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2화. 우물 안 개구리 (4)
연무장 앞으로 가라는 내 말에 청죽관 생도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기숙사 방면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가라고만 했지, 뛰어가라고는 안 했는데?”
아무래도 하성이가 돌려준 빨간 모자가 여태 내 손에 들려 있는 탓에 몸이 먼저 반응한 모양이었다.
“선착순인 줄 안 건가?”
뭐, 기강이 해이해지지 않았다는 것은 반길 일이었다.
하여, 내 입가에 절로 피식하는 미소가 걸렸는데.
그 미소가 귀에 걸리기 직전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있는 복철과 계춘 두 거지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음?”
나는 곧바로 미간을 구기며 입을 열었다.
“너희는 청죽관 사람 아냐?”
“마, 맞습죠?”
“그렇습죠?!”
“그런데 왜 아직 발을 붙이고 있어? 진즉에 알아봤지만, 이거 완전 고문관들이구만?!”
복철과 계춘은 ‘히익!’하는 소리를 내더니 부리나케 앞서 달려간 녀석들을 따라 달려가기 시작했다.
“…고문? 오, 온몸 비틀기?”
“갑니다! 갑니다요!”
그렇게 청죽관 식구들을 먼저 보낸 나는 다른 기숙사 출신으로 이번 대민 지원에 따라왔던 녀석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용명이랑 장호, 수고 많았다. 제갈 소저도 고생 많았소. 세 사람은 각자 기숙사로 돌아가서 복귀 수속 잘 마치고 푹 쉬도록 하고. 수업 시간에 보는 것으로.”
그런 내 말에 제갈설지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는데.
“용운 님이야 말로 수고 많으셨어요. 어떻게 복귀 날에도 이런 일이 생기는지, 가만 보면 항상 다사다난하시네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천장호가 미간을 좁혔다.
“…쓰흡.”
“장호 님? 그 쓰흡은 뭐죠?”
“내 알기론 그 다사다난 중엔 제갈 소저도 한몫한 거로 아는데?”
“모산파 출신 생도들이 항의하는 일에 제가 뭘 했길래요?”
“아니, 오늘 말고. 그 뭐시냐 입관 시험 때 결과 인정 못 한다고 깽판을 치고 그랬다더만?”
“…….”
“아앜!! 왜 사람을 꼬집고 그러시오?!”
그렇게 제갈설지와 천장호가 투덕거리는 이 순간.
용명이 녀석이 낙양에서 헤어지던 날의 아버지처럼 쭈뼛거리는 것이 보였다.
하여, 왜 그러나 싶어 물음을 던지니.
“왜. 뭐.”
“…형님이야말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녀석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는데.
우수에 잠긴 눈동자가 단순히 이번 산서행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아서, 나는 녀석이 무슨 말을 하나 가만히 두고 보았다.
“강시종의 복원. 정말이지 꿈과 같은 일을 해내셨습니다.”
“…어. 뭐, 그래.”
“그러면서도 가문의 안전과 천하의 안위를 위해 망나니를 자처하시고 온갖 수모를 감내하셨는데, 동생인 저는 그것도 모르고 소가주라 불리고 있었으니…. 그게 참 부끄러워서 어찌 말을 꺼낼까 돌아오는 여정 내내 고민하다 이제야 이렇게 말을 꺼냅니다.”
그랬더니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하기는 뭐한 이야기를 토대로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형님! 제가 가문에 형님에 관한 소명서를 쓰겠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소가주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히겠습니다!”
그런 용명이 녀석의 음성에 허리춤의 사부님께서는 반색을 표해오셨다.
- 오. 용명이 녀석이 저렇게 움직여주면 용운이 네가 복권되는 날이 더 빨라지는 것 아니냐?
‘글쎄요?’
- 응? 어째 시큰둥한 것으로 보이는구나?
‘보이는 게 아니라 실제로 시큰둥합니다. 마냥 그러라고 하기가 좀 뭐하네요.’
뭔가 보여주고 싶다는 용명이 녀석의 마음은 이해했다.
‘따지고 보면 모산파 놈들을 엿먹인다고 내가 내 입으로 망나니니 복권이니 하는 소리를 한 게 불을 붙인 것 같기도 하고?’
하나, 용명이 녀석의 행동이 득이 될지 실이 될지는 판단이 서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녀석이야 내 곁을 맴돌며 제 눈으로 확인한 사실들이 있으니, 전(前) 용운이의 행적이 저렇게 미화가 되는 것일 테지만.
진주에 있는 가문 사람들은 내 활약상이 아무리 전해진들 본인들이 눈으로 보고 접했던 전(前) 용운이 놈의 기억이 강렬할 수밖에 없으니.
분명한 온도 차가 발생할 터였다.
‘장로랍시고 거드름을 피우는 늙은이들이 오라 가라 할 게 불 보듯 뻔해.’
딱히 득이 없어 보이는 일을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하여, 나는 적당한 말을 골라 입을 열었는데.
“그 일은 순리대로 두자. 아버지께서 외조부님 앞에서 애쓰겠다고 하지 않으셨느냐.”
“…아! 그건 또 그렇습니다. 제가 또 제 마음만 앞세웠군요.”
그런 내 말에 용명이 녀석이 진지한 표정으로 낯부끄러운 소리를 해댔다.
“역시 형님께서는 무심한 듯하면서도 마음 씀씀이의 어짊이 남다르십….”
하여, 나는 곧바로 천장호를 불렀다.
“천장호, 얘 데리고 빨리 너희 기숙사로 가라.”
* * *
대민 지원단을 해단한 나는 경신술을 일으켜 청죽관의 연무장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당도한 연무장에서 우둑우둑 목과 어깨를 풀고 있으니.
경룡이 형이 턱을 긁으며 입을 열었다.
“…언 부회장? 그러니까 자격이 있는지 보자는 말은 몸의 대화를 나누자는 거지?”
“그렇죠? 왜요, 무슨 불만이라도 있으십니까?”
“내가 자네한테 불만이 있을 리가 있나.”
“그런데 왜 그런 말씀을? 아, 부상자나 몸 안 좋은 사람은 미리 빠지세요. 솔거 거지들도 오늘은 저기 단상으로 빠져 있고.”
“아니, 우리야 괜찮은데 자네가 걱정이라 그렇지. 방금 도착한 몸인데 피곤하지 않나? 여독 같은 거 없어?”
“없지는 않죠.”
“그럼 그냥 쉬지 그래.”
피곤함이 없지는 않았다.
하나, 내가 자리를 비운 사십여 일을 청죽관 생도들이 어떻게 보냈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나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전했고.
“근데 청죽관 생도 여러분이 제가 산서에서 보낸 날을 궁금해하는 만큼, 저도 여러분들이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한 마음이 커서요.”
“…자네.”
그런 내 말에 어째선지 경룡이 형이 눈시울을 글썽이는 사이.
은하연이 ‘하아.’ 하고 한기가 섞인 숨을 내쉬는가 싶더니 땅을 박차며 짓쳐 들어왔다.
“저부터 갈게요!”
옥녀검 특유의 한기가 실린 검기에 힘입어 은하연의 검이 미끄러지듯 발검 되니.
그 자체로 쾌(快)의 묘리를 띤 검이 되어 내게 그어져 왔다.
쌔애애애액!!
하지만 해볼 만했다.
은하연의 검은 빨랐으되 정직했다.
‘실전 경험이 없는 티가 나긴 난다.’
나는 그녀의 검이 만들어 내는 선의 종착지를 정확하게 간파했다.
하여, 대처는 어렵지 않았다.
나는 늘어지는 시간 속에 회한을 잡아 뽑은 뒤, 은하연의 검이 그리는 선의 종착지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 파천의 내력을 불어 넣으며 일부러 투박하게 쳐냈다.
챙!!!
그에 은하연의 몸이 본인이 검을 휘두르던 방향의 반대 방향으로 회전했는데.
이 순간 은하연은 바쁘게 보법을 밟아냄과 동시에 그 회전을 이용하여, 서리가 일렁이는 또 한 번의 검초를 펼쳐냈다.
쌔애애액!!
챙!
한 달 전만 해도 기본기에 충실한 초식을 펼치는 것에 여력이 없었던 은하연의 검식이 놀랍도록 유려해졌다.
이는 신공과 검술 양면에서 일보를 내디뎠다는 방증이었다.
그에 내 입에서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는데.
“천재는 천재네.”
“언 공자가 그런 소리를 하면 놀리는 것 같거든요?!”
은하연은 되려 입술을 짓씹으며 다음 검초를 펼쳐냈다.
“괴물. 못 본 사이 더 강해졌어.”
그렇게 은하연의 검초를 쳐내고 있으니.
하성이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형님께서는 여유가 있으시네요! 저도 들어갈까요?!”
“어. 들어와.”
그에 파직거리는 아지랑이를 뿜어내며 은하성도 덤벼왔다.
채챙!
깡!!!!!!!
녀석의 검을 쳐내며 내 머릿속을 스친 생각은 녀석을 중심으로 한 동심원이 작아졌다는 것이었다.
깡!!!
한창 방황하며 삽질하고 헛물을 켜던 때의 녀석이 펼치던 검은 화려하고 내력 소모가 많은 초식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지금 은하성이 펼치는 검은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최대한의 힘을 내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그건 은하성을 중심으로 한 동심원의 크기가 예전보다 작아 보이게 만들었지만.
그만큼 찌르고 들어갈 틈이 없어진 것이기도 했다.
‘견실해졌네.’
좁아진 범위 속에서 녀석은 본인이 익힌 천뢰검법이 담고 있는 특유의 강검을 펼쳐내고 있었다.
‘놀진 않았구만.’
그에 내 입가에 피식하는 웃음이 걸린 이때.
“우리도 들어간다!”
서진효 선배를 필두로 이삼 학년 선배 셋이 동시에 뛰어들더니, 다섯 명을 기본으로 삼는 채작진이 돌아가기 시작했는데.
챙! 챙!
채채챙!!!!
일일이 입으로 신호를 내리는 것을 듣고도 모른 척해줬던 전과 달리.
사십여 일 만에 마주한 청죽관의 채작진은 그런 신호 없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에 내 입꼬리가 절로 귀에 걸렸다.
“크. 몇 년씩 허송세월하던 선배님들이 한 달하고 보름이 채 안 되는 기간을 참 알뜰히도 쓰셨네요. 이렇게 하실 수 있으면서 왜 안 하셨대?”
“그, 그 시절 이야기는 갑자기 왜 하나.”
“아무튼, 그럼 저도 본격적으로 가 봅니다?”
* * *
격렬한 진검 대련이 펼쳐지고 있는 청죽관의 연무장을 바라보며 솔거 거지들은 저마다 마른침을 삼켰다.
그중 가장 크게 경악한 사람은 청죽관의 졸업생인 전(前) 사결개 복철이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캉!!!
눈 깜짝하면 누군가의 검이 깨져나갔다.
방금 깜짝였던 눈을 다시 한번 깜짝이면 사람이 날아간다.
“컼!!”
눈앞에 보이는 연무장에선 까딱하면 치명상을 입을 수 있는 초식들이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툭 까놓고 말해서, 산서분타에서 언용운을 상대로 타구진을 펼쳤던 순간에도 저 정도 각오로 언용운에게 덤비지 않았다.
‘…그냥 좀 두들겨 놓을 생각이었지.’
하여, 복철의 입이 자기도 모르게 열렸는데.
“…이게 청죽관 생도들 간의 대련이라고?”
그 광경을 단상에서 함께 보고 있던 여생도 하나가 복철의 말을 듣고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대련이라기보다는 일상이죠. 이게 저희의 일상이에요. 거지 아저씨들도 저희 청죽관에 소속된 이상 익숙해지시는 게 좋을 거예요.”
근데 그 여생도의 말이 제일 무서웠다.
‘너는 향란관 생도이신 것 같은데요?’
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잘못 걸려도 단단히 잘못 걸린 모양이었다.
* * *
“…뭐, 그렇게 되어서 이가장의 일이 마무리되었고. 백의개가 된 거지 셋은 이리 오게 된 거지.”
“와, 진짜 엄청난 일들이 있었네요. 그 현장을 함께하지 못해서 너무 아쉽습니다.”
딱!
“아!”
“화상아, 놀러 갔다 왔냐?! 놀러 갔다 왔어? 까딱하면 누구 하나 뒈질 뻔했는데?!”
“아! 아!!”
“아니, 저는 그 뭐냐 심정적으로 그런 것이거든요?! 정현 도장, 뭐라 말 좀 해주십시오!”
“…음. 저는 묵언을 하겠습니다.”
“야 이.”
“심정적이고 나발이고 그 실력으로? 그동안 놀지 않았다뿐이지 아직 멀었어. 뭐, 됐고. 아, 은 소저. 외조부께 소식지 사업에 관해서는 허락을 맡았소.”
그렇게 복귀 첫날은 청죽관 생도들과 서로 보낸 시간을 확인하느라 쌩하고 지나갔고.
이튿날은 이번 대민지원 일정이 보편적인 일정보다 열흘 정도를 초과하는 바람에 뒤처진 수업 진도들을 나름대로 쫓느라 필기를 베낀다고 지나갔다.
그리고 찾아온 다음 날.
점심을 먹는 자리에 마침 경룡이 형이 왔길래.
이 시기쯤 예정된 학사일정에 관해 물음을 던졌는데.
“그러고 보니 슬슬 신구대면식을 할 때 아닙니까? 총회 쪽에선 무슨 이야기 없습니까?”
“맞네. 본래라면 훨씬 전에 논의가 시작됐을 건데, 당금수석인 자네를 비롯해서 상위권 후기지수들이 학관에 없는 데다가, 산서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이 흉흉해서 논의가 안 되고 있었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처해서 후식을 나르던 거지 삼인방 중 한 명이 그 이야기를 듣다 은근슬쩍 입을 열었다.
“그 제가 오늘 아침에 뭐 들어온 이야기 없나 지타에 나갔다가 그 대면식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는뎁쇼, 무림맹에서 행해지는 회의가 끝나면 명숙들 중에 몇이 내려올 수도 있다고 하던 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