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6화. 원오원(願俉院) (3)
평소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던 점호를 끝낸 나는 자치회실을 향해 걸음을 돌렸다.
한데, 허리춤의 사부님께서 말을 걸어오셨다.
- 점호를 돌며 들어가는 방마다 했던 이야기 말이다.
‘…또 사기 친다는 말씀을 하시려고 그러시죠?’
- …아니.
‘에헤이. 사부님께서는 어지간하면 검으로 다 해결을 보셔서 잘 모르시나 본데, 그게 다 인사관리라니까요?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결과를 위한 말들이 어떻게 사기를 친 게 됩니까? 오히려 사기를 올리는 일이죠. ’
- 아니라니까! 그 말을 하려던 게 아니다 이놈아!
‘엥? 아닙니까?’
- 그래! 청죽관 생도들은 어지간하면 빼려고 한다는 이야기에 관해 물으려고 했거늘! 괜히 제 놈이 찔려서는?!
‘…아니 그럼 처음부터 그렇다고 말씀을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 첫 마디부터 아니라고 했느니라! 아무튼! 네 녀석의 말을 되새겨보니, 내심에서 이미 이번 산서행 인선의 윤곽이 선 듯한데 아니냐?
하여 쭉 듣고 보니.
그래서 산서행에 누구를 데려갈 생각이냐는 물음이셨다.
딱히 비밀로 할 이야기가 아니었기에 나는 곧바로 생각을 전했다.
‘언용명, 천장호, 정현, 우소릉, 제갈설지. 이렇게 데려갈 생각입니다.’
- 흠. 용명이 녀석과 젊은 거지는 익히 들은 산서의 특수성 때문이겠고. 정현 그 녀석은 네가 믿을 수 있는 녀석 중에 가장 무위가 강하기 때문에?
정현은 원작 때문이라도 무조건 데려가야 했지만 굳이 할 이야기는 아니어서 나는 그저 가만히 고개를 주억였다.
그사이 사부님의 의문은 남은 둘에게로 넘어갔다.
- 소릉이는 이번 대민지원 일정 자체가 네 녀석의 외가 쪽 선산이 도굴을 당해서이니 녀석의 특기가 도움이 될까 싶어서겠고?
‘오. 바로 맞추셨습니다. 내친김에 제갈소저도 한번 짐작해 보시죠?’
- 내 보기엔 제갈가의 아해는 하연이 그것이랑 경합을 했던 것 같은데…. 자리를 비운 청죽관을 챙기는 것을 보아하니, 하연이 녀석이 미덥기에 되려 네가 없는 동안 청죽관을 굴리라고 남기는 것 아니냐?
뭐, 자잘한 이유가 더 있기는 했다.
‘은소저는 눈에 보일 정도로 성장세가 가파른 시기니, 산서행에 따라나서는 것보다는 검후 교수님 곁에 붙어 있는 게 낫겠지.’
아무튼 큰 틀은 맞추셨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드렸다.
그런 내 답에 사부님께서 침음성을 내오셨다.
-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인선이라는 생각이 든다만, 하성이 녀석이랑 하연이 그것이 받아들이겠느냐?
‘제가 그러겠다고 결정한 건데. 안 받아들이면 어쩔 건데요?’
- 아 그야 그렇겠지. 그러니까 내 말은! 아까 점호를 받은 생도들보다 몇 배는 섭섭해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이번에 원오원인가 뭔가 하는 발표회도 그 둘이 가장 앞장서서 추진한 모양이더만? 인사관리 어쩌고 하더니 정작 간부들은 안 챙기는 것이야?
‘아, 그야 그렇겠죠. 그러니까….’
- 그러니까?
‘이번에도 사기를 쳐… 아니 사기를 북돋아 줘야죠.’
* * *
그렇게 사부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자치회실에 도착하니.
발표회에 참가한 청죽관 생도 중에 아직 내게 사기 진작의 말을 듣지 못한 네 녀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내려놓은 지 오래된 점호를 오랜만에 맡겠다고 한 순간부터 내가 인선을 확정했음을 직감했는지.
평소였다면 일선에 나가 점호를 해보니 감회가 어떻냐며 호들갑을 떨었을 하성이 놈이나, 그 옆에서 도를 찾을 정현까지 모두가 은근히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데리고 갈 정현이나 소릉이 녀석은 신경 쓸 필요 없고.’
나는 은하성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하성아.”
“예?”
“왜 그렇게 산서행에 따라오고 싶어 하는 거냐?”
“어. 발표회 때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이런 여정에선 진자리 마른자리 살피며 그림자처럼 보좌할 수족이 필요할 겁니다.”
“계속해봐.”
“형님에, 형님의, 형님을 위한 수족은 제가 적임입니다. 또 많이 모셔보기도 했고요. 입학시험을 치를 때도 그렇고, 아까는 구경꾼이 많아서 이야기 안 했지만, 약재 시장 때도 그렇고요.”
할 말을 다 마친 모양인지 하성이 녀석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 녀석을 향해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너를 데려가야 하는 이유고. 나는 지금 네가 따라오고 싶어 하는 이유를 묻는 거다.”
그런 내 말에 하성이 녀석은 잠시 입술을 물었다 떼더니.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
“뒤처질 것 같아서요.”
“누구한테? 따지고 보면 여기 있는 사람 중에 너보다 뒤에 있던 사람은 사실 은소저 말고 없지 않냐?”
“…단어를 잘못 골랐습니다. 대상이 다른 동기들이 아니라 용운형님이시니, 뒤에 남겨질 것 같다고 해야겠네요. 뭔가 형님은 눈을 비빌 때마다 저만치 멀어지시는 것 같아서 제 쓸모를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본디 사기를 북돋아 주려고 녀석에게 말을 건넨 것이었지만.
하성이 녀석의 말을 듣고 나니 어째선지 씁 하는 소리가 나도 모르게 입에서 새어 나왔다.
“그런 놈이 중간고사 때 편지를 쳐 써?”
“…그건 제 실책이 맞습니다. 뭔가 배분에 실패했어요. 형님을 쫓아서 다니려면 정현도장처럼 무위가 받쳐줘야 한다고 생각해서 학과시험보다는 검에 집중했는데, 성취가 벽에 막혀 버려서 이도 저도 아니게 된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하긴 늦은 시각 청죽관의 후원에서 남몰래 검을 휘두르는 하성이 녀석의 모습을 가끔씩 보긴 했다.
뭐, 하성이 녀석이 대충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어쩐지 불이 좀 붙은 것 같았던 학기 초에 비해 요즘 헤매는 것 같기는 했지.’
무는 벽에 막혔고, 학과시험은 조졌고.
뒤처지는 게 아니라 남겨지는 게 싫다고 말을 고치긴 했지만, 자기보다 한참 늦게 검을 들었음에도 무섭게 쫓아오는 은하연도 신경 쓰였을 것이다.
‘이해는 간다.’
하지만 그렇다면 하성이 녀석은 더더욱 산서행에 데려갈 수 없었다.
“그럼 너는 못 데려가겠다. 애초에 안 데려갈 생각이긴 했는데. 더더욱 안 되겠어.”
“…….”
“여정에서 밥하고 자리 정리하고 이런 거? 그거야말로 아무나 할 수 있어. 꼭 네가 아니어도 된다. 나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 네 쓸모를 증명하려면 그런 거 말고 발버둥을 쳐봐. 단순히 너를 산서행에 데려가지 않는 게 아니라, 뒤처지지 않을 체력을 기를 시간을 조금이라도 주려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예.”
“모르는 거 같은데? 명각주님이 계시는 동안 악착같이 하나라도 더 경험을 빼내란 말이야. 귀찮게 만들어 드리라고. 그리고 네 검은 남궁세가의 검을 뼈대로 하니 남궁윤 그 녀석도 좀 귀찮게 하고. 하는 짓이 고까워도 우리한테 큰 빚을 진 거나 마찬가지라 모른 체는 안 할 거다.”
“예.”
“그래.”
그렇게 내게 쓴소리를 겸한 조언을 듣는 은하성을 보며 급격히 시무룩해진 사람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은하연이었다.
“분위기를 보니 저도 명단에서 빠졌나 보네요.”
‘사실 은소저가 멀어진다느니 내년의 자신이 나와 같은 경지를 볼 수 있을지 모르겠느니 같은 소리는 제일 많이 했지.’
그렇다 보니 하성이를 향한 쓴소리가 은하연에게도 직격을 한 모양이었다.
“맞소. 우리 중엔 정현과 소릉이만 데려갈 생각이오. 나머지는 용명이랑 천장호 그리고 제갈소저. 이렇게 가려고 하오.”
다만 은하연 쪽은 좀 구체적으로 시무룩했다.
“정현도장은 등을 맡길만한 무위를 가졌으니까 그렇다 치고, 작은 언공자도 내가 언공자라도 데려갔을 거 같고, 천소협은 노삼 교수님의 말이 일리가 있었죠. 우소협은 덮어 놓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손과 발이 되어주실 테니 합당한 인선이긴 한데. 저 그럼 제갈 소저한테 밀린 건가요?”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가며 아미를 좁히는 은하연을 향해 나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밀린 게 아니라 더 나은 선택을 한 거요.”
“…그게 그거잖아요.”
“사실 오늘 발표회를 하기 전에는 은소저를 생각하고 있었소. 은소저야 내 사람이니 가자고 부탁을 할 수 있지만, 제갈 소저는 억지로 데려가서 될 일이 아니니까. 한데, 오늘 행사 덕분에 제갈소저 본인이 가겠다고 나서줬으니 일이 편해졌지.”
“괜히 열었네요. 산서금붕이라 불리시는 언 공자의 외조부님을 꼭 한번 뵙고 싶었는데….”
은하연의 상심도 이해가 갔다.
그녀의 경우 뒤처지지 않겠다는 마음 외에도 산서상인의 수장을 만나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열기야 잘 열었지. 사실 은소저를 데려가면 제일 큰 고민이 청죽관은 어찌 하나였으니까. 잘 생각해 보시오. 소식지 사업을 진행하는 거야 계획서만 잘 짜가면 나도 할 수 있는 거고, 내 외조부를 뵐 일이야 또 기회가 있을 것이오.”
방학 기간에 가도 되는 것이었고, 소식지 사업을 진행하게 된다면 자연히 또 자리가 생길 터였다.
‘저쪽에서 학관으로 올 수도 있는 거고.’
꼭 이번만 날이 아닌 것이다.
“한데 지금 시점에서 은소저와 나 둘이 모두 청죽관을 비워도 되겠소? 아직 인선에 관해 어디에도 전달한 바 없으니, 기실 은 소저 이름을 적어 넣기만 하면 되는데 정말 그걸 원하오?”
“…….”
“추진 중인 기숙사 개선사업부터가 소저가 손을 떼면 개판이 될 것이오, 한눈팔면 코 베어 가는 게 목수들 아니오? 채작진을 익히는 과정에서 보여준 통솔력을 봐도 그렇고, 은 소저가 아니면 맡길 사람이 없소.”
“진 회장님이….”
“경룡이 형은 다 좋은데 소저랑 나한테 있는 섬세함이 없잖소?”
- 지독함이겠지.
“…생각해 보시오. 은 소저랑 내가 빠진 청죽관을. 작년까지의 청죽관 아니오? 거기서 생긴 좀이 양금표 같은 위인이고.”
“…진짜 밉다.”
“음?”
“엄청 섭섭했는데. 또 안 섭섭해졌어요. 언 공자. 말 엄청 잘하는 거 본인도 알죠?”
뭐, 긴말은 여기까지.
은하연은 나름대로 내 인선을 납득한 것 같았고.
하성이 녀석에게 너무 쓴소리만 한 것 같아 조금 걸리긴 했지만.
녀석에게 돌려줄 격려는 말보다는….
‘이게 낫겠지.’
나는 당옥기에게 빌려줬던 때를 제외하면 항상 지니고 다니던 빨간모자를 하성이 녀석에게 내주며 입을 열었다.
“믿겠다.”
* * *
초유의 발표회까지 거쳐 뽑힌 산서행 대민지원단.
그 대민지원단이 여정을 출발하는 날이 되었다.
대민지원이라는 게 천하를 살피고 백성을 돕는 이른바 협객의 일을 행하여 보자는 취지로 행해지는 행사였기에 정무학관에서는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는 행사였다.
하여, 본래라면 학관에 재학 중인 모든 생도가 각지로 흩어지기 전에 총장님의 격려 말씀을 들으며 다 같이 의지를 다지는 시간을 가졌을 터였으나.
이번에는 어수선한 시절 때문에 보안에 초점을 맞추고자 그러한 행사는 열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청죽관 생도들은 나름의 배웅식을 하게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언용운이라는 녀석이 여정을 출발하는 당일 아침까지 전체 수련과 합격진 연습에 참여하여 쪼아대는 것을 보고.
“더 빨리 움직여야죠! 발 보입니다! 발 보여요!!”
돌아가는 사정을 대강 아는 명태성이 자연스럽게 배웅할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자, 이쯤 하지!”
“수고하셨습니다!!!”
“그래. 다들 수고했네. 언용운 생도가 오늘 산서로 간다지? 한데 걱정이 참 많아 보이는군. 떠나기 전에 다른 생도들을 향해 한마디 하도록 하게.”
“아. 감사합니다, 명각주님.”
그런 명태성의 배려에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언용운이 입을 열었다.
“방금은 수련 중이라 으레 그래왔듯 목소리를 높였던 겁니다. 제가 걱정을 왜 하겠습니까? 저와 선도부장이 잠시 자리를 비우더라도 스스로와 청죽의 이름을 갈고 닦아주실 것이라 굳게 믿겠습니다.”
그런 언용운의 음성에 그와 따로 나눈 대화에서 ‘제가 믿을 사람은 경룡이 형뿐입니다.’ 소리를 들은 진경룡은 가만히 고개를 주억였다.
‘나만 믿게.’
하나 진경룡은 알지 못했다.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사실 그와 비슷한 말을 듣고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 후배! 걱정 붙들어 매게.’
‘걱정하지 말고 잘 다녀오세요. 언 공자.’
‘용운형님. 잘 다녀오십쇼. 이 적모는 제가 잘 맡아두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청죽관은 저마다 비장한 얼굴로 언용운을 배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