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3화. 우물 안 개구리 (5)
백본회의 대회의장에선 근 육십 년 내에 가장 크게 개최된 회의가 한창이었는데.
얼마 전에 남궁욱이 사퇴한 백본회 부회주 자리를 꿰찬 종남파의 전 집법 장로 장손립이 쥐고 있던 항아리에 꽂혀 있던 나무표를 꺼내 찬반 표시의 개수를 확인하고 헛기침을 하자.
“험험.”
자리하고 있던 구파일방과 명문 세가의 수뇌부 그리고 군소방파의 의견을 대신하는 하원대표와 간사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림맹주이시자 백본회주이신 공손무결 대협이 발의한 합종군에 관한 건은….”
장손립이 쥐고 있는 항아리에 꽂혀 있던 표들은 지난 며칠간 회의장을 뜨겁게 달궜던 논제 중 가장 굵직한 건에 관한 것이었으니까.
“집계 결과. 부결되었소이다.”
그렇게 나온 결과에 자리에 모인 이들 중 누군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또 다른 누군가는 한숨을 내쉬었는데.
그중 후자의 대표라 할 수 있는 공손무결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은 꼴이 될 것입니다.”
그러자 전자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소림의 방장 공효대사가 손에 쥔 염주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맹주께서는 걱정이 너무 많으시외다.”
“대사, 마교의 일에 어찌 걱정이 많다고 하십니까?”
“과거 마교도들이 보였던 해악이야 빈승도 알고 있으나, 합종군을 일으키는 일은 대단한 고역이 될 것이외다. 그 고통과 불안이 고스란히 민초들에게 전가될 것이고, 또 숱한 젊은 목숨이 달린 일이니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할 문제이외다.”
“그렇게 신중을 기하는 동안 마인들은 강해지고 놈들의 세력은 커질 것입니다.”
“그림자가 강해진다 한들, 빛이 굳건하면 어찌 넘볼 생각을 하겠소이까? 개방도 쇄신을 다짐하였고, 산서의 일로 여기 모이신 강호인들이 모두 경각심을 되새겼소이다.”
“말씀이야 맞는 말씀입니다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 어찌 빛과 그림자처럼 절대적일 수가 있겠습니까?”
“맹주의 말씀도 그럴듯하오만, 백도 무림의 기둥들이 고민 끝에 부결을 낸 논제이외다. 그만 집착을 버리고 함께 논의된 자잘한 조치와 백도무림의 첨병 역할을 해주고 계시는 곤륜 그리고 마교도들이 부리는 사술의 방책이 되어주실 모산을 지원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좋지 않겠소이까?”
“…예. 단, 잠시만 쉬었다가 하도록 하시지요.”
그렇게 백본회의가 잠시간의 휴회(休會)를 맞았다.
회의 자체는 휴식에 들어갔으나, 이만한 명숙들이 한자리에 모일 일이 잘 없었고.
또 마교라는 존재가 마냥 무시할 존재는 아니라는 것은 다들 인지하고 있었기에.
참석자들 간의 물밑 대화는 활기를 띠고 이어졌는데.
“장로님, 어떻게 생각을 좀 해보셨습니까?”
“오, 단목 가주님이시군요. 생각이라면 호주(湖州)에 모산의 업장과 속가문을 세우게 도와주시는 대신, 상청검수급 제자를 세가에 파견해 달라시던 말씀 말입니까?”
“예. 장문인과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 하셨는데, 어떻게 끝났나 싶어서 말입니다.”
“예. 장문인께서도 모산과 단목세가 모두가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흡족해하셨습니다. 성은 달라도 단목세가와 저희 본산의 거리가 지척이니 제가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찾아뵙는 것이 도리이지요. 저희가 찾아가겠습니다.”
“허허허. 그러시렵니까?”
그중 가장 인기가 좋은 대화 상대는 모산파의 행사 장로 송양자였다.
“장로님, 저희 제안은 생각해 보셨는지요?”
“염성문의 문주님이시군요? 삼대제자급이라도 좋으니 다섯 정도를 파견해 달라고 하셨지요? 삼 년 단위로 계약을 갱신하자고 하셨고요. 흐음, 그런데 삼대제자들은 한창 본산이나 정무학관에서 수신하고 있거나 정무학관에 입관할 준비를 하는지라….”
“그러시면 기간은 오 년으로 잡고 대금을 선납부를 해드리면 어떻겠습니까? 파견료도 삼할 정도 더 드리겠습니다.”
“허허. 제가 돈 때문에 고민을 한 것은 아닌데….”
“알지요. 알지요.”
그때였다.
그렇게 송양자의 주변이 나름대로 인산인해를 이루는데, 웬 거지 하나가 회장 안으로 달려 들어와 개방의 방주인 만복에게 쪽지 하나를 전했다.
“어허, 이 녀석 주변에는 뭔 바람 잘 날이 없구먼. 팽 가주, 언 가주. 용운이 소식이 왔는데 들어 보시렵니까?”
만복의 입에서 나온 말에 회장에 있는 사람들의 관심이 절로 만복 쪽으로 옮겨갔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진주언가에서 쫓겨났다는 소식으로 천하에 제 이름을 알린 이래, 언용운은 천하에서 가장 유명한 후기지수가 되었는데.
천하의 개망나니 소리가 돌다가도 정무학관의 수석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이번에는 진주언가의 강시종을 복원했다느니 마두를 베었다느니 하는 소리까지 돌고 있었으니까.
그에 회장에 앉아 있던 사람 중 몇 사람이 만복을 향해 입을 열었고.
“방주님, 저희도 같이 들으면 어떻겠습니까?”
“그러지 뭐. 대단한 비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들 알려면 알 수 있는 이야기니까.”
만복은 흔쾌히 입을 열었다.
“여기 있는 언 가주의 장남이 이번에 노획한 강시들을 정무학관에 기증하겠다고 싣고 갔는데, 모산파 출신 생도들이 자신들을 통했어야 했다면서 관리 소홀이 있는지 확인하겠다고 나섰다네?”
그런 만복의 음성에.
자리에 있는 사람 중 몇몇이 ‘하기야, 강시는 모산을 통하는 게 맞지.’ 하는 소리를 했다.
그에 송양자의 입꼬리가 피식하고 비틀렸다.
하나, 송양자의 입에 걸린 미소는 그리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
팽무혁이 만복에게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었다.
“용운이, 그놈이 가마니로 둔갑을 하지 않고서야 그런 소릴 듣고 가만히 있을 놈이 아닌데? 그래서요? 그 뒤에 어찌 됐답니까?”
“의외로 가만히 응했다는구만? 모산파의 제자들이 제기한 이의에 순순히 응했는데.”
“응했는데?”
“정작 용운이 녀석이 보인 강시술에 모산파의 제자들이 모친을 찾으면서 나자빠졌다네?!”
사실 나자빠진 녀석은 무길 하나라 되어 있었지만.
마교를 치자는 논제에는 부(不) 표를 던져놓고 단물은 챙기려 하는 모산파가 아니꼬워서 만복은 그냥 싸잡아 버렸다.
본디 소문이란 것이 단수가 복수가 되는 일은 심심하면 있는 일이었다.
뭐, 아무튼.
그렇게 만복의 말이 끝나자.
송양자의 근처에 있던 사람 중 몇이 은근슬쩍 걸음을 빼더니 언정웅을 향해 물음을 던졌다.
“그러면 그 언가의 망나…. 아니, 하북권웅의 장남이 진주언가의 강시종의 맥을 복원했다는 소문이 사실이라는 겁니까?”
“…허? 그게 사실이라면 방술 쪽으로 대종사급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 사람들의 물음에.
언정웅의 입꼬리가 경련이 일 듯 푸들거렸다.
“크흠. 커흐흠.”
하나 언정웅 본연의 겸손한 성정이, 그의 입에선 솔직하지 못한 말이 나오게 했다.
“용운이가 가문에 있을 적에 강시종의 맥을 복원해 보겠다고 한 적은 있습니다만, 대종사급 재능이라는 말씀은 너무 과하십니다. 그저 작은 성취를 보았고, 그 성취를 토대로 이번에 산서에서 작은 공을 세웠다 하겠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송양자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장로님?”
“…예, 말씀하십시오. 염성문주님.”
“방금 돈 때문에 고민하신 게 아니라고 하셨는데, 생각을 해보니 그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도사님들께 너무 세속적으로 접근한 듯합니다. 더 어울리는 제안이 무엇일지 고민을 좀 해보고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그에 모산파의 장문인인 송청자가 ‘크흠!’ 하고 목을 가다듬으며 송양자에게 쓴소리를 뱉었다.
“사제는 아이들 관리를 어떻게 하는 겐가?”
그리고 언정웅을 향해 적당한 사과의 말을 던졌다.
“아이들의 일이라 하나, 모산이 실례를 좀 한 듯합니다.”
그런 송청자의 말에 언정웅은 짐짓 진중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포권을 취했다.
“정무학관이라는 곳이 워낙에 젊은 혈기들이 모이는 곳이니 왕왕 일어나는 일 아닙니까.”
한데 여전히 입꼬리는 비실거리고 있었다.
그것이 송양자의 가슴에 불을 댕겼다.
‘이런 개망신이 있나?!’
본래는 적당히 신구대면식을 구실 삼아 정무학관에 들려서 남몰래 기를 꺾어주려 했건만.
일이 이렇게 돼서야 수지 타산이 전혀 맞지 않았다.
‘더 많은 사람 앞에서 진주언가 녀석들에게 오늘의 개망신을 돌려줘야 한다.’
송양자는 얼굴이 홍시처럼 벌게진 와중에 빠르게 머리를 굴렸고, 떠오른 생각을 송청자에게 전음으로 전했다.
그 생각이 제법 그럴듯하다 느껴진 것일까?
공손무결이 회장으로 돌아왔을 때.
“다시 회의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마교의 준동을 막을 수 있는 대안이 있으시면 기탄없이 발의를 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예, 모산의 장문인. 말씀하십시오.”
발언권을 얻은 송청자의 입이 열렸다.
“여러 대안도 대안이지만 백도무림이 건재함을 보이는 것도 마교도들을 위축시켜 발붙일 자리를 좁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빈도의 머릿속에 들었습니다.”
“음? 무술대회라도 열자는 말씀이십니까?”
“그러면야 좋겠습니다만, 갑자기 그런 대회를 열려면 비용도 비용이고 급히 열려 하면 되려 혼란이 생기거나 치안의 공백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럴 것입니다. 하여 장문인의 생각이 정확히 무엇이십니까?”
“이즈음에 정무학관에서 신구대면식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음. 대면식은 재학 중인 생도 중에 학년이 높은 생도가 신입생들을 맞아주는 행사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걸 좀 키우는 겁니다. 여기 계신 명숙 중에 여유가 있으신 분들은 참석하시어 자리도 좀 빛내주시고. 아! 금년의 신입생들이 그렇게 날고 긴다고 하니, 아예 맞아주는 선배를 ‘재학생’이 아니라 ‘졸업생’으로 바꾸면 어떨는지요?”
* * *
제법 긴 시간을 자치회실을 비웠더니, 밀린 수업 진도를 따라가는 것 외에도 일이 참 많았다.
‘뭔 놈의 일이 이렇게 끝이 없지? 가만, 이거 은 소저가 시위하는 건가?’
- 시위?
‘뭐랄까? 지능적으로 항의를 한다고나 할까요? 산서에 가기 전에 제가 맡던 업무가 십이라면 십이나 십삼 정도가 된 느낌인데요? 진짜 묘하게 늘어서 물어보기가 좀 그렇네요?’
- 그 정도는 그냥 해라! 그 친구비라는 것도 곧 죽어도 그만 달라는 소리는 안 하는 놈이!
그때였다.
그렇게 사부님과 몇 마디를 주고받고 있는 그때.
은하연이 두루마리 하나를 내 책상으로 툭 하고 던졌다.
“그게 제일 급하니 그것부터 좀 봐주세요.”
이것 좀 보세요.
이제 그냥 막 던진다니까요?
한데 그 두루마기를 펴보니 내 업보였다.
‘…아, 이건 던질 만하긴 했네.’
- 뭐길래?
‘복귀 날에 제가 그동안 보낸 시간을 확인해보겠답시고 대련하다가 부숴 먹은 백련검의 수리비요.’
한데, 맨 마지막에 적힌 수리단가가 산서행을 다녀오기 전보다 저렴했다.
“은 소저, 이거 백련검의 수리단가가 좀 싸진 것 같은데?”
- 삯이 저렴한 게 문제가 되느냐?
‘품질에 문제만 없으면 좋은 일이긴 한데 확인은 해보는 거죠.’
- …하연이 저것이 어련히 확인을 안 했을까?! 가만 보면 너도 일을 찾아서 하는 인종이로다!
“대장간 골목에 있는 대장간 중 한 곳의 대야장이 노환으로 물러났어요. 그래서 아들 내외가 맡아서 하는데, 다들 대야장이 버티고 있는 다른 대장간에 일을 맡기니까 내외분이 가격을 낮추더라고요? 품질은 제가 직접 확인했어요.”
“그럼 됐소.”
그렇게 묵묵히 봐야 할 일거리를 쳐내고 있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잠시 본관에 불려갔던 경룡이 형이 달려와 입을 열었다.
“부회장! 큰일 났네! 신구대면식에 관한 소식이네! 백본회에서 명숙들이 내려오신다고 하네!”
“회의 끝나고 본산이나 세가로 돌아가는 길에 구경 좀 하고 가려나 보죠. 그게 무슨 큰일입니까? 심지어 며칠 전에 거지새끼들이 했던 말 아닙니까?”
“거지들이 입에 올린 뜬소문이랑은 궤가 좀 다르네! 여기 보게 이게 백본회에서 보내왔다는 문서의 필사본이네! 신구대면식의 구(舊) 쪽을 보게 재학 중인 고학년이라고 되어 있어야 할 곳이 졸업생으로 바뀌어 있네!”
경룡이 형의 말마따나 문서의 ‘구’ 부분에 적힌 단서가 달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적힌 지명표의 맨 위 열엔 모산파의 이름에서 그어져 나온 화살표가 내 이름을 가리키고 있었다.
『모산파 -> 청죽관 언용운』
처음 신구대면식에 명숙들이 참석한다는 이야기가 돌았을 때만 해도, 바쁜 일을 쳐내고 나면 직접 한번 찾아오시겠다던 맹주님의 전언을 떠올렸다.
한데 이 공문을 보고 나니 어쩐지 구린내가 느껴졌다.
‘내가 보낸 엿을 잡순 노인네가 뭔 짓을 한 모양인데 이거?’
누군지 몰라도 잘 걸렸다.
아주 개 쪽을 팔게 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