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8화. 뜻밖의 초대 (2)
초대한 바 없는 손님의 등장에.
돌아가는 게 심상치 않다는 판단을 내린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뒤쪽에 있는 짐마차의 고삐를 쥐고 있던 천장호는 쓰흡 소리를 내며 입을 열더니.
“우리 표두님을 알아보면서 저렇게 대할 수 있는 산적은 잘 쳐줘야 녹림왕…. 노, 녹림왕?”
어느 순간 헉! 하고 눈을 키웠다.
- 녹림왕? 휘주에서 단강구로 올라오는 길에 마주했던 저질 관장마황조 놈들이 노리던 자가 저 자란 말이냐? 오호? 그놈들이 워낙 싸구려 같아서 비슷한 저질을 상상했었는데, 풍기는 기도도 그렇고 말라붙은 피 냄새도 그렇고 제법 한가락 할 놈 같구나?
그 소리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녹림왕이라.’
내가 원작에서 읽은 녹림왕은 이 시점에 등장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외형의 묘사 또한 눈앞의 사내와 달랐다.
‘얼굴도 몸도 마치 표범 같다는 묘사가 나왔었지.’
하나, 눈앞의 사내는 아무리 봐도 표범보다는 곰에 가까웠다.
‘체형 자체가 저렇게 타고난 거 같으니, 간헐적 단식 같은 것을 통해 곰이 표범으로 거듭났을 리는 없고.’
원작에 나온 녹림왕의 전대(前代)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용명이 녀석이 내 옆에 붙어섰다.
“유사시를 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형님.”
동시에 소릉이 녀석도 마른침을 삼키며 내 옆에 붙어섰는데.
“저, 정말로 녹림왕인 걸까요?”
그러자마자 앞쪽 마차의 차창이 열리며 남궁윤의 비단옷을 빌려 입고 있던 정현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언 표사님? 저도 준비를 해야 합니까? 그렇다면 이 거추장스러운 장포부터 벗는 게 좋겠기에 여쭙습니다.”
“어. 광풍투개 소리가 나왔으면 우리를 알고 왔다는 소리다. 준비해.”
“옙.”
그리고 통행세를 협상하기 위해 저편에 나가 있던 제갈설지도 움직였다.
그녀는 은자가 들어있던 주머니의 끈을 당겨 꽉 묶더니.
자신과 실랑이를 하고 있던 산적 놈의 옆통수를 후려쳐 기절시켰다.
빡!!!!!!!!
“엌!”
그런 제갈설지의 돌발행동에 이쪽저쪽 할 것 없이 잠시 입을 벌렸는데.
팟!!
그사이 급히 걸음을 물려 이쪽으로 돌아온 제갈설지가 자신의 행동을 해명했다.
“한 명이라도 줄여놓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혹시 몰라서 힘 조절은 했습니다. 죽이지는 않았어요.”
납득이 가지 않는 행동은 아니었다.
상대방의 당황을 유도해 안전하게 몸을 빼낸 영리한 행동이었고.
‘조금 전에 쌓인 울분도 풀었나?’
그러면서도 상대와 대화가 통할 가능성을 고려해 생명은 빼앗지 않았으니까.
그런 제갈설지의 행동에 노삼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잘했다.”
나도 한마디를 건넸다.
“고생했소.”
그러는 사이 뒷짐을 지며 몇 걸음을 앞으로 옮긴 노삼이 목책 너머의 대여섯 기의 인마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산적 두목 도중광이 아니냐? 네가 여기는 어쩐 일이냐?”
그런 노삼의 말에 두 사람이 입을 열었으니, 도중광이라 지칭되는 사내와 함께 말을 몰고 온 민머리 산적이었고.
“말을 조심해라! 어느 안전이라고 일흔둘 녹림채 주인의 존함을….
“산적 새끼들이 안전이니 존함이니 염병들을 떨고 있네! 그리고 제 머리털도 조심히 관리를 못 한 새끼가 감히 조심이란 소리를 입에 담지 마라!”
“뭣이?!”
다른 한 명은 민머리 산적이 괜히 팔결의 거지를 상대로 입을 열었다가 본전도 못 찾는 사이, 나를 향해 입을 연 제갈설지였다.
“실제로 본 적이 없어서 긴가민가했는데 도중광이면 녹림왕이 맞는 것 같은데요?”
저쪽에서 우리를 알아본 이상 표행인 척을 고수할 필요는 없었다.
“나도 노삼 교수님을 지칭하는 어투나 풍기는 기도에서 그러지 않을까 하고 있었소.”
“녹림왕이 여기를 왜 왔을까요? 낙양 인근을 지날 때 맹의 군사부에서 얻은 정보에 의하면 가장 가까운 위협이 산적왕이긴 하나 근래 반기를 든 산채들이 많아서 여력이 없을 것이라고 했잖아요? 그거 진압하기도 바쁠 텐데, 왜 우리한테?”
그런 제갈설지의 말에 내가 입을 열려는데, 뒤쪽에 있던 천장호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아까 제가 헛똑똑이 소리를 했는데, 그게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지금도 보십쇼. 나타났으니까 나타난 거지, 이미 벌어진 사실을 머리 아프게 왜 고민하고 그러…. 어, 제갈소저?”
“…….”
그리고 제갈설지의 손에 들려있는 전낭이 부들거리기 시작했다.
“…그, 그러니까 나는 아까 헛똑똑이 소리를 사과하려고 말을 꺼낸 건데, 염병 또 말했네?”
나는 이쪽의 전력도 한 명 줄어드는 사태를 막기 위해 산적의 온기가 남아있는 전낭을 빼앗으며 입을 열었다.
“그 헛똑똑이 소리 너무 신경 쓰지 마시오. 소저는 단순히 경험이 부족한 것일 뿐이오.”
“…….”
“누구나 그런 시절이 있는 거요. 나도 그랬고. 맹에 계실 대군사님도 그런 시절이 있으셨을 거고, 천장호 저 친구도 처음 동냥을 했을 때는 쪽박을 무수히도 깨 먹었을걸?”
“오. 그걸 어떻게? 맞습니다. 그래서 당시 구역을 관리하던 왕초새끼한테 뒤지게 맞고 그랬죠.”
“후.”
그에 제갈설지의 입에서 낮은 숨이 새어 나왔고.
나는 그 숨을 신호 삼아 조금 전에 하려던 이야기를 꺼냈다.
“아무튼. 내 경험에 의하면 보통 이렇게 약조 없이 거물이 튀어나오는 경우엔 저쪽에서 먼저 뭐라 뭐라 요구사항을 말을 하곤 했소.”
아니나 다를까.
도중광은 씩씩거리는 부하들에게 손을 휘휘 저어 진정시키고 노삼을 향해 입을 열었다.
“멀끔한 모습은 처음 봐서 긴가민가했는데 입담을 보니 그 노삼이 맞구만. 슬슬 저녁때 아니오? 밥이나 한 끼 합시다.”
* * *
이 시대의 산적은 나름대로 사업적인 측면이 있었다.
하여 표국이나 상단의 인사가 채주들의 초대를 받아 산채를 방문하는 일도 드물지 않게 있었다.
하나, 녹림왕쯤 되는 양반이 노삼쯤 되는 양반과 정무학관의 생도들을 산채로 초대하는 일은 상당히 황당한 일에 속했다.
‘그렇다면 저 제안 뒷면에는 진짜 제안이 따로 있다는 이야긴데?’
뭐, 아무튼.
어쨌거나 일 자체는 황당한 일에 속했기에 동기들은 저마다 ‘왜 저러는 걸까요?’ 하는 표정을 지었고, 노삼 교수님은 팔짱을 끼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왜 산적 놈들이랑 밥을 먹느냐? 입맛 떨어지게.”
“입맛이 없으면 밥맛으로 먹으면 되지. 이 위에 있는 산채의 채주가 나랑 형님 동생 하는 사이라 잘 아는데, 이곳 진성 부근이 제법 부자 동네라 통행세가 아주 쏠쏠해서 산채의 곳간에 좋은 술과 먹거리들이 제법 있소.”
“알게 뭐냐.”
“내가 해코지라도 할까 봐 그러시나?”
“당연히 그런 생각도 하고 있지.”
“허. 악연도 인연이라 했소. 이렇게 사람의 호의를 물려 섭섭하게 할 거요?”
“미친놈. 시커먼 도적놈이 섭섭을 논하네.”
“해코지를 할 거였으면 애초에 이런 식으로 권유를 하지도 않았소. 그리고 내가 인의를 좀 희미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광풍투개 당신에겐 목숨 빚도 있고, 또 얼마 전에 당신 제자에게 나름대로 도움을 받은 일도 있는데, 허튼 수를 쓸 정도로 파렴치는 아니오.”
“내 제자 중에 산적놈을 도운 새끼가 있다고?”
“당신 청죽관 사감 아닌가? 강남신협이라는 친구가 청죽관에 들어갔다던데? 뭐,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으나 그 친구가 주인을 물려고 하던 산채 하나를 밟아준 일이 있소.”
“언가야. 강남신협이면 하성이 그 녀석 아니냐?”
물어오는 노삼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준 나는 원작에서 글로 접했던 다음 대의 녹림왕과 조금 전 제갈설지와 나눈 대화들을 상기해 보았다.
‘원작에서 녹림왕이 등장했던 시기는 지금보다 훨씬 뒤였다.’
녹림마왕(綠林魔王) 야율보.
그리고 놈은 마교의 인물이었다.
‘군사부에서 내준 정보에 의하면 근래 녹림왕에게 반기를 드는 산채들이 많다는 정보가 있었지.’
확실치는 않지만 녹림왕 도중광이 노삼과 나누고 싶어하는 이야기에 뭔가 실마리가 있을 것도 같았다.
‘개뿔도 없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숙박비랑 밥값은 굳겠지.
생각은 여기까지.
나는 노삼 교수님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교수님? 어찌하실 요량이십니까?]
[글쎄다. 놈과는 인연이 좀 있는데, 말 몇 마디만 주고받고 물러난 적도 있고, 죽도록 싸운 적도 있다. 너희들이 있어서 솔직히 고민이다. 저 산적 두목 놈이 녹록한 놈은 아니거든.]
[그럼 가서 무슨 소리를 하나 들어나 보시죠? 저 사람 입에서 나올 이야기야말로 개방에서도 구하기 힘든 정보 아닙니까?]
[흠.]
[낙양 근처를 지날 때 군사부의 사람이 찾아와 주고 간 정보에 의하면, 녹림이 어수선하다고 했지않습니까?]
[그랬지.]
[교수님이 산서에 오신다는 소식에 수하 몇만 데리고 부리나케 온 모양이니, 아마 녹림왕이 이끌고 온 전력은 저게 다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 산서행 조원들은 저마다 제 몸 하나 뺄 경신술을 갖추고 있습니다. 함정이다 싶으면 도망치면 됩니다.]
[문제는 밤이다. 밥을 먹는다 어쩐다 하다 보면 해가 질 수가 있다. 산중에서 낮에 몸을 빼는 것과 밤에 숲에서 몸을 빼는 것은 천지 차이야. 그것을 알고 하는 이야기냐?]
[당연히 압니다.]
알다마다.
아니, 그냥 아는 게 아니라.
해가 지는 것은 오히려 반길 일이었다.
‘밤은 가장 오래된 내 벗이니까.’
* * *
노삼은 내 제안을 받아 들였다.
그렇게 우리는 앞서 걷는 도중광을 따라 진성채라 부르는 산채로 이동했다.
근방이 부유해서 수입이 쏠쏠하다는 도중광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진성채에는 산채치고 깔끔한 건물과 제법 공을 들인 목책들이 있었는데.
노삼은 도중광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가장 높은 언덕에 자리한 산장 안으로 들어갔고.
“허튼짓하는 새끼 보이면 굳이 참지 마라?”
“저 그런 거 못 참는 거 아실 만큼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도 우리대로 자리를 잡았다.
산채에 발을 들이긴 했지만, 산적 놈들을 완전히 믿는 것은 아니었기에 산 아래가 내려다보이는 입구 근처에 자리를 잡았는데.
“제기랄. 우리 같은 졸병들은 채주 생일날에나 먹는 소고기를 정파 놈들한테 대접하고 앉았네.”
우리를 극진히 대접하라는 녹림왕의 명을 받은 산적들이 식탁과 의자 그리고 음식을 구시렁거리며 차례차례 날라왔다.
“녹림왕 저 양반이 우리한테 해준 게 뭔데?”
“야. 녹림왕이 해준 게 뭔가가 중요한 게 아니야. 그딴 말을 하다가 잘못 걸리면 뒈진다는 게 중요한 거지.”
“염병. 때려치우면 그만 아닌가?!”
“억삼이 이놈 새끼 이거 또 병 도졌네. 그래 때려치우면 그만이긴 하지. 근데 때려치우고 뭐할 건데? 굶어 뒈지려고? 농사? 그것도 땅이 있어야 하는 거다?”
“수로채로 가면 되지! 내가 이래 봬도 왕년에 미역 좀 감았다.”
“등신이냐? 여기서는 쫄병이지만 거기 가면 쫄쫄병이야! 무공도 간신히 삼류에 걸친 놈이?!”
한데, 가만히 듣고 있다 보니 제법 흥미가 생기는 이야기가 내 귀에 걸렸다.
“나도 알지. 근데 무공 수준을 한방에 몇 계단을 확 올릴 수 있다면?”
“…꿈꿨냐?”
“얼마 전에 채주 심부름한다고 나랑 홍식이 그놈이랑 둘이서 태원에 다녀왔잖아!”
“근데?”
“거기서 예전에 나랑 면산채에서 졸병질 하던 놈을 우연히 만났는데, 이놈이 진짜 약골이었거든? 다른 건 몰라도 그 새끼보다는 내가 오래 살 거라는 확신이 들 정도로 말이야. 근데 몇 년 사이에 사람이 몰라보게 바뀌었더라고?”
뭐?
무공 수준이 확 올라가?
그리고 태원?
“기연이라도 얻었나?”
“그래서 나도 물었지. 그랬더니 글쎄….”
그때였다.
수적(水賊)으로 이직 예정인 산적의 입에서 딱 중요한 이야기가 나오려 하는 이때.
“우리 같은 놈들한테 기연이 왜 돌아와? 너는 억삼이 새끼가 약장수한테 홀린 이야기를 왜 진지하게 들어주고 있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저기 저 소저 좀 봐라! 정무학관 생도라던데 분위기가 다르지 않냐?!”
산적들의 대화와 음충맞은 웃음이 영 좋지 않은 곳으로 새고야 말았다.
“그, 거기 계신 소저?”
“……?”
“그거 역용한 거요? 역용한 것도 그렇게 아름다우신데 본래 얼굴은 어떠실까나?”
“확실히 여름만 되면 뛰쳐나가고 싶어서 지랄하는 억삼이 새끼 이야기보단 확실히 이쪽이 궁금하긴 하네. 우리가 이렇게 진수성찬을 대접하는데 좀 풀어보시오. 귀한 얼굴 구경 좀 합시다. 흐헤헤.”
한데, 제갈설지나 다른 녀석들은 이런 상황에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서 그런지 눈앞에서 얼쩡거리고 있는 녀석들을 방치하고 있었다.
‘이해는 간다.’
호랑이굴에 들어앉아 있는 와중에 노삼 교수님은 녹림왕과 대담을 하러 들어가셨고.
이런 때엔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잘 안 설 것이다.
‘그럼 내가 알려줘야지.’
나는 지체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식탁 위에 올려져 있던 술병을 거꾸로 들어 파천의 내력을 감은 뒤.
음식을 나르고 있던 산적 중 헛소리를 지껄였던 자식들의 옆통수를 차례대로 냅다 후렸다.
“뭔 놈의 산채에!”
빡!!!!
“컥!”
“이렇게 큰 두더지 새끼들이 있지?!”
빡!!!!
“엌?”
그렇게 음충맞은 산적 두 놈을 뻗게 만든 나는 방금 태원 이야기를 중얼거렸던 억삼이라는 산적을 향해 검지를 까딱였다.
“거. 방금 하던 이야기 이리 와서 자세히 좀 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