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158화 (158/444)

제158화. 나비효과 (3)

팔 하나를 내놓고서야 나를 떨쳐낼 수 있었던 경 노야는 쥐한테 물린 고양이 같은 표정을 지으며 혀를 내두르더니.

“…허. 허허허.”

우수의 소매를 이로 북! 하고 큼지막하게 찢어 왼팔의 환부를 동여매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나는 조심스럽게 호흡을 골랐는데.

이 틈을 타 우수에 들린 사부님께서 입을 열어오셨다.

- 아직 검기성강(劍氣成罡)의 벽을 넘지 못한 녀석이 어찌 검강을 검에 서리게 했나 했더니, 철수개화(鐵樹開花)를 하고 있는 것이로구나.

철수개화란 쇠로 된 나무에 꽃이 핀다는 말이었다.

민가에서 통용되는 본래의 뜻은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의미하는 말이었지만.

강호에서 통용되는 의미는 방금의 나처럼 본래라면 닿을 수 없는 경지를 펼쳐내는 것을 뜻했다.

- 혹시나 하는 노파심에 묻는다만, 선천진기를 끌어다 쓴 것은 아니겠지?

뭐, 사부님의 저런 물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평범한 무림인이 철수개화를 해낼 때는 회광반조 그러니까 죽기 직전에 몸이 내는 마지막 힘을 사용하거나, 선천진기라 하여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나는 생명의 근원을 가져다 썼을 때나 가능한 것이었으니까.

아무튼, 나는 그 두 가지에 모두 해당하지 않았기에 곧바로 사부님의 우려를 곧바로 일축했다.

‘그럴 리가요. 혈조술이라고 아까 보여드린 혈용 소환술의 응용입니다. 왜, 다른 방식으로 쓸 수 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 멀쩡한 왼손바닥에 상처를 내길래 그것인가 싶긴 했느니라. 별 희한한 방법이 다 있구나? 하여, 지금의 상태는 얼마나 유지할 수 있는 것이냐?

시간이라.

방금 시원하게 써버렸으니, 오늘 새긴 혈륜의 출력으론 앞으로 십오 분 정도 유지하는 게 최대치일 터였다.

‘앞으로 최대 일각 정도요?’

- 최대라 하면, 감고 있는 것만 그렇다는 것이냐?

‘예. 방금처럼 휘둘러 대면 시간으로 말하기는 어렵고. 두 번 정도가 최선일 것 같습니다.’

- 녹록한 노인네가 아니다. 그거 가지고 저 노괴의 목을 베기는 무리일 듯한데?

‘하지만 저 노인네는 그 사실을 모르죠. 모르니까 방금처럼 활개를 치듯 공격을 해오지는 못할 겁니다.’

- 하기야 그건 또 그렇구나?

그렇게 사부님과 생각을 나누고 있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왼팔의 환부를 동여매는 것을 끝낸 경 노야가 팟! 하고 땅을 박차며 다시 한번 이쪽으로 뛰어들었는데.

“이놈!”

내 예상대로 경 노야의 손속에선 조금 전과 달리 조심성이 묻어났다.

공세에서 조심성이 묻어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날카롭지 않다는 것이었다.

쌔애액!!!

물론 뭉툭한 둔기에 맞아도 사람은 죽고, 화경의 반열에 닿은 고수의 공격은 그런 둔기와도 같았지만.

내게는 아직 열두 구의 강시가 있었다.

펑!!!!

그렇게 강시 하나를 앞세워 어렵지 않게 경 노야의 장심을 피해내자.

경 노야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한마디를 뱉어냈다.

“…알면 알수록 해괴한 놈이로구나.”

여기까지만 들었을 땐 단순히 게임 조까치 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 같았지만.

“묘하게 본교의 검초를 닮은 그 검도 그렇고, 강시술도 그렇고, 이제보니 본교의 인물평과 완전히 거꾸로인데?”

“만드는 놈이 눈이 썩었나 보지.”

“네 놈은 필히 교단으로 데려가야겠다.”

결론이 좀 이상하게 났다.

“노부를 얌전히 따라오겠느냐?”

“내가 왜? 영감이나 사홍이 놈을 따라가라니까?”

“그렇게 나온다면 어쩔 수 없지, 팔다리를 모두 부러뜨려서라도 데려가는 수밖에.”

그리고 그 결론은 이 싸움을 새로운 국면으로 향하게 했다.

경 노야가 제 몸을 돌보지 않고 공격을 펼쳐오기 시작한 것이다.

크아!!!

그에 한 구의 강시가 경 노야의 가슴팍을 할퀴는 데 성공했지만.

펑!

그러자마자 그 강시가 터져나간 것을 시작으로.

펑! 펑! 퍼엉!!!

세 구의 강시가 추가로 터져나갔고.

그러면서 생겨난 틈으로 검붉은 이무기의 형상을 한 장력이 뻗어 나왔다.

콰콰콰쾅!!!!

당장에 다른 강시를 불러들이기엔 늦었고 피할 각도 없었다.

‘이건 못 피한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혈조검강이 감긴 회한을 가로로 그어 응축된 기운으로 이루어진 이무기를 썽둥! 하고 갈라냈는데.

‘!’

여기서 문제는 당장의 위기는 넘었지만, 다음이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본디 혈조술을 응용한 유사 검강을 두 번 정도는 휘둘러 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간신히 유지하는 것도 앞으로 얼마간이 고작일 것 같았다.

‘생각보다 기운이 너무 빨렸다.’

나는 빠르게 남은 강시들의 대오를 정비했다. 그리고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죽는 소리를 낼 순 없어.’

그럼 진짜 죽는다.

십만대산으로 가자 하니, 당장 죽지는 않겠지만 결국 그곳에서 곽사홍의 목숨값을 토해내야 할 터였다.

‘어차피 저 괴물 같은 노인네도 슬슬 한계일 수밖에 없어.’

이가장에서 누적된 피로.

잘려나간 팔.

강시들에게 긁힌 피부.

다음 공세를 바로 이어오지 않고 호흡을 고르고 있는 것만 해도 그랬다.

‘애초에 이곳으로 돌아온 이상 옥쇄를 할 생각은 없었을 거고.’

마교인들은 일이 틀어졌을 때 장렬하게 목숨을 던져 옥쇄를 해오는 자들이 많았다.

내세에서 그 공을 천마에게 치하받고, 이 땅에 천마가 재림할 때 함께 재림한다고 믿기에 그러는 것이었는데.

그러지 않고 여기 왔다는 것은 애초에 교단으로 돌아가 일의 실패를 보고하고자 하는 뜻이 있다는 방증이었고.

‘원래는 곽사홍을 살리는 것이 목표였겠지만, 곽사홍의 죽음을 확인하고도 내게 십만대산으로 가자고 한 것은.’

곽사홍을 따른 것도 천마의 그릇이 될 자질이 있다고 보았기에 따른 것일 뿐.

개인의 복수심보다 천마재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라는 것이었다.

그 점을 깨달은 나는 허장성세를 펼치며 입을 열었다.

“영감, 당신은 나보다 분명히 강해. 하지만 조금이라도 틈을 내보이면 나는커녕 혼자서도 십만대산에 돌아가지 못하게 될 거야.”

그러면서 은근히 십만대산에 당신 혼자서도 못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말을 흘렸다.

“…….”

그런 내 말이 의표를 찌른 것일까?

경 노야는 호흡을 다 골랐음에도 손속을 뻗어오지 않고 입술을 짓씹으며 잠시 행동에 뜸을 들였는데.

그 덕에 벌게 된 약간의 시간 끝에 선산 아래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 * *

선산 아래에서 나는 인기척에.

경 노야는 이를 까득 갈며 곧바로 걸음을 틀었다.

“!”

그리고 득달같이 제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런 경 노야의 행동은 내게 두 가지 의문이 들게 만들었다.

‘인기척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견적도 안 내보고 가네? 근데 왜 제실 안으로 들어가지?’

그중 첫 번째는 상대를 가늠해 보지도 않고 내뺀다는 점이었고.

두 번째는 왜 제실로 들어갔느냐였는데.

‘혈강시를 찾아 들어간 건가?’

그중 두 번째 의문을 고민하는 동안 인기척의 주인들이 나와 가까워지며 첫 번째 의문은 풀리게 되었다.

- 음? 맨 앞에 서서 부리나케 달려오는 저기 저 양반이 네 아버지 되는 위인 아니냐? 나머지는 소릉이, 정현, 용명이 그리고 설지 그 아이로구나?

‘…어. 그러게요?’

애들은 그렇다 치고.

형이… 아니 아버지가 여기서 왜 나오지?

반갑고 든든한 것과 별개로 언정웅은 이 시점에 산서에 오지 않는 사람이었다.

원작에서 하북이 공격당할 때 지원을 와준 금 총관을 향해 처가가 위험할 때 자신은 눈치도 못 챘다며 자책을 하던 모습이 기억에 선했다.

그에 내 입에선 그런 생각이 그대로 튀어나와 버렸는데.

“…아버지가 어떻게?”

“괜찮으냐? 어디 다친 곳은 없느냐? 오는 중에 용명이 녀석에게 대략적인 이야기는 들었다! 미련한 녀석 같으니!”

아니, 뭔 이야기를 어떻게 들으셨길래?

“언혀어어엉!”

“원시천존, 도덕천존, 영보천존. 삼청께서 도우셨습니다!”

안 도왔어!

“형님! 흐헝헝! 제가 얼마나 걱정을 하였는지 아십니까?! 선조들께서 도우셨습니다!”

그분들도 안 도왔어!

부둥켜안기만 하고 아무도 내 질문에 답을 안 해주는 와중에.

반걸음쯤 물러나 있던 제갈설지가 볼을 긁으며 답을 해주었다.

“하북팽가의 가주님과 함께 들르셨어요. 저희도 급하게 이리로 오면서 용운님 이야기만 한다고 그것밖에 몰라요.”

아. 그럼 인정이지.

언정웅에 팽무혁까지 같이 왔으면 이가장 쪽 싸움은 완전히 가둬두고 팬 상황이 됐을 것이다.

두 사람이 왜 이가장에 왔는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경 노야 그 늙은 마두가 왜 꽁지가 빠져라 도망을 쳤는지 이제야 이해가 됐다.

아무튼 남은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뤄야 했다.

경 노야가 제실 안으로 들어갔기에 스스로 궁지를 찾아 들어간 꼴이 되어서 잠시 이러고 있었으나, 마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나는 우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잠시 입을 다물게 만든 뒤.

“그만!”

이어서 본론을 입에 담았다.

“경 노야. 그 노마두가 아직 살아있습니다. 저 제실 안으로 들어갔어요.”

“그게 정말이냐?”

“예. 저로서는 역부족이라 쫓아 들어가지는 못했는데 저리로 들어갔습니다.”

“잘했다. 내 직접 합을 섞어 보았는데 녹록한 노인이 아니더구나.”

그때였다.

내 말에 언정웅을 필두로 동기생들이 동시에 제실 방향으로 기수식을 취한 그때.

펑!!!!

제실의 지붕이 뚫리더니 경 노야가 모습을 드러냈다.

튀어나온 경 노야의 손엔 손잡이가 달린 종이 들려 있었는데.

딸랑! 딸랑!

딸랑! 딸랑!

처음에는 무부금강시의 주도권을 되찾아 보려고 저러나 했으나, 귀에 걸리는 파장이 곽사홍이 흔들어 댔던 혈령이라는 방울의 소리와 완전히 달라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 찰나.

푸슉!

푸슉! 푸슈슉!!

제실 인근의 흙으로 된 땅에서 시퍼런 손이 우후죽순처럼 삐져나오기 시작했다.

관뚜껑을 덮지 않고 매장해둔 강시들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에 사부님께서는 죽은 사홍이 놈을 향한 의문을 던져 오셨고.

- 강시가 이렇게나 많은데 그놈은 왜 사용을 안 하고 그러고 간 것이냐?

나는 나대로 큰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너무 많아.’

내가 왕년에 사령왕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지금 이 몸은 그 몸이 아닌 언용운의 몸이니, 결국 내력이 부족하면 흑마법을 사용할 수가 없는데.

조금 전에 금강시들을 운용하며 유사 검강을 사용한다고 내력이 바닥을 드러낸 상태였기에 그랬다.

크아!!!!

하지만 해볼 만했다.

흙을 헤치며 튀어나온 강시들의 피부가 벌레에 뜯어 먹힌 것과 이마에 부적들을 붙이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이 강시들은 고수 반열에 든 사람에겐 전혀 위협이 되지 못하는 평범한 시체와 크게 다를 게 없는 별거 아닌 강시였기 때문이었다.

“정현, 제갈설지, 용명아. 저 놈들 아까 상대한 강시랑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아까 나와 같이 상대한 놈들의 몸이 무쇠와 비슷했다면 이것들은 찰흙이야. 겁낼 거 없어.”

그렇게 강시들과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리 대단한 강시가 아니었기에 검을 휘두르는 족족 강시의 오체가 잘려 나갔고.

썽둥! 썽둥!!

내가중수의 묘리를 담고 있는 언가권이 날아가는 족족 강시들이 터져나갔다.

펑! 펑!!!

다만 그 수가 너무 많았다.

태원에서 근 몇 년간 돌아가신 분들을 다 깔아 놨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았다.

그에 내 뇌리엔 이 강시들의 용도가 곧바로 스쳤다.

‘시간을 버는 용도.’

아니나 다를까.

“언용운! 감히 신교의 대계를 망쳐놓은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될 것이다!!”

경 노야는 이를 갈며 한마디를 뱉어내더니.

강시들 틈으로 휙! 하고 몸을 날렸다.

직접적으로 흑마법을 사용하는 일은 되도록 피하려 했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나는 경 노야를 쫓을 수 없으니까.’

그렇다면 남은 내력을 짜내 최대한 강시들을 무력화시키고, 남은 강시들의 처리와 경노야의 추격은 아버지와 동기들에게 맡기는 수뿐이었다.

생각을 마친 나는 곧바로 동기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내가 강시 중 절반 정도는 무력화시킬 테니 정현, 제갈설지, 언용명, 우소릉 너희가 길을 좀 열어.”

그리고 이어서 언정웅에게도 말을 전했다.

“그사이 아버지는 경 노야를 쫓아 주십시오.”

그런 내 말에 금강시의 위력을 확인한 세 명은 지금까지 살아남은 나라면 정말 무슨 수가 있나 보다 하는 표정을 지었고.

소릉이 녀석과 언정웅은 눈을 키웠다.

하지만 자세한 설명을 해주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우웅-

나는 선천진기를 제외한 거의 모든 내력을 상단전으로 밀어올려 거대한 흑마법진을 그려 낸 뒤.

언령으로 그 흑마법진을 발동시켰다.

“사멸하라.”

그에 일순 시커먼 섬광이 번쩍 하며 강시 중 절반 이상이 실이 끊긴 인형처럼 픽! 하고 쓰러졌고.

나 역시 극심한 피로감을 느끼며 소릉이 녀석의 어깨를 빌리게 되었는데.

그 와중에 나는 제갈설지를 가리켰다.

입만 벌리고 있지 말고 정신을 차리라는 뜻이었다.

‘!’

그에 이성을 되찾은 제갈설지가 주변을 향해 입을 열었고.

“어, 언가주님! 그리고 여러분! 어안이 벙벙하신 것은 압니다만 지금은 용운 님의 말을 따라 주세요!”

“어. 그, 그래. 알겠네.”

“빈도가 길을 열겠습니다.”

“저도 돕겠습니다. 정현 도장.”

“저, 저는 언 형을 챙기면서 후미를 따를게요!”

음.

제법 키운 보람이 느껴지는 게.

눈을 좀 붙여도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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