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0화. 우물 안 개구리 (2)
사부님과 술잔을 나누는 시간을 보내고 연회장에 돌아오니, 우리 쪽 상에 어른 둘이 넘어와 있었다.
다른 사람은 아니고 윤영 숙부와 팽무혁이었는데.
그중 윤영 숙부는 동기생들에게 팔찌를 하나씩 나눠주고 있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준비한 선물이니 받아들 주게.”
가장 먼저 받은 사람은 우소릉이었다.
녀석은 팔지에 꿰여 있는 구슬 중 가장 앞쪽에 꿰인 구슬 속에서 반짝이는 보석을 보며 감탄을 했다.
“우와, 이런 보석은 처음 봐요. 금강석과 청금석과 녹주석이 함께 있는 느낌인데요?”
한데, 곁에 있던 천장호는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외람되지만 한 말씀을 하자면, 거지 체면에 이런 금은보화를 받기는 좀 그런데요? 더욱이 산서분타의 거지새끼들이 개판을 치기도 했고요. 저는 이 닭다리랑 분주로 만족했습니다.”
그런 천장호의 음성에 윤영 숙부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 보물로 봐주니 고맙네만, 팔찌에 꿰인 구슬들은 용안목에 흰 칠을 해놓은 것이네. 소영웅들의 무공이 일취월장하면 유사시에 암기 삼아 쓰라고 재료로 삼았지. 가장 앞에 꿴 구슬은 보석이나 금은보화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 산서상인들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소금일세.”
그런 윤영 숙부의 말에.
정현과 우소릉은 각자의 방식으로 감탄을 했는데.
“산서를 상징하는 소금에 정진하라는 뜻까지. 역시 언 소협의 몸에 흐르는 도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귀한 선물입니다.”
“와, 이게 진짜 소금이라고요? 이렇게 이쁜데요?”
그중 우소릉을 향해 제갈설지가 입을 열었다.
“엄밀히 따지면 불순물이 낀 소금이죠. 암염을 채취하다 보면 이따금 저런 소금이 발견된다고 알고 있어요.”
그런데 이때.
제갈설지를 향해 팽무혁이 한마디 말을 던졌다.
“제갈가의 똑똑아. 그래서 너는 소금이 상하는 기간이 얼마쯤 되는 줄 아느냐?”
팽무혁의 말에 제갈설지는 골똘한 표정을 지었다.
“……? 소금은 보관을 잘해 습이 들지 않으면 썩지 않는 것으로 아는데, 어떤 환경을 가정하고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하나 정작 팽무혁의 입에서 나온 답은 특유의 아재개그였다.
“천일염. 그러니까 천일! 크하하!”
그에 허리춤의 사부님께서는 있는 대로 혀를 차셨고.
- …저, 저런 썩은 농담을 입 밖으로 내다니. 잘 마신 술이 다 깨는구나.
동기생들은 저마다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었다.
그 바람에 분위기가 싸해지자 팽무혁도 혀를 차고 나왔다.
“에이. 아직 경륜들이 부족해서 그런가, 이걸 웃지를 않네. 이게 엄청 재밌는 이야긴데. 하북에서는 다들 배꼽이 빠져라 웃는데.”
그런 팽무혁을 향해 천장호는 특유의 소신 발언을 하려 했다.
“그건! 하북이닊….”
하지만 언용명의 손이 그 입을 막았다.
“읍읍.”
“응? 용명아 왜 젊은 거지의 입을 막고 그러느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백부님.”
뭐, 아무튼.
그 바람에 팽무혁의 시선이 문가에 있던 용명이 쪽으로 옮겨왔다가, 들어서는 나를 발견했다.
“용운이 왔느냐? 어디 갔다 왔느냐?”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왔습니다.”
“찾으러 나가도 없더니만, 좀 멀리까지 다녀온 모양이던데?”
그러더니 짐짓 대견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듣자 하니 용운이 네가 뭔 일이 있고 나면 검에 술을 붓곤 한다더니만, 지금도 그걸 하고 왔느냐?”
뭐 그런 이야기까지 알고 계시나 싶었지만.
말 자체는 맞는 말이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는데.
“…어, 예. …뭐, 그렇습니다.”
“쓰흡. 술이 뿌려지는 날붙이가 도였으면 더 좋았을 것을.”
그러면서 나온 말이 자칫하면 도를 쥐라는 이야기로 이어질 것 같아 말을 돌리니.
“한데, 백부께서 저를 찾으러 나오셨다고요? 왜요?”
“뭐, 이제는 다 지나간 일이고. 자, 오다 주웠다.”
옻칠이 된 자그마한 목함 하나가 휙 하고 나를 향해 날아왔다.
딸깍-
오다가 줍기에는 너무 실한 환단이었다.
* * *
외조부께서 마련한 환송연은 거나하게 취하자고 마련한 자리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무거운 이야기를 나누자고 마련한 자리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석별의 정을 기분 좋게 나누는 자리였기에.
술자리는 모두가 적당히 취기가 올랐을 즈음 끝이 났다.
객실로 돌아온 나는 호법을 자처하는 언동생들 사이에서 팽무혁에게 받은 웅패환을 꺼내 들었다.
“나만 이렇게 좋은 걸 먹어도 되나?”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그거 소진 님 일로 받으신 거 아닌가요?”
“맞습니다. 백부께서 워낙에 간지러운 말씀을 싫어하셔서 따로 말씀은 하지 않으셨지만, 그 일에 대한 감사로 주신 것이지 싶습니다.”
“빈도는 호법을 서겠습니다.”
“그럼 저는 밖에서 망을 볼게요.”
“같이 가세, 소릉이. 망은 거지가 전공이지.”
그리고 호법을 자처하는 동기들 틈에서 주기(酒氣)를 밀어낸 뒤.
- 아이고, 분주를 내력으로 밀어내네! 저 아까운걸!
사부님의 애타는 소리를 벗 삼아 웅패환을 흡수했다.
그렇게 웅패환을 흡수하고 나니 힘이 넘쳤다.
“오늘 불침번은 나 혼자 설 테니 너희는 푹 자라. 다들 고생했다.”
그렇게 홀로 불침번을 서기로 한 나는 마당으로 나와 달빛과 별빛을 벗 삼아 회한을 휘둘렀고.
그러고도 힘이 남길래 항룡장의 초식하나 하나를 곱씹으며 몸을 움직였는데.
그러고 나니 어느 순간 해가 떠올랐다.
대저 해라는 것은 본디 시작을 알리는 녀석이었지만.
오늘 떠오른 해는 이가장과의 작별을 알리는 해였다.
우리는 다시 한번 빠진 것이 없는지, 개인 물품부터 강시들까지 꼼꼼히 챙겼고.
그러는 사이 낙양까지 함께 가기로 한 만복과 개방의 제자들이 도착하여 이가장 앞에 대략 일개 소대가 늘어선 꼴이 되었는데.
“장주님 나오십니다.”
그런 우리를 배웅하기 위해 외조부가 대문가로 나오자.
만복과 노삼이 딴청을 피웠고.
“험험.”
“크흠.”
아버지와 팽무혁도 한 걸음씩을 물렸다.
보니까 나더러 작별 인사를 올리라는 것 같았다.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니었기에 나는 한 걸음을 앞으로 나서며 외조부께 포권을 올렸다.
“다시 만나는 날까지 보중하십시오.”
그런 내 인사에 맞추어 다른 사람들도 동시에 포권을 취했고.
외조부는 가만히 고개를 주억여 주셨다.
그 끄덕임을 신호로 우리는 마차에 올랐다.
“이랴!”
그렇게 우리를 실은 마차가 남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는데.
외조부는 대문가를 떠나지 않고 그런 우리의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셨다.
* * *
개방의 방주 만복과 광풍투개 노삼.
도제 팽무혁과 하북권웅 언정웅.
거기에 외조부께서 빌려주신 태원상단의 깃발과 녹림왕의 통행패까지 있는 우리의 앞길을 막아서는 용자는 없었다.
용자는커녕 기실 금강시가 실려 있는 마차의 얼음을 갈 때를 빼면 감히 찾아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하여 우리를 실은 마차는 쾌진격을 거듭해 황하에 이르렀는데.
그 황하를 건너 무림맹이 위치한 낙양의 목구멍이라 할 수 있는 맹진항에 이르자.
비로소 한 사람이 찾아와 우리에게 말을 걸었으니.
밀직원장 국도진이었다.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본디 맹주님께서 직접 맞으러 나와야 맞겠습니다만….”
우리를 찾은 국도진은 무림맹의 상황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마교도의 준동으로 긴급회의가 소집되어 맹에 이름을 올린 문파와 세가에서 장문인 혹은 가주님들이 속속 낙양으로 오고 계시는 중인지라, 맹주님께서 지금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셔서 제가 대신 나왔습니다.”
그렇게 운을 뗀 국도진은 만복부터 팽무혁과 우리 아버지 등등 배분대로 사과의 말을 하더니.
우리에게도 심심한 사과를 표했다.
“정말 고생 많았네. 맹주님께서 감사하다는 말씀과 함께 대공(大功)을 세웠는데 따로 치하도 해주지 못함을 미안해하셨네. 학관에 돌아가 있으면 추후 본인께서 날을 잡아 찾아가겠다고 용서해달라 하셨네.”
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육십 년 만에 마교가 고개를 쳐든 상황이었고, 기라성같은 명숙들이 모이는 상황이었다.
‘공손무결의 성정이나 원작의 행보를 고려하면 합종군을 일으켜 십만대산을 치자는 이야기를 꺼낼 준비를 하고 있겠지.’
그 와중에 무림맹주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밀직원장을 이리로 보낸 것만 해도 성의를 다한 것이었다.
‘합종군 쪽은 별반 소득은 없겠지만.’
왜 옛말에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물론, 정말 위험이 코앞까지 닥치면 사공이 많은 배도 옳게 강이나 바다로 나가기도 한다.
하나, 산서에서 일어난 일이 백도 무림이라는 튼튼하고도 넓은 우물 안에서 안락한 개구리로 살아온 다른 문파들의 눈에 위험으로 비칠 리가 만무했다.
‘어쨌거나 산서가 지켜진 상황이고.’
거기서 나온 단서인 마시와 북시는 사실상 장성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관련된 곳이었다.
‘막말로 오랑캐들이 사는 곳이라 생각하는 지역인 것이니까,’
공손무결이 십만대산으로 쳐들어가는 합종군을 일으키자고 해봐야 공허한 메아리가 될 터였다.
‘뭐, 그래도 원작보다 저 소집이 이르게 시작된 것에 의의가 있으려나?’
아무튼 낙양에서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학생들은 학관으로 가야 할 때였다.
하여, 우리는 여기서 만복과 팽무혁 그리고 아버지와 작별하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무슨 말을 할락 말락 쭈뼛거리시더니.
“학관에 도착하면 어머니께 편지하거라. 그리고 시간이 남으면 나 한….”
“예?”
“…아무것도 아니다.”
딱히 중요한 말은 아니었는지,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로 작별을 고해오셨다.
* * *
그렇게 낙양을 통과한 우리는 하남의 관도를 내달리고 또 내달려 어느덧 정무학관이 위치한 단강구에 이르렀는데.
이미 우리가 인근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들어간 것인지.
학관의 정문에는 총장인 경혜사태를 비롯해 이른바 운영위원이라 불리는 몇몇 교수님 그리고 청죽관의 생도들과 강시를 실어 온다는 소식에 나온 강시학개론 수업 인원들이 모여 있었다.
“언가야. 총장님께 보고하거라.”
나는 노삼의 턱짓에 힘입어 경혜 사태에게 복귀 보고를 했다.
“언용운 외 다섯. 무사히 산서행 대민 지원을 마치고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그러자 경혜사태께서 배시시 웃어 보이시며 고개를 끄덕여 주시더니.
“전해 들은 이야기가 많아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우선 무사히 돌아와 줘서 고마워요. 아, 청죽관 생도들은 대민지원단이 돌아온다는 소식에 공부가 안되는 것 같아서 그냥 빈니가 출석 인정을 해주기로 하고 데리고 왔습니다. 우선은 생도들끼리 회포를 풀도록 하세요. 그리고 노삼 교수님은 저희랑 같이 본관으로 좀 가시죠.”
노삼 교수님만 데리고 본관으로 가셨는데.
그러자마자 파란 무복을 입은 청죽관 생도들이 밀물처럼 몰려들며 한마디씩 던져댔다.
“마교가 나타났다며?”
“마두를 직접 베었다는 소리도 들리던데 그게 정말이냐?”
“그보다 성질이 뻗쳐서 거지들을 두들겨 팼다는 소리가 들리던데 그 소리는 또 뭔가?”
그러다 어느 순간.
귀에 익은 목소리가 호통을 치는가 싶더니.
“어허!”
밀려든 인파를 가르며 하성이 녀석이 정품(?) 빨간 모자를 무슨 왕관이라도 되는 듯 경건하게 들고 나를 향해 다가왔다.
“어허! 빨간 모자가 원주인에게 돌아가는 순간입니다! 다들 조용히 합시다!”
그에 내 뒤에서 그 빨간 모자를 확인한 복철, 계춘, 오복 세 명의 백의개는 눈에 띄게 흠칫했는데.
“언 공자?”
갈라진 인파 사이로 하성이 녀석과 함께 나온 은하연이 그걸 보고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뒤쪽에 계신 분들은 누구신가요?”
그런 은하연의 질문에 나는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노삼 교수님의 연구실에 대학원생 명목으로 파견된 양반들인데, 아무 때나 필요할 때 불러다 자치회실의 일을 거들게 하면 될 거요.”
그러자 경룡이 형이 흠칫하며 한 손을 입가로 가져가 막을 치더니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고.
“…언 부회장. 그 대학원생 선배들의 실상이야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래도 아무 일이나 거들게 하라는 것은 조금 그렇지 않을까?”
이어서 은하연도 소곤거리는 목소리를 보탰다.
“…안 그래도 힘드신 분들인데 저희 일까지 어떻게 도와달라고 해요.”
그러고 보니 좀 이상하게 들릴 수 있을 것도 같아서.
나는 사실관계를 정정하기 위해 산서에서 있던 일 중 정의파 거지들의 이야기만 간략하게 늘어놓았다.
“명목상이라고 하지 않았소. 명목상. 그러니까 저 양반들이 어떤 양반들이냐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내 이야기가 끝나자.
은하연의 눈에선 서리가 낄듯한 한기가 새어 나왔고.
경룡이형의 눈에선 용암 같은 노기가 새어 나왔다.
그에 정의파의 거지들이 마른 침을 꿀꺽 삼키더니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제, 제가 거지지만 깨끗한 옷을 입던 사람이라 청소를 잘합니다.”
“저는 산서에서 술 취급을 해서 상계의 일을 볼 줄 압죠. 예. 헤헤. 헤헤헤.”
“저, 저는 발이 빠릅니다!”
그렇게 청죽관으로 소속을 옮긴 세 거지가 살아남기 위해 자기 홍보를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청죽관 생도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서 있던 사람 중 영환 교수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나를 향해 질문을 건넸다.
“회포를 푸는 중에 미안한데. 언용운 생도, 뒤에 있는 게 정말로 무부금강시가 맞나?”
“예, 교수님. 맞습니다.”
“허, 무부금강시라니. 정말로 저게 무부금강시라면 자네는 기말과제는 따로 하지 않아도 좋네. 아, 가산점도 줘야지. 아니지, 그냥 기말시험을 칠 필요도 없이 만점을….”
그때였다.
그렇게 영환 교수의 입에서 여러 가지 약속이 나오던 그때.
함께 나와 있던 강시학개론 수업 인원이 무리를 짓는가 싶더니.
모산파 출신 제자들이 동시에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교수님, 그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