 뭔가 큰 결심을 하고 저러는 것 같은데, 거기다 대고 당신 그런 사람 아니지 않냐 하고 초를 치기도 좀 그랬다.
나는 적당한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
“운이 좋았소.”
그런 내 말에 제갈설지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재차 입을 열었다.
“운 아니에요. 윤국관의 해우소가 이 자치회실보다는 두 배는 좋겠네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거, 말이 조금 심한데.
“용운 님은 저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에서 시험 준비를 하셨네요. 심지어 합격진도 배우고 계시니 시간도 부족하셨을 거고요. ”
아무튼 제갈설지가 뭔가 속에 있는 것을 토해내는 중인 것 같았기에 나는 그냥 그녀의 말을 듣고만 있었는데.
“그런데도 저는 배운 것을 자랑하기에 바빴지, 시제를 관통해 내지는 못했네요. 제가 완전히 졌어요.”
그렇게 제 할 말을 모두 뱉어낸 제갈설지의 입가에는 어쩐지 후련함이 감도는 엷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처럼 한결 후련해진 표정의 제갈설지는 언제 울먹였냐는 듯.
턱을 세우며 마지막 말을 뱉었다.
“하지만 기말고사 때는 안 질 거예요.”
늘 하는 말이었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이전까지와는 좀 달랐다.
그에 나도 피식 웃으며 일전에 해주었던 말을 다시 돌려주었다.
“그런 말을 내 앞에서 하고 원하는 결과를 받아 간 사람이 없소.”
그렇게 제갈설지의 패배 선언 겸 선전포고와 함께 일 학기 중간고사는 막을 내렸다.
* * *
정무학관의 생도들이 내걸린 석차와 공개된 학점에 누구는 울고 누구는 웃는 이때.
쌔애애애액!!
쌔애애애액!!!
각각 검은 난초 문양이 새겨진 장포와 푸른 대나무가 새겨진 장포를 걸친 두 사내가 하남의 관도를 날 듯이 달리고 있었으니,
생도들이 습격당한 일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북상을 하고 있던 챵량과 노삼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달린 지 얼마나 되었을까?
정무학관에서 하남으로 뻗어 있는 관도를 기준으로 창량의 목적지는 서쪽에 노삼의 목적지는 동쪽에 있었기에.
창량과 노삼 두 사람은 갈림길을 마주하게 되었다.
“…거, 뭐냐. 다른 일도 아니고 애들 일이니까 괜히 젠체하다가 일 그르치지 말고, 잘해라.”
“제가 할 소리를. 선배야말로 가는 길에 아무거나 주워 먹다 탈 나서 일 그르치지 마십시오.”
“내 위장은 너희 같은 놈들이랑 질적으로 달라서 썩은 두부를 먹어도 탈 안 나.”
“딱히 부럽지는 않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흥이다! 흥!”
그렇게 잠시 서로를 향해 덕담(?)을 건넨 창량과 노삼은 각각 서와 동으로 흩어졌는데.
그중 동쪽으로 길을 잡은 노삼의 걸음이 향하는 종착지는 개봉이었다.
개봉.
하남성이 아니라 천하를 기준으로 삼아도 다섯 손가락 안에 당당하게 드는 이 대도시의 별칭은 불야성(不夜城).
그러니까 밤이 없는 도시였다.
천하의 수운과 육운을 잇는 요충지라 상점가와 번화가의 불이 낮이고 밤이고 항시 꺼지지 않는 도시라 그런 별칭이 붙은 것이었는데.
노삼은 그처럼 환한 곳을 피하고 피하고 피해 개봉 성내에 흐르는 수로 위에 놓인 다리 중에 가장 큰 다리 아래 위치한 칙칙한 굴다리를 찾았으니.
이곳이 바로 개방의 총타라 불리는 곳이었다.
뭐, 아무튼.
아무리 노삼이라고 하나 방주를 만나려면 최소한의 절차가 필요했다.
하여 굴다리 앞에서 늘어져라 퍼질러 자고 있는 거지를 깨우고자 노삼은 헛기침을 했다.
“흠흠.”
한데, 거지치고 피둥피둥한 이놈의 거지새끼가 귓구멍에도 살이 쪘는지 꼼짝을 하지 않았다.
노삼은 즉시 결단을 내렸다.
빡!!
“앜! 어떤 호로 잡놈의 새끼가 개봉에서 거지를 차냐?!”
“니가 거지새끼냐? 돼지 새끼 아니고? 날마다 기름진 것만 처먹어서 배 튀어나온 것 좀 봐라! 내 튀어나온 배까지는 봐주려고 했는데, 귓구멍에 살이 찐 건 못 참겠다!”
“…가 아니고. 노 장로님 오셨습니까?!”
“그래 왔다! 방주님 안에 계시냐?”
출발하기 전에 용무 있다는 서신을 보냈고, 오면서도 가까운 지타와 초막들을 들려 현재 방주가 총타에 들어앉아 있다는 소식을 받고 온 터라 엇갈림은 없었다.
“옙!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기별을 넣고 오겠습니다.”
잠시간의 기다림 끝에 들어오라는 말이 안에서 나왔다.
노삼은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전서구가 호루룩-거리는 다리 밑을 지나 방주가 기거하는 움막 안에 들어섰다.
“팔결개 노삼이 방주님을 뵙습니다.”
그러자 허리에 아홉 개의 매듭이 맺힌 누더기를 입은 풍채 좋은 늙은 거지가 개방의 신물인 타구봉으로 등을 긁으며 그를 맞았으니.
“간만이다?”
“예. 방주님. 별고 없으셨습니까?”
그가 바로 개방의 당대 방주 강골개(强骨丐) 만복이었다.
“나야 맨 똑같지. 서신 뒤적거리다가 비둘기 똥이나 처맞고, 때 되면 밥 처먹고. 그러는 노삼 너는 학관 밥이 좋은가 신수가 아주 훤하다?”
“개봉의 동냥밥만 하겠습니까? 오면서 보니까 삼식이 놈이 이름값을 못 하고 다섯 끼씩 처먹었는지 아주 굴러다니던데요?”
“알고 보면 불쌍한 놈이다. 너무 그러지 마라. 엥? 아니 근데 다시 보니 신수가 훤하지가 않은데? 거 이빨 하나는 어디 갔느냐?”
“아. 이거 말씀이십니까? 새로운 시대에 선물하고 왔습니다.”
“…염병한다. 후개 시켜 줄 테니까 들어와 앉으라니깐, 나이가 몇 살에 배분이 어디인데. 어디 가서 처맞았는지 등신같이 이를 해 먹고 앉았네.”
“진짠데요? 정말로 새로운 시대에 주고 왔습니다. 아니 근데 제 말도 안 믿어주시면서 후개는 뭔 놈의 후개입니까? 그리고 저는 성질이 더러워서 어차피 방주질 못 합니다. 벽에 똥칠하실 때까지 그 타구봉 쥐고 계시다가 바로 천장호 그놈한테 넘겨주시던지 하십쇼.”
뭐, 회포는 여기까지.
벅벅 긁던 등에서 타구봉을 뽑아낸 만복이 봉 자루에 턱을 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쩐 일이냐?”
“허락을 구할 일이 하나 있고, 또 여쭐 것도 하나 있는데. 서신으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서 부득불 직접 왔습니다.”
“그럼 허락을 구할 일부터 듣자.”
“항룡장을 외부인에게 가르쳐 줬습니다.”
천하의 소식이 모이는 개방이라도 극소수만 알고 있는 정보는 구할 방도가 없다.
노삼이 언용운에게 항룡장을 전수한 것도 그에 속하는 일이었다.
금시초문이었던 소식에 만복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염병할 놈. 주고 싶습니다도 아니고 줬다고 말하면서 허락을 구한다고 하네.”
말은 그렇게 해도 만복에게 악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애초에 팔결 제자인 노삼에게는 비인부전의 대원칙 그러니까 바른 인성을 갖춘, 이른바 협객의 자질이 충분한 사람이라면 일신의 무공을 전수해줄 권한이 있었으니까.
단지 왕년에 광풍투개 소리를 들었던 노삼의 마음에 든 녀석이 누군지가 궁금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전수 해준 놈이 누군데?”
뭐, 천하 거지들이 들은 모아온 소식이 모여드는 자리에 앉아있는 만복인 만큼 짐작이야 갔다.
“그 언용운이라는 놈이냐?”
“예.”
“흠. 그놈은 근데 소문이 항상 두 개씩 들리던데, 망나니라는 소리랑 망나니가 아니라는 소리랑? 노삼 네가 보기엔 괜찮았나 보지?”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물건입니다. 방주님께서도 그놈을 직접 보시면 제가 왜 그런 마음을 먹었는지 바로 아실 겁니다.”
“노삼이 네가 그렇다면 그 말이 맞겠지. 알았다. 그리 알고 있으마. 그건 그렇고. 그래서 여쭐 것이라는 건 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