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148화 (148/444)

제148화. 쥐를 잡자 (3)

산서금붕 이길환의 모습은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 좀 말라보여서 그렇지 정정하기 그지없어 보였을 것이다.

하나 나는 외조부가 지금 기를 쓰고 건재함을 내보이고 있음을 알았다.

‘목덜미가 벌써 땀으로 젖으셨네.’

사부님의 조언을 받아 찍어 놓은 혈도는 말 그대로 임시방편이자 내일의 체력을 당겨쓰는 행위였고.

그마저도 허리와 다리에 지지력이 돌아온 것일 뿐.

그걸 움직이는 데는 엄청난 정신력이 필요했다.

‘평범한 가문의 웃어른이셨으면 푹 쉬면서 기력 회복에 만전을 다해야 할 시기인데. 바깥바람까지 쐬셨으니 갑자기 주저앉더라도 전혀 이상할 게 없지.’

하니 아무리 외조부라도 한계에 다다랐을 터였다.

‘노인네의 무리를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지.’

그 사실을 확인한 나는 빠르게 일행들을 이끌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그러자꾸나.”

“너희들도.”

내가 은연중에 서두르는 기색을 보이자, 나와 동고동락한 나날이 제법 되는 정현과 우소릉이 생각 없이 급히 걸음을 뗐는데.

내가 그런 두 녀석의 소매를 잡아끌자.

“음?”

“언형?”

내 의도를 대략 눈치를 챈 제갈설지가 적당한 구실을 붙여 입을 열었다.

“정현 님, 소릉 님! 어찌 보면 정무학관의 대민지원단이 산서금붕 어르신을 정식으로 뵙는 자리인데 대오를 맞춰서 가야죠!”

그리고 곁에 섰던 천장호와 언용명의 소매를 끌어 사람으로 된 벽을 완성했다.

평소라면 엄한 소리를 했을 천장호도 이 분위기에서 헛소리를 했다간 밥도 못 얻어먹겠다 싶었는지 묵묵히 걸음을 맞췄다.

나는 그렇게 만들어진 사람의 벽 안에서 용명이 녀석에게 전음을 보냈다.

[외조부님께서는 지금 전력을 다하는 중이시다. 문턱을 넘자마자 내가 문을 닫아걸 테니, 너는 외조부님을 부축해라.]

[예! 형님!]

아니나 다를까.

문턱을 넘은 내가 태연하게 전각의 문을 닫아걸자마자 예상대로 외조부의 다리가 풀려버렸고.

“……!”

용명이 녀석이 놀란 토끼눈을 하고 튀어나가 그런 외조부의 허리를 감쌌다.

한데, 하나같이 놀란 표정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 달리.

외조부, 아니 산서금붕 이길환의 얼굴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끌끌끌. 내 나이가 들어서 젖먹던 힘을 어디에 뒀는지 가물가물했는데 오늘 그걸 제대로 끌어다 썼구나. 어떠냐 용운아, 이만하면 장원에 숨어든 쥐들이 철렁했겠느냐?”

* * *

- 허. 걸물은 걸물이로다.

‘그러게요.’

- 이제 보니 네 녀석의 간덩이가 외탁을 한 모양이구나.

그건 아닐걸요?

‘아니지. 전(前) 용운이 놈이 언가의 가산을 날려 먹은 과정을 생각해 보면 확실히 간은 크긴 컸나?’

뭐, 아무튼.

그렇게 사부님과 몇 마디를 나누고 있는 사이에 용명이 녀석이 외조부를 침상으로 안아 옮기는 것을 끝냈고.

“이렇게 말고. 허리를 좀 받쳐주거라. 내 반만 누울 것이다.”

“…외조부님. 하오나.”

“하오나는 뭔 놈의 하오나냐. 내 몸이 좀 고단할 뿐이지, 정신과 목구멍은 멀쩡하다. 돌아가는 사정이 심상찮고 손님도 들인 판국인데 아주 누울 수는 없지.”

나는 그런 외조부와 노삼 교수님을 소개했다.

“교수님. 외조부님이십니다.”

“추레한 거지가 산서금붕 어르신을 뵙습니다.”

“외조부님. 이쪽은 소손이 몸을 담고 있는 청죽관의 사감이신 노삼 교수님이십니다.”

“추레한 거지라니요. 직접 뵙는 것은 처음이나 내 노삼이라는 이름을 기억한 지가 오래고, 노대협의 행보에 감탄한 적이 여럿이오. 또 내 손주 녀석을 맡아 주고 계신 분이니 귀인 중의 귀인이신데, 이렇게 앉아서 인사를 전하는 무례를 범하는 늙은이를 용서하시오.”

“무례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조금 전 전각의 밖에서 보여주신 기백에 이 거지는 진심으로 감탄했습니다. 이 나이 먹고 공부가 된다는 감정을 느끼기가 쉽지 않은데 그 감정을 느낀 참입니다.”

“부끄럽소이다. 내 중영이 녀석에게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도리에 대해 말을 하긴 했으나, 기실 나도 집안 단속을 해내지 못한 주제에 입바른 소리를 한 것을 그리 추켜세우시면 부끄럽소이다.”

그런데 처음에는 퍽 훈훈했던 두 사람의 대화가 어느 순간 조금 이상한 곳으로 튀기 시작했다.

“한데, 말씀 중에 이가장의 일을 용운이를 통하게 하신다는 것 말입니다. 그게 아주 그러시겠다는 것은 아니시지요? 잠시 잠깐 저희가 이곳에 있는 동안 그러시겠다는 것이지요?”

“허허허. 본인이 바라고 또 능력이 된다면야 아주 맡길 수도 있소만, 노대협께서는 그게 어찌 궁금하신지 이 늙은이는 모르겠소이다?”

“아직 저 녀석의 학관 생활이 창창하게 남았는데, 자칫 오산을 하실까 봐 그렇지요.”

“중퇴라는 제도가 있지 않소?”

“그러기에는 용운이 녀석이 벌여놓은 일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건 내가 이자까지 쳐서 두둑이 물어주면 되는 것이고. ”

두 사람의 대화는 마치 나를 두고 서로 고상하게 떼를 쓰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거, 만사가 돈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따르는 생도들은 어쩔 것입니까?”

“오. 용운이를 따르는 청죽관의 생도들이 많소이까?”

“청죽관의 생도뿐입니까? 여기 있는 제갈설지는 윤국관 출신인데 이번 일정에 따라오고 싶어서 발표까지….”

“교, 교수님!”

“…아무튼, 기타 등등의 생도들은 물론이고 그 뭐냐 총장님이랑, 아! 맹주님도 요즘 이 녀석이라면 껌벅 죽습니다. 저번에는….”

“끌끌끌. 이목구비를 보면 대충 감이 오시겠지만, 그게 다 외탁을 진하게 하여 그렇소이다. 우리 영영이도 내 울타리에 있을 적엔 별다른 행사에 나선 적도 없는데 어찌 그리 소문들이 나서는….”

한쪽에선 침을 튀기고 한쪽에선 입꼬리를 비실거리는 게, 사실 대화 자체가 성립되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아무튼, 저 대화가 더 엉망진창이 되기 전에 말려야 했다.

“…그 외조부님? 그리고 교수님? 저희 이럴 때가 아니지 않나요.”

그런 내 말에 노삼과 외조부가 동시에 딴청을 피우며 나름의 변명을 해왔다.

“커흠. 잠깐은 괜찮다.”

“그래, 노대협의 말이 맞느니라. 어차피 당장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생각을 정리하느라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내 모습이 죽기 전의 늙은이가 힘을 낸 회광반조인지 정말로 기운을 차린 것인지 관망도 해올 것이고.”

“죄송스러운 말이라 꺼내지는 않았지만 어르신의 말씀이 맞다.”

“말씀은 일리가 있으신데, 외조부님이 몸져눕게 된 일에 관한 이야기도 엄청나게 쌓여 있지 않습니까?”

어쨌거나 두 분 모두 내 말에 고개를 주억이셨다.

그렇게 주의를 환기한 나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고자 입을 열었다.

“저희 대민지원단이 산서로 오는 길에….”

그런데 이때.

노삼 교수님이 손바닥을 펼쳐 내 말을 막더니 금 총관을 응시했다.

‘금 총관이라는 사람을 믿어도 되냐는 거구만.’

그런데 금 총관은 믿어도 되는 인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금 총관은 훗날 마교의 군세가 하북 전역을 기습했을 때.

혈혈단신으로 달려온 팽무혁과 더불어 태원이가의 남은 세력을 끌어모아 지원을 오는 유이한 지원군이었다.

‘이진장(李賑場)이라고 태원이가가 운영하는 고아원 출신이라 충성심이 굳건한 사람이었지.’

하여 나는 자신 있게 입을 열 수 있었는데.

“금 총관님은 믿으셔도 됩니다.”

그런 내 말에 금 총관의 눈이 엷게 일렁였고.

“…도련님.”

외조부께서는 흡족하게 수염을 쓰다듬으며 입을 여셨다.

“용운이의 말이 맞소이다. 여기 금현필 총관은 가문이 북경의 정계에서 일어난 변고에 휩쓸려 모함을 당했을 때, 이 늙은이가 나름대로 목숨을 걸고 거둔 자식 같은 녀석으로 내가 그리되고 중영이를 보필한 것도 그게 이가장을 지키는 일이라 생각하여 그리한 것일 뿐, 다른 뜻은 없을 것이오.”

그에 노삼 교수님도 금 총관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내 본의 아니게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닙니다. 응당 그런 의심을 하셔야 옳습니다.”

그렇게 정돈된 상황 속에서 나는 재차 입을 열었다.

“그럼 아까 하던 이야기를 이어서, 저희는 일련의 학사 일정에서 어떤 조직을 발견했습니다….”

그렇게 운을 뗀 나는 살수들에게 습격을 당했던 일.

오다가 들른 산채에서 마인화의 부작용을 겪은 자를 만났던 일.

그리고 외조부가 저주에 걸려 있었고 그 방식이 어떠했는지 뺄 건 빼고 나머지는 낱낱이 늘어놓았다.

“…그렇게 된 것입니다.”

“내심 예상은 했지만, 필히 용운이 네 외숙부 중에 거든 녀석이 있겠구나. 가법이 엄해지기 전부터 가묘가 있는 곳은 금지였다. 그곳의 물항아리에 누가 그런 것을 넣었다면 들락날락할 수 있는 사람은 나를 제외하면 중영이, 윤영이, 권영이밖에 없지.”

그런 내 말에 외조부는 잠시 혼자 말을 되뇌더니.

“중영이 녀석은 가만히 있어도 모든 것이 제 것이 된다 했지만, 누구보다 형제들을 신경 쓰던 녀석이다. 윤영이 녀석은 서자라 쌓인 분이 있을 것이고, 권영이 녀석은 항상 능력보다 욕심이 앞서는 녀석이었지. 세 녀석 모두 동기도 있고.”

어느 순간 나를 보며 입을 여셨다.

“어차피 세 녀석 모두 자극은 받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외조부의 말이 맞았다.

큰 외숙부는 제 것으로 생각한 것을 빼앗겼으니 자극을 받았을 것이고.

작은 외숙부는 갑자기 생각지도 않던 걸 얻게 되었는데, 그게 오롯이 온 게 아니라 자극이 될 것이다.

‘막내 외숙부는 시기하던 작은 형이나 나한테 모든 것이 돌아갈 분위기에 자극을 받았을 거야.’

노삼 교수님만 해도 내가 완전히 눌러앉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침을 튀겨가면서 안 된다고 말했는데.

후계경쟁을 하던 양반들은 당연히 자극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외조부는 사정을 정확히 모르시는 데도 여기까지 내다보고서 이가장의 일은 나를 통할 것이라는 말을 하신 건가?’

하기야 촉이 저 정도는 되어야 강남이 개발되기 전부터 상계를 주름잡아온 산서상인의 맹주 역할을 해내실 수 있는 거겠지.

뭐, 아무튼.

외조부의 추측이 대략 내 생각과 비슷했기에 나는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자 눈매가 맹금류의 그것으로 돌아간 외조부의 음성이 금 총관을 향했다.

“내가 자리보전을 하는 동안 견붕대(牽鵬隊)는 뭘 하고 있었느냐?”

견붕대.

그러고 보니 원작에서 금 총관이 이끌고 온 이진장 출신으로 이루어진 지원군들을 그렇게 불렀던 것 같았다.

“장주님께서 몸져누우신 상황인지라, 가법에 따라 소장주…. 아니, 중영 공자를 보필하고 있었습니다.”

“그 인원 중 절반은 이리로 보내라. 남은 절반은 윤영이를 보필토록 하되, 개중에 몸이 가볍고 존재를 갈무리할 수 있는 자들을 가려 뽑아 내 세 아들놈에게 은밀히 붙여라.”

여기까지 들은 나는 한 걸음을 내디디며 입을 열었다.

“그 외조부님? 권영 숙부 쪽은 저희가 맡으면 어떻겠습니까?”

“권영이 쪽이 가장 의심스러워 그러느냐?”

“솔직히 그렇습니다.”

“하면 좀 더 많은 사람을 붙이면 될 것인데 왜 네가 가야 하느냐?”

한데 외조부의 어투가 반대를 하는 투라 나는 왜 내가 가야 하는지 조목조목 설명했다.

“이진장 출신 무사들처럼 소손과 동기들도 외조부님께서 믿어도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일에 방사가 개입된 점을 생각하면 제가 가보는 게 맞습니다.”

“위험하다. 안 된다.”

그런데 이제 보니 반대를 하시는 이유가 딱히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위험하기 때문인 듯했다.

그렇다면 설득의 방향을 바꾸면 됐다.

나는 곁에선 동기 중 소릉이 녀석의 어깨를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위험할 것 같으면 이 친구를 통해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친구가 이래 봬도 뇌전편복의 비전을 이은 하나뿐인 아들입니다. 할아버님도 그 이름을 들어보셨겠지요?”

* * *

후원에서 돌아오는 길.

이권영은 부인의 입에서 나온 말에 미간을 좁혔다.

“아버님이 정말 좋아지셨네요. 아프신 적이 없는 줄 알았어요. 큰 아주버님도 호되게 혼이 나시면서 직인과 패도 빼앗기셨고. 드디어 당신한테도 볕이 드는 날이 오는 걸까요?”

“큰아주버님? 그럼 작은 아주버님이 누구요?!”

“…사, 상공. 윤영 공자가 함께 있는 자리라서 제가 머릿속으로 구분을 한다는 게 그만 실언을.”

“그리고 지금 이윤영 그 더러운 피가 섞인 놈이랑 영영이네 자식 놈이 태원이가를 반 나눠 먹게 생겼는데 볕 뜰 날은 무슨 볕 뜰 날이란 말이요?!”

“죄, 죄송해요.”

“꼴도 보기 싫으니까 몇 발짝 떨어져서 오시오.”

그렇게 부인을 떼어놓은 이권영은 생각을 거듭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이권영을 외면하고 남몰래 이윤영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던 산서금붕 이길환은 그 대가를 받아 조금씩 죽어가고 있었고.

소장주 신분인 이중영은 이가장의 소장주가 아비를 잡아먹으려 한다는 괴소문에 휘둘리고, 주어진 권력에 취해가며 점점 더 독선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대로 산서금붕이 숨을 거두기만 했으면 모든 것이 이권영의 손아귀에 떨어졌을 것이었다.

‘혹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 불꽃을 보인 것이라면?’

그나마 아무것도 모르는 부인의 말처럼 볕이 들 가능성이 커지겠지만.

어쨌거나 일 자체가 처음의 계획보다 훨씬 복잡해졌다.

‘영영이 그것은 어렸을 때부터 나보다 이윤영 그 자식을 잘 따랐지.’

이중영은 실각을 했으니, 이윤영이나 외조카들 각각은 정통성에서 자신에게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이길환이 기력이 남은 상태에서 두 세력이 만약 힘을 합친다면 골치가 아팠다.

‘젠장. 이래서야 죽 쒀서 개를 준 꼴 아니냔 말인가?!’

이 모든 것은 누구도 풀 수 없을 것이라 장담한 저주가 풀렸기 때문이었다.

‘아버님이 정말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신 거라면, 신교 사람들을 만나서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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