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137화 (137/444)

제137화. 뜻밖의 초대 (1)

청죽관 생도들의 배웅을 뒤로한 나와 정현 그리고 우소릉은 각자 가볍게 세신을 마치고 학관에서 준비해준 여행복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여행복이라고 해서 거창한 것은 아니었고.

쉬이 구할 수 있는 갈색 염료로 물을 들인 싸구려 무명 무복의 배판에 남곤표국(南昆鏢局) 이라는 글귀를 새긴 표사복이었는데.

‘신분을 숨기기 위한 잠행복이니까. 너무 튀면 안 되긴 하지.’

이 잠행복은 정무학관이 이번 산서행 대민지원에서 안전을 기하기 위한 조치 중 하나였다.

학관에 적을 두고 있는 교직원과 생도들, 그리고 학관 덕분에 먹고 사는 지역민들과 그들의 친지들.

그 모든 사람의 입을 막을 수는 없기에 완벽한 보안 유지는 애초에 불가능했다.

‘그러니 표행단으로 위장을 하는 약간의 변주로 추적을 어렵게 하는 거지.’

생활감이 묻어나는 표사복에, 남곤이라는 저 멀리 광동성의 지명까지, 나름대로 위원회의 교수님들이 신경들을 많이 쓴 게 보였다.

아무튼, 그렇게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고 있으니.

먼저 환복을 마친 소릉이 녀석이 입을 열었다.

“언형? 정현도장? 보시기에 어떤지요? 입관시험에 응시할 때만 해도 정무학관 졸업장만 따서 이런 표국 같은 곳에 적을 두고 안정적인 삶을 사는 게 꿈이었는데 어울리나요?”

무림에서 함부로 택해선 안 되는 직업 중 하나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는 표사가 안정적?

‘바이어…. 아니, 여기식으로는 의뢰인들이라고 해야겠지? 아무튼 그런 양반들 비위 맞추랴, 통행세를 뜯어가려 하는 산적 놈들 비위 맞추랴.’

그러다 수틀리면 목숨 걸고 한판 떠야 하는데?

‘…음. 하기야 소릉이네 가업에 비하면 안정적이긴 한가?’

정무학관의 졸업생 신분이면 꼴등으로 졸업해도 중형 이상의 표국에 표두급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봉급도 꼬박꼬박 나올 것이고.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는 하지만, 그래도 정처와 돌아갈 곳이 있으니까?’

가만있어봐.

근데 소릉이 녀석에게 표행을 맡겼다간, 여차하면 표물을 내던지고 도망을 갈 것 같은데?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느라 잠시 턱을 만지는 사이.

풀이 죽은 소릉이 녀석의 입이 먼저 열렸다.

“어리숙해 보이나요?”

“아니. 너는 나름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소릉이 녀석의 기를 세워주기 위해 하는 빈말은 아니었다.

“좀 어리바리해 보이긴 해. 근데 보통 이런 표행단에는 신입표사도 한 명쯤은 끼어 있기 마련이다.”

하니 소릉이 녀석의 변복은 오히려 그럴싸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사실 문제는 소릉이가 아니라 정현 쪽이었다.

“문제는 소릉이가 아니고 너다. 정현.”

“…예? 빈도 말씀이십니까?”

“그래. 변복 중인데 태극 문양이 새겨진 영웅건은 왜 쓰는 거냐? 그 옆에 매듭도 너무 정갈해. 세상에 어떤 표사가 그렇게 매듭 모양을 딱딱 잡아서 옷을 입냐? 일하기 싫어 죽겠는데?”

“아. 습관이 돼 놔서.”

“영웅건은 당장 벗어서 이걸로 대신하고. 그 옷 매듭도 좀 대충대충 매.”

“예!”

“그리고….”

“빈도가 또 잘못한 것이 있습니까? 말씀해 주십시오. 옛 선현께서 이르시길 자신의 허물을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말씀해 주시면 고치겠습니다. 또 잘못 걸친 옷이 있습니까? 기탄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있지.

있고말고.

“옷을 잘못 걸친 건 아니고. …쓰흡. 등뼈가 잘못됐는데?”

“…예?”

“너무 꼿꼿해. 짝다리 좀 짚어봐.”

그런 내 말에 허리춤의 사부님께서 한마디를 해오셨다.

- 자세가 바른 것을 두고 등뼈가 잘못됐다고 하다니…. 우리 제자 녀석은 표현이 참 고급져.

“…이, 이렇게 말입니까?”

그리고 정현은 쭈뼛거리며 짝다리를 짚었다.

‘이거 표물 역할을 제갈설지가 하기로 했었는데 바꿔야겠는데?’

아무리 봐도 광동 출신 표사가 짝다리를 짚었다기보다는 그냥 엉덩이뼈와 다리뼈 사이에 탈골이 온 정현이었다.

“역할을 바꿔야겠다. …저번에 보니까 정현 너랑 남궁윤이 체격이 맞던데. 소릉아.”

“예, 언형.”

“지금 당장 연구실에 있는 당옥기 데리고 향란관에 가서 남궁윤이 가진 옷 중에 가장 재수 없어 보이는 것으로 두세 벌 정도 받아와라.”

그런 내 말에 우소릉이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근데 남궁형이 옷을 주실까요?”

“소릉이 너랑은 이래저래 면도 텄고, 같이 화생방도 한 사이 아니냐. 아마 박대는 안 할 거다. 멧돼지한테 엉망 됐을 때 우리도 옷 줬지 않느냐고 말하면 순순히 내놓을 거다.”

“…어. 근데 그때는 주신 게 아니라 판매하신 거 아니에요?”

“그게 그거지.”

“아하. 그게 그거였군요.”

“그래.”

“예!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근묵자흑을 중얼거리시는 사부님의 음성을 무시하며.

정현에게 소릉이가 옷을 가져오면 갈아입고 오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변동사항을 전달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기 위해 집결지인 학관의 서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정무학관의 서문은 본디 학관에서 소비되는 물자들과 쓰레기들이 드나드는 곳이었다.

하여, 행정처의 직원이나 호위부의 무사가 아니라면 교직원이고 생도들이고 보통 얼씬도 하지 않는 곳이었다.

하나, 오늘만큼은 표두로 분한 노삼 교수님을 필두로 표사로 분한 천장호와 언용명.

그리고 표물.

그러니까 호위대상의 역할을 하기 위해 궁장을 갖춰 입은 제갈설지와 멀찍이 남곤표국이라는 깃발이 내걸린 두 대의 마차가 보였는데.

그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어?”

- …어?

모든 파천검문 사람이 입을 떡 하고 벌리고야 말았다.

우리의 입이 벌어진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각각 표두와 표사로 분하기 위해 노삼 교수님과 천장호가 목욕을 하고 머리를 빗어 올린 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거지새끼들이 멀끔해졌어?

생도들은 학칙상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청결 의무가 있었기에, 천장호는 머리 정도는 감고 다녔어서, ‘얼굴이 좀 깨끗해졌구나.’ 하는 수준이었지만.

노삼 교수님은 워낙에 상거지꼴을 하고 다니셨던 분이라 말 그대로 ‘누구세요?’ 소리가 목 끝까지 차올랐다.

- 근데 좀… 개 같지 않느냐?

‘…큽. 아니, 사람한테 개 같다뇨? 거, 말씀이 너무 심하신 것 아닙니까 사부님?’

- …욕을 하는 것이 아니잖느냐. 말 그대로 개. 그러니까 송사견(松狮犬) 같지 않냐 나만 그런가?

송사견은 미래에는 차우차우라고 부르는 품종의 개였는데.

듣고 보니 좀 그렇긴 했다.

씻고 정리하기 전의 노삼의 봉두난발과 수염은 사자(獅子)의 갈기 같은 야생의 느낌이 있어서 좀 나름대로 맹수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한데 머리와 수염이 정리되어 거지미(?)가 걷히니 솔직히 차우차우나 불도그 같다는 생각이 나긴 했다.

‘…웃으면 안 된다.’

나는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곧바로 입술을 씹으며 사부님께 볼멘소리를 전했다.

‘그른믈씀흘 흐슬뜨는 끔쁙이즘 크스르그 흐쓸튼드요.’

- 그런 말씀을 하실 때는 깜빡이 좀 켜시라고 했을 텐데요? 그러기야 했지, 근데 정작 깜빡이가 뭔지를 안 가르쳐주지 않았더냐?

그런 내 모습에 노삼이 목을 긁으며 입을 열었다.

“웃기냐? 웃어도 된다. 제갈설지 요것이랑 언용명이 저거 다 웃더라.”

그리고 천장호의 엉덩이를 차며 말을 맺었다.

“장호 이 새끼가 제일 크게 웃었고!”

“앜! 웃긴 걸 어떡합니까!”

그 모습이 너무 웃겼고, 억지로 웃음을 참으려다 보니 눈물이 찔끔 나왔다.

“큽.”

그런 내 모습을 보며 급격하게 시무룩해지는 노삼 교수님.

“…한데, 언가 네놈까지 웃는구나.”

하지만 나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 줄 아는 남자였다.

“이건 우는 겁니다, 교수님.”

“가, 갑자기?”

“교수님께서는 오의파, 그러니까 거지들의 본분을 고수하는 계파의 차기 수장으로 거론되는 분 아니십니까. 제자들을 안전하게 인솔하겠다고 그 신념을 잠시 접으신 부분에 감동했습니다.”

- …주둥이는 확실히 화경이야. 아니, 그 이상인가?

그런 내 말에 허리춤의 사부님께서는 뭐 저런 소리를 하셨고.

노삼 교수님은 멋쩍었는지 천장호의 엉덩이를 더 강하고 빠르게 걷어찼다.

“본 좀 받아라. 본 좀 받아.”

“앜! 아악!”

뭐, 아무튼.

그런 상황 속에서 나는 정현과 제갈설지가 맡은 역할을 바꾸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전했다.

노삼은 고개를 주억이며 제갈설지의 의사를 물었다.

“하기야. 정현이 그놈이 좀 뻣뻣하긴 하지. 제갈가야 네 생각은 어떠냐?”

“저는 좋습니다. 개인적으로 표사나 상행단의 장궤들이 하는 일을 해보고 싶기도 했거든요. 용운 님의 의견대로 하시지요? 교수님께서 결정을 내려주시면 저도 의복을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금방이에요.”

“그럼 그렇게 하자!”

“사실 이미 그렇게 하라고 해두고 왔습니다.”

“그러냐? 그럼 잘했다!”

그처럼 사소한 곡절이 있었지만, 후속 조치는 깔끔하게 이루어졌고.

“이랴!”

표행단으로 분한 우리를 실은 마차가 북쪽으로 길을 잡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우리를 싣고 내달리기 시작한 두 대의 마차는 순식간에 호북성을 넘었다.

그리고 하남성의 관도에서는 그야말로 쾌조(快調)란 말을 붙여도 좋을 정도로 북상을 거듭했다.

‘하남성에서는 그야말로 거리낄 것이 없었지.’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여타 무협지에 비해 그 위상이 떨어진다고 하나 어쨌든 백도무림의 합의체인 무림맹.

십만 거지들을 움직일 수 있는 개방의 총타.

백도무림의 태산북두를 자부하는 숭산의 소림사.

지난 살수들의 습격 사건이 하남성에 위치한 백도무림을 떠받치는 세 기둥의 자존심을 동시에 긁은 꼴이 되는 바람에 이래저래 살피고 다니는 사람들이 늘어나니.

‘반대급부로 사람들이 몸을 사리는 현상이 발생한 거지.’

이런저런 구실로 통행료를 받아갔을 자들은 물론이고, 바가지를 씌우려던 상인이나 지나는 행단이 있으면 한몫 잡으려 드는 마을같은 곳 등등.

모두가 몸을 사리는 효과가 발생한 것이다.

‘이런 것도 전화위복으로 쳐야 하나?’

뭐, 아무튼.

그 덕분에 우리는 별일 없이 하남성을 가로지를 수 있었다.

어찌나 별일이 없었는지.

내 제안에 따라, 우리 중에 마차 모는 법을 모르는 나와 언용명 그리고 제갈설지가 돌아가면서 마차 모는 법을 익힌 것이 제일 큰 별일이었다.

하나, 그처럼 유람하듯 마차가 나아간 것은 딱 하남성까지.

낙양의 북쪽에 자리 잡은 맹진항에 이르러 마차를 실어 나를 수 있는 배를 찾아 싯누런 황하를 건너는 것까지도 좋았다.

하나, 황하를 넘어 산서성에 이르자.

슬슬 애를 먹이는 자들과 통행세를 두고 생떼를 쓰는 산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하남성에서는 손쉽게 장궤 역할을 했던 제갈설지의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은자 한 냥을 드릴게요.”

“그거로는 안 되지. 저쪽 길이 무너져서 토사를 치우려면 인건비가 좀 들어서 삯이 올랐으니 넉 냥을 내슈.”

“미치셨나요? 아까부터 자꾸 제시를 하라기에 넉넉잡아 한 냥을 드리겠다고 한 건데, 넉 냥을 달라고요? 이거 완전 순 날강….”

“뭐? 미쳤냐고? 그리고 방금 날강도라고 하려고 했지?! 허! 이 년이 녹림 무서운 줄을 모르네?”

한데 가만히 보고 있기엔 좀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정작 우리 장궤님이 얼마나 무서운 줄 모르는 건 제 놈들 같은데.”

그런 내 말에 곁에 있던 소릉이 녀석이 맞장구를 쳤다.

“날강도도 맞으면서! 흑도에도 도가 있거든요! 저런 사람들이랑 비교하면 도둑한테 실례에요!”

그런 소릉이 녀석의 말에 다른 녀석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와중에.

두 대의 마차 중 뒤쪽 짐마차의 고삐를 잡고 있던 천장호가 하품을 하며 입을 열었다.

“하암!!!! 근데 제… 아니 우리 장궤님 완전 헛똑똑이 아닙니까? 어제 지나왔던 산채에서도 한참 만에 통과해도 좋다는 말을 받아 오더니, 오늘은 어제보다 더 오래 걸리네요. 이러다 해지겠네! 무림맹에 갔을 때 일을 보신 은장궤님은 일 처리가 그냥 유수(流水)와 같았는…. 방금 장궤님이랑 제가 눈이 마주친 거 같은데, 이거 기분 탓이겠죠? 제 말 들렸을까요?”

“들렸을걸?”

“헉. 용운이 형님. 저 이제 어떡합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뭐, 천장호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제갈설지가 강호행을 많이 해본 것은 아니라, 이런 식의 일 처리가 미숙한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이건 좀 이상했다.

‘은자 한 냥이면 저쪽에서 들먹이는 구실을 고려하더라도 통행세로는 충분한 금액인데?’

돌이켜보니 일부러 제갈설지의 속을 긁어대다가 녀석이 발끈하니까 건수를 잡았다는 식으로 뻗대는 느낌이었다.

‘뻗대는 이유가 심지어 돈이 목적도 아닌 거 같고.’

그에 나는 노삼 교수님을 향해 입을 열었다.

“뭔가 이상한데요, 표두님?”

“네 녀석이 보기에도 그렇지?”

“예.”

“권주를 마다하겠다니 별수 없지, 누런 아가리에 벌주를 때려 부어 주는 수밖에.”

그때였다.

그렇게 노삼이 소매를 걷어붙이는 그때.

산적 놈들이 목책을 세워 놓은 길 너머에서 흙먼지가 일며 몇 기의 인마가 달려온다 싶더니.

구렛나루가 희끗한 곰 같은 풍채의 장년 사내가 이쪽을 향해 입을 열었다.

“광풍투개. 오랜만이오? 아, 이제는 작풍월개라고 해야 하나?”

음.

흑도, 그것도 녹림의 고수 중에 노삼을 저렇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몇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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