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174화 (174/444)

제174화. 우물 안 개구리 (6)

공문에서 나란히 적힌 내 이름과 모산의 이름을 확인한 나는 이를 갈았다.

하나, 그러면서도 시선을 조금 더 내려 다른 이름들도 살펴보았다.

그러고 보니 굵직한 이름들이 빠져 있었다.

‘일단 소림이 없고 무당도 없네? 개방이랑 팽가, 언가도 빠졌고? 그 외에도 빠진 곳이 좀 있는데?’

이 와중에 구파일방과 명문 세가들이 한마음으로 합심한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는 이때.

솔거 거지 삼인방의 둘째 격인 계춘이 기별을 해왔다.

“부회장님! 계춘입니다!”

“들어와.”

“옙!”

그렇게 자치회실에 들어온 계춘은 내 손에 들려 있는 공문을 보고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저번에 말씀드린 명숙들이 학관에 방문한다는 소문이 구체화돼서 알려드리러 왔는데. 회장님이 저보다 빠르셨군요?”

하지만 곧바로 가슴에서 꼬질꼬질한 쪽지 하나를 꺼내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제게는 방주님의 쪽지가 있습죠!”

계춘에게 쪽지를 받아 펼쳐보니 구불구불한 만복의 필체가 적혀 있었는데.

『용운은 보아라.

네가 모산파의 제자들을 골려줬다는 소식이 들어 왔길래 공개적으로 낭독했더니, 모산파의 말코 놈들이 얼굴이 벌게져서는 일을 키우더구나?』

그렇게 시작한 쪽지의 내용은 조금 전 내 뇌리를 스쳤던 생각에 대한 답을 담고 있었다.

『나는 말코 놈들의 속내가 보여서 반대했고, 소림의 중놈들이랑 무당 그리고 남궁세가는 고고한 척 반대했다.

그러고 나니 아미랑 화산 그리고 종남은 찬성을 하고, 그런 식으로 갑론을박이 있다가 전반적으로 취지 자체는 좋다는 의견이 많아서 일이 그렇게 되었다.

언 가주에게 네 녀석의 방술에 관해 들은 바가 있고, 항룡장도 가르쳐놨으니 걱정은 안 한다.

아, 네 아비와 백부는 하북을 비운 지 너무 오래되기도 했고 마교의 발호를 생각하면 챙길 게 많다고 바로 그리로 간다더라.』

‘이건 참 아버지다운 결정이네.’

『나도 말코 놈들의 얼굴이 벌게지는 꼴을 또 보고 싶었으나, 산서의 일을 수습해야 해서 불참하니 거지들을 통해 소식을 전해주길 바란다.

추신. 따라간 거지들이 애를 먹이거든 언제든지 약을 처방하거라. 물론 여기서 약은 매다.』

그렇게 쪽지를 다 읽고 나자, 계춘이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그, 부회장님?”

“왜?”

“외람되지만 방주님께서 저희 이야기는 안 하셨는지요?”

“말미에 하시긴 했는데, 기대하는 게 뭔데?”

“예컨대 품행이 방정해졌다 싶은 놈은 이만 돌려보내도 좋다 뭐 그런? 헤헤헤.”

그런 계춘을 향해 쪽지의 마지막 부분을 보여준 나는 다시금 경룡이 형이 가져온 공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만복의 쪽지를 보고 나자 공문에 적힌 신구대면표가 다르게 보였다.

모산파 → 청죽관 언용운

화산파 → 청죽관 정현

아미파 → 청죽관 은하연

‘천하제일 도문과 검문을 두고 무당과 경쟁하는 화산은 정현을, 당대 검후가 보타문에서 나온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아미파는 검후의 제자가 된 은 소저를. 이런 식인가?’

명숙이라는 양반들의 속내가 빤히 보이기도 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런 판이 벌어진 것 자체는 나쁠 것이 없었다.

‘원작의 신구대면식은 단순히 정현이 자신을 무시하던 학관 선배들을 시원하게 두들겨주는 사건에 불과했지.’

그에 비하면 이번 신구대면식은 일이 비교도 안 되게 커져 버렸다.

‘그렇기에 좋아.’

산서의 일로 이야기의 궤가 이미 크게 틀려버렸다.

앞으로 닥쳐올 위기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 주인공 세대도 더 큰 파도를 넘을 준비를 해야 했는데.

내 생각에는 이번 신구대면식이 그 계기를 만들기에 딱 좋아 보였다.

‘사문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으니 동기부여를 시키기도 더 좋겠지.’

뭐, 원작과 승패는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이기든 지든 판이 커진 쪽이 배우고 얻는 게 더 클 터였다.

생각은 여기까지.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은 소저, 이거 공문에서 지목표 부분만 큰 종이에 옮겨 적어 놓으시오.”

“알겠어요.”

“그리고 계춘.”

“예, 부회장님.”

“너는 하성이랑 소릉이한테 가서 일과 마치고 청죽관 신입생들은 연무장으로 빠짐없이 모이라고 전하고. 너는 너대로 내가 적어주는 사람들한테 가서 같은 이야기를 전해. 그리고 경룡이 형.”

“음? 나는 왜?”

“후배들이 연무장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데, 선배들께 쉬시라고 하면 마음 한편에 후배들 생각이 나고, 나는 이러고 있어도 되나 싶은 마음이 들고 그래서 되려 괴롭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지 않을까? 푹 쉴 수도 있을 것 같네만?”

“에이.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주먹은 갑자기 왜 그러고 푸나. 다시 한번 생각하니 자네 말이 맞는 것 같네.”

“역시 그렇죠? 그럼 특별히 선배님들도 함께 구르…. 아니, 수련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 * *

그렇게 집합을 걸어놓은 나는 계춘에게 수련에 필히 참석시킬 명단을 써준 뒤.

마지막 결재서류를 쳐내고 수업을 듣기 위해 자치회실을 나왔는데.

“야! 같이 가!”

연구실에서 헐레벌떡 튀어나온 당옥기가 나를 불렀다.

“응? 연구실에 있었냐? 자치회실에서 안 어슬렁거리길래 향란관에서 바로 강의실로 간 줄 알았는데?”

“영환 교수가 내준 과제 하고 있었지. 수업을 파할 거면 화끈하게 파해 주던지 과제는 왜 내주는 거야? 진짜 내가 자기 수업만 듣는 줄 아나?!”

그리고는 철을 해놓은 종이를 내밀었다.

“아무튼 이것 좀 봐 줘.”

“뭔데 이게?”

“영환 교수가 내준 과제.”

당옥기가 과제라고 내민 종이철은 표지가 참 일품이었다.

깔끔한 끈 처리에다 테두리에는 예쁜 문양을 그려 넣었고, 수상록이라는 글자와 향란관 당옥기 라는 글자는 용이 날아갈 것 같은 필체였다.

한데, 녀석이 내민 종이철을 들어 훑어보니 내용은 그저 그랬다.

두 글자로 요약하면 가관이었고, 좀 길게 말하면 표지만 일품이었다.

나는 녀석의 손에 종이철을 되돌려주며 입을 열었다.

“과제 자신 없는 애 특. 표지 개 열심히 꾸밈.”

“캬악! 그러게 어떻게 한 건지 귀띔 좀 해달라니까!!”

“기말시험 준비할 때는 알려줄 수 있어도, 지금 알려줘서 그걸 네가 과제로 내면? 영환 교수님 성격에 분명히 발표시킬걸?”

“…그건 또 그렇네. 강호생활백서 교수랑 강시학개론 교수는 발표를 너무 시켜. 왜 그러는 거야 진짜!”

그렇게 툴툴거리는 당옥기와 당도한 강의실엔, 평소보다 빨리 와있던 퀭한 얼굴의 영환 교수가 있었는데.

“헙.”

“언용운 생도랑 당옥기 생도군. 당옥기 생도, 그 손에 들린 것은 과제인가?”

“예? 아, 예!”

“이리 내게.”

당옥기에게서 과제를 받아가더니 빠르게 훑고 곧바로 을(乙) 자를 써서 돌려주었다.

생각지도 못한 점수를 받아든 당옥기는 소곤거리며 눈을 키웠다.

“뭐야. 나 잘 썼나 본데?”

놀라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딴게?”

“캭!”

그냥 점수를 후하게 주시는가 하면 또 다른 생도들은 거의 다 병(丙)점 이하를 받아가는 듯했다.

뭐, 아무튼.

그런 식으로 들어오는 생도들의 과제를 그 자리에서 모두 확인한 영환 교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수업을 시작했다.

“여러분과 함께 수업을 듣는 언용운 생도는 실제로 무구 없이 강시를 움직여 보이기까지 했는데, 그 방식을 현실성 있게 추측해 본 생도가 없다는 건 조금 실망인데? 일단 강시를 움직이는 원리를 되짚어 보는 것부터 시작하기로 하지.”

그렇게 판서를 시작한 영환 교수는 이 시대의 강시술을 기반해 제법 그럴듯한 추론 과정을 도출해냈는데.

“…이걸 실현하려면 상단전이 열리는 심법을 수련해야 하고, 그러고서도 내력으로 만든 부적을 어떤 상황에서도 유지해 낼 수 있는 평정심과 정신력이 필요하지. 어려운 과정이지만, 일단 이런 식으로 상단전에서 자아낸 내력으로 가상의 부적을 만들어 강시를 통제할 수 있으리라는 것까지는 내 수업을 들었으면 누구든 쉽게 추론할 수 있다.”

탁. 탁.

탁탁탁.

“너희가 해온 과제를 전부 훑어봤는데, 생각들이 여기서 벗어나지를 못하더구나. 유일하게 당옥기 생도만이 과제의 주제라도 정확히 잡아서 을(乙) 점을 주었다. 당옥기 생도, 내가 내준 과제가 뭐였지?”

“…어? 언용운 생도가 보여준 무구 없이 강시를 일으키는 법이었습니다.”

“그렇지. 언용운 생도가 일으킨 강시들은 노획한 무부금강시였다. 그 말은 강시들의 몸에 새겨진 부적이 이미 있다는 것이다. 그럼 내력으로 만든 부적의 식이 바뀌어야 한다.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탁탁.

탁탁탁탁탁.

“이런 식으로 강시의 몸에 새겨진 부적을 무효로 하는 부적이나 덮어씌우는 부적을 동시에 만들어서 유지하는 식으로 한 꺼풀을 더 들어가야 한다. 너희들과 언용운 생도의 수준 차이가 이 정도나 나는 것이다.”

영환 교수는 그렇게 쉬는 시간도 없이 한 획 한 획 설명을 곁들인 부적을 그려가며 거대한 칠판을 가득 채우더니.

수업 종료를 말함과 동시에 나를 찾았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고. 언용운 생도는 남아 줄 수 있겠나? 짧게 할 이야기가 있어 그렇네.”

이후로 훈련을 잡아 놓기는 했지만, 짧은 이야기라면 못 나눌 것도 없었다.

나는 고개를 주억였고.

다른 생도들이 강의실을 나가자, 영환 교수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신구대면식에 관한 소식 들었지?”

“예, 들었습니다.”

“내 본산에서 외골수 취급을 받는지라, 그분들이 무슨 의중으로 자네를 지목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네. 하지만 저번에 아이들이 벌인 일도 그렇고, 아마 순순히 교류하자는 뜻은 아니지 싶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모산이 크나큰 실례를 범했네.”

“에헤이. 사문은 달라도 교수님이랑 저랑 배분 차이가 얼만데 이러십니까.”

“배움에는 배분이 없다는 게 내 지론일세, 자네는 백도무림의 강시학을 최소한 백 년은 앞당길 사람이야.”

“…천 년.”

“응?”

- …….

“아닙니다.”

“아무튼, 나는 모산이 더 이상 자네에게 실수하는 것을 원치 않네. 내가 어떻게든 본산의 지목을 거두어 볼 테니 노여움을 거둬 줄 수 있겠나?”

“공문까지 내려온 일인데 상식적으로 그게 거두어지겠습니까? 저는 교수님이 헛심을 빼지 않으셨으면 싶네요. 말씀 다 하셨으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 * *

영환교수와 헤어진 나는 강의실을 나와 자치회실에 서책을 옮겨다 놓고 곧바로 연무장으로 갔다.

연무장에는 청죽관 생도들 그리고 다른 색 무복을 입은 동기생 몇 명이 나와 있었다.

그렇다고 주인공 세대를 다 불러 모은 것은 아니었고.

남궁윤과 제갈설지, 그러니까 제 할 일을 알아서 할 녀석들은 빼고.

당옥기랑 소천이 형.

그리고 천장호를 끌고 오라고 용명이 녀석 정도만 불렀는데.

그렇게 내가 당도하자, 소릉이 녀석이 단상으로 뛰어나와 은하연에게 준비해 놓으라고 이른 전지를 촤륵 펼쳤다.

나는 그 전지에 적힌 지목표를 턱짓하며 입을 열었다.

“이거 다들 확인했죠? 대련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질 수도 있고 이길 수도 있어요. 근데 납득이 안 가는 대련 내용을 보인다? 그럼 뒈지는 겁니다?”

그런데 이때 천장호가 손을 빼꼼 들고 입을 열었다.

“그럼 납득이 가는 패배는 어떻게 하면 인정받을 수 있는 겁니까?”

“세상에 납득이 가는 패배가 어딨어? 이겨야지.”

“오. 확실히 용운이의 말이 일리가 있군.”

“오는 뭐가 오입니까 소천 형! 그냥 다 뒈졌다는 소린데!”

“언 소협의 말씀은 죽기 살기로 하라는 뜻으로,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는 도로 통하는 말씀이신데 어찌 초장부터 그리 초를 치십니까 천 소협?”

“아니, 이 사람들아. 나는 운매관 사람이야!”

“이보게, 장호. 나랑 소천이 형도 운매관 사람일세.”

“그러니까!”

“용운아, 얘는 무시하고 그냥 시작해라! 근손실 난다!”

“그럼 앞 열부터 나와서 거지들한테 모래주머니들을 받아 팔다리에 차십시오. 그리고 무당산 둘레부터 한 바퀴 돌죠 그 다음에 불러드리는 짝과 대련을 하는 겁니다. 고선배 인솔하십시오.”

그렇게 청죽관의 연무장에서 시작된 악다구니가 단강구 일대를 물들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나는 회한을 끄집어내 검지 끝에 조그마한 상처를 낸 뒤, 천천히 혈조술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허리춤의 사부님께서는 한마디를 해오셨다.

- 호오, 용운이 네가 방술을 수련하는 것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그래도 모산파의 본산에서 나오는 놈들쯤 되면 너도 경계를 하는 것이냐? 아까는 백도무림의 강시술을 천 년쯤 앞당길 거라더니?

‘사부님, 이건 그놈들을 경계해서 하는 수련이 아닙니다.’

- 하면?

완벽히 압도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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