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8화. 의로워야 한다 (3)
내게 철전 한 닢을 건네주신 외조부는 만복에게 예를 표하고 이가장으로 돌아가셨다.
그런 외조부를 배웅하고 나니, 개방의 방주 만복이 나를 이끌었다.
“나랑도 좀 걷자.”
만복의 뒤를 따라 도착한 곳에는 작은 연무장이 있었다.
그 연무장 앞에서 만복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나를 향해 사과의 말을 전해왔다.
“미안하구나.”
한데 만복의 사과가 나로서는 조금 의아했다.
하여, 가타부타 답을 하는 대신 질문을 던졌는데.
“음? 사과는 이가장에 조문을 오시면서 하신 것 아닙니까?”
그런 내 말에 만복은 단호히 고개를 저어왔다.
“그건 이가장과의 일이고, 산서분타에서 작성한 서간으로 인해 벌어진 일은 엄연히 네가 사과를 받아야 하는 일이다.”
“엄밀히 따지면 그렇긴 하네요.”
“오냐. 다만 이 말을 전하려면 개방이 산서분타의 처분을 어느 정도 정해놓고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제대로 된 사과가 늦게 되었느니라.”
만복의 말을 듣고 보니 나름대로 일리가 있었다.
나는 고개를 주억이며 재차 물음을 던졌다.
“하여, 어찌하기로 하셨습니까?”
내 물음에 만복은 책임이 가벼운 순서대로 그 처분을 늘어놓기 시작했는데.
“단순히 방관한 거지들은 기존의 제자 신분에서 일결씩 강등을 시키기로 했다. 그리고 너와 노삼에게 보내진 서간에 수결을 한 간부들은 백의개로 강등해 오지 벽촌의 연락책으로 쓸까 한다.”
분타주였던 덕근의 차례에 이르러서는 솔직하게 난처함을 표했다.
“덕근이 놈은 너도 알다시피 이가장 사태가 마교 놈들과 관련돼 있는 데다, 신분이 상당히 높은 제자였던 탓에 밟아야 하는 절차가 있다. 하여 지금 시점에서는 정확하게 말을 해주기가 좀 뭐하구나.”
하나 곧이어 조심스럽게 한 가지 약속을 해왔다.
“내 약조할 수 있는 것은 우선 덕근이 놈은 무림맹에 데려가 백본회에 세울 것이고, 그 자리에서 본인의 과오를 토설토록 할 것이다. 이후로는 집법당에 세워 엄벌에 처할 것이며, 그 절차 전반에 내가 참여할 것이다.”
그리고 내 생각을 물어왔다.
“여기까지가 개방의 생각인데, 용운이 네 생각은 어떠하냐?”
그런 만복의 말에 허리춤의 사부님께서 한마디를 해오셨다.
- 가재는 게 편이라고 저 늙은 거지가 정의파 놈들의 역성을 드는 것 아니냐?! 내가 천하를 활보하던 시절에는 저런 괘씸한 놈들은 보이는 족족 요절을 냈거늘. 에이잉!
‘놈들의 과만 보면 사부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겠는데, 이 경우에는 공도 있으니까요.’
산서분타의 거지들이 벌인 일이 괘씸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나, 놈들에게 공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마교가 이가장에 쳐들어왔을 때 산서분타의 거지들이 거들지 않았다면 어찌 됐겠습니까?’
극단적으로는 아버지나 팽무혁이 도착하기 전에 이가장이 무너졌을 가능성도 있었고.
꼭 거기까지 가지 않았더라도 피해가 커졌을 것만큼은 분명했다.
‘그 공과 과, 개방이라는 방파의 특성과 만복의 권위, 그리고 마교라는 적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상황을 고려하면 저 정도가 최선일 겁니다.’
뭐,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개방의 쇄신이라는 큰 그림이었다.
만복은 정치적인 부담을 지고 그 쇄신의 의지를 보인 것이었고.
덕근이 여기에서 요절이 나는 것보다 만복이 말한 절차를 제대로 거치는 것이 개방의 쇄신에 도움이 될 터였으니.
이 사과를 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단, 첨언하고 싶은 말은 있었다.
“방주님의 사과를 받겠습니다. 다만.”
“다만?”
엄벌이 예정된 덕근과 손 놓고 지켜보고 있던 일, 이결개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삼, 사결개의 처분은 좀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 서간에 서명했던 간부들을 오지 벽촌으로 보낸다는 거 말입니다. 귀양의 성격인 것 같은데, 오지 벽촌으로 보내는 것보다 정무학관으로 보내시면 어떨까요?”
“학관으로?”
“예. 제가 사흘간 굴려…. 아니 교육을 해봤는데, 그 세 명은 다른 거지들보다 무위도 높으면서 정신줄은 더 많이 놓더라고요. 아무래도 사흘간의 교육으로는 좀 부족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기왕에 귀양이 예정된 거라면 학관으로 보내시면 어떨까요?”
그런 내 제안에 만복이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는데.
“…노삼과 네가 있는 학관으로 보내는 것이 오지 벽촌으로 보내는 것보다야 낫겠다만, 입관 시험은 내년에나 있다. 그 시험에 응시한다고 합격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복철이 놈은 애초에 졸업생….”
“생도 말고 대학원생으로 보내시면 되지 않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노삼은 다른 교수들과 달리 연구실을 운영하지 않고 있었으니, 그 아래 대학원생으로 들어간다는 명목으로 보내면 되기야 하겠는데?”
“예. 노삼 교수님도 돕고 겸사겸사 청죽관의 훈련도 함께 받고 하면 좋을 것 같은데요?”
내 말이 끝나자 처음에는 갸웃했던 고개가 언제 그랬냐는 듯 끄덕여지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간이 흘렀는데.
그러고도 만복이 나를 가만히 응시하는 것을 멈추지 않자, 어쩐지 머쓱한 기분이 들어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여, 하실 말씀은 그게 끝이십니까?”
“…….”
“다하셨으면 돌아가 볼까 합니다. 제가 있고 없고에 밖에서 행해지는 교육량에 차이가 분명히 있긴 하거든요. 오늘이 마지막 교육 날인 만큼 마무리를 잘해야죠.”
한데, 만복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직 안 끝났다. 방금 그 말은 개방의 방주로서 한 말이고, 구결개 만복으로서 할 말이 남았다.”
그러고 보니 문득 만복이 외조부더러 자신의 볼일은 조금 길어질 것이라 했던 것이 떠올랐는데.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만복이 연무장으로 걸어 올라가며 입을 열었다.
“나는 네 녀석이 마음에 들었다. 근데 거지가 되는 것은 네가 싫다 할 것이고, 주머니도 개털이라 달리 줄 게 없으니, 항룡장이나 한 세 수 정도 가르쳐 줘야겠구나.”
* * *
이미 열여덟 장법 중에 열다섯 개를 기억에 새기고 있는 나였다.
그런 나를 향해 항룡장을 세 수정도 가르쳐 주겠다는 것은 완전한 항룡장을 전수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반길 일이긴 한데.’
이래도 돼?
노삼에게 열다섯 장법을 받아 익힌 것으로 이 사태가 터졌는데.
내가 항룡장을 모두 전수받아도 되는가 싶었다.
‘외부인에게는 열다섯 장까지만 가르쳐주는 게 국룰 아닌가?’
나는 연무장 위로 걸음을 옮기면서도 입으로는 그 점을 짚었다.
“그래도 됩니까? 천장호도 아직 배우지 못한 것 아닌지요?”
“그놈은 아직 배울 준비가 안 됐고.”
“저는 됐고요?”
내 물음에 만복은 가만히 고개를 주억여 왔다.
“이번에 태원에서 일어난 일들에서 용운이 네가 보여준 행동들은 살신성인의 의지와 협객의 정신이 묻어났다. 거기서 이미 준비가 된 녀석이구나 싶었는데, 방금의 대화로 확신이 들었다.”
“방금의 대화요?”
”오냐. 거지는 의로워야 한다. 너는 내 사과를 그저 윗사람의 말이라고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네 나름 숙고를 하였다. 그것은 권위에 굴하지 않는 의다.”
“…….”
“그 숙고 속에서 아마 내심의 분과 천하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이 줄다리기를 했겠지. 그 줄다리기 끝에 내심의 분을 삭였으니 이는 천하를 걱정하는 의로움이다. 네 행동과 생각에 개방의 정신이 담겨 있으니 너야말로 깨끗한 옷을 입은 제자라 할 것이다.”
그렇게 할 말을 마친 만복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싫으냐? 가르쳐주지 말까?”
“싫지는 않죠.”
“이것만 봐도 그래. 열다섯 장을 익힌 것으로 이 사달이 났으니 부담스러워할 법도 한데, 넙죽 받겠다고 한단 말이지? 이것만 봐도 너는 거지가 어울려….”
“…….”
“흠흠. 아무튼 잘 보거라.”
대화는 여기까지.
만복은 내가 아직 익히지 못한 세 장법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남은 세 장법은 이미 외워둔 열다섯 장법의 심화판이라고 할 수 있었기에.
기본식을 머리에 새기는 것은 어렵지 않았는데.
“마지막은 용전어야(龍戰於野)라는 초식이다. 이렇게 양손을 사용해 장력을 분출하는 장법이지.”
“쌍룡출해(雙龍出海)처럼요?”
“오냐. 다만 양손 중 한쪽은 허초로 전개하는 것이 핵심이다. 허 속에 실을 숨기고 실속에 허를 담을 줄 알아야 제대로 사용할 수 있다 할 것이니. 기실 나중에 가서는 초식에 얽매여서는 안 되는 장법이나, 기본식을 외워두는 것이 우선이다.”
마지막 열여덟 번째 장법을 기억에 새기고나자.
“세 초식 모두 잘 기억했느냐?”
“넵.”
“정말로? 한 번씩 보여줬는데 말이냐?”
“예. 연습을 하고 실전도 겪어봐야 하겠지만 기본식은 다 외웠습니다.”
“그럼 항룡유회를 사용해 보거라.”
만복이 대뜸 가장 처음 익혔던 항룡장의 초식인 항룡유회를 사용해보라는 말을 했다.
“방금 기억한 초식들이 아니라 항룡유회를 말씀입니까?”
“오냐.”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만복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단전에서 뽑아 올린 내력을 배운 대로 돌려냈고.
‘높은 하늘에 오른 용이, 더 오를 곳이 없어 내려가야 함을 후회한다.’
그 내력을 하체와 허리 그리고 손의 회전을 절묘하게 실은 일장에 실었다.
‘그리고 장력이 뿜어져 나간 순간에 모조리 거두어낸다!’
그러자 손에서 묵빛 용이 격류를 헤엄치듯 뻗어져 나갔다.
쌔애애애액!!!!
한데 그 기세가 당장 며칠 전에 산서분타의 거지들을 패줄 때와는 전혀 달랐다.
꽈르릉!!!!!!
방금 내 손에서 뻗어 나간 장력이 제대로 된 용이라면, 지금까지 내가 뽑아내던 장력이 머리는 용이되 꼬리는 뱀이라 할 정도로..
애초에 항룡장이 열여덟 장법을 모두 기억해야 비로소 화룡점정이 이루어지는 무학인 모양이었는데.
“!”
눈을 키운 나를 보며 만복도 헛웃음을 짓더니.
“이놈이 정말로 한 번만 보고 다 기억한 모양이로구나? 뭐, 아무튼.”
그 헛웃음을 히죽 하고 귀에 걸며 말을 맺었다.
“그것이 진짜 항룡유회다.”
* * *
복철은 촉망받는 거지였다.
젊은 나이에 사결제자가 되어 정의파의 차차기 당수는 자타공인 따놓았다 여겨졌으며.
내심으론 귀찮은 것을 싫어하고 강단이 부족한 천장호만 제치면 후개 더 나아가 방주도 노려볼 만하지 않나 하는 꿈을 꿨던 거지가 바로 복철이었다.
하나 그런 꿈을 꾸었던 나날은 근 사흘간 일장춘몽이 되어버렸다.
삑! 삐이빅! 삑삐삑비빅!
이제 복철의 꿈은 하루라도 빨리 이 지옥에서 벗어나는 것이 되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릇된 일인 줄 알면서도 보신과 권력에 눈이 멀어 그런 짓을 벌였습니다. 부처님, 공자님, 천존. 아무라도 듣고 계시면 제발 이 지옥만 끝나게 해주십….’
그런데 이 순간 복철의 귀에 집법 제자들과 제갈설지가 나누는 이야기가 얼핏 들려왔다.
“내일 돌아가신다지요?”
“예. 그리 알고 있습니다.”
“본디 저희 집법당에서 맡아 해야 할 일을 도와주신다고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많이 배웠습니다. 이리 짧은 기간에 제자들의 눈동자에 참회와 해탈이 드는 것은 처음입니다.”
“그 말씀은 용운 님께 하셔요. 저도 배운 대로 하는 것일 뿐인걸요.”
언용운이 내일이면 돌아간다고?
‘조금만 더 버티면 끝이구나!’
그 소식은 복철로 하여금 이런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그래. 내가 잘못을 하긴 했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지!
드디어 끝이다!
‘언용운, 그 악귀 같은 녀석이 태원을 떠나는구나!’
그에 복철의 입에 비실거리는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를 보며 언용명은 미간을 좁혔는데.
“이보게, 장호. 저 복철이라는 놈이 갑자기 실실 웃는데?”
“내버려 둬. 좋은 꿈이라도 꾸나 보지.”
그러고 있는 사이 산서분타의 뒤편으로 자취를 감췄던 만복과 언용운이 대연무장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언용운은 한마디 음성으로 지옥을 멈췄다.
“전체 기상!”
그리고 만복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산서분타의 처분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지금부터 이번 일에 처분에 대해 발표하겠다. 기본적으로 산서분타의 모든 거지를 일결씩 강등할 것이다.”
이때만 해도 복철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떠나지 않았으나.
그의 미소는 딱 여기까지였다.
“이번 일에 적극 가담한 복철, 계춘, 오복. 세 거지는 백의개로 강등할 것이며 노삼 장로의 연구실에 파견할 것이다.”
세 거지의 하늘이 노래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