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도(道)둑들 (1)
도중광이 내어준 통행패는 생각보다 쏠쏠했다.
그도 그럴 것이.
본디 산서성의 남쪽 관도, 그러니까 하남성이나 섬서성으로 통하는 방면에 놓인 관도는 황하의 지류와 인근의 산세의 영향으로 굽이굽이 돌아가게끔 되어 있었다.
“목책을 치워라!”
하여, 본래의 여정대로라면 길 위에서 허비했을 시간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녹림산장의 글자가 새겨진 통행패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니 다른 지방의 우리 형제들인 모양이다!”
내보이기만 하면 산적들이 길을 터주는 통행패가 손에 있으니.
굳이 관도를 고집할 필요 없이 질러갈 수 있게 되어 시간이 많이 절약되었다.
‘소소한 통행세 절감은 덤이고.’
그런 통행패의 효과에 남곤표국의 표사로 분한 동기생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해왔는데.
가장 먼저 길목을 틀어막고 있던 산적에게 다녀온 제갈설지가 한숨을 내쉬었고.
“후. 이거 이렇게 쉬운 거였나요?”
뒤쪽 마차의 고삐를 쥐고 있던 천장호는 너스레를 떨었으며.
“쉬운 게 아니라 용운 형님이 난사람인 거지요. 토벌 없이 산적한테 돈을 뜯어 온 것만 해도 살다 살다 처음 봤는데, 저 통행패는 산중에서는 단서철권(丹書鐵券)이 따로 없네. 이봐, 친구. 자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용명이 녀석은 그 옆에서 우물거리며 죽을 맞췄다.
“동감이네. 우리 형님이지만 내가 모르는 면모가 너무 많으셔서 알면 알수록….”
그리고 소릉이 녀석은 내가 모는 마차의 차창을 열고 안에다 물음을 던졌다.
“정현 도장? 단서철권이 뭔가요?”
그에 정현이 골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천자께서 공신들에게 하사하는 증표로 면책특권이 있다 보면 됩니다. 저희도 녹림왕에게 받은 패를 써먹고 있으니, 어째 상황이 비슷하긴 한데 산적들한테 형제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좀 묘하긴 합니다.”
얼결에 나온 말이었지만, 정현의 말에는 사파와 손을 잡아도 되는가에 관한 고민이 묻어 있었다.
‘이해는 간다.’
정현의 본래 성정과 녀석이 도중광과 대담을 나눈 자리에 함께하지 못했음을 고려하면 충분히 할 법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런 오해를 하게 뒀다간 결정적인 순간에 내 앞을 막아설 수도 있는 녀석이 정현이지.’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우리가 녹림왕의 하수인이 된 게 아니야. 굳이 따지자면 녹림왕이 우리에게 숙이고 들어온 거라 봐야지.”
“그렇습니까?”
그리고 대담 중에 나눴던 이야기 중 일부를 전해주었다.
“그래. 산적 중에 한 줌 정도는 운명에 휩쓸려 산으로 들어왔다는 말을 하시면서 진성채에서 목격한 괴이한 현상의 근원을 해결해 달라는 부탁을 하셨으니까. 이 통행패는 그 부탁에서 기인한 거고.”
“……!”
“…왜. 또 무슨 도를 찾았는데?”
“저희가 산채에 막 들어가서 자리를 잡았을 때 말입니다. 당시 산적들이 희롱의 말을 던지는 것을 보면서도 저는 이런저런 생각에 선뜻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언 소협께서는 그런 상황에서는 바로 몸을 움직이셨으면서, 또 이런 상황에서는 정(正)의 의미를 너그러이 관조하시니, 갑자기 제 안의 도가 너무도 편협하게 느껴지어….”
더 들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마차의 차창을 닫고 다시금 마차를 출발시켰다.
“목책 다 치웠네. 소릉아, 천장호한테 가서 출발할 거니까 호들갑 그만 떨고 고삐나 쥐라고 말해라. 짐칸에 계신 교수님께도 출발한다고 전하고.”
“예! 언형!”
* * *
녹림왕의 통행패 덕분에 우리는 예상했던 시일보다 한참 빠르게 태원에 도착했는데.
“워! 워!”
붕성(鵬城)이라 불리는 태원의 성채를 드나드는 마차와 인파를 바라보며 허리춤의 사부님께서 한마디를 해오셨다.
- 예나 지금이나 태원은 드나드는 사람이 많다는 것만큼은 변함이 없구나.
‘그때나 지금이나 태원에는 소금과 불 그리고 돈이 있으니까요.’
산서성은 거대한 소금호수들이 있어서 내륙의 소금창고로 불리는 곳이었고.
송나라 때부터 중원의 사람들이 땔감으로 사용해온 석탄의 주요 산지이기도 했다.
그런 소금과 불을 방패 삼고, 고대로부터 이어 내려온 산서상인의 명성과 신용을 무기 삼아 축적한 부가 한데 모이는 곳이 바로 태원이었다.
하니 드나드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 한데 뭔가 좀 어수선하구나.
‘호화스러운 마차나 비단옷을 입은 사람들은 제 외조부인 산서금붕의 생신을 축하하려고 온 사람들 같기는 한데, 그 사람들을 뺀다손 치더라도 확실히 어수선한 감이 있네요.’
글로나 읽었지 기실 나는 태원에 와본 것이 처음이었다.
하나 이건 누가 봐도 어수선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풍경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해괴한 행색을 한 자들이 너무 많았다.
‘딱 봐도 사이비 냄새가 풀풀 나는 가짜 도사.’
술독이 올랐는지 코에 술 고름이 찬 땡중.
의장용 언월도를 짊어지고 얼굴에 금칠을 한 자와 사자춤에 사용할 것이라고 치더라도 모양새가 퍽 해괴한 거대한 탈바가지를 짊어진 자들까지.
때마침 짐마차에서 내린 노삼은 그런 어수선한 풍경을 한 마디로 정의했다.
“개판이구나.”
그에 내 미간이 이 사태의 원인을 고민해 본다고 절로 좁혀지는 이때.
‘…원작에서는 그냥 산서금붕의 생신연 때문에 평시보다 조금 더 붐비는 느낌이라는 식으로만 묘사됐던 것 같은데.’
노삼이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 두 형제의 신분을 밝히거나, 개방의 산서분타에 연락을 넣으면 성내에 빨리 들어갈 수 있지 않겠느냐? 얼른 들어가서 잡놈들을 소탕해야지.”
“잡놈들 소탕해야죠. 한데, 성문에서 시끌벅적하게 입장하면 저쪽에서 무슨 수를 취해도 취하지 않겠습니까? 외람된 말씀이지만 여기서는 빨리 들어가는 것보다 조용히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런 내 말에 제갈설지가 자신의 생각을 보탰다.
“저도 용운 님의 생각에 동의해요. 검문에 걸리는 시간과 저희 앞에 늘어선 마차의 수로 추산하면 대략 반나절 정도를 기다리게 될 것 같은데, 기왕 표국의 이름을 빌렸으니 이 정도는 기다렸다가 은밀히 태원 곳곳을 뒤져보고 나서 용운 님의 외가나 산서분타에 가보시죠?”
“듣고 보니 너희 말이 일리가 있구나. 내 마음이 앞서서 잠시 시야가 좁아졌다.”
노삼은 우리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우리는 그렇게 조용히 태원 성내로 들어간 뒤.
아무 숙소나 하나 잡아 마차 맡겼다.
“교수님은 북문, 제갈소저랑 소릉이는 동문, 정현이랑 천장호는 서문, 저랑 용명이가 남문을 살펴보죠.”
그리고 억삼이라는 산적에게 들은 정보를 토대로 조를 나누어 뒷골목을 돌며 불꽃 문양이 그려진 집들이 있는지 살폈는데.
“내가 눈을 씻고 찾아봤지만, 북문 쪽에는 그런 문양이 없었다. 네놈들은 뭘 좀 찾았느냐?”
온갖 좌도방문을 주워섬기는 해괴한 자들이 태원으로 몰려드는 터라 각종 문양과 부적들이 곳곳에 붙어 있는 가운데 우리가 찾는 문양은 찾을 수가 없었다.
“서문에도 그런 표식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잘 찾아본 거 맞냐? 정현아, 장호 저 새끼가 집중력이 상당히 부족한 놈이다. 만약 나눠서 살핀 거면 저놈 저거 대충 봤을 수도 있어.”
“이번에는 아닙니다! 꼼꼼히 살펴봤다고요!”
“천 소협의 말이 맞습니다. 이중 삼중으로 살폈으니, 혹여라도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냐? 제갈가랑 우가 너희는?”
“동문도 없었어요.”
“예. 소릉 님의 말씀대로예요.”
“언가 너희들은 어땠느냐? 남문에도 뭐가 없었어?”
노삼의 질문에 나는 입을 열었다.
“예. 문양은 찾지 못했습니다.”
“씁. 그럼 이제 어찌한다? 음? 한데 언용명이 너는 표정이 왜 그러느냐?”
찾으려던 문양을 찾지는 못했지만 소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용명이 녀석을 대신해 조금 전에 이야기하려던 탐문과정에서 얻은 소득을 입에 올렸다.
“그건 제가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아무리 살펴봐도 찾는 문양이 없길래 조심스럽게 주변에 탐문이 해봤는데, 그 와중에 산서금붕 그러니까 제 외조부께서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외조부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소득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단순히 내가 빙의자라 산서금붕에게 조손 간의 정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원작의 산서금붕은 이 시기에 건강했어.’
몸도 정신도 멀쩡해서 언용명과 정현의 그릇을 가볍게 시험하는 사건이 있던 것을 기억한다.
‘추계대항전 직전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와서 언용명과 팽소천이 출전 명단에서 빠졌지, 그 바람에 당시 정현이 속해 있던 운매관에 위기가 왔기에 정확하게 기억해.’
당시에는 큰 대회를 앞두고 주요인물들이 이탈하는 것만 안타까워했는데, 직접 이 세상에 들어와 보니 그 사건 뒤에 마교가 있는 것 같았다.
‘어째선지 그 시기가 당겨졌다고 보는 게 맞겠지.’
하여 나는 저마다 ‘저런.’ 혹은 ‘유감이다.’ 같은 소리를 하는 대민지원단 그리고 침울해하는 용명이 녀석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제가 아는 외조부님은 갑자기 노환이 오실 분이 아닙니다.”
그런 내 말에 가장 먼저 용명이 녀석이 맞장구를 치고 나섰다.
“그러고 보니 그렇습니다. 작년에는 형님의 일로 저희 가문이 정신이 없었….”
“괜찮아, 계속해.”
“…예. 형님의 일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직접 뵌 것은 재작년이 마지막이긴 한데. 얼마 전에 어머님께서 서신으로 해주신 말씀으로는 아직도 말단 사환들의 교육을 직접 챙기실 정도로 정정하시다 들었습니다. 너무 갑작스럽습니다.”
그러자 노삼이 곧바로 생각을 틀었다.
“그럼 개방의 산서분타로 가보자. 그놈들이 이런 일엔 빠꼼이다. 나랑 사이가 안 좋긴 한데, 장호 이 새끼를 씻겨서 데려오기까지 했으니, 어떻게 잘 어르고 달래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정보를 토해낼 게다.”
* * *
찾아간 개방의 산서분타에서, 노삼 교수님과 덕근이라는 산서분타주 사이에 가벼운 실랑이가 있긴 했다.
하지만 학관에서 창량 교수님을 상대할 때와는 달리, 노삼 교수님이 산서 분타주의 비꼼을 모른 척 넘어가 줌과 동시에 장호가 보는 앞에서 싸우지 말자는 말을 전하자.
대략적인 돌아가는 사정을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그런 상황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산서금붕 어르신이 편찮으신 것은 사실이고, 그 아드님들이 지금 차기를 두고 다투고 있는 상황입니다.”
“흠. 그래?”
물론 한마디 당부는 잊지 않았다.
“예. 지금 줄 잘못 서면 큰일 납니다. 정무학관의 공식 일정이니 박대는 안할거고, 아마 내일 있을 만찬에 장로님과 생도들도 초대를 받지 싶은데, 저도 초대를 받을 테니 가서도 챙기겠지만 노 장로님께서는 제발 그 더러운 성질 좀 죽이고 되도록 가만히 있으십시오. 십만 거지 밥줄 끊지 말고요. 너희들도 명심하고.”
그렇게 개방의 산서분타주에게 돌아가는 사정과 당부를 들은 우리는 다음 날 아침.
학관의 하얀 예복으로 의복을 바로 하고 각자 가벼운 행낭만 챙겨 곧장 이가장을 찾았다.
그렇게 찾은 이가장의 대문.
궁궐과도 같은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대문 앞에는 태원금붕의 생신 선물과 쾌차 기원 선물이라고 쓰고, 차기 장주에게 줄을 대기 위한 성의 표시라고 읽는 물건들을 이고 지고 끌고 온 사람들이 이미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순서를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정문 앞으로 나아가니.
“거기! 멈추시오! 하얀 옷을 입은 분들! 순번을 지키셔야….”
노복 하나가 나와 용명이 녀석을 알아보고 입을 쩍 벌렸다.
“…가 아니고. 용운 도련님과 용명 도련님이 아니십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특히나 용운 도련님은 대체 얼마 만이십니까?!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이걸 묻고 있을 때가 아니지! 들어오십시오!”
그렇게 이가장 안으로 들어가니.
“여봐라! 영영 아가씨의 아드님들이 오셨다! 소장주님과 제세당주, 안민당주님께 이 소식을 알려라! 두 분 도련님께서는 여기 계시면 숙부님들이 오실 겁니다. 같이 오신 학관의 빈객분들은 일단 저를 따라서 오시지요. 장내에 법도가 있는지라 빈객분들은 우선 객관을 안내해 드린 뒤 법도에 따라 가문의 어른들께 안내하겠습니다.”
우리를 처음 맞아준 노복처럼 화색이 되어 반기는 사람도 있었지만.
똥 씹은 표정으로 우리를 맞는 자도 있었는데.
생물학적으로 이 몸의 큰외삼촌 되는 양반이 바로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의 대표였다.
“큰외숙을 뵙습니다.”
큰외숙이라.
이 사람이 산서금붕께서 돌아가시면 상속이 가장 유력하다는 큰외삼촌 이중영이구만?
“…큰외숙을 뵙습니다.”
“쯧. 피차 왕래도 잘 없는 사이에 인사는 됐다. 영영이 그것은 아버님께 지참금을 두둑이 받아서 갔으면 됐지, 친정의 변고를 틈타 손을 뻗으려 드는 건가? 쯧. 내 신경쓰지 말라고 따로 서신을 보냈거늘. 흠. 아닌가? 언서방 그 친구의 생각인가?”
이 와중에 우리가 상속을 노리고 왔다고 생각하는 것 좀 보게?
‘이미 조부님이 돌아가실 것으로 취급하는 것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파천검법 마렵네.
한데, 옆을 보니 용명이 녀석도 언가권이 조금 마려운 듯 보였다.
나는 그런 녀석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참아라. 우선 외조부님부터 뵙자. 만약 내 추측이 맞다면 조만간 다 갚아줄 수 있을 거다.]
[…예, 형님. 형님은 더한 수모도 참아 오셨는데, 고작 이걸 못 참겠습니까.]
딱히 참은 적은 없지만 그런 것으로 하고.
우리는 큰외숙부라는 양반을 따라 장원 내에서 가장 넓은 공간을 차지한 후원의 웅장한 전각에 이르러 이르렀는데.
“날붙이는 이쪽에 끌러 놓거라.”
- 제 아비가 죽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은 놈이 유난을 떠는구나?
‘그러게요. 아무튼, 여기서는 말을 따라야 할 것 같습니다.’
- 오냐, 다녀오거라.
무기는 가져갈 수 없다는 이중영의 말에 따라 사부님을 끌러 놓고 전각 안으로 들어가니.
“아버님 소자 중영이입니다. 영영이의 두 아들 녀석이 찾아왔습니다.”
산서의 금붕이 아니라 말라비틀어진 고목나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은, 그야말로 간신히 숨만 붙어있는 노인이 보였는데.
‘저 노인이 산서금붕 이길환이군.’
그런 노인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내 머릿속엔 또렷한 생각이 스쳤다.
‘이거 저주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