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5화. 무엇을 해야 하는가 (2)
금총관과 제갈설지가 몇 마디를 나누는 사이.
각각 좌우로 날아가 벽에 틀어박혔던 괴인들이 몸을 빼기 시작했다.
숨 돌릴 틈은 여기까지였다.
정현이 아지랑이가 넘실거리는 송문검으로 기수식을 취하며 입을 열었다.
“준비들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정현의 모습에.
“용명 도련님, 그리고 친우분들. 모두 보중 하십시오.”
금 총관은 검을 고쳐 쥐고 자신이 맡기로 한 괴인을 향해 달려갔고.
“후…. 정현 님, 용명 님?”
제갈설지는 호흡을 고르며 조금 전 세 사람이 눈치껏 맞춰 냈던 합을 다시 한번 정리했다.
“두 분 모두 일전에 진성채에서 용운 님과 노삼 교수님이 보여주셨던 대처법 기억하시죠?”
그 바람에 나온 언용운의 이름에 정현과 언용명의 입이 다물어졌다.
하지만 제갈설지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짐승이라고 생각해야 해요. 손속에 사정을 둬서도 안 되고, 괴인의 공격이 정형화된 초식의 형태가 아님을 염두에 두어야 하고요.”
이번에는 마음을 다잡은 정현도 한마디를 거들었다.
“생명력을 태워 가며 힘을 내고 있는 것이니 시간을 끌면 약해진 다는 것도 염두에 둬야 할 것입니다.”
“정현 님 말씀도 맞아요. 방금처럼만 하면 돼요. 정현 님이 핵이 되어주시고, 제가 왼쪽 날개 역할을 맡을게요. 용명 님은 꼬리 역할이긴 하나 주로 저와 붙어 다니다가 괴인에게 틈이 보이면…. 용명 님?”
언용명은 여전히 굳은 표정이긴 했으나.
굳은 표정과 별개로 당장 눈앞의 괴인이 시급함을 알았기에, 그 역시 제갈설지의 말에 집중을 하고 있었다.
“듣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확인한 제갈설지가 마지막 말을 뱉었는데.
“예. 괴인이 틈을 보이면 그쪽을 공격하시고, 제 쪽에서 틈이 드러나면 지원해 주세요. 조바심은 금물이에요! 우선 괴인의 힘이 충분히 빠질 때까지 버텨낸다는 생각으로 가요! 옵니다!!”
그러자마자 괴인 하나가 짓쳐 들어왔다.
크아아아!!!
들이닥친 괴인을 향해 정현은 지체없이 송문검을 휘둘러 냈다.
쌔애애액!!
시퍼런 검기를 일렁이며 반원을 그려내는 정현의 검.
달려들던 괴인은 동물적으로 방법을 바꿨다.
놈은 최초에는 달려오던 속도를 그대로 살려 포옹하듯 할퀴려 했으나, 그랬다간 조금 전처럼 제갈설지와 언용명의 공격에 본인이 무방비하게 노출이 될 것을 깨달았는지.
끼기긱!
다리를 기이하게 꺾어 급제동을 걺과 동시에 허리를 뒤로 크게 접어 정현의 검을 피해냈다.
부웅-
그리고는 퉁기듯이 몸을 일으켜 세웠고, 이어서 바짝 세운 손날이 쾌검이라도 되는 양 속사를 하듯 정현을 향해 찌르고 들어왔다.
슉! 슉!
슉슉슉!!
물론, 그런 괴인의 공격을 정현도 가만히 보고 있지는 않았다.
쌔액!
정현은 송문검으로 계속해 반원을 그어냈다.
쌔액!
쌔애액!
반원, 그리고 반원, 이어서 또 다음 반원.
그렇게 태극의 묘리를 지키며 밟아내는 보법과 그려지는 반원 속에 면면부절 펼쳐지기 시작한 태극의 검은 아슬아슬한 순간마다 괴인이 팔을 거두게 만들었는데.
쌔애애액!!
꽝!!
그럴 때마다 제갈설지의 와룡검과 언용명의 언가권이 검기와 권기를 흩뿌리며 가세하여 괴인의 허점을 노렸다.
하나, 괴인은 몸을 기이하게 꺾고 비틀면서 상식을 벗어난 공세를 펼쳐냈다.
크아아아!!
그리하여 자신의 활로를 찾거나 세 사람을 위기로 몰았다.
물론, 그렇게 합을 주고받는 동안 꾸준히 생명력을 사르고 있는 괴인의 기도는 조금씩 약해져 갔다.
크르르.
하나, 그건 그거대로 위기를 초래했다.
“제갈 소저!”
“피하세요!”
약해진 괴인은 세 사람의 머릿속에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 게 만들었고.
그런 생각은 자연히 눈앞의 괴인을 한시라도 빨리 처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했으니까.
“…하아. 하아. …방금은 정말 위험했네요. 두 분 덕분에 살았어요.”
조바심을 내지 말자 다짐하고 시작한 싸움이었지만.
눈앞의 괴인을 조금이라도 빨리 처리해야 언용운을 구하러 갈 수 있는 상황이 조바심을 내지 말자는 말을 뱉은 제갈설지 본인도 순간 평정심을 잃게 만든 것이다.
뭐, 아무튼.
정현은 제갈설지가 호흡을 고를 틈을 만들어 주기 위해 괴인을 향해 짓쳐들어갔다.
“잠시 호흡을 고르고 따라 들어오십시오. 저 놈은 제가 맡고 있겠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이 싸움이 시작되기 전부터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던 생각을 다시 한번 상기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렇게 느려지는 시간 속에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정현의 뇌리에 스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스친 생각은 제갈설지가 했던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산서행에 따라왔다면 일이 이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였는데.
그런 생각이 스치자 산서행 대민지원단의 명단이 언용운의 입에서 나왔던 날의 기억도 스쳐 지나갔다.
그날 은하연은 언용운이 발표한 명단에 대해 하나하나 평했었다.
‘정현 도장은 등을 맡길만한 무위를 가졌으니까 그렇다 치고, 작은 언 공자도….’
개중엔 당연히 정현에 대한 평도 있었다.
그런 은하연의 평을 부정하지 않는 언용운의 모습에 정현은 내심으로 기뻤었다.
이 순간.
정현은 그날의 기쁨을 다시 한번 관조했다.
‘나는 지금 그날 누린 기쁨의 값어치를 하고 있는가?’
자칫 잘못하면 심마로 빠질 수 있는 순간이었으나.
정현에게는 찾아든 심마 속에서 우직하게 앞으로 나아갈 심지가 있었다.
그리고 동기가 있었다.
‘베어낸다. 그리하여 언 소협이 부탁하신 이가장 사람들과 다른 생도들을 지켜낸다.’
그러자 정현의 검에 감겨있던 진한 아지랑이들이 실의 형태로 촘촘하게 엉기기 시작했으니.
정현이 절정 고수의 반열에 완전히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우웅-
그에 정현이 이어내는 반원들이 크고 날카로워지며 그려지는 태극이 한층 매서워지기 시작했는데.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합공을 가해오는 언용명과 제갈설지에 퇴로가 막힌 괴인이 멈칫하는 사이.
쌔애애애액!!
정현이 그려낸 태극이 사선으로 회전하며 괴인의 어깻죽지부터 허리를 깔끔하게 갈라냈다.
* * *
이가장의 정문을 넘어서면 바로 나오는 앞마당.
이곳에선 완전히 광풍투개의 모습으로 돌아간 노삼과 괴왕부의 내사 경 노야 간의 싸움이 한창이었다.
꽈르릉!
노삼과 경 노야 두 사람 모두 권사였기에 싸움은 그야말로 초근접전의 형태로 정신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쾅! 쾅! 쾅!!!!
노삼이 주먹을 뻗어내면 경 노야는 장심을 내질렀고, 그렇게 내질러진 장심은 순식간에 용조(龍爪)의 형태로 탈바꿈해 노삼의 눈을 찔러왔다.
퍽! 퍽!
퍼퍼퍽!
그러면 이제 노삼이 팔꿈치를 들어 그 용조를 걷어냄과 동시에 박치기를 시도했다.
그렇게 지근거리에서 수십 초가 삽시간에 교환되었음에도 제대로 된 정타가 들어가지 않자.
이번엔 노삼이 바쁘게 몸을 숙이며 다리를 뻗어 나락을 쓸 듯 하단을 훑어 냈는데.
휘릭!
그런 노삼의 수를 경 노야가 풀쩍 뛰어 피해내자, 곧바로 노삼의 손에서 벼락이 내리치는 굉음과 함께 항룡장이 아래에서 위로 쏘아져 나갔다.
꽈르르릉!!!!
그럼 경 노야도 양장(兩掌)을 모아 장력을 분출해 시뻘건 이무기를 쏟아내 그런 항룡장에 대응했다.
콰콰콰쾅!!!!
평범한 사람들을 미리 대피를 시켜놓았기 망정이지.
범인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사방에서 터져나가는 굉음과 풍압에 귀와 코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을 싸움이었고.
어지간한 고수도 오간 초식 중에 몇 초는 채 알아보지도 못할 싸움이었다.
쾅쾅!!
콰콰콰콰쾅!!!!
실제로 경 노야가 이끌고 온 마군졸 중 몇은 그 틈바구니에 잘못 끼어 곤죽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우위는 분명히 있었다.
거지인 노삼보다 경 노야의 몰골이 점점 더 추레해져 가는 것이 바로 그 반증이었다.
하여, 경 노야로서는 뭔가 새로운 수를 강구해야 할 때였는데.
“늙은 거지가 명줄 한번 질기구나.”
“마두 놈의 혓바닥이 낭창거리는 것을 보니 밑천이 다 드러났나 보구나? 슬슬 똥줄이 타지? 명년(明年) 오늘이 네 제삿날이 될 것이다. 지옥에서도 제삿날에 돌려보내 주는지는 모르겠지만?”
장력을 교환한 직후 두 사람이 동시에 잠시 호흡을 고르는 틈을 타, 경 노야는 이래저래 밑밥을 던져보았다.
“나는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늙은이다. 거지야, 네놈이 나보다 반 수정도 위인 것은 인정하마 작풍월개 소리가 이름 앞에 붙었기에 다 썩어 매운맛이 빠진 생강인 줄 알았는데 제법 매운 맛이 나는구나.”
“그걸 알았으면 이리 기어 와서 얌전히 무릎을 꿇고 곱게 뒈져라. 내 고통 없이 보내주마.”
“근데 밑천이 다 드러났다는 말은 좀 그런데? 동무를 제물로 바치고 도망쳐온 네 제자 놈들이 하는 소리를 그새 까먹었느냐? 이쪽엔 아직 내가 모시는 공자님과 강시들이 있다.”
“누가 제물이 되었을지는 모를 일이지! 잔말 말고 내 장력이나 받아라!”
꽈릉!!
콰콰쾅!!!!
그리고 그렇게 던진 밑밥 속에서 경 노야는 한 가지 실마리를 찾고야 말았다.
‘지금 이 거지새끼가 제자가 희생되었다는 말에 발끈한 것인가?’
물론, 표정이 좀 굳어졌을 뿐 노삼의 권장에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내심의 화가 손발을 어지럽히지는 않는 것이다.
‘하기야. 거지 소굴에서 팔 결이 될 때까지 개겨낸 놈에게 격장지계가 통할 리는 없지.’
하지만 근처에 노삼의 진짜 제자 우소릉이 있었다.
‘우가야 하고 불렀지?’
별호가 작풍월개로 바뀐 노삼이 정무학관에서 열정을 완전히 잃은 것 같다는 정보가 경 노야의 머리에 들어있던 터라.
괜히 한눈을 팔았다가 노삼에게 치명상을 당할까 봐 여즉 내버려 둔 것이었는데.
‘늙은 거지가 단순한 언급으로 노기를 띨 정도로 제자들을 아낀다면? 저 우가 놈을 때려죽이려 들면 분명 몸을 던져 오겠지?’
물론 그러려면 정타 한 대 정도는 몸으로 받아내야 하겠지만.
어차피 가만히 합만 섞고 있다간 이 싸움은 결국 노삼의 승리로 끝나게 될 터였다.
‘도박이긴 하지만 지금으로선 유일하게 우리 쪽이 이가장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수다!’
쌔애애액!!!
생각을 마친 경 노야는 원래라면 노삼의 주먹을 피하거나 장심으로 막았어야 했을 순간에.
스윽-
몸을 슬쩍 틈과 동시에 오히려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디뎌 왼 팔뚝을 노삼의 주먹에 가져다 붙였다.
반 박자 빠르게 맞아 위력을 줄이는 수법이었다.
뻐각!!
하나 주먹의 주인이 노삼이었기에 경 노야의 왼팔 뼈가 쇳소리를 내며 부러져 나갔고.
“끙.”
“?”
그에 노삼 본인도 갑자기 이 마두새끼가 돌았나 하는 표정을 지은 그때.
경 노야는 입을 ‘끙!’ 하고 앙다물며 마군졸들을 견제하고 있던 우소릉을 향해 우수를 뻗어냈다.
그리고 일신의 내력을 일거에 쏟아내듯 강렬한 장력을 분출했다.
콰콰콰콰콰쾅!!!!!!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 이런 죽일 놈이?!”
경 노야의 예상대로 노삼은 우소릉을 감싸기 위해 몸을 던져왔고.
덕분에 경 노야가 분출한 장력은 고스란히 노삼의 가슴팍을 강타했다.
꽝!!!!!!!
그에 노삼이 검붉은 선지피를 토해내며 주저앉았고, 우소릉이 화들짝 놀라며 노삼을 부축했는데.
“쿠, 쿨럭.”
“교수님?!”
그 모습을 보며 경 노야는 한바탕 대소를 터트렸다.
“푸하하하하! 꼴좋구나! 늙은 거지!”
그리고 노삼의 숨을 거두기 위해 우수에 붉은 아지랑이를 감고 저벅저벅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우소릉이 떨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검을 세웠다.
“꼬, 꼼짝 마라 마두놈아!”
우소릉의 모습에 경 노야는 또 한 번의 대소를 터트렸다.
“푸하하하! 그 떨리는 손발로 뭘 하겠다는 것이냐? 마두놈 소리가 이렇게 귀엽게 들리는 것은 평생 처음이구나. 끌끌. 꼬마야 어차피 다 죽여줄 것이니 그렇게 나설 것 없다. 장유유서라는 말도 있지 않느냐? 명년 오늘 제사상을 같이 받더라도 갈 때는 늙은 거지가 먼저 가야지?”
그렇게 경 노야가 이죽거리고 있는 사이.
땅을 짚고 일어선 노삼이 양손으로 삼각형을 만들며 후- 하고 호흡을 고르더니.
왼 주먹을 허리에 붙이고 오른 손바닥을 앞으로 뻗으며 입을 열었다.
“우가야, 너는 즉시 덕근이 놈이랑 장호가 있는 삼선으로 물러나라.”
“그, 그렇지만.”
그에 우소릉이 쭈뼛거렸고.
경 노야는 계속해 비웃음을 흘렸다.
“그냥 곱게 가지 발악을 하시려는가?”
그런 경 노야를 향해 노삼은 퉤! 하고 피가래를 뱉어내며 입을 열고는.
“간지럽지도 않던데?”
다시 한 번 우소릉을 다그쳤다.
“얼른 물러나래도! 오장육부가 자리를 바꾼 거 같긴 하지만, 늙은 마두 하나 쳐죽일 힘은 있다!!”
그런 노삼의 모습에 경 노야가 또 한번의 비웃음을 흘리고, 노삼은 심기를 다지는 그때.
히히힝!!!!!!
이가장의 정문에서 말 울음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났다.
그에 노삼과 경 노야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는데.
“공자님?”
“…언가놈?”
이가장의 대문을 넘어 들어온 사람은 경 노야가 기다리던 곽사홍도, 노삼이 기다리던 언용운도 아닌 팽무혁.
“…이게 뭔?”
그리고 언정웅이었다.
“뒈지려고 환장들을 하셨습니다. 감히 이가장을 넘보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