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6화. 신구대면식 (1)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몸을 일으킨 송양자는 나를 쏘아봤다.
하나, 분통만 터트릴 뿐.
제대로 된 말을 뱉어내진 못했다.
“이! 이이이!!”
할 말이 없지 뭐.
호기심 많은 신입생이 신기한 술법을 보고 따라 하다가 실수를 했다는데, 거기다 대고 뭘 어쩔 건데?
하여, 송양자의 노기가 내 근처에 있던 솔거 거지 계춘에게 튀었다.
“거기 조교 선생!”
“예? 저 말씀이십니까?”
“그래! 비색 무복을 입은 대학원생이 이 근처에 지금 자네 말고 더 있나?!”
“없네요?”
“없다는 말을 할 게 아니라, 그 쥐고 있는 수건을 건네야지! 내 꼴이 지금 안 보이나?”
“아, 근데 이건 수건이….”
“어허! 언제부터 대학원생이 그렇게 말대꾸를 했지?”
계춘은 노기등등한 송양자의 등쌀에 쥐고 있던 천 쪼가리를 내밀었다.
“여, 여깄습니다요.”
송양자는 그렇게 계춘에게 빼앗은 천으로 얼굴과 수염에 튄 술을 슥슥 닦았는데.
그러다 말고 천을 코로 가져가며 입을 열었다.
“킁킁. 근데 무슨 수건에서 쉰내가 이렇게….”
“수건이 아니고 걸레라 그렇습니다요.”
“뭐, 뭣이?! 내가 지금 걸레를 얼굴에 문대고 있었단 말이냐?”
“아니. 제가 그래서 아까 수건이 아니라고 말씀을 드리려 했는데, 말을 자르시길래 상관 없으신 줄 알고….”
그런 송양자의 모습에 허리춤의 사부님께서 대소를 터트렸고.
- 푸하하. 걸레로 오물을 닦았으니 이치에 딱 맞거늘, 어찌 저리 역정을 내는고?
곁에 있던 정현은 나직이 한마디를 읊조렸다.
“…적악여앙(積惡餘殃). 악함을 쌓으면 반드시 재앙이 따른다더니, 이 연회장에도 도기가 흐르나 봅니다.”
그러는 사이 송양자의 분기는 더더욱 탱천했다.
조금만 더 내버려 두면 ‘갈!’ 소리를 외칠 것만 같아 가만히 뒀는데.
“이! 이놈들이!”
아쉽게도 함께 온 형운이라는 젊은 도사가 그런 송양자를 말리고 나섰다.
“장로님, 고정하십시오. 이 이상 시끄러워지면 보는 눈이 많아질 것입니다.”
“……!”
그런 형운의 말에 송양자는 까드득 이를 깨물더니 ‘흥!’ 하는 소리와 함께 소매를 털며 자리를 떠나갔다.
그리고 홀로 남은 형운은 나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실례가 많았다. 내일 보도록 하지.”
“그러시죠.”
그러고 송양자를 뒤따르는 형운을 보며 나는 턱을 괴었다.
‘내일 보자는 말이 두고 보자는 거야, 아니면 그냥 인사말이야?’
모산파의 인물 중 동분서주하며 마교의 괴왕부와 맞서다 제법 이름을 떨치는 사람은 두 명이었는데, 그중 하나가 영환 교수님이었고.
다른 하나가 바로 저 형운이라는 도사였다. 하여,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한마디가 새어 나왔다.
“애매하네.”
그 소리를 듣고 있던 소릉이 녀석이 입을 열었는데.
“언 형? 뭐가 애매하시다는 건가요?”
뇌리에 스친 생각은 털어놓을 것은 아니어서 나는 말을 돌렸다.
“그런 게 있다. 아무튼 많이 먹어둬. 내일 패배했다가는 향냄새를 맡으며 먹게 될지도 모르는 음식들 아니냐.”
그러자 여기저기서 사레들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 * *
그렇게 환영 연회가 끝이 났고, 대면식의 날이 밝았다.
간밤에 연회가 있었기에 오전은 통으로 휴식 시간으로 주어졌다.
하여, 생도들이 점심을 먹고 난 뒤에 본격적으로 대면식의 막이 올랐는데 개막을 장식한 기수는 아미파였다.
아미파의 장문인 경민 사태는 자리에서 일어서 좌중을 향해 합장을 했다.
“아미의 경민입니다. 검후께서 제자를 얻으셨다는 소식이 대파산맥을 넘어 아미산의 금정봉까지 들려오기에, 과연 어떤 소여협일까 궁금하여 은하연 생도의 대면식 상대로 우리 아미가 자원했습니다.”
그러고는 검후 모용린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한데, 듣자 하니 은하연 생도가 본디 문과의 생도로, 검을 쥔 지 얼마 되지 않았다지요?”
그에 모용린이 경민 사태의 눈을 마주하며 입을 열었는데.
“그러합니다만.”
“하여, 빈니가 고민이 많았습니다. 막상 자원은 했는데, 아미의 검수 중에 검을 쥔 지 그토록 짧은 아이가 없어서 아무리 대면식이 지도대련의 성격을 띠고 있다지만, 어른이 어린아이의 팔목을 비트는 모양새가 되어서야 피차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싶으신 말씀이 무엇이신지요?”
“아미의 삼대제자 중에 혜정이라는 아이가 있습니다.”
이 순간.
경무학관의 총장인 경혜 사태가 공적인 자리라는 것도 잊고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입을 열었다.
“사저! 혜정이는 아직 학관에 입관조차 하지 않은 아이 아닙니까?!”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혜정이 아미파의 삼대제자 중 특출난 재능을 보이는 검수이기는 했다.
하나, 그건 아미파 사람들과 아미파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나 아는 이야기.
이 자리에서 은하연이 패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검후의 제자가 입관도 하지 못한 아미파의 제자에게 패했다고 알게 되는 것이었다.
“하여 빈니가 이리 미리 말씀을 여쭙는 것 아닙니까? 검후께서 탐탁지 않으시다면, 재학 중인 아이나 졸업생 중에 고르셔도 됩니다.”
경혜 사태는 총장의 권한으로 불가를 입에 담으려 했으나 모용린의 입이 먼저 열렸다.
“혜정, 들어본 이름입니다. 아미파의 젊은 검수 중에 제법 싹수가 보이는 친구라지요? 하연아.”
“예, 스승님.”
“내 생각엔 혜정이라는 검수와 겨뤄 보는 게 좋은 공부가 될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떠하냐?”
“스승님의 생각이 그러하시다면 소녀는 상관없습니다.”
“그렇답니다. 좋은 제안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장문인.”
그렇게 첫 대면식의 구체적인 대진이 결정되었고.
청죽관 대기석에 자리하고 있던 은하연이 연무장에 올랐다.
그리고 경민 사태의 뒤를 지키고 있었던 혜정도 연무장으로 내려왔다.
각각 오르고 내려온 두 검수 중,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혜정이었다.
“선배님이 되실 분께 결례를 범함을 용서하세요.”
확신에 찬 혜정의 말은 예의를 가장한 결례였다.
하나, 은하연의 가슴에 아무런 감정도 남기지 못했다.
‘망나니를 자처해서 온갖 멸시를 받은 사람도 있는데. 이 정도쯤이야.’
은하연은 그런 평정 속에서 조용히 검을 뽑았다.
스르렁-
그리고 혜정의 입에서 또 한 번의 결례가 나왔을 때.
“삼 초를 양보할….”
옥녀검 특유의 한기를 검에 감으며 지체없이 땅을 박찼다.
쌔애애액!!
혜정은 불가 무공 특유의 금광(金光)이 감긴 검으로 은하연의 검을 막아냈다.
챙!!!
그렇게 교환된 첫 초식에서 두 검수는 어렴풋이 서로의 수준을 파악했다.
“!”
혜정은 은하연의 검이 생각보다 훨씬 매서움을 깨달았고.
은하연은 혜정이 자신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강해.’
그러나 넘을 수 없는 벽으로 보이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강하지만 언 공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채챙!!!!!
그랬기에 혜정이 양보한 삼 초가 모두 지나갔을 때.
마음이 급해진 사람은 되려 강자인 혜정이었다.
세 번의 공세를 받으며 급해진 혜정의 마음은 초조함이 되어 그녀가 강맹한 검초를 선택하게 만들었다.
쌔애애애액!!
그렇게 휘둘러져 나온 초식은 강맹하되 정직했다.
꼭 열흘 전의 은하연이 휘두르던 검처럼.
그랬기에 은하연은 침착하게 혜정의 검이 도착할 종착지에 자신의 검을 끼워낼 수 있었다.
챙!!!!!
단, 은하연의 움직임은 혜정의 검초를 단순히 막아내는 것이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혜정에게서 전해지는 힘에 옥녀보법에 묘리를 더해 연무장을 빙판 삼아 미끄러지듯 움직여 혜정의 뒤를 잡았다.
그리고 지체없이 검을 빗겨 올렸다.
쌔애액!
서걱!
그에 아미파의 여승들이 착용하는 승모의 끝단이 잘려져 나가며 혜정의 단발머리가 드러났다.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제가 그쪽의 선배가 될지는 두고 봐야 할 문제고, 결례는 용서할게요.”
은하연의 승리에 아미파의 장문인 경민 사태가 입술을 씹었고, 검후 모용린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행정처장 임태옥은 공식적으로 은하연의 승리를 공언했다.
“아미파의 혜정과 청죽관 은하연 생도의 대면식의 승자는 은하연 생도외다!”
그러자 청죽관의 객석이 뒤집혔다.
“와아아아!!”
“소검후! 소검후!!”
솔직히 말해 소검후 소리를 은하연의 이름 앞에 가져다 붙이기엔 아직 한참 이르긴 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리 불러도 될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원작의 은하연은 이 시기에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아미파의 재학생 선배에게 패배를 당했었다.
반면 혜정은 주인공 세대의 후배 기수로 원작에서도 두각을 드러내는 검수였다.
‘이걸 이기네.’
그에 나도 객석으로 돌아온 은하연에게 축하를 건넸는데.
“축하하오.”
은하연은 승자답지 않게 한숨을 내쉬더니, 객석에 앉으며 한마디 말을 했다.
“저는 살았네요.”
그런 은하연의 말에 목놓아 소검후를 외치던 청죽관 동기생들의 목소리가 우뚝 멈췄다.
“…….”
뭐, 아무튼.
그렇게 시작된 신구대면식은 자잘한 방파들이 지목한 대련이 스무 번 정도 치러지고 나면.
굵직한 명문대파가 중간고사에서 상위권 성적을 기록한 생도들을 지목한 대련이 한번 치러지는 식으로 진행됐는데.
어느덧 해가 지고 그 자리를 달이 대신한 시각.
각각 청성파와 곤륜파가 내세운 후기지수를 꺾은 제갈설지, 천장호에 이어 내 차례가 되었는지.
명숙들이 자리한 단상 위에서 송양자가 몸을 일으켰다.
“빈도는 모산의 송양자입니다. 본디 제 옆에 계신 장문인께서 이번 정무학관의 신구대면식에 자원한 까닭을 설명하시는 것이 이치에 맞겠으나, 이 늙은이가 한 가지 건의를 하고 싶은 것이 있어 이렇게 섰습니다.”
그런 송양자의 음성에 아미파의 일을 상기한 경혜 사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건의요?”
“예. 모산이 언용운 생도를 지목한 까닭은 언 생도가 언가의 강시종의 맥을 복원하며 마교놈들에게서 강시를 노획해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도로 지목했으니, 단순히 검을 섞는 평범한 신구대면식과는 다른 방식을 취하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기왕지사 아미의 차례에 유연함을 보여 주셨으니 이번에도 조금 유연하게 가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어떻게 유연하게 하시자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말씀을 해주시지요.”
“언용운 생도가 일곱 구의 금강시를 노획해왔다 하는데, 그 일곱 구의 강시를 언용운 생도가 노획하던 때의 방법대로 부리도록 하고, 모산이 자랑하는 퇴마진인 북두퇴마진을 제대로 보여 보겠습니다.”
그런 송양자의 말에 경혜 사태가 잠깐을 외치며 입을 열었고.
“제대로 보여 보겠다는 그 말씀은 설마 상청검수를 내보낸다는 말씀이십니까?”
“예. 급이 전혀 맞지 않습니다만, 언용운 생도가 승패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본인은 물론이고 다른 생도들에게도 좋은 공부가 될 것입니다.”
영환 교수도 흙빛이 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장로님!”
그러나 이때.
내가 입을 열었다.
“…그! 어른들 말씀하시는데 무림말학이 끼어들 자리가 아님을 압니다만, 저는 좋습니다. 모산파의 진법이라는 거 한번 견식해보고 싶네요?”
당사자인 내가 동의하자, 송양자의 제안은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덜컥 덜컥.
쿵! 쿵! 쿵! 쿵! 쿵! 쿵! 쿵!
그에 잠시간의 휴식 시간 동안 일곱 구의 무부금강시들이 옮겨져 왔고.
“그 뚜껑 좀 미리 열어놔 주십쇼. 사람도 많은데 박차고 나오면 이게 아무렇게나 날아가서 위험하거든요.”
내가 작은 요구사항을 전달하는 사이.
어제 연회장에서 봤던 형운을 비롯해 일곱 명의 모산파 제자들이 단상에서 연무장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북두칠성 모양으로 늘어서며, 상청검수의 상징인 시커먼 사인칠성검을 뽑아들었다.
“준비들 되신 것 같으니 시작합니다?”
그렇게 운을 뗀 나는 회한을 뽑아듦과 동시에 왼손에 마법진을 그리며 입을 열었다.
“일어나라.”
그에 일곱 구의 강시들이 몸을 일으키더니 내 의지에 따라 연무장 아래에서 콩! 하고 튀어올라 쿵! 하고 내려섰다.
크아아아아!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너나없이 마른침을 삼켰다.
무구 없이 강시가 움직이는 모습을 처음 보는 상청검수들도 그러했다.
하나, 나름대로 무길이놈의 상위호환들이라 이건지.
그들은 침착함을 유지하며 돌림노래를 부르듯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는데.
그 주문의 마지막 마디가 맺어지자.
“급급여울령!”
검수들의 사인칠성검에서 뻗어져 나온 아지랑이들이 주박을 형성하며 일곱 구의 강시에 감겼다.
그에 강시들이 감전된 듯 푸들거리기 시작했는데.
끄어어엌?!
나는 잠시 ‘역적의 낙인’에 공급하던 내력을 거두어 보았다.
그러자 일곱 구의 강시가 내 쪽을 향해 몸을 틀었다.
크어!
크어어어!!
상청검수들의 입가에 엷은 미소들이 걸리는 순간이었고.
“장로님의 말씀이 맞았군. 별거 아니야.”
“흥. 그래 봐야 강시인 것이지. 칠성진의 주박에서 자유로울 수 있나.”
영환을 제외한 모산의 도사들이 노소를 가릴 것 없이 입꼬리를 뒤트는 순간이었다.
그에 이곳저곳에서 여러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언가의 강시종의 맥을 복원했다더니 이거 싱겁구만.”
“아무리 천재라도 이제 약관인 친구가 복원을 해봐야 뭐 얼마나 제대로 복원했겠나?”
“제대로 했다손 치더라도 사마씨(司馬氏)의 진(晉)나라 때부터 방술을 익혀온 모산파에 안 되겠지. 괜히 우도본산소리를 듣겠나?”
“…허미. 제아무리 용운 형이라도 상청검수 일곱은 무리인 건가?”
나는 그런 소리를 가만히 귀에 담아보다가 어느 순간 입을 열었다.
“아주 멋진 주박이네요. 근데 다들 꽉 붙들고 계신 거 맞죠?”
“…뭐라?”
그리고 다시금 ‘역적의 낙인’에 내력을 공급했다.
그러자 가장 가까이에 있던 강시 하나가 사인검에서 뻗어져 나온 뇌기를 거스르며 삐걱삐걱 몸을 움직여 다시금 상청검수 쪽으로 몸을 틀기 시작했다.
크? 크그극!!
그에 북두칠성의 핵이 되는 자리에선 형운이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입을 열었는데.
“옥형성(玉衡星)! 개양성(開陽星)! 정신 안 차리나?!”
“지, 집중하고 있습니다!”
“저희 주박은 정상입니다!”
“뭐?”
상청검수들이 그러고 있는 사이, 가장 가까이에 있던 강시를 시작으로 다른 여섯 구의 강시들이 모두 상청검수들을 향해 몸을 틀기 시작했다.
크극!
크그그그극!!
그에, 멍청한 표정이 된 상청검수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입꼬리를 뒤틀어 올렸다.
“설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