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6화. 나비효과 (1)
이 시점에 언정웅과 팽무혁이 이가장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언용운이라는 나비가 활개를 치고 돌아다닌 결과였다.
그도 그럴 것이.
언용운이 정무학관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다면?
팽무혁이 팽재혁을 시켜 하북삼협의 자제들에게 일어나는 일을 보고하라고 시킬 일 자체가 없었다.
백번 양보해 팽무혁이 팽재혁에게 그런 보고를 시킬 수 있다고는 치더라도, 하북삼협이 모여 그 소식을 듣는 일은 절대로 없었을 것이다.
겉보기엔 융통성 없이 우직하고 정직한 사람이 언정웅이었지만.
내심에는 잔정이 많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팽무혁과 석금필인데, 장남을 호적에서 파낸 언정웅을 앉혀 놓고 다른 자제들의 이야기를 할 리가 만무했다.
그러니 본래라면 정무학관의 생도들이 살수들의 습격을 받은 일을 접하는 시기가 늦어졌을 것이었고.
그 사실을 전달받은 시기가 늦어졌다면 비슷한 시기에 날아온 백본회의 정기회 소집에 응할 일도 없었다.
하북은 비교적 평화로웠다.
하여 백본회까지 가서 논할 안건이 없었으니, 원래라면 늘 그래왔듯 이미 파견돼있는 각 가문의 대의원들에게 일임하였을 터였다.
하나, 언용운이 만들어 낸 나비효과가 ‘원래’의 모습들을 바꾸어 언정웅의 걸음을 옮기게 만들었고.
또 무림맹에서 체류하고 있는 팽소진의 존재가 팽무혁의 걸음까지 함께 옮기게 만들었다.
그렇게 향한 낙양의 무림맹.
그곳에선 팽가와 공손가가 사승의 연을 맺게 되어 언정웅, 팽무혁, 공손무결이 사사로이 만나 긴한 이야기가 이어졌는데.
“…우리 소진이를 잘 부탁하네.”
“팽 선배께서 그리 말씀을 해주시니 이 공손 모가 한시름 덜었습니다. 아까 소진이를 보신 것으로 아는데, 혹 검을 휘두르는 모습도 보셨습니까?”
“그건 보지 않았네, 그냥 열심히 하라고만 했지. 괜히 부담을 느낄까 봐서.”
“하하하. 천하의 도제도 자식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아버지이신 모양입니다.”
“끙, 자식 농사가 제일 어렵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야.”
“저는 자식이 없어서 그 마음을 모르기에 선배께서 화를 내시면 어쩌나 괜히 속을 끓였습니다. 아무튼 소진이는 잘하고 있습니다. 빈말이 아니라 나중에 가면 저보다 더 높은 성취를 거둘 것 같습니다. 아, 그리고 언 선배께도 감사드립니다.”
“제게 감사를요?”
“예. 소진이와 제가 사제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전적으로 용운이 덕분이니까요.”
처음에는 그저 딸아이를 잘 부탁한다는 팽무혁의 말과 잘 가르치겠다는 공손무결의 답으로 이야기가 시작됐지만.
어느새 화제가 언용운으로 옮겨가며, 공손무결의 입에서 언용운이 견학을 왔을 때 나눴던 약속에 관한 이야기가 튀어나왔고.
“…그러다가 태원이가의 선산이 도굴을 당한 건이 아무래도 찝찝하여 용운이에게 부탁을 해뒀는데, 시국이 시국인지라 그 부탁을 취소한다는 말을 전했습니다만. 용운이 녀석이 기어이 태원으로 갔습니다.”
그 이야기는 낙양에서 볼일을 마친 언정웅과 팽무혁이 하북으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귀로를 두고 어떤 대화를 나누게 만들었다.
“이보게, 정웅.”
“예, 의형. 말씀하십시오.”
“이럴 게 아니라 산서를 들렀다 가는 게 어떻겠나?”
“이가장에 들르자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공손 후배가 말한 도굴 건도 그렇고, 정정하시던 자네 장인이 갑자기 아프신 것도 좀 찝찝하지 않은가 말이야.”
“…흠.”
“용운이랑 용명이도 때마침 가 있다고 하니, 병문안을 겸해 들렀다 가면 좋을 것 같은데?”
팽무혁은 나름대로 찝찝한 구석도 확인하고 소진이의 일에 관한 보답으로 웅패환을 줄까 하여 그리 말한 것이었는데.
근래 언용운의 일이라면 입꼬리를 가만히 두지 못하던 언정웅의 답이 어째선지 바로 나오지 않았다.
그에 팽무혁의 재차 입을 열었다.
“이게 그렇게 고민을 할 일인가? 아니 애초에 낙양에 오는 길에 정웅이 자네 입으로 장인어른의 병환이 걱정이라는 소리를 했잖나?”
“…그게. 소장주인 큰처남이 저와 부인한테 보낸 서신이 있어서 말입니다.”
“서신?”
“예. 장인어른의 병환은 알아서 할 것이니 신경 쓰지 말라시면서, 괜히 처가의 유산을 탐낸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으면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부인이 받은 것도 비슷했는지 병문안은 가지 말자고 하였고요.”
“사람이 꽉 막혀서는. 자네 의형이 이래 봬도 하북팽가의 가주이지 않나?! 어디를 가도 함부로 쫓아내지는 못하는 객이니, 나랑 함께 가면 정웅이 자네 큰처남도 허튼소리를 하지는 못할 거야. 내 핑계로 한번 가보도록 하세.”
* * *
언정웅과 팽무혁이 이가장에 등장한 것은 그간 켜켜이 쌓여온 나비효과가 겹치고 겹친 결과였다.
하여, 경 노야로서는 갑자기 나타난 두 사람이 그야말로 청천벽력일 수밖에 없었다.
‘하북권웅은 그렇다 쳐도 도제가 산서에는 왜?!’
하여 일순 사고가 멈출 정도로 경악할 수밖에 없었는데.
“의형은 우측을 좀 맡아 주십시오. 노 선배 쪽은 제가 가보겠습니다!”
“그렇게 하세!”
그러는 사이 팽무혁과 갈라진 언정웅이 날듯이 달려와 노삼과 경 노야의 사이에 비스듬히 내려앉더니.
북!
부우욱!!
펄럭이는 장포의 소매를 찢어내곤 주먹을 말아 쥐며 경 노야를 향해 입을 열었다.
“처음 뵙는 노인장이신 것 같은데. 뉘시기에 남의 처가에서 이리 소란을 피우고 계십니까?”
예의 바르기 그지없는 말이었지만 딱 말만 그랬다.
언정웅은 경 노야의 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자기 할 말만 하고 곧바로 주먹에 아지랑이를 감았고, 그러자마자 번쩍하고 뛰어 들어가 경 노야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펑! 펑! 펑펑펑!
그에 경 노야가 다급하게 언정웅의 주먹을 쳐내기 시작했는데.
팍! 팍! 파팍!
노삼을 쓰러뜨리기 위해 육참골단의 수를 쓰느라 왼 팔뚝을 내어준 경 노야가 언정웅의 주먹을 완벽히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여 부득불 주먹 하나를 이마로 받아내고자 일부러 머리를 들이밀었는데.
계산이 살짝 어긋나 번쩍하는 사이 코가 깨지고 말았다.
빡!!!!
이에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우소릉이 한마디 중얼거렸는데.
“말투만 작은 언 형이랑 비슷하지, 하는 행동은 언 형이랑 완전 판박이셔….”
녀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언정웅이 경 노야를 향해 다음 주먹을 뻗어왔다.
팍! 팍! 파파팍!!
경 노야는 그 주먹을 바쁘게 쳐내며 조금 전보다 크고 빠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면서 힐끔 우측을 봤는데.
팽무혁의 대도에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가는 마군졸들이 보였다.
갑자기 나타난 청천벽력의 위력을 확인한 경 노야는 까득 이를 악물었다.
‘일이 완전히 글렀구나. 본래라면 이 자리에서 장렬히 옥쇄하여 신교인의 기개를 보여야 하겠으나….’
이 실패를 누군가는 알려야 했다.
“교인들은 이리 모여라!”
그런 경 노야의 음성에 팽무혁에게 쓸려나가느라 바쁜 자들을 제외한 마인들이 속속들이 모여들었는데.
퍽! 퍽! 퍽퍽퍽!!!
경 노야는 주먹을 뻗어오는 언정웅을 향해 모이기 시작한 수하들을 땔감처럼 밀어 넣으며 계속해 걸음을 뒤로 물렸다.
그렇게 모인 수하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하나는 괴왕부 산하의 귀도궁에서부터 따라온 자들로, 신교와 귀도마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자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마군졸이라 지칭되는 잠폭환에 홀려 입교한 녹림 출신 신출내기 교인들이었다.
경 노야가 땔감처럼 집어던지고 있는 수하는 그중 후자였다.
‘이깟 놈들은 시간만 주어지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것들이지.’
마군졸들은 속으로는 도망을 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을 자들이었다.
‘그저 괴인화가 나나 공자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줄로만 알고 있어 도망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니, 하등 아까울 게 없지.’
하나, 순서가 뒷순위일 뿐 귀도궁에서 데려온 궁인들도 땔감처럼 사용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 마녀의 견제를 피해 어렵게 키워낸 궁인들을 소모해야 하다니 너무도 아깝구나.’
그러나 다른 수가 없었다.
곽사홍과 강시들을 데리고 태원 경내를 빠져나가려면 시간을 벌어야 했다.
‘아까워도 어쩔 수 없다! 혈강시와 공자님만 지켜내면 혹시 모른다! 역천괴마 어른께서 그 마녀의 손에서 공자님을 한 번은 지켜 주실지도 몰라! 그럼 다시 기회가 있을 것이야!’
생각을 마친 경 노야는 귀도궁의 궁인 중 본인 다음으로 지위가 높은 자에게 전음을 보냈다.
[일호.]
[예, 어르신.]
[나는 지금 바로 공자님께 갈 것이다. 너는 남아 마군졸들을 이끌되, 부상을 입어 쓸모가 다한 놈을 제물로 삼아 혈해무(血海霧)를 펼쳐라.]
혈해무는 다른 게 아니었다.
마공을 익힌 아군을 특정한 방식으로 터트려 죽여 그 피로 안개를 뿜게 하는 수법이었는데.
‘신교불패’란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천마신교의 교인들에겐 그 자체로 패배를 뜻하는 수법이었고.
전원 이 자리에서 옥쇄해서라도 시간을 끌라는 말이었다.
그 뜻을 확고히 하고자 경 노야의 입에서 천마가 다시 세상에 오는 날을 기약하는 말이 새어 나왔고.
[천마재림.]
일호가 그에 답했다.
[만마앙복.]
그와 동시에 경 노야가 장력을 분출해 근처에 있던 마군졸 하나를 터트렸다.
펑!!!!!!!!!!!!
그에 피비린내 나는 안개가 펼쳐지는 가운데, 경 노야가 선산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제 편을 죽이는 마두의 모습에 언정웅은 본능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
그리고 도망치는 경 노야를 보며 쫓아야 할까 잠시 고민했다.
하나, 언정웅의 생각으론 내상을 입은 것으로 보이는 노삼과 이가장의 사람들을 챙기는 것이 중하게 느껴졌다.
하여, 쫓으려던 걸음을 멈추고 노삼 쪽으로 향했는데.
“노 선배! 우 소협! 괜찮습니까?!”
노삼이 그런 언정웅의 멱살을 움켜쥐며 다급히 입을 열었다.
“선산으로! 여기는 팽무혁 저 친구랑 나한테 맡겨놓고 지금 당장 선산으로 가게!”
“그 몸으로 말씀이십니까? 그리고 갑자기 선산으로 가라니요?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설명할 시간이 없네! 거기 용운이 녀석이 강시를 부리는 마두놈과 홀로 있어! 아직 생사를 몰라!”
“예에?”
“늙은 마두도 그리로 가는 걸 거야! 만에 하나 용운이 녀석이 버텨내고 있었더라도, 저 늙은 마두가 끼어들면 사정이 바뀔 거야! 한시가 급하네! 빨리!”
* * *
아귀 구슬이 게걸스럽게 옥관에 든 원한 섞인 피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슈우우욱-
그에 최초에 시커멓던 아귀 구슬의 색이 점점 붉어지기 시작했는데.
- 흡수할 것이라더니? 이건 저번에 네 외조부의 저주를 해제할 때 사용했던 방술이 아니냐?
그 모습을 보며 허리춤의 사부님께서 이런저런 생각을 던져 오셨다.
- 꿀꺽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끔찍하게 죽은 넋들을 위로하기 위해 흡수한다는 이야기였느냐? 하기야 용운이 너는 처음 만났을 때도 불쌍한 넋들을 위로해 줬더랬지? …녀석, 마냥 후안무치 같다가도 한 번씩 기특하단 말이지.
‘엥? 꿀꺽할 건데요?’
- ……?
‘넋을 향한 위로야 방금 큰절을 올리지 않았습니까? 방술 자체는 비슷한데 자세히 보시면 구슬에 새겨진 글귀가 외조부님 때랑 다릅니다. 그때는 해주(解呪)의 술식이었고, 지금은 자문(刺文)의 술식으로요.’
- 자문? 문신을 새긴단 말이냐? 어디에다가?
‘음. 아마 상단전 안이겠죠?’
- …아마?
그렇게 사부님의 의문을 해소해드리고 있는 그때.
옥관에 든 핏물과 기운을 모조리 빨아냈는지 시뻘게진 아귀 구슬이 부르르 떨었다.
우웅!!
그에 옥관 안을 들여다보니.
어찌나 알뜰히도 빨아냈는지, 당연히 핏물은 전부 없어졌고 안에 들어있던 강시마저 가뭄을 만난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져 있었는데.
톡.
호기심에 강시를 건드려보니.
파슷-
파스스-
그대로 부서져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가루가 되어 비산했다.
하여 옥관 안엔 귀와 눈을 덮고 있던 밀랍 덩이만 덩그러니 남았다.
“잘했어.”
나는 피식 웃으며 아귀 구슬을 오른손으로 쥔 뒤에, 미리 그려둔 마법진 위에 퍼질러 앉았다.
“갑니다?”
그리고 왼쪽 가슴에 그대로 쑤셔 박기 시작했는데.
그러자마자 구슬 안에 갇힌 원념들이 울부짖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육신이 떨려오며 이가 딱딱 부딪히기 시작했다.
으드드드드드-
- 가긴 어딜 가느냐! 요즘 좀 잠잠하다 했더니만, 이놈의 자식이 오랜만에 병이 도졌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