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9화. 우물 안 개구리 (1)
산서분타 거지들의 인수인계를 마치고 이가장에 돌아온 나와 동기생들은 학관으로 복귀할 준비를 했다.
남곤표국의 이름을 빌려야 했던 처음과 달리, 복귀할 때는 개방의 호위 아래 정무학관의 이름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하여, 각자 소지품과 의복을 챙기는 것으로 개인적인 준비는 끝이었으나.
내 경우에는 챙겨야 할 것이 더 있었다.
‘노획한 강시들.’
이번 이가장 사태에서 곽사홍과 경 노야가 동원한 강시가 엄청나게 많았는데.
그 강시들의 연고를 찾아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여, 이가장에서 상을 치르는 김에 화장을 해서 약식으로 장례를 치러주었으나.
개중 일곱 구의 무부금강시는 내가 학관으로 데려가기로 했다.
‘강시 연구는 백도 무림이라는 이름 아래 시도되기에 제약이 있어서 마교에 한참 뒤처져 있는 꼴이지.’
그러니 이 무부금강시들은 마교와의 기술력 차이를 느낄 수 있는 경종이자 학술적인 교보재가 될 터였다.
‘겸사겸사 기말과제 면제 혜택이랑 가산점도 받을 수 있을 테고?’
뭐, 아무튼.
내가 그렇게 강시들의 상태와 녀석들을 실어 갈 마차의 점검을 하고 있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음? 윤영 숙부 아니십니까?”
강시를 보관하고 있던 빙고(氷庫)안으로 윤영숙부가 찾아왔다.
“오냐. 확인은 다 했느냐?”
“예. 준비를 제대로 해주셨네요. 이대로 실은 다음에 대도시를 지날 때마다 얼음만 갈아 끼우면 되겠습니다.”
“태원상단의 지점이나 협력 상단에 명을 내려 얼음을 공급받을 곳도 이미 수배해 놓았다. 내일 지도를 줄 테니 표시된 곳에 가기만 하면 될 거다.”
“그럼 완벽합니다.”
“용운이 네 이름으로 정무학관에 기증하는 것이니, 한치의 소홀함이 없도록 단단히 챙기라는 네 외조부의 엄명이 있으셨다.”
“감사합니다. 한데 그 말씀을 하러 오신 건 아닌 것 같으신데요?”
“녀석, 눈치하고는. 저번에 아버님께서 너와 네 동무들의 공을 치하하는 자리를 마련하려 하셨다가 권영이의 일과 개방의 일이 겹치며 흐지부지되지 않았느냐? 아버님께서 환송연을 준비하셨다.”
* * *
이가장이 장례를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외조부께서 준비한 환송연은 조촐했다.
야단을 차리는 등 요란을 떨지도 않았고 악공들도 부르지 않았다.
하나, 자리한 사람들이 외조부와 윤영 숙부, 언정웅과 팽무혁, 그리고 노삼과 동기생들이라 편안했고.
음식들은 푸짐했으며.
준비된 술은 허리춤의 사부님이 군침을 흘리실 정도의 명주였다.
- 이 깨끗한 향은 분주(汾酒)가 아니냐? 개봉을 하자마자 이리 깨끗한 향이 퍼지는 것을 보니 그중에서도 최상등이겠구나?!
‘…그.’
검이 되신 사부님이 군침을 흘리신다는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순간적으로 눈이 도신 것은 사실이었다.
- 하기야 네 외조부가 산서금붕이라 불리는 양반이니 당연히 최상등의 분주겠지?! 대저 최상등의 분주라 하면 향이 좋아 코로 마시고, 색이 예뻐 눈으로 마시고, 입으로 넘겨 혀로 마시는 술이라 삼절이라 부르며 황족들이나 마신다고 하였고 많은 시인이 노래한 술이거늘!
‘…진정 좀 하십시오!’
- 지금 진정을 하게 생겼느냐?! 그런 말을 할 시간이 있으면 이 사부에게 한잔 올리기나 하거라!
‘나 원 참. 지금 어떻게 올립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몇 병 빼놓을 테니까.’
내가 그렇게 사부님을 달래고 있는 사이.
한쪽에선 노삼 교수님이 산서분타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 한창이었는데.
“거기서 언가 녀석이 제게 배운 항룡장을 딱! 그러면서 한마디를 하기를 사람이 살다 보면 타성에 젖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부끄러운 줄은 알아야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것만 봐도 언가 녀석은 학관에 꼭 필요한 녀석입니다. 예.”
어째선지 나는 학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이 나는 이야기에 윤영 숙부가 술잔을 비우고.
“크으! 이거 안주가 필요 없습니다? 아니 그런가, 언 서방? 아니 그렇습니까, 아버님?”
아버지의 입꼬리가 주책맞게 비실거리는 이때.
외조부의 음성이 아버지를 향했다.
“하여, 언 서방은 용운이의 일을 어찌할 것인가?”
그런 외조부의 음성에.
아버지는 표정을 바로 하며 되물음을 던졌다.
“용운이의 복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에 외조부의 음성이 조금 뾰족해졌다.
“알아서 잘하는 녀석을 두고 자네와 내가 나눌 이야기가 그것 외에 달리 뭐가 있어?”
“그 문제는 저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가문의 장로들과 다른 어른들께 고해야 하는 문제인지라, 진주로 돌아가 봐야 알 것 같습니다.”
“그걸 누가 모르나 이 사람아? 빈말로라도 어떻게 하겠다고 하면 될 것을…. 어차피 언서방 자네는 마음을 먹은 것은 어떻게든 관철을 시키고야 마는 위인이잖나?”
“하오나 어찌 장인께 빈말을 하겠습니까.”
“하여간에 꽉 막혀서는.”
하나, 외조부의 목소리는 계속 뾰족한 채로 이어지진 않았다.
어느 순간 좁히고 있던 미간을 누그리셨고.
“이리와서 술 한잔 받게.”
“예.”
“이거 받고.”
술과 함께 아버지가 답을 내놓을 수 있도록 물음을 바꿔내셨다.
“애 좀 쓰게.”
“예. 애를 써보겠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용명이 녀석이 입을 쩍 벌렸는데.
“…외조부님께서 아버님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살가워지셨는데요?”
저게?
한잔 술에 핀잔이 세 마디나 따라붙었는데?
한데, 아버지도 뿌듯해하는 것 같으신 게.
용명이 녀석의 말이 맞기는 맞은 듯싶었다.
하여, 내 머릿속엔 이런 생각이 스쳤는데.
‘그동안의 취급이 어땠길래?’
곁에 있던 천장호는 한 걸음을 더 나아가, 나름 소곤소곤한 목소리로 언정웅의 취급이 박한 연유를 물어왔다.
“이보게, 용명이. 그러고 보니 저번에 산서금붕께서 언가주님한테 박하게 구시는 비사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숨은 이야기라 비사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듣고 보면 그리 대단한 이야기는 아닐걸세. 어찌 보면 방금 상황과 좀 비슷해서 그리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닐지도….”
그에 다른 동기생들의 귀가 동시에 쫑긋했고.
“…모르는데 다들 궁금한 모양이군.”
그에 용명이 녀석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형님, 이야기해도 괜찮겠습니까?”
기실 나는 모르는 이야기였으나.
용명이 녀석이 앞에 말한 그리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라 하기도 했고.
마침 나도 궁금한 이야기도 해서, 짐짓 표정 관리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용명이 녀석이 머쓱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흠흠. 이걸 어디부터 시작해야 하나. …음. 그러니까 어머님께서 혼기가 찼음에도 외조부께서 사주단자를 한 번도 안 돌릴 정도로 끼고 사셨다고 하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님께서 동무들과 꽃놀이를 나가셨다가….”
“…곤경에 빠지셨는데! 하북권웅께서 용운 님과 용명 님의 어머님을 구해주셨군요?!”
“어. 예.”
“아, 제갈 소저. 집중하고 있었는데 흐름 끊겼잖수. 그런 생각은 속으로 좀 하시오, 속으로.”
“천 소협의 말이 옳습니다. 그것은 도가 아닙니다.”
“맞아요!”
“…아, 알겠어요.”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만 놓고 보면 강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곤경에 빠진 소저를 헌앙한 소협이 구해주고 사랑에 빠지게 되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제 딸바보와 답답이를 곁들인?’
도둑놈에게 딸을 빼앗기게 생긴 어떤 딸바보와 매사에 우직한 어떤 남자의 이야기만 빼면.
“…그러다가 외조부께서는 결국 고집을 꺾고 좋을 대로 하라는 말을 하셨다네.”
“아, 그렇게 혼인을 하게 되신 것이로구만? 쓰흡. 그럼 그냥 딸 도둑이라고 그러시는 건가?”
“아니.”
“아니라고?”
“…아버님이 너희 좋을 대로 하라는 말씀은 허락이라 할 수 없다고, 장인의 축복 없이는 혼인할 수 없다. 뭐 그렇게 버티셨다 하네. 결과적으로 듣고 싶은 말은 들으셨지만, 그 말 한마디를 듣는 대신 미운털이 단단히 박히셨다 들었네.”
그렇게 용명이 녀석의 이야기가 끝났고.
“…아.”
“…허.”
“…음.”
“…어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녀석들은 하나같이 장탄식을 뱉어내는 틈을 타.
나는 분주 몇 병을 챙겨 들고 연회장을 나섰다.
“너희끼리 먹고 있어라. 나는 잠시 바람 좀 쐬고 오마.”
* * *
연회가 한창인 정전의 내실을 빠져나온 나온 나는, 일전에 윤영 숙부를 따라 장원 구경을 하던 기억을 되살려 걸음을 옮겼다.
그리하여 내문 몇 개를 벗어난 끝에 인공 연못 한가운데 지어놓은 정자를 찾은 뒤.
휙!
그 지붕 위로 뛰어올라 자리를 잡고 허리춤의 사부님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어떻습니까? 운치 있죠?’
- 올리라는 술은 안 올리고 애먼 걸음만 옮기길래, 이놈의 자식이 사부를 놀리려고 일부러 이러나 했더니. 여기를 오려고 그러한 것이냐?
‘…평소에 제자를 어떻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 그야 너라고 생각하지.
‘…?’
- ?
‘?’
- 험험. 아무튼 다 생각이 있었구나! 명주야 본디 물가에서 달을 보며 마셔야 제맛이긴 하지!
그렇게 운을 뗀 사부님께서는 왜 물가에서 달을 보며 마시는 술이 제맛인지에 관한 자신의 지론을 늘어놓기 시작하셨다.
- 하늘에 걸린 달을 보며 한잔, 연못에 흔들리는 달을 보며 또 한잔, 잔에 비치는 달을 보면서 또 한잔.
아직 술을 올리지도 않았는데 이미 분위기에 취하신 듯한 사부님의 모습에.
나는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으며 가져온 술병 중 하나를 들고 뚜껑을 개봉했다.
그리고 회한을 뽑아 사부님께 꼴꼴 술을 부어 드렸다.
- 거, 좀 천천히 붓거라 천천히. 크으. 흠향만으로도 명주구나 하는 감이 오는데, 목으로 넘기면 어떠할 것인가? 진짜 끝없이 들어가겠구나!
그리고 나도 한 잔을 부어 마셨다.
그러면서 사과의 말을 전했는데.
“크으. 죄송합니다.”
그러자 되려 사부님 쪽에서 멋쩍어하셨다.
- …아니, 너답지 않게 뭔 그런 걸로 사과를 하고 그러느냐. 사람 무안하게. 네 말마따나 검마가 마검이 될 수도 있지 뭐.
하나, 나는 사부님을 검에 집어넣은 일로 사과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안 죄송한데요?’
- 좀 죄송해해라!
‘아무튼, 제가 죄송한 건 이번에 까딱하면 죽을 뻔하지 않았습니까?’
- …? 일단 계속해 보거라.
그렇게 운을 뗀 나는 경 노야와의 일전을 회상하며 사부님을 향해 생각을 전했는데.
‘물론 당시에 저 나름대로는 안 죽을 자신이 있긴 했지만. 다 지나고 이렇게 사부님이랑 술 한잔을 기울이며 그 순간을 복기해보니 죽을 고비였었다 싶네요?’
- 그게 왜 죄송한 일이냐?
‘죄송하죠. 사부님의 검이, 파천의 검이 천하제일임을 증명하기로 하고 모시고 나왔는데요.’
그런 내 말에 사부님께서는 콧방귀를 뀌셨다.
- 뭔 소리를 하나 했네. 내가 들어있는 이런 검 한 자루를 벼려내려면 만 번은 두드려야 함을 알고 있거늘, 천하제일검을 벼려내는데 그런 위험은 당연히 따른다는 것을 내가 몰랐겠느냐?
‘그러십니까?’
- 오냐. 그러니까 되려 네 녀석이 나한테 코가 꿰인 것이지. 아마 앞으로 골백번은 더 죽을 위기가 있을 것이다. 절대로 안 바꿔줄 것이니 파문시켜 달라는 소리나 하지 말거라.
‘그럴 일은 절대로 없죠.’
나는 다시 한번 웃음을 흘리며 사부님께 한잔 술을 올렸고, 나도 한 잔을 따라 마셨다.
그리고 질문을 하나 던졌다.
‘아 참. 사부님의 후인을 자처하는 자들을 보신 소감은 어떠하십니까?’
그러고 보니 이 이야기를 제대로 나눈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꺼낸 이야기였는데.
그에 앞서 내가 죄송하다는 이야기를 했기 때문일까?
이 순간.
사부님께서 전에 없이 진중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시더니.
- 용운아.
‘예?’
- 나는 너의 사부이지 거푸집이 아니다.
‘…….’
- 너는 위철진이 아니라 언용운이다. 언제 어디에서 누구를 마주하든, 너는 너의 의지로 너의 검을 펼치면 되는 것이다.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 그 말씀이 듣기에 나쁘지는 않아서, 나는 그냥 사부님께 술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