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5화. 도(道)둑들 (4)
한편, 청죽관의 자치회실에선 대민지원조에 포함되지 못한 청죽관 자치회 간부들과 향란관 출신 깍두기 하나가 조촐한 다과회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통상적인 다과회는 아니었다.
산서로 대민지원을 가느라 빠진 사람들의 빈자리를 메꾸느라 오늘도 정신없이 갈린 사람들이, 쌓여 있는 야근 거리를 앞두고 취하는 일종의 의식이라고 보는게 맞았다.
와삭- 와삭-
그러니까 이건 살고자 월병을 씹고 정신을 차리자고 차를 마시는 중인 것이었다.
후릅- 후르릅-
물론 그마저도 완전히 마음을 놓고 즐기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각자의 일거리를 안고 있는 사람들이었고.
일련의 사태들 속에서 품게 된 숙제 거리를 가진 사람들이었으니까.
뭐, 아무튼.
그렇게 월병을 깨작거리고 있던 사람 중 당옥기가 팔을 뻗어 기지개를 켜고 나서자.
은하연이 입을 열었다.
“옥기, 벌써 연구실로 가려고?”
“응? 아 응.”
“열심이네 요즘? 언공자가 계실 때는 한 식경 정도는 쉬다 가려다가, 언공자가 쪼아대면 쫓겨나듯 연구실로 갔던 것 같은데? 요즘은 한 다경도 안 채우고 알아서 가는 것 같네? 오늘만 해도 차가 반이나 남았고 쪼는 사람도 없는데 더 쉬다 가지 왜?”
“아. 뭐라고 해야 하지? 막상 쪼아대는 사람이 없으니 뭔가….”
그런데 이 순간 은하성이 당옥기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좀이 쑤십니까, 누님?”
“컄! 말을 그렇게 하면 내가 이상한 사람 같잖아!”
“그럼요?”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눈앞에서 쪼였을 때는 그때그때 나도 할 말이 딱 떠올랐는데, 지금은 시간만 덜렁 이렇게 주어지니까….”
그렇게 이어진 당옥기의 이야기를 진경룡이 맺었다.
“…언 부회장이 돌아왔을 때. 내놓을 연구 성과가 없으면 볼 낯이 없다, 뭐 그런 건가?”
“어, 네. 맞아요.”
“심정을 알 것도 같구만. 사실 나도 그렇긴 하다네, 나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사람 모두가 그렇지 않을까? 은 후배도 부회장의 빨간 모자를 맡은 뒤로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더만?”
“몸은 산서성에 계시면서도 실시간으로 저희의 정신을 압박하는 용운형님 당신은 도대체….”
그렇게 이어진 대화의 끝에 은하연의 고개가 마침 이야기가 나온 산서가 있는 방향으로 돌아갔다.
“다들 별일은 없으려나.”
“누님. 천하의 용운형님에 노삼 교수님도 함께 가셨습니다. 거기다 길목인 하남은 백도무림의 영역이고, 산서는 성(省) 자체가 용운 형님의 외가쪽 앞마당이나 마찬가지인 곳인데 별일이야 있으려고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상계에서 산서금붕 어르신이 갑자기 많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이 돌아서 말이야.”
그런 은하연의 말에 자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 나름의 탄식들이 나왔다.
“저런.”
“진짜?”
“그런일이.”
한데 개중에 은하성의 입에서 나온 말에, 진경룡, 당옥기, 은하연, 고완산이 합심하여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용운형님이 겉은 강해 보이셔도 속은 여린 분인데….”
“은 후배! 자네는 빨간모자를 받은 이후로 너무 언 부회장을 숭상하는 경향이 있어. 나 역시 요즘도 자다가 언 부회장이 우리 청죽관에 와주지 않았으면 어찌 됐을지 걱정되지만, 부회장의 속이 여리다? 그건 아니지!”
“캬악!”
“그래 그건 너무 갔어 하성아.”
“그래. 차라리 강철이 말랑하다고 하게.”
들끓는 민심에 은하성은 표현을 고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잔정이 많으시다 정도는 어떻습니까?”
이번 건 어떻게 균형이 맞았는지, 방금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던 사람들이 ‘이건 뭐’, ‘그럴지도?’ 같은 소리를 하며 턱을 매만졌다.
뭐, 잡담은 여기까지.
다시 산서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던 은하연이.
“태원상단도 아직 누구라고 후계자가 딱 정해진 게 아니라 정말로 산서금붕이 편찮으시다면 제아무리 언공자라도 운신의 폭이 상당히 좁아지셨을 텐데. 그런 상황에서 대민지원을 나가신 보람을 거둬 오실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요.”
짝! 하고 박수를 쳐 다과회의 종료를 알렸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할 일을 해야겠죠?”
* * *
제갈설지가 둘러보지 못한 이가장의 전각들을 좋은 머리를 굴려 그리며 물항아리가 있을 법한 위치를 찍기 시작한 이때.
노삼이 나를 향해 물음을 던졌다.
“그러니까 언가 네 녀석의 말은…. 그 막내 숙부 말대로 외조부가 저주에 걸린 것 같다는 게지? 배후는 그 문양을 쓰는 자들이고?”
“같은 게 아니라 확신합니다.”
“…확신이라.”
“예. 외조부께서 저주에 걸리신 것은 확실합니다. 하여 저는 낮에 그 저주에 사용된 기물의 위치를 낮에 파악하려고 했고, 어느 정도 공통점을 찾은 상황에서 조금 전에 막내 외숙부와 나눴던 대화로 확신이 섰습니다.”
주장이 조금 강하긴 했지만, 저주라는 것은 큰 범주 안에선 진법과 주부술과 교집합이 있었고, 나는 나름대로 이쪽으로 확실한 실적이 있었다.
“…하기야 네 녀석은 입관시험의 진법 단계에서도 최고 점수를 거뒀지? 강시학 개론도 일 학기엔 부적만 배운다고 알고 있는데 거기서도 만점을 받았고.”
“예.”
“흠. 나는 주부술 쪽으로는 문외한인데, 그럼 어쩌면 되겠느냐? 막내 외숙에게 힘을 실어서 소장주가 후원의 문을 열게 해? 아니지, 아직 숙부들에 대한 판단은 내리지 못했다 하지 않았냐?”
노삼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주억이며 본격적인 계획을 입에 담았다.
“그래서 저주에 사용된 기물을 직접 제거하고자 합니다.”
그러자 어느 때보다 날카로워진 노삼의 눈이 나를 훑기 시작했다.
“직접? 네 막내 외숙의 말에는 점쟁이 하나가 죽었다는 말도 있었다. 그걸 직접 하겠다고?”
“예.”
“가족의 일이기 때문이냐?”
여기선 대답을 잘해야 했다.
나는 침착하게 할 말을 고른 뒤.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가족의 일이라 이러는 게 아닙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기에 하겠다는 겁니다.”
그에 턱을 싸쥔 노삼이 ‘…네 녀석은 역시.’ 같은 소리를 하더니.
어느 순간 턱에서 손을 떼고 다시 나를 응시했다.
“우선 해주법을 말해 보거라.”
“숨겨놓은 기물을 찾아서 부수면 됩니다. 이가장의 생리를 잘 아는 이가 장내의 권력구도나 산서금붕의 성정을 절묘하게 이용하면서 외조부도 당했을 뿐이지 저주를 해주하는 것 자체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해주법 자체는 간단하지만, 사실 쉽냐고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무조건 기물을 찾아 없애기만 해도 됐으면 낮에 개수를 조금이라도 줄여 놨겠지.’
산서금붕의 몸은 일종의 시한폭탄이었다.
그리고 기물들은 저주의 매개기도 했지만, 산서금붕의 생명력을 잡아두고 있는 역할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폭탄이 ‘당장은’ 터지지 않게 하는 전선의 기능도 하고 있었다.
‘항아리에서 기물을 꺼내기 시작한 순간 잠잠하던 폭탄이 달리기 시작한다.’
해주를 시작한 이상 최대한 빠르게 모든 기물을 남김없이 찾아서 파괴해야 했다.
하여 낮에도 위치만 파악해둔 것이었다.
‘근데 이 사실은 굳이 말할 필요는 없지.’
노삼의 허락도 허락이었지만.
나는 이번 일에 소릉이 녀석의 손을 좀 빌릴 생각이었다.
‘녀석과 내가 동시에 기물을 모으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다 모을 수 있으니까.’
괜히 겁주지 않고 명령만 정확하게 내려놓으면 간 큰 짓도 곧잘 해내는 녀석이 바로 우소릉이었고.
더욱이 야심한 밤에 남몰래 물건을 꺼내오는 일은 소릉이 녀석이 부끄러워하면서도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재주였다.
그때였다.
내가 잠시 잠깐 그런 생각을 하는 그때.
마침 천장호가 그에 관한 질문을 해왔다.
“한데 소장주 되시는 양반의 허락이 없으면 항아리를 찾아다니는 일이라는 거, 말짱 꽝 아니요? 보니까 허락을 해줄 양반이 아니던데?”
나는 그런 천장호를 향해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허락은 필요 없다. 월담을 할 거니까.”
그런 내 말에 소릉이 녀석이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는데.
“허락 없이 담을 넘어서 뭔가를 가져오는 거면 꼭 도둑질 같네요. …어? 그러고 보니 아까 낮에 저한테 집안의 구조를 잘 보라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언형?”
가만히 듣고 있던 정현이 진지한 표정으로 우소릉의 말을 정정했다.
“월담과 훔침에 의로움이 있으니 이건 도(道)둑질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 쓰흡.
‘왜 그러십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는지요?’
- 문제는 아니고 가만 보면, 정현이 저 녀석이 너보다 구실을 더 잘 찾는 것 같아서 말이다.
아.
난 또 뭐라고.
뭐, 아무튼.
정현을 보며 허리춤의 사부님께서 한마디를 하시는 사이.
장고 끝에 노삼이 내 계획을 허락했다.
“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 녀석의 말이니 내 허락을 하마.”
그사이 제갈설지의 지도도 완성됐고.
“다 그렸어요.”
나는 빠르게 역할분담을 시작했다.
“일단 교수님은 여기 계셔야 합니다. 워낙 명숙이시니 누가 객관을 찾아올 수도 있으니까요.”
“알겠다.”
“용명이랑 천장호, 정현 그리고 제갈소저는 그런 교수님을 도와 우리가 여기 있는 것처럼 꾸며주시고. 아, 되도록 정현은 연기시키지 마시고.”
“…….”
“용운님? 어차피 밤이니까 남은 종이로 사람의 형상을 오려서 그림자를 만들면 어떨까요?”
“오. 좋은 생각이오. 다들 지금 당장 제갈소저 좀 도와.”
“그렇게 하겠습니다.”
“옙!”
“예, 형님.”
“그리고 소릉이는 잠행복으로 갈아입는다.”
* * *
‘이쪽으로는 소릉이 녀석이 전문이지만, 출입 금지 구역은 종주의 술을 걸어놓은 내가 가는 게 정확하겠지.’
잠행복으로 갈아입은 우소릉을 향해 나는 반으로 나눈 지도 중 자(子), 그러니까 낮에 돌아본 구역의 지도를 건넸다.
“낮에 돌아본 곳이니까 어렵지 않지?”
시커먼 의복으로 전신을 가리고 눈만 내놓았기 때문일까?
“그냥 제갈누님이 그려주신 지도의 위치에 있는 항아리에 가면 기물이 있는 거죠? 저는 그걸 꺼내서 언형께 드리면 되는 거잖아요.”
“맞다. 그렇게 기물을 모아서 여기 정충문으로 오면 돼.”
소릉이 녀석은 보기 드물게 자신감을 보였다.
“제겐 너무 쉬운 일이네요.”
학관에서의 모습만 본 사람이면 이 녀석이 왜 이러나 싶겠지만.
원작의 우소릉을 아는 나로서는 이보다 든든할 수가 없었다.
“그럼 시작하자.”
그렇게 객관을 기준으로 남으로 방향을 잡아 멀어지는 우소릉을 뒤로하고, 북쪽으로 길을 잡은 나는 곧바로 사출계 흑마법 암흑동화를 사용했다.
샤아아악-
그리고 어둠이 완벽히 스며든 몸을 움직여 제법 높은 전각의 지붕 위에 올라섰는데.
그런지 얼마 되지 않아 종주의 술에 반응하는 붉은 점들이 크게 부르르 요동치더니, 그중 한 개가 깡충깡충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릉이 녀석이 기물 하나를 손에 넣은 모양이었다.
‘나도 시작하면 되겠군.’
어려울 것은 없었다.
제갈설지의 지도는 나름대로 정확했고, 어둠이 스민 내 몸과 절정에 다다른 걸음은 은밀했다.
문제라면 사람이 들어갈 만한 항아리에 속에 든 기물을 젖지 않고 꺼내려면 나름의 꾀가 필요하다는 점이었는데.
‘소릉이가 일러준 대로 철사의 앞쪽을 이렇게 구부려서 건지면!’
월척.
아니, 신상(神像)이 올라오네?
그렇게 야밤에 신상 낚시를 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남쪽에 숨겨진 여섯 개의 신상을 모두 찾은 것인지, 한데 뭉쳐져 커 보이는 붉은 점이 약속의 땅 정충문을 향해 북상하기 시작했다.
나도 마침 북쪽에서 마지막 여섯 개째 신상을 낚아낸 터라 정충문 쪽으로 걸음을 옮겨 암흑동화를 잠시 해제하니.
신상이 든 자루를 들고 있는 소릉이가 이 와중에 발랄하게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언형!]
‘녀석.’
이 일이 천직인데 괜히 내가 청죽관에서 굴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얼른 그런 생각을 머리에서 밀어낸 뒤.
[신상 이리 넘기고 객관으로 돌아가 있어.]
[넵!]
다시금 암흑동화를 시전하고 바쁘게 걸음을 옮겨 외조부가 계신 후원으로 향했다.
‘경계가 참 허술하네.’
외조부가 계신 후원의 경비는 빙 둘러싼 벽의 귀퉁이에 설치된 망루를 지키고 있는 무사들이 다였다.
만찬장에서 큰 외숙부를 호위하기 위해 모여 있던 무사들의 질과 양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천지 차이라 할 수 있었다.
‘설령 외조부가 암살을 당하더라도 큰 외숙부로서는 이득이라는 건가?’
아무튼,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면 망루 위의 무사들을 하나하나 재워놓고 진입을 했겠으나.
‘그럴 시간이 없다.’
저주에 사용된 신상에서 넘실거리기 시작한 기운을 보니 해주의 제한 시간이 경각에 달린듯했다.
쌔애애애액!!!
그에 나는 암흑동화만 풀지 않은 채 비영파천보를 시전하며 곧바로 후원의 담장을 넘었는데.
“침입?!”
아니나 다를까.
기감이 예리한 후원의 무사들이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종을 울리기 시작했다.
땡땡땡땡!!!
하지만 해볼 만했다.
어차피 외조부만 눈을 뜨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나는 종이 울려대든 말든 번개같이 외조부가 들어계신 후원 안의 전각 안을 박차고 들어간 뒤.
암흑동화를 해제하며 외조부의 몸에 올라타, 그 가슴팍 위에 열두 개의 신상을 모두 얹었다.
“한시가 급해 소손이 실례 좀 하겠습니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해 양손에 해주의 술식을 감았다.
우우웅-
그에 내 손안에서 시커먼 아귀 구슬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그 바람에 아귀 구슬 안에 갇힌 십이 신상의 모습을 한 기물들이 동시에 귀곡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끼애애애애액!!!!!!
하지만 별거 아니었다.
“네까짓 것들이 울면 어쩔 건데?”
나는 합장하듯 손바닥을 합쳤고, 찍소리도 못하고 아귀구슬과 합쳐진 신상들은 한순간에 가루가 되어 비산했다.
그렇게 신상이 사라지며 손에 남은 생기를 외조부의 몸에 밀어 넣자.
“……!”
익어버린 생선의 눈처럼 안개가 끼어 있던 산서금붕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