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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언가 망나니-143화 (143/444)

제143화. 도(道)둑들 (2)

말 그대로 산송장과 같은 산서금붕 이길환의 모습에 용명이 녀석이 참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어, 어쩌다가 저리되셨단 말입니까?”

“노환이시다. 태의나 약왕 같은 분은 모실 수가 없었지만, 다른 내로라하는 의원들이 입을 모아 그리 말했다.”

“…….”

“원래 아버님의 나이쯤 되시면 기력이 어제 다르고 내일 다른 것이라 하였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노환은 무슨.’

이중영이나 용명이 녀석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내 눈에는 산서금붕의 몸에 덩굴처럼 휘감긴 가늘고 시커먼 줄기 들이 보였다.

눈앞의 노인은 노환이 들거나 불치병이 발병한 게 아니었다.

‘음. 이러다가 다른 사람 앞에서 별호가 튀어나오겠네. 의식적으로라도 외할아버지라고 생각을 좀 하자.’

아무튼, 이건 저주였다.

비교적 천천히 생명력을 빨아내는 저주라, 방술 쪽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의원들은 노환으로 착각했겠지만.

‘뭐, 젊은 사람이 이렇게 몸져누웠다면 시대가 시대인 만큼 의원들도 저주 같은 것을 한 번쯤 고민해 봤겠지.’

하나, 산서금붕은 나이가 있으니 노환으로 결론을 내릴 만도 했다.

산서금붕의 재산과 영향력을 탐내는 아들들도 그런 판단을 반쯤 유도하거나 방조했을 수도 있고.

‘배후는 역시 마교인가?’

대략 배후도 짐작이 가고.

저주 쪽은 전문분야라 내 머릿속에선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청사진도 그려졌다.

‘문제는….’

다만 산서금붕에게 걸려 있는 저주가 너무 구닥다리라는 게 문제였다.

내가 부적에 담아 사용하는 저주처럼 술식을 그려 넣는 방식이었다면 이 자리에서 곧바로 밀어서 잠금 해제가 가능했겠지만.

‘이건 너무 재래식 저주야.’

이건 외조부의 머리카락 같은 것을 매개로 한땀 한땀 저주를 건 기물을 만들어 집안 곳곳에 두어 발동시킨 저주였다.

‘하나하나는 미미한 기운이지만, 그런 저주들이 산서금붕의 몸 안에 모여 마침내 생명을 빨아들이는 사슬로 변모하는 거지.’

이런 저주는 해주(解呪)를 하려면 숨겨진 기물을 하나하나 부숴야 했다.

‘그러려면 저주를 건 술자만 알고 있는 기물의 위치를 알아야 하고.’

그 또한 방법이 없지는 않았다.

‘종주(從呪)의 술.’

저주의 근원을 추적하는 흑마법이 있긴 했으니까.

‘근데 그걸 쓰려면 외조부님의 몸에 내 피를 한 방울 묻혀야 하는데….’

그때였다.

내가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는 그때.

감정이 새어 나오는 것을 참기로 약속했던 언용명이 그 약속을 어겼다.

“말도 안 됩니다!”

녀석은 이중영을 향해 뾰족한 목소리를 내질렀는데.

“얼마 전만 해도 정정하셨던 분이 갑자기 노환이 오신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됩니까?!”

“말이 되고 자시고 왔으니까 온 거지, 그리고 아버님을 직접 뵌 게 재작년인 녀석이 얼마 전을 들먹이느…. 잠깐만, 용명이 네 녀석의 말은 어째 내가 아버님을 저렇게 만들었다는 것으로 들리는구나?”

뭐, 용명이 녀석이 저러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원작 기준으로 유정권이라는 별호가 붙는 녀석이니까.’

초라하게 죽어가는 외조부의 모습을 목격하니 이성이 끊어질 수밖에 없었겠지.

‘개방의 산서분타에서 외숙부들이 상속과 외조부의 치료를 두고 대립을 하고 있다는 정보를 듣기도 했고.’

하나, 이 이상 소장주 신분인 이중영을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장주인 외조부가 저러고 있는 이상.

이 장원 안에선 소장주인 이중영의 말이 법이었다.

“읏?!”

나는 보란 듯이 용명이 녀석의 목을 잡아서 누르며 녀석을 향해 전음을 날렸다.

[뭐 하는 짓이냐?]

[형님! 이건 정말 말도 안 됩니다! 형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

[생각한다. 집안사람 중에 누군가가 외조부님이 저리되도록 일조했을 수도 있겠다 생각 중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외조부님께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시면 다 해결될 문제다. 그러고 나면 일조를 했든 방조를 했든 외숙부들도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그 말씀은? 외조부님을 살려내실 방도가 있다는 겁니까?]

[그래. 하지만 네가 이렇게 길길이 날뛰면 어려워질 수도 있겠지.]

하나, 용명이 녀석의 급발진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큰외숙께서도 용명이 이 녀석이 정이 많은 녀석임을 아실 겁니다. 외조부님의 모습을 보고 많이 놀라 실감이 안 나는 모양입니다.”

나는 용명이 녀석을 잠자코 있게 만든 것을 빌미 삼아 이중영에게 말을 건 뒤.

“솔직히 큰외숙께서는 이미 소장주이신데 뭐가 아쉬워서 외조부님을 해하겠습니까?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놈들은 머리에 도삭면이 찬 놈들일 겁니다.”

은근슬쩍 이중영을 두둔해주었다.

“흥. 여태까지 용명이 저 녀석이 순둥이 인줄 알았는데 눈이 돌아가니까 제 숙부도 못 알아보더구나. 망나니로 소문난 네가 나아 보일 줄이야.”

그리고 물 흐르듯 본론을 던졌다.

“그런 의미에서 용명이랑 저랑 외조부님의 손을 한 번씩만 잡아봐도 괜찮겠습니까? 그럼 이 녀석도 실감하고 진정을 할 겁니다.”

“흐음.”

물론 그냥 부탁으로만 그치지는 않았고, 이 시점에서 우리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를 들먹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희의 인솔자로 따라오신 분이 개방의 장로 배분이신데, 용명이 녀석이 흥분한 마음으로 그분 앞에서 실언을 할까 봐 그렇습니다.”

그런 내 말에 이중영은 탐탁지 않지만 허락한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허락하마. 단, 학관에서 무공 몇 자락 익혔다고 괜히 어쭙잖게 내력을 불어넣지는 말아라. 의원들이 역효과가 날 수 있다 했다.”

그렇게 산서금붕에게 다가간 나는 용명이가 먼저 앙상한 손을 잡아보는 사이에 입술을 씹어 피를 내 엄지손가락에 묻혔다.

그리고 저주를 뒤쫓는 종주의 술법을 담아 산서금붕의 손바닥에 자연스럽게 묻혔다.

스윽-

그러자, 산서금붕의 몸에서 뻗어 나온 붉은 기운이 이가장 곳곳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 * *

끼이이익-

외조부가 들어계신 후원의 문이 다시는 열리지 않겠다는 듯 굳게 닫혔다.

쾅-

그와 동시에 이중영은 내게 회한을 돌려주었다.

그것으로 최소한의 혈육대우는 다 했다고 여긴 것일까?

“오면서 봤겠지만, 워낙 빈객이 많아서 나는 이만 일을 보러 가야겠다. 아, 집안이 어수선하니 괜히 얼굴 붉히고 싶지 않으면 함부로 돌아다녀서 괜한 의심을 사지는 말아라. 내 윤영이 그 녀석을 붙여줄 테니, 녀석이랑 있다가 나중에 저녁 만찬 때 보든지 하자. 변서방.”

“예, 소장주님.”

“조카들이랑 같이 온 일행들은 지금 안민당에 있지?”

“예. 거기서 안민당주가 접대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조카들도 그리로 안내해. 그리고 안민당주의 입을 빌려서 인솔자로 온 광풍투개 대협과 생도들을 저녁 만찬에 초대하도록 하고.”

“예, 그렇게 조치하겠습니다. 도련님들은 저를 따르십시오.”

이중영은 짐짓 홀가분하다는 표정으로 나와 용명이를 아랫사람에게 떠넘기고는 멀어져 갔다.

그 모습을 보며 허리춤의 사부님께서는 혀를 차셨다.

- 쯧쯧쯧, 저 싹수하고는. 뺨을 한 대 치고 싶은데, 손이 없는 게 오랜만에 원통하구나.

‘놔두십시오. 저런 싹수 노란 행동도 조만간입니다.’

- 오호라. 안에 들어가서 일이 잘 풀린 모양이구나?

‘잘 풀렸다기보다 제 예상과 같더라고요.’

-예상대로라면?

‘외조부님께서 저주에 걸린 것 같습니다. 당장에 숨이 넘어갈 것 같지는 않은데, 시시각각 생명력이 줄어가고 계십니다.’

- …저런. 내가 련금이 그놈의 절맥을 고쳐주면서 분수대로 살라는 말을 했던 것 같은데, 녀석의 후인이라는 마교 놈들은 어찌 그 모양이냐? 아무튼 유감이구나.

‘사부님이 왜 미안해하십니까? 그리고 저주는 풀면 됩니다.’

- 하기야 방술에는 또 용운이 네가 일가견이 있지?

그때였다.

사부님과 잠시간의 회포를 풀며 걸음을 옮긴 지 얼마나 되었을까?

어느새 도달한 안민당이라는 현판이 붙은 전각 앞에서 변서방이라는 사내가 기별을 넣고 오겠다고 사라지자.

용명이 녀석이 흑마법에 들어가는 피를 낸다고 터진 내 입술을 보더니 우물쭈물 사과를 해왔다.

“죄송합니다. 형님은 그렇게 입술을 짓씹으며 분기를 누르셨는데, 저란 녀석은….”

용명이 녀석의 급발진이 결과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그걸 떠나서 오해도 좀 있는 것 같았다.

한데, 들어보니 어쨌거나 앞으로 말 잘 듣겠다는 다짐이어서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여 주었는데.

“됐다.”

그렇게 용명이 녀석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있으니.

덜커덕-

안민당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외탁을 하여 어머니를 많이 닮은 나와 용명이 녀석과 묘하게 닮은 중년 사내가 바쁘게 걸어와 우리를 맞아주었다.

“조카님들 오셨는가?”

“작은 외숙.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용명이 너는 볼 때마다 내가 작은 외숙 소리를 하지 말라고 하는데, 꼭 그렇게 부르는구나. 그러면 권영이 그 녀석이 탐탁지 않아 할 거다. 특히나 아버님이 저렇게 되시고 나서는 바짝 날이 서 있다. 나는 괜찮은데 괜히 너희들이나 영영이에게 불똥이 튈까 봐 걱정이구나.”

“…하지만 어찌 숙부님의 함자를 함부로.”

“아, 됐다니까. 그냥 윤영 숙부라고 하거라. 그쪽이 더 친근하게 느껴지고 좋지 않으냐? 그러고보니 용운이 너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구나. 영영이가 친정에 올 때마다 근신 중이라 함께오지 못했었지?”

“…어, 음. 그랬었죠?”

“하하하. 올챙이 적 생각은 안 난다 이거냐? 요즘 학관에서 날고 긴다는 소식은 익히 들었다! 네 어미와 아비가 한 번씩 태원에 와서 너를 두고 왔다는 이야기를 하면, 애들은 원래 그런 거라고 제 살길을 알아서 찾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내가 누누이 말했었는데. 그래서 내 얼마 전에 언서방에게 서신도 썼느니라. 거보라고 내 말이 맞지 않느냐고.”

우리를 짐짝 혹은 거머리 취급했던 큰외삼촌과 달리 둘째 외삼촌은 정반대의 반응을 보여주었다.

‘사실 나로서는 처음 보는 사람인데. 엄청 친근한 느낌이 들게 하는 재주가 있으시네.’

반겨주는 말 뒤에 옥으로 된 장판이 있는데 살 생각 있냐고 물어봤어도 한 번 정도는 고민을 해봤으리라.

‘출신성분 탓인가?’

이윤영은 나이상으론 차남이었으나 서자였다.

‘개방 산서분타주의 표현을 빌리면 호인 중의 호인이나 후계자 경쟁에서 가장 멀고, 본인도 한 발짝 떨어져 있으려 하는 사람.’

아무튼.

그렇게 우리를 반겨준 윤영 숙부가 외조부의 안부를 물어왔다.

“그래. 아버님은 좀 어떠시더냐?”

그런 숙부의 음성에 용명이 녀석은 내 눈치를 보더니.

별다른 덧붙임 없이 제가 본 외조부만을 입에 올렸다.

“좋아 보이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윤영 숙부를 향해 곧바로 물음을 던졌다.

“이가장에 계시는 분이 저희에게 그런 걸 물으십니까?”

“…그게, 권영이가 아버님을 낫게 하겠다고 방사들을 초청하기 시작한 뒤로 나도 너희 큰외숙의 허락 없이는 후원에 출입을 못 하게 되었다. 물론, 그 허락을 잘 해주지 않으시고. 아차차. 그런데 형님께서 너희에게 마음이 상하는 소리를 하지 않으시더냐?”

“…….”

“쯥. 용명이 네 표정을 보니 안 들어도 알겠구나. 내가 괜한 소리를 했다. 사과하마. 이런 이야기는 이쯤하고 기분전환이나 하자꾸나. 가서 동기들을 데리고 나오거라.”

“기분전환 말씀이십니까?”

제안은 감사했다.

“그래. 침울하게 있어 봐야 아버님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시는 것도 아니고, 호북에서 여기까지 왔으면 산서 최고의 명승지는 돌아봐야지.”

한데, 나는 지금부터 저주를 유지케 하는 기물들의 위치를 파악할 생각이라 미간이 좁혀졌는데.

“유람은 좀 그렇지 않겠습니까?”

용명이 녀석이 오늘 중 제일 밝아 보이는 표정으로 피식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가장을 구경시켜 주겠다는 말씀이십니다.”

“그래, 당금수석이라더니 헛똑똑이로구나. 황가에는 황궁이 있으면 민가(民家)에는 이가장이 있다는 말을 그새 잊은 것이냐?”

아, 이 집 구경이면 인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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