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2화. 위원회의 결정 (1)
언용운에게 화생방 훈련을 받고 투약실을 나온 생도들이, 팔 벌려 높이 뛰기로 무복에 묻은 독기를 바람결에 날려 보내고 있는 이때.
바람결을 따라 산을 넘고 황하를 건너 하북 팽가의 본가가 위치한 보정 땅에 전서응 한 마리가 내려앉았다.
빼애액!!!
그에 기별이 들어간 진주언가와 석씨세가에서 달려온 마차가 하북팽가의 문전에서 바퀴를 멈추고, 언정웅과 석금필을 토해내니.
어느덧 월례 행사 비슷하게 된 하북삼협의 친목회가 개최되었다.
“…….”
“…….”
“…….”
한데, 앞선 모임과 달리 오늘은 분위기가 좀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꼴꼴- 꼴꼴꼴-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고, 이렇게 세 사람이 모이곤 하면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해도 기어이 실없는 숙숙농담을 날려오던 모임의 좌장인 팽무혁.
“크.”
그가 전과 달리, 아니 전에 없이 침울한 표정으로 술잔만 연거푸 기울이고 있었기에 그랬다.
“…….”
“…….”
언정웅과 석금필은 팽무혁이 왜 저러고 있는지를 알았다.
그도 그럴게 도제의 장녀가 검을 쥔 일은 호사가들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성질의 이야깃거리인지라, 팽재혁의 서신이 날아왔다는 전갈이 진주언가와 석씨세가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팽소진이 공손무결의 제자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는 천하에 파다했었다.
꼴꼴꼴-
하여 차마 팽무혁을 말리지 못하고 있었으나, 팽무혁의 침울이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보다 못한 언정웅이 백주를 꼴꼴거리며 토해내던 술 주전자를 팽무혁에게서 빼앗으며 입을 열더니.
“술잔을 주고받을 벗이 둘이나 있는데 어찌 그리 자작(自酌)을 하십니까.”
곧바로 한잔 술을 철철 따라 단박에 넘기고선 입을 열었다.
“큿. 그. 미안합니다. 의형.”
그런 언정웅의 행동에 석금필이 급히 몸을 세웠다.
“에헤이. 어찌 자작을 하시냐면서 언 가주님께서는 또 왜 자작을 하십니까?”
그렇게 술 주전자를 빼앗아 든 석금필이 비어 있는 세 개의 잔을 차례대로 채우는 동안.
팽무혁이 쩝 하는 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의제가 미안할 게 뭐가 있나? 다 내가 모자란 것인데.”
“…왜. 저번 모임에서 우제가 분위기에 취해서 괜히 두 분은 자식이 속을 썩인 적이 없으셔서 모르신다, 언젠가 품 안의 자식이란 말의 뜻을 깨달을 날이 오실 것이다. 뭐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 말이 씨가 된 것 같아서요. 소진이 소식을 전해 들은 뒤로 저도 내내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운을 뗀 언정웅은 계속해 말을 이었다.
“한데, 그건 형님의 아우로서 그리했던 것이고, 소진이 녀석의 숙부로서는 툭 까놓고 잘됐구나 하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소진이 녀석이 항상 발을 동동거리고 있었음을 의형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하여, 실전된 도법을 복원하려고 심혈을 기울이고 있으셨던 것이고요.”
“…….”
“근데 그 복원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될 일입니까? 실전된 지 고작 육십년 정도 밖에 안된 저희 가문도 강시종 복원은 반쯤 포기를 했습니다.”
“…….”
“무림맹주. 공손무결 그 친구는 의형을 제법 잘 아는 친구입니다. 그리고 허허롭게 웃고 다니는 것 같아도 도리에 밝고 천하의 안정에 누구보다 진심인 사람이고요. 안 그렇습니까? 석 가주님?”
“말씀에 틀림이 없으십니다. 언 가주님.”
“우제의 짧은 소견으로는 그 공손 무결이 도제의 침울이나 진노를 예상하지 못했을까요? 예상했을 겁니다. 그러니 그런 것들을 무릅쓰고 소진이에게 검을 가르쳐 주겠다 정했다면 그 길이 소진이에게 맞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
“의형. 작년 즈음의 저를 떠올려 보십시오. 용운이 녀석이 끌어다 쓴 빚들을 청산한다고 하북 땅의 기루나 고리대 꾼들의 집중에 제가 걸음을 안 한 곳이 없습니다.”
기실 동생이 형을 가르치는 꼴이었으나.
속이 썩은 것으로 순서를 매기면 천하에서 언정웅보다 위에 있을 사람은 그의 부인인 이화 부인 정도밖에 없었기에 언정웅의 말엔 힘이 실렸다.
“자식 일에 자존심이 무에 그리 중요하십니까? 도면 어떻고 검이면 어떻습니까? 아이들이 주저앉지 않고 제 뜻을 펼칠 수 있다면 된 것이지요.”
“…끙. 나는 단순히 소진이가 도를 놓고 검을 쥔 것이 섭섭해서 속이 상하는 게 아니야. 그만한 일을 가족이랑 상의도 없이 턱 저질러 버리니 속이 착잡한 것이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시죠. 의형 성정에 소진이가 솔직하게 고민을 털어놨으면 웃으면서 그러라고 했겠습니까? 그리고 망나니를 자처해서 호적에서 제 이름을 파고 나간 용운이 녀석만 하겠습니까?”
거의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지고 있는 언용운의 이름이었으나.
팽무혁과 석금필으로서는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아무리 생각해도 팽소진의 행동은 언용운의 그것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그리고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더니, 정말로 가만히 있기만 한 석금필의 아들 석호열은 효자 중의 효자로 보였다.
“…….”
“…….”
절로 숙연해진 분위기 속에 언정웅이 남은 말을 뱉었다.
“그리고 스승이 공손무결이면 쌍수를 들고 환영을 할 일이지요. 저는 용운이 녀석이 어디서 무슨 검술을 주워 익혔는지 제대로 된 내력도 알지 못합니다.”
“…끙. 미안하네. 듣고 보니 우형이 자네 앞에서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고 있던 꼴이었구만.”
“자자, 두 분 모두 미간 좀 펴시고 거국적으로 한잔하시지요.”
딸그락-
오늘 자리에서 내내 따로 기울여지던 술잔이 처음으로 동시에 기울여지는 순간이었는데.
그렇게 잔을 비운 언정웅은 팽무혁을 향해 한마디를 덧붙였다.
“기왕 오지랖을 부린 김에 한마디만 더하자면, 소진이를 보시거든 괜히 흰소리하지 마시고 격려나 해주십시오. 나중에 저처럼 후회하시지 말고요.”
언정웅의 말에 팽무혁은 가만히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용운이 이 녀석은 대체 뭐 하는 녀석인가.’
속상함에 가려져 잠시 잊고 있었는데, 언정웅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입학식 다음 날의 일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무결 동생이 본디 제자로 삼고 싶어 하던 사람은 소진이가 아니라 용운이였는데?’
이 녀석이 설마 제 누님이 벽에 막힌 것이 안타까워 그 기회를 양보한 것인가?
검을 펼치는 팽소진의 모습을 보지는 못했으니, 아직 단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만약 정말로 팽소진이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은 것이라면?
‘그렇다면 나는 이 언용운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인사에게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지?’
그때였다.
갑자기 든 생각에 팽무혁의 미간이 좁아진 그때.
눈치 빠른 석금필이 분위기가 좀 풀린 것으로 보이자.
“자자. 그럼 팽 교수님의 서신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분위기를 쭉 이어가기 위해 전서응이 실어 온 팽재혁의 서신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일어난 일이 많은데 일단 중간고사 결과부터 쓰겠다고 되어 있군요? 허?! 용운이 녀석이 학과 시험에서도 수석을 했다는데요? 이 말은 제갈설지를 붓으로 꺾었다는 말 아닙니까?”
그런 석금필의 음성에.
언정웅은 태어난 이래 가장 큰 위기를 맞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숙연했던 현장이었고.
의형 되는 팽무혁이 속앓이를 하는 와중이었다.
그리고 그런 의형에게 나름대로 쓴소리를 했던 언정웅 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콧구멍을 벌름거리거나 입꼬리가 움직여서는 안 됐다.
‘스, 슬픈 생각.’
돌아가신 어머님 아버님.
가시는 날까지 걱정을 안겨 드렸던 불효자 정웅이 고합니다.
아니 글쎄 용운이 그 녀석이 입학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한 것으로 모자라, 이번에는 글쎄 학과 시험에서도 수석을 흐흫….
‘어. 이게 아닌데?’
하나 곧 그럴 필요가 없게 됐다.
이어진 석금필의 음성이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만드는 소식을 전해 왔으니까.
“…어 근데 이게 무슨 소릴까요? 무림맹 견학을 마치고 복귀하던 생도들이 살수들의 습격을 당한 일이 있었다는군요?!”
* * *
무림맹과 학관의 정규 과정에 화생방 훈련을 넣자는 품의를 올려도 되겠냐는 두 분 선배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 음? 거지새끼가 돌아왔구나.
사부님의 말에 고개를 돌려보니.
노삼 교수가 털레털레 걸어오더니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언가야.”
“음? 교수님? 언제 오셨습니까?”
노삼은 그간 개봉에 다녀온다고 자리를 비우고 있었기에, 이렇게 마주하는 게 제법 오랜만이었다.
“조금 전에 와서 본관을 들렸다 바로 이리 온 참이다. 땀 냄새가 좀 나지 않느냐?”
“쉰내야 항상 나던 거라서요.”
“그건 그렇지? 근데, 왜 네 동기 놈들은 얼굴이 저 모양이냐? 눈물 자국에 콧물 자국에 아주 거지꼴이 따로 없구나, 천장호 저 새끼는 원래도 거지였는데 아주 상 거지꼴이 됐고?”
“왜 개봉에 가시기 전에 제가 허락을 구했던 투약 일정 있지 않습니까? 거기 참여해서 그렇습니다.”
노삼이 학관을 비운 이유는 우리가 살수들에게 습격당했던 일을 조사하기 위해 개방의 총타에 다녀오기 위해서였다.
이미 살수들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는 나였지만.
개방은 이 일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가 궁금해서, 나는 넌지시 물음을 던졌다.
“하여, 알아보시러 간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안 그래도 그 일로 왔다. 그 투약 일정인가 훈련인가 한다고 한 것은 다 된 것이냐?”
“예. 아직 제갈설지 생도랑 은하연 생도는 덜 끝났는데, 저보다 더 전문가인 당옥기 생도가 진행하고 있어서 사실상 다 끝났습니다. 탈이 난 사람도 없고요.”
“그럼 나를 따르거라.”
“지금요?”
“그래. 내가 총장님께 보고를 하는 중에 창량도 도착을 했는데, 그 바람에 대민 지원 일정을 두고 학관의 운영 위원들이 참석하는 회의가 다시 열렸다. 왜 저번에 너 복귀 하던 날에 임시로 열렸던 회의에 참석해봤지 않느냐? 사감교수랑 행정처장이랑 모였던?”
“아. 그 자리요?”
“그래. 듣자 하니 무림맹에 갔을 때 맹주랑 나눈 약속이 있었다면서? 창량이 그러던데?”
“예.”
“그 일로 이번에도 네가 배석을 좀 해야겠다더라. 하여 지금 당장 나랑 본관에 좀 가봐야겠다.”
그런 노삼 교수님의 말에 나는 잠시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럼. 잠시만 시간을 좀 주십쇼. 제가 그래도 책임잔데 마무리는 해놓고 가야죠.”
“그렇게 해라. 어차피 다른 교수들이 모이는 데도 시간이 들 테니 막 서두를 필요는 없다.”
노삼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잠시간을 얻은 나는 화생방 훈련을 참관하고 계시던 명태성과 배종도 두 선배 명숙께 남은 감독을 부탁했다.
“본관에서 저를 부른다네요? 하여 가봐야겠는데,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두 분께 뒷일을 부탁드려도 될는지요?”
“그게 왜 죄송한 말인가. 걱정 말고 다녀오게.”
“그래. 마음 놓고 다녀오게나. 보니까 마지막 조도 방금 운기조식에 들어갔으니 별일은 없을 거고, 애초에 뒷정리나 잔여 독탄 관리까지 단단히 확인하고 감독란에 수결을 해줄 생각이었기 때문에 자네가 죄송할 일이 아니네.”
“예. 그럼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매를 먼저 맞고 쉬고 있던 정현과 은하성 우소릉에게 뒷일을 맡겼다.
“정현, 은하성, 우소릉.”
“여기 있습니다.”
“넵!”
“예?”
“은소저랑 제갈 소저도 나오면 정현 네가 책임지고 상황 설명 좀 해드리고. 아. 팔 벌려 높이 뛰기는 꼭 시키고.”
“그건 걱정 마십쇼 용운 형님!”
“…하성이 네가 그런 소리를 하니까 없던 걱정도 생길 것 같은데? 이것도 정현 네가 책임지고 해라.”
“아니, 제가 하는 게 누님들도 더 편하실 텐데 정현 도장은 앞뒤가 꽉 막혀….”
“정현이 해.”
“그리하겠습니다. 언 소협.”
“아무튼 뒷정리랑 청소 좀 부탁한다.”
그렇게 대략적인 교통정리를 마치고 나니 한편에서 그런 나를 흐뭇하게 보고 있는 노삼이 보였다.
“……? 뭘 그렇게 보십니까?”
“내 눈깔인데 마음대로 쳐다도 못 보느냐?”
“보는 건 문제가 아닌데, 사람을 무슨 갓 구워져 나온 거지닭 보듯이 보시니까 그렇죠.”
그런 내 물음에 노삼은 답을 하는 대신 걸음을 돌렸다.
“다 됐으면 가기나 하자!”
나는 그런 노삼 교수님의 뒤에 걸음을 붙였는데, 그렇게 함께 걸음을 옮긴 지 얼마나 되었을까?
노삼의 입이 두서없이 열렸다.
“언가야. 네가 하북에서 쫓겨나는 데 크게 공헌한 일 말이다.”
“……? 가문의 비급을 날려 먹은 거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거. 아까 보니 동기들이랑 아주 돈독하던데 혹시 그 일에 관해 동기들과 나눈 바 있냐?”
“아뇨.”
“그으래? 흠. 그럼 혹시 내가 자초지종을 물어본다면 답을 해줄 의향이 있느냐?”
“아니요.”
당연히 없지.
애초에 내가 한 일이 아니라 자초지종을 모르는 이야기니까.
근데 갑자기 이 양반이 그걸 왜 궁금해하지?
“한데 교수님께서 갑자기 그 일을 왜 물어보십니까? 개방의 총타에 다녀오신 거로 아는데 방주님께서 교수님께서 무슨 말씀이 있으셨습니까?”
“아니. 그냥. 방금 난 자리를 단속하는 모습을 보다 보니 문득 하북에서는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물어봤다.”
아닌데.
뭐가 있는데.
‘근데 원체 생겨 먹으신 게 의뭉스럽게 생기셔서 저러고 입을 꾹 닫으시니 속을 모르겠네.’
그때였다.
내 사고가 노삼이 왜 저러나를 고민하는 이때.
노삼이 더욱더 알기 힘든 말을 해왔다.
“그때의 일을 털어놓기를 강요할 생각은 없다. 단 세상에 네 녀석 혼자 짊어져야 할 일 같은 것은 없다는 것만 알아두거라.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이 노삼은 주저 없이 몸뚱이를 보탤 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