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2화. 뺨을 때려 주시네 (2)
씁쓸함을 뒤로하고, 나는 윤영 숙부와 함께 이권영의 시신을 수습했다.
수습이라 하여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팔다리에 감긴 족쇄를 풀어 바닥에 눕히고 입가에 말라붙은 피를 닦아내는 것이었는데.
그러는 사이 감정을 다스려낸 윤영 숙부가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버님께 말씀을 드려야겠는데, 나는 권영이 곁을 좀 지키고 있어야 할 것 같구나. 녀석은 용서받지 못할 짓을 했다. 나 역시 용서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 녀석 나름의 속죄를 했고, 또 고통 속에 외롭게 갔으니 잠시나마 곁에 있어 주고 싶다.”
윤영 숙부의 심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고.
기껏해야 말을 전하는 일이 번거롭거나 어려울 리도 없었기에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하면, 제가 외조부께 가서 소식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한데, 윤영 숙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용운이 너보다 언 서방이 전하는 게 나을 것 같구나.”
“아버지가요?”
“그래. 네 외조부님이 보기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처럼 보이시지만….”
“속정이 깊으시죠.”
어머니와의 일 같은 것을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만 해도 그랬다.
“오냐. 용운이 너도 알겠지만 네 외모가 영영이를 많이 닮았다. 같은 말이라도 네 입을 통하면 상심이 두 배는 크실 듯하구나. 그리고 나도 네게 그런 무거운 말을 맡기기가 싫고. 그렇다고 또 남에게 맡길 일도 아니니, 언 서방이 이 일을 맡아줬으면 싶구나.”
듣고 보니 윤영 숙부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그럼 아버지께 윤영 숙부의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언 서방에게 내 어려운 부탁을 좀 하마.”
“예.”
그렇게 지하실에서 나온 나는 그 길로 곧장 언정웅을 만나러 갔다.
‘조문하러 가는 길에 아버지랑 무혁 백부 그리고 노삼 교수가 앉아 있던 곳이 저쪽이었지?’
오면서 세 사람이 어디에 앉아 있었는지 기억해 뒀기에, 찾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고.
다행히 팽무혁, 언정웅, 노삼 세 사람 모두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정웅이 자네 큰아들이 오는구만?”
“음? 벌써 오느냐?”
“다른 놈들은 어디 가고 혼자 오는 것이냐, 언가야?”
나는 우선 팽무혁과 노삼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백부님. 노삼 교수님께서는 내상을 입으셨다고 들었는데 괜찮으십니까?”
내 인사에 팽무혁은 팔짱을 끼고 근엄하게 고개를 주억여 왔고.
노삼은 너스레를 떨어왔다.
“내상은 무슨. 나는 마두놈에게 다치고 그러는 사람이 아니다. 춘장 바르면 낫는 수준으로 살짝 긁혔을 뿐이야.”
소릉이 녀석에게 들은 이야기를 참고하면 절대로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았지만.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나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백부님, 교수님. 산재한 이야기가 많은 줄은 압니다만, 내실에 아버지를 모시고 가야 할 일이 좀 생겼습니다.”
“그러냐? 하면 그 일이 우선이지, 언 가주는 가보시게.”
그런 내 말에 노삼은 가보라며 손을 휘휘 저었고.
팽무혁은 나름의 추측을 하며 언정웅의 등을 밀었다.
“내실이면 장인이 부르시는 거 아닌가? 이번 일로 박혀 있던 미운털이 좀 뽑힌 것 아니겠나? 서둘러 가보도록 하게.”
기실 팽무혁이 하는 추측과는 거리가 많이 멀었지만.
서둘러 가봐야 하는 것만큼은 맞았기에 나는 말을 아꼈고.
“…….”
언정웅은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따라나섰다.
“의형, 노 선배. 그럼 저는 잠시 자리를 비우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걸음을 옮기며 나는 언정웅을 향해 조심스럽게 전음을 보냈다.
[…그, 아버지?]
갑작스러운 전음에 언정웅은 눈을 키웠다.
“?”
하기야 단둘이 걸어가고 있는데 전음을 사용하는 게 이상하긴 했을 것이다.
아무튼, 전할 말은 전해야 했다.
[제가 아버지를 모시러 온 이유는 팽 백부가 하신 말씀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 내 말에 언정웅은 담담히 고개를 주억이더니.
본인도 전음을 보내왔다.
[장인어른께서 이런 시절에 그렇게 실없이 나를 찾을 분이 아님은 알고 있다. 백부님의 말은 신경 쓰지 말거라. 하여, 무슨 일로 내가 필요한 것이냐?]
그에 나는 제법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권영의 관이 사실 비어 있다는 사실부터 시작해서, 윤영 숙부와 함께 이권영의 심문을 맡은 것과 그러는 중에 일어난 일을 말했고.
가는 순간 어머니께 전하려 했던 말도 전했다.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윤영 숙부의 부탁도 전했다.
[하여, 윤영 숙부가 외조부께 이 일을 전하는 것을 아버지께서 맡아주십사 부탁을 해 오셨습니다.]
그런 내 말에 아버지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진주언가가 있을 동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긴 탄식을 내뱉으시더니.
[네 어미에게 어찌 이 일을 전해야 할지 마음이 무겁기 그지없구나.]
십만대산이 있을 서편을 향해 이를 가셨다.
[마교라는 족속들의 해악이 실로 크다. 한데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늙은 마두 놈을 놓쳤으니 참으로 원통할 노릇이구나.]
그렇게 아버지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있는지 얼마나 되었을까?
아버지는 숨을 한번 고르시더니 내 어깨를 두드려 왔다.
[애썼다.]
그리고 다시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옮기기 시작한 걸음은 금세 정전의 내실 앞에 이르렀는데.
도착하고 보니 안에선 도란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용운 님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나중이라도 꼭 다시 말씀을 드릴 참이에요. 저희가 어째서 남이냐고요.”
“그건 확실히 우리 용운이가 잘못을 했구만.”
외조부님과 동기들의 이야기가 한창인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그 분위기를 헤집으며 입을 열었다.
“장인어른, 언 서방입니다.”
그 분위기에 힘입어 외조부님의 입에서도 웃음기가 섞인 대꾸가 튀어나왔다.
“내 딸을 데려간 사람이라곤 한 사람밖에 없는데 뒷말은 왜 하나? 들어오게.”
하나 그렇게 열린 문밖에 내가 함께 있자.
“…….”
무언가를 직감하신 모양인지.
일순 휘어 있던 눈매가 반듯하게 펴지셨는데.
그런 외조부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간 아버지는 다른 말 없이 술주전자를 집어 들며 입을 여셨다.
“사위가 오늘 장인께 술 한잔 올리고자 왔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말에 외조부님께서도 다른 말 없이 가만히 고개를 주억여 오셨다.
그에 주전자에서 떨어져 내린 술이 금세 잔을 채웠다.
쪼로록-
외조부께서는 그 잔을 한참 들여다보신 끝에 무겁게 들어 올려 목 안으로 털어 내셨다.
* * *
홀린 듯이 외조부님과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나와 동기들은 이 이상 내실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어선 안 됐다.
‘나도 모르게 멍하니 있었네.’
이쯤 해서 우리는 나가야 했다.
나는 적당한 구실을 붙여 입을 열었다.
“외조부님, 생각해보니 소손과 동무들이 아직 노삼 교수님과 팽 가주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런 내 말에 외조부는 허허로운 웃음을 흘리시며 입을 여셨다.
“…허허. 그래서야 안되지. 가보거라. 내 미흡한 대접은 나중에 다시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마.”
잠깐 사이 늙으신 듯한 외조부님의 모습에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내 속에서도 마교를 향한 분노가 솟았으나 티를 내진 않았다.
나는 묵묵히 걸음을 돌렸다.
이래저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였는지, 내실 안에선 천장호마저 찍소리도 하지 않고 일사불란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따라나섰는데.
그렇게 내실을 나오자마자 용명이 녀석이 물음을 던져왔다.
“형님. 외조부님이랑 어딜 다녀오신 겁니까? 아버님이랑은 어쩌다 같이 오셨고요? 조금 전의 그 분위기는 또 뭐고요?”
하나, 나는 그 물음에 굳이 답을 해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일정 수준에 이르지 못한 무인에게 필요 이상의 울분과 분노는 심마에 빠지는 지름길일 뿐이니까.’
“제단 근처에 다른 주술 같은 게 있나 살펴보고 왔다. 아버님은 그러고 오다가 만났고.”
하여 나는 대충 일축을 해버리려고 입을 열었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꼬치꼬치 캐물어 오면 피곤해질 것 같아서, 아예 화제를 다른 곳으로 향하게 하고자 내 쪽에서 물음을 던졌다.
“너희야말로 내가 돌아오기 직전에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거냐? 외조부님이 내가 잘못했다는 소리를 하시던데?”
내 말에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정현이었다.
“별 이야기 아니었습니다. 왜 안민당주께서 부음을 전하러 오셨을 때, 언 소협이 남의 일에 목숨을 걸고 뛰어다닌 저희가 영웅이 아니면 누가 영웅이냐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영웅. …그런 부끄러운 말을 하기는 했던 것도 같네.”
한데 듣고 보니 별거 아닌 이야기… 라고 하기엔 좀 많이 부끄러운 이야기였다.
하여 없었던 것으로 하자는 말을 했는데.
“…자다 깨서 그랬나 보다. 잊어라.”
그런 내 말에.
소릉이 녀석이 답지 않게 단호히 고개를 저었는데.
“언형이 그런 말씀을 해주신 걸 왜 잊어요? 학관에 가서 자랑할 건데요?”
“…뭐?”
“그리고 저희는 영웅 이야기가 아니라, 그 앞에 남의 일에 소매를 걷어붙였다는 부분에 대해 말하고 있었던 건데요? 저희는 한 식구잖아요. 남이 아니죠!”
이 순간.
천장호가 귀를 후비며 특유의 소신 발언을 해왔다.
“근데 엄밀히 따지면 제갈 소저는 남이 맞지 않나? 용명이 이 친구는 친동생이고, 정현 도장이랑 소릉이는 그 청죽관의 막후실세 언동생인가 뭔가 그건데, 제갈 소저는 성도 다르고 기숙사도 다르고 개뿔도 아니잖소?”
그런 천장호의 말에 제갈설지가 와락 아미를 구기며 입을 열었다.
“장호 님은 뭐라도 된다는 식으로 말씀하시네요? 그렇게 치면 장호 님도 아무것도 아니죠. 기숙사도 다르고, 끽해야 동생 친구 정도 아니신가요?”
“에이, 용운 형이 노삼 교수님께 항룡장을 전수받았으니 무맥적으로 따지면 나는 엄연히 저형이랑 형제라고 볼 수 있지.”
“하? 언동생인가 그거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별거 아닌 일로 불이 붙는 녀석들의 모습에 허리춤의 사부님께서 실소를 터트리셨고.
- 참나. 산 사람은 산다더니, 이 와중에 언동생에 지원하는 녀석이 나오는구나?
그런 사부님의 헛웃음에 내 입에서도 비슷한 실소가 새어 나오려 하는 그때.
“…덕근이 이 새끼가 완전히 미쳤구만?!”
조금 전 아버지를 모셔왔던 그 자리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노성을 내는 것이 들려왔다.
“가보자.”
하여, 바쁘게 달려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이 새끼가 사람이 좀 됐나 싶었더니, 정신이 완전히 나간 놈이었어!”
팽무혁이 팔짱을 끼고 있는 가운데 노삼이 웬 서간 하나를 들고 화를 토해내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언가 너는 알 것 없다.”
노삼은 시치미를 떼려 했다.
하나, 곁에 섰던 팽무혁이 입을 열었다.
“왜 알 게 없습니까? 따지고 보면 이 녀석 일이기도 한데? 용운이 네가 노 선배한테 항룡장을 전수 받았다지?”
“그런데요?”
“산서분타의 거지들이 그 일에 관해 당장 해명하라고 서간을 보내왔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분타에도 통문을 보내고 집법당에 투서를 넣겠다는구나?”
그런 팽무혁의 음성에 천장호가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갸웃했다.
“노삼 교수님은 팔결, 그것도 교육 장로시라 비인부전의 원칙만 지키면 전수할 자격이 있으신데? 다들 제사상의 떡을 잘못 주워 처먹고 맛이 갔나?”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정확히 이해가 갔다.
“교수님이 아니라 내 자질을 두고 그러는 거겠지. 사실은 그것도 허울 좋은 핑계일 거고.”
전쟁이 끝나면 정치가 시작된다는 말이 있다.
산서분타주 덕근은 지금 정치를 해오는 것이었다.
‘산서는 지금껏 개방의 계파 중 정의파의 영역이었지.’
하나 이가장의 후계싸움에 줄을 대기에 급급하여 마교의 발호를 방관하는 실책을 저질렀다.
그런데, 여기서 노삼이 큰 공을 세워버린 것이다.
물론 큰일 났다 싶었는지 막상 일이 커지자 덕근과 산서분타의 거지들도 달려와 거들긴 했다.
하나, 본인 생각에 자신의 공보다 과가 많다는 판단을 내린 모양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며 입을 열었고.
“해명하죠.”
그런 내 말에 천장호가 마른침을 삼키며 되물음을 던졌다.
“…그 이런 경우에 해명은 붙어보자는 이야긴데요?”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