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5화. 우물 안 개구리 (7)
내가 그렇게 지옥 훈련을 선포한 지 꼬박 일곱 날이 지났다.
육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면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도 정신이 또렷해지는 순간이 있다.
지난 일곱 날 동안 진행한 훈련은 생도들의 몸에 모래주머니와 쇳덩이를 채워서 인위적으로 그런 집중상태를 끌어낸 뒤 대련을 붙이는 것이었는데.
한계에 도달한 체력이라는 것은 집중력을 끌어내기도 하지만 그 집중력을 갉아먹기도 하는지라, 이따금 흐트러지는 녀석들이 나왔다.
그런 사람이 보일 때마다 나는 단상에서 하던 개인 수련을 멈추고 연무장으로 내려왔다.
“은 소저, 힘드오?”
“…아니요.”
“아니라니 잘됐군. 그럼 대련 상대를 나로 바꿉시다.”
“……!”
“들어오시오.”
챙!
“힘든 거 같은데? 검초는 무뎌졌고, 호흡은 흐트러졌군. 까딱 잘못하면 눈도 풀리겠소?”
“그건 벌써 일주일째 이러고 있으니까….”
“아미파가 하고 많은 생도 중에 굳이 은 소저를 지목한 이유가 뭐겠소?”
채챙!
“…저를 통해 스승님을 욕보이려는 거겠죠.”
“잘 아는군. 그쪽에서 어떤 제자를 소저의 상대로 내세울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소저보다 검을 쥔 세월이 긴 검수가 나설 테니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소. 그때도 그런 말을 할 참이요?”
“…….”
“저번에도 말했지만, 대련에서 질 수도 있소. 검후께서 그런 일에 마음을 쓰실 성정도 아니시고, 검을 쥔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변명거리야 있겠지. 하지만 그런 표정으로 진다면 내가 용납하지 않을 것이오. 입술을 씹어 무시오.”
사람이 많다 보니 그렇게 한 명에게 집중하고 있으면, 다른 방면에서 흐트러지는 사람도 나왔다.
하지만 해볼 만했다.
내겐 사부님이 계셨으니까.
- 용운아, 소천이 녀석도 좀 지친 것 같구나?
“소천이형! 이젠 소진 누님이 없어. 백부님의 체면이 오롯이 형에게 달렸다?!”
“!”
“…저 형은 눈이 뒤통수에도 달렸나? 이 와중에 소천 형이 흐트러지는 걸 보네.”
“천장호, 남에게 관심을 가질 여유가 있나 보지? 어이, 복철이. 천장호한테 모래주머니 하나 더 추가해!”
“예이!”
“으아아아아!”
그렇게 오늘도 청죽관의 연무장을 피땀눈물로 물들이고 있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명숙들이 어디쯤 왔는지 알아보기 위해 개방의 지타에 보내놓은 솔거 거지 하나가 돌아와 입을 열었다.
“부회장님! 명숙들의 행렬이 남양(南陽)에 이르렀답니다!”
남양에서 정무학관까지 급히 달리면 하루 만에도 올 수 있는 거리였다.
하나, 백도무림의 건재함을 보인다는 명목으로 정무학관을 찾는 명숙들이 모양 빠지게 급히 달려올 리는 없었다.
적당한 속도로 달리는 마차를 타고 마주치는 백성들을 위무도 하고 그럴 것이다.
‘그럼 대략 삼일 정도 걸리겠군.’
나는 곧바로 입을 열어 생도들의 훈련을 멈추게 했다.
“그만.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 그리고 지옥 훈련도 여기까지 하기로 하겠다. 이제부터 차고 있던 모래주머니와 쇳덩이들을 해제해도 좋다.”
그리고 남은 삼일 중 첫날은 하중을 부여하던 구속구를 벗어던지게 한 상태에서 대련을 진행시켰고.
“쉬는 것도 훈련이고, 만전의 몸 상태를 만드는 것도 대비이니 오늘은 몸은 쉰다.”
둘째 날은 몸은 쉬게 하는 대신 미래로 치면 이미지트레이닝이라 할 수 있는 논검을 진행시켰다.
그리고 마지막 날은 온전히 쉬게 함과 동시에 덕담을 전했다.
“근 열흘 다들 고생했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납득이 안 가는 패배를 하는 사람은 나한테 뒈지는 거야.”
그렇게 삼일을 마저 보내고 찾아온 다음 날.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시점에 낙양에서 내려온 명숙들이 단강구 일대에 진입했으니, 생도들은 예복을 갖춰 입고 본관 앞 광장에 도열하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명숙들이 단강구 일대에 진입하셨답니다!”
하여, 청죽관 생도들을 이끌고 본관 앞 광장에 나가 자리를 잡고 서 있는데.
남궁윤이 대뜸 내게 말을 걸었다.
“왜 나만 안 불렀지?”
처음에는 나한테 한 소린 줄 몰랐을 정도로 뜬금없는 소리였으나.
속내를 알기 힘든 남궁윤 특유의 시선이 정확하게 나를 향하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지옥 훈련에 자기는 왜 안 불렀냐는 소리인 것 같았다.
남궁윤을 부르지 않은 이유는 알아서 잘할 놈이어서였지만 그 말을 그대로 돌려주기는 좀 그래서 나는 말을 돌렸다.
“제갈설지도 안 불렀다.”
“…….”
그러고 있으니.
행정처장 임태옥이 입을 열었다.
“손님들이 도착하셨소이다!”
그리고 각 문파를 상징하는 깃발을 들고선 제자들을 앞세운 각 문파의 명숙들이 학관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는데.
‘우도본산(左道本山) 모산파라.’
그렇게 들어서는 깃발 중엔 ‘우도본산’ 그러니까 옳게 된 방술의 종가를 자처하는 모산파가 있었다.
‘늙은 개구리가 오셨구만.’
* * *
정무학관을 찾은 명숙 중 장문인 배분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본관에서 총장인 경혜 사태를 비롯한 학관의 운영위원들과 차를 나누는 사이.
그 아래 배분의 명숙들과 제자들은 학관에 재학 중인 제자들을 위무하는 시간을 갖거나 오랜만에 찾은 학관을 구경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는데.
“…일이 그렇게 되었던 게로구나, 언용운이라는 녀석의 꾀가 아주 여우와도 같다만, 그래도 그렇지 무길이 너는 모산의 제자라는 녀석이 조심성 없이 강시를 두고 나자빠지는 꼴을 당하느냐?!”
“죄, 죄송합니다. 장로님.”
“너희도 마찬가지다. 그 녀석이 노획을 해보라고 했으면 앞으로 나서서 본산에서 배운 방술을 보였어야지. 그걸 멀뚱멀뚱 보고만 있었느냐?”
“변명으로 들리시겠지만 저희가 나섰으면 더 우스워졌을 겁니다. 놈의 분위기가 좀 남달랐습니다. 영환 사숙조도 수업 중에 항상 언용운이 저희보다 한참 앞서있다고 했고요.”
그렇게 송양자가 모산파의 삼대제자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그때.
영환 교수가 송양자를 찾아왔다.
“장로님, 소질이랑 이야기 좀 하시지요.”
마침 송양자도 영환과의 만남을 바라던 바였기에 두 사람의 걸음이 옮겨졌다.
“오냐! 이야기 좀 하자!”
그렇게 영환 교수의 연구동으로 자리를 옮긴 송양자는 곧바로 불호령을 내렸다.
“영환이 너는 대관절 어느 사문의 사람이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번에 언가가 강시를 기증한 일로 우리 삼대제자들이 이의제기를 했을 때! 영환이 네가 언용운의 역성을 들었다면서?”
이 순간.
영환의 뇌리엔 헛심 빼지 말라던 언용운의 음성이 스쳤다.
하나, 포기할 수는 없었다.
영환은 불호령을 거스르며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역성을 든 게 아니라, 그날의 이의제기는 억지가 다분했습니다. 저는 정무학관의 교수이고, 그건 옳고 그름의 문제였습니다.”
“관리 소홀이 있는지 확인하겠다는 것이 어떻게 억지냐? 그리고 매번 언용운이 앞서 있다고 치켜세우고 모산의 제자들은 뒤처졌다고 기를 죽였다면서?”
“모산의 제자들의 기를 죽인 게 아니라 그게 사실입니다. 언용운 생도는 다른 방면에서도 뛰어남을 보이지만, 강시학과 주부술 쪽에서는 그야말로 번뜩이는 발상과 천재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젊은 친구이지만 저희가 배울 것이 많습니다. 그런 마음일랑 접어두시고 백도무림의 강시학을 함께 발전시키기 위해….”
“허허. 나는 지금껏 네가 모산의 사람인 줄 알고 있었건만, 그동안 골수를 진주언가의 것으로 갈아 끼운 모양이로구나?!”
하나 송양자의 태도가 결국 영환의 침착함을 잊게 만들었다.
“장로님! 아니 사숙!!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냉정하게 판단해 보십시오! 저희 중 누구도 무구 없이 강시를 움직인 예가 없습니다!”
“없지. 근데 그게 뭐가 어떻다는 것이냐? 만날 연구동에만 처박혀 있더니만 현실감각이 이렇게나 떨어져서야.”
“예에?”
“영환이 네가 젬병인 백도무림의 알력에 관한 것은 접어두더라도, 무구 없이 강시를 운용하는 게 무에 그리 대단하다는 것이냐?! 내력으로 짜낸 부적으로 강시를 움직이는 거? 상단전에서 뽑아낸 내력으로 그린 여러 장의 부적을 유지해야 할 테니. 그래, 쉬운 일은 아니지.”
“그건 인정하시면서 어찌 그런 말씀을?”
“영환아, 이놈아. 그만한 집중력을 상대 술자가 방해하는 환경에서, 날붙이들이 날아드는 전장에서 유지할 수가 있겠느냐? 하나를 세우는데도 그만한 집중력이 소모될 텐데, 수십 수백 구를 움직일 수 있겠느냐? 학술적으로 대단한 증명일지 몰라도 실상 하등 쓸모가 없는 잡기인 것이야!”
그것으로 대화는 끝이었다.
“네 녀석이 치켜세우는 바람에 언용운이라는 녀석이 하늘 높은 줄을 모르던데, 내 이번 기회에 그 녀석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 녀석이 그리도 마음에 들거든 이후에 데려다 가르치든지 볶든지 하거라!”
송양자는 자기 할 말만 하고 영환의 연구실을 나가버렸다.
홀로 남은 연구실에서 영환은 전에 없는 답답함을 느끼며 장탄식을 내뱉었다.
* * *
백본회에서 내려온 명숙들이 두 패로 갈리어 한쪽은 정무학관의 운영위원들과 담소를 나누고, 다른 한쪽은 학관을 구경하고 다닌 지 얼마나 되었을까?
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무렵.
신입생들은 정무학관의 본관으로 다시 모이게 되었다.
그리 대단한 이유가 있어 모인 것은 아니었고.
기라성 같은 명숙들이 학관을 방문한 만큼, 학관의 주인이자 이번 신구대면식의 얼굴인 신입생도들이 명숙들을 맞이하는 연회를 연다는 취지에서 모이게 된 것이었는데.
“음식은 풍족하게, 술은 조금만 준비했습니다. 대면식이라는 행사를 앞둔 만큼 주향이 가득하면 아니 되겠기에 그리한 것이니, 섭섭해 마시고 이 자리를 즐겨 주시기 바랍니다.”
총장이신 경혜 사태의 말씀으로 연회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젊은 도사 하나를 대동한 노 도사가 청죽관의 식탁을 찾아왔다.
한데, 뒤에 따라온 젊은 도사의 얼굴이 이제 보니 아까 ‘우도본산모산’ 이라는 깃발을 들고 있던 녀석인가 싶더니.
아니나 다를까 노도사의 입에서 모산파의 이름이 나왔다.
“나는 모산의 송양자라 하네. 좀 앉아도 되겠나?”
“언용운입니다.”
나는 형식적으로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명숙들이 기숙사를 돌며 격려하는 것은 다른 식탁에서도 한창 행해지는 바였지만, 그건 본인들의 제자가 속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내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허리춤의 사부님께서 한마디를 하셨다.
- 모산의 늙다리에게 내줄 자리는 없다 하거라!
사부님의 마음이 곧 내 마음이긴 했으나, 보는 눈도 있었고.
늙은 개구리가 왜 찾아왔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마침 비어 있던 앞자리를 권했는데.
“자네가 진주언가의 망나니로구만? 아, 이런. 입에 붙어놔선. 미안하네, 당금수석이라고 해야 했는데. 매년 주인이 바뀌는 이름이라 그만 깜빡했네.”
송양자는 자리에 앉자마자 이런 소리를 하더니.
“사죄의 뜻으로 술 한 잔 줌세. 형운아, 내 붓을 좀 다오.”
술을 준답시고 뒤에선 형운이란 제자에게서 붓을 찾았다.
“근데 그냥 주면 재미가 없으니….”
그러더니 함께 받은 빨간 안료에 담근 붓으로 앞에 놓인 술병에 무슨 글씨를 쓰기 시작했는데.
송양자가 술병에서 붓과 손을 떼자 술병이 두둥실 떠서 나를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 …? 허공섭물(虛空攝物)은 아닌 것 같은데?
허공섭물은 내력으로 멀리 있는 물건을 움직이거나 물건을 멀리 움직이는 것을 말했다.
송양자가 보내오는 술병은 허공섭물은 아니었다.
‘이건 주술과 염(念)으로 물건을 움직이는 겁니다. 허공섭물보다는 염동력이라고 부르는 게 맞겠네요.’
뭐, 아무튼.
송양자라는 양반은 홀로 먼저 신구대면식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나타날 때부터 헛짓거리 할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웃어른이 벌써 쪽을 팔고 싶으시다는데, 어울려 드려야지.
나는 오른 엄지의 손톱을 사용해 식탁 아래에서 왼 검지에 피를 낸 뒤.
그 손가락을 송양자가 보내온 술병에 가져다 댔다.
그에 술병이 내 손가락에 붙은 듯이 허공에서 우뚝 멈췄고.
그러자 송양자와 형운의 눈이 커졌다.
“!”
“!”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잔은 어른이 먼저 받으시는 게 예의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핏방울을 병 아래로 움직인 뒤, 송양자가 그러했던 것처럼 둥둥 떠 날렸다.
물론 얌전히 날리지는 않았고.
마지막에 가선 술병을 완전히 뒤집어 버렸다.
촤악!!!!
그에 쏟아져 내린 술이 송양자의 옷에 속절없이 쏟아져 내렸는데.
“이, 이런!!”
나는 송양자가 얼굴을 붉히는 사이, 과장되게 머리를 긁어 보이며 선수를 치고 나섰다.
“아이고, 제가 치기로 송양자 어르신의 고매한 술법을 따라해 보려다가 그만 집중력이 흩어졌습니다. 야, 이거 어렵네. 그나저나 총장님께서 술 냄새를 너무 풍기지 말자고 하셨는데, 이를 어떡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