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8화. 신구대면식 (3)
이 자리엔 소림의 방장과 무당의 장문인 그리고 개방의 방주가 없었다.
화산의 장문인인 성민자가 가장 배분이 높았고 연배도 높았다.
하여, 성민자의 말은 그 자체로 공신력을 지니고 있었다.
‘괴룡의 주인이 바뀌었다.’
흔히 후기지수를 일컬어 용봉(龍鳳)이라 표현하지만.
그중에서도 정말로 빼어난 이들의 이름 앞엔 용봉이라는 글자가 별호가 되어 붙는다.
비룡, 검룡, 도봉, 창룡, 독봉 하는 식으로.
그런 별호들은 강호라는 말의 근간이 되는 장강과 닮아 있다.
장강의 물이 끊이지 않고 흘러 황해로 나아가듯.
앞 물결에 있는 선배가 더 넓은 바다로 나아가 새 이름을 얻으면, 뒷 물결에 해당하는 후배가 그 별호를 이어받는 것이다.
그런데 이따금 교체가 강제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었으니.
언용운 같이 강제로 밀어내 버리는 경우였다.
더욱이 ‘괴룡’이라는 별호는 대대로 모산파의 후기지수가 독점해오던 이름이었다.
하여, 단상에 모여 있는 명숙들의 반응이 여러 가지로 갈렸는데.
언용운을 일찍부터 눈여겨보고 있던 몇몇 교수들은 감탄을 섞은 말을 내뱉었고.
“괴룡이라. 바둑이면 바둑, 검이면 검, 방술 외에도 다른 재능도 출중한 친구라 ‘괴(怪)’ 자가 어울리는가 싶다가도. 그만한 인물을 일컬어 흔히들 ‘괴물’이라 하기도 하니 어울리는 것도 같은데. 뭐, 아무튼 총장님의 걱정이 괜한 것이 되었습니다?”
“하하. 그렇습니다, 제갈 교수님. 늙은 비구니가 마음을 졸였는데, 그러느라 고단해진 심부를 언용운 생도가 또 한 번 놀라게 하는군요. 하여간에 사람을 쥐락펴락하는 재주가 있는 친구입니다.”
“…쓰흡. 이 일을 전서구 다리에 매달 조그마한 종이에 어떻게 다 적어 넣지? 이러다가 세필가로 전직을 하겠네.”
“예? 팽 교수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 집안일입니다. 집안일.”
모산파와 지근거리에 있어 이렇게 된 상황에서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단목세가는 이 상황을 어떻게든 포장해주려 했지만.
“…허허허. 으음. 하, 하기야 형운 도장이 너무 용의 이름을 오래 가지고 있기는 했지요? 물려줄 때가 되었습니다.”
모산이 자랑하는 상청검수들이 피떡이 되어 나뒹구는 상황인지라.
포장을 하면 할수록 되려 당사자인 모산파의 도사들의 얼굴이 벌게질 뿐이었는데.
그마저도 노삼이 그냥 듣고만 있지를 않았다.
“거, 단목세가에서는 뭔가를 물려줄 때 저런 식으로 물려줍니까? 두 번만 물려줬다간 살림살이가 남아나지를 않겠는데요?”
“…….”
그렇게 단목세가 가주의 입을 다물게 만든 노삼은 웃음을 삼키며 모산파의 노도사들이 앉아 있는 좌석을 향해 다음 말을 전했다.
“큽. 뭐, 그건 그렇고. 아까 송양자 어르신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더라? 아, 좋은 공부가 될 거라고 하셨던가요? 하기야, 배움에는 나이가 없다는 말이 있기는 합디다. 어떻게, 좋은 공부가 되셨습니까요?”
“…….”
그에 모산파 노도사들의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시커멓게 변했는데.
신입생들이 무언가를 얻어가야 하는 자리에서 자칫 어른끼리 싸움이 날 것 같았기에.
이쯤 하여 경혜 사태가 단상 위의 분위기를 정돈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노 교수님!”
“아니, 저는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본 겁니다? 동냥이면 모를까 방술에는 까막눈이라, 용운이가 이겼고 상청검수들은 피떡이 되었다는 것 말고는 어떤 술법이 오갔는지 몰라서요?”
“…그렇다고 칠 테니 이쯤 하시고. 잠깐 청죽관 생도들이 있는 곳에 가서 아이들을 격려해주고 오시죠.”
“에헤이. 한창 재밌는데 지금 말입니까. 꼭 가야 하는지요?”
“…마침 강시들을 옮긴다고 잠시 쉬는 시간이지 않습니까. 언용운 생도도 언용운 생도지만, 오늘 청죽관의 신입생도들이 아주 기백 있는 대련을 보여주고 있던데. 가서 격려 좀 해주고 오세요.”
“커흠. 뭐, 그럼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노삼은 코를 한껏 치켜들고 단상을 벗어났다.
그리고 청죽관 생도들이 모여 있는 객석으로 향했다.
청죽관에서 대면식에 나서는 생도는 신입생들 뿐이었기에, 푸른 무복이 가득한 객석은 신입생들은 앞쪽에, 고학년들은 뒤쪽에 앉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다.
‘모산파의 늙은 말코 놈들을 골려준다고 한눈을 팔았는데, 이놈들 이거 분위기가 왜 이래?’
한데, 누구보다 화색이 되어 날뛰고 있어야 할 청죽관 생도들이 있는 자리가 예상과 달리 고요했다.
그리고 신구를 가릴 것 없이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평소라면 질질 짰을 진가 녀석도 울지 않고?’
노삼은 고개를 갸웃하며 뒷좌석에 있던 진경룡에게 다가가 나직이 질문을 던졌다.
“진가야. 너희 왜 조용하냐?”
“교수님?”
“그래, 나다. 조금 전만 해도 좋아 날뛰던 놈들이 잠깐 사이에 왜 이렇게 조용해? 아니지, 조용한 게 아니라 떨고 있는 거 같은데?”
그에 진경룡이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는데.
“…언 부회장이 돌아오면서 지면 뒈진다는 것을 또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실감이 돌아왔습니다.”
“…뒈져? 현실감? 아, 근 열흘 언가 놈이 너희를 쥐잡듯이 잡는 것 같더만? 그 지옥 훈련인가 수련회 인가 그거 또 한대?”
“예. 말로는 납득이 안 가는 패배를 한 사람은 다시 지옥을 보게 될 거라고 했는데, 언 부회장은 상청검수 일곱을 때려잡은 상황이니 납득이 가는 패배가 있을 리가….”
“그래서?”
“아마 일정 수준 이상 패배가 누적되면, 신입생은 물론이고 저희까지 연대 책임으로 지옥으로 가게 될 것 같습니다,”
“에이. 말로만 뒈진다고 하는 거지, 언가 녀석이 다 너희 생각해서 그러는 거 아니냐. 그 지옥이라는 것도 수련 좀 빡세게 하는 거 가지고 엄살은? 내가 너희였으면 돈을 주고서라도 끼워달라고 했다.”
그러다 나온 노삼의 말이 진경룡의 가슴을 가격했다.
그에 울컥함이 진경룡의 입에서 작게나마 새어 나왔다.
“…교수님도 한번 당해보셔야 그런 말씀을 못 하실 텐데.”
“응? 방금 뭐라고 했느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데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아. 나는 격려를 해주러 왔….”
“아, 그거라면 괜찮습니다. 되려 신입생들의 집중을 해칠 듯합니다. 나중에 하시고, 지금은 계시던 곳으로 돌아가 주시지요. 곧 우 부장이랑 은 부장, 두 홍보부장의 차례라 저희는 이만 진심을 다해 응원해야 합니다.”
“…뭔. 여기서도 가라고 하고 저기서도 가라고 하네.”
* * *
모산파와 나의 대면식이 끝나고 여러 대련이 이루어졌다.
‘그중 이렇다 할만한 것은 당옥기?’
사천당가랑은 어지간하면 원한을 쌓지 않는 게 무림에서 살아남는 지혜 중 하나라 그런지.
아무도 지목을 안 하는 상대라, 사천당가의 먼 친척이 맞수로 나왔다는 게 인상 깊었다.
그 외에도 여러 녀석이 이기거나 졌는데.
제법 기념비적인 승리는 소릉이 녀석이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학관에서 크고 작은 대련이 있다 치면 늘 도망 다니기 바빴던 녀석이.’
명문대파의 지목을 받은 것은 아니고, 녀석의 출신에 불만이 많은 향란관에서 급을 맞춘다고 이학년 선배를 냈는데, 그걸 보기 좋게 꺾었다.
산서에서 나름대로 생사가 오가는 싸움을 해본 것이 도움이 된 모양이었다.
챙!!!!
그리고 지금 또 한 명의 청죽관 생도가 상대를 꺾고 돌아왔다.
- 호오, 하성이 저놈도 이겼구나.
“으아아아! 보고 있나 청죽?!”
신승을 거두고 요란하게 돌아온 은하성은 곧바로 소릉이 녀석과 손을 맞잡고 덩실거리기 시작했다.
“나만 패하고 돌아오면 슬플까 봐 아까는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우 동생, 오늘은 우리 홍보부의 승리다!”
“하하. 그렇기도 하네요!”
“이제야 말하는데, 아까 우 동생이 마지막에 보여준 그 검초는 마치 화살과도 같았어.”
“그런 말씀은 좀 부끄러운데요. 은 형도 대단했어요! 내려치는 천둥과도 같은 검초였어요!”
“아무튼 우리는 살았다. 나만 아니면 돼!!”
“돼!”
지랄 났네.
지랄 났어.
조금 전에 세운 기념비 취소.
나는 덩실거리고 있는 두 녀석을 향해 곧바로 입을 열었다.
“너희는 이겼어도 참석이다.”
“예? 어째서?”
“어, 언 형?”
“납득이 안 가는 패배가 있으면 반대의 경우도 있는 거지. 아직 멀었어. 그리고 뭐? 나만 아니면 돼? 동기는 하나라는 것부터 다시 배워야겠네.”
그런 내 말에 두 녀석의 얼굴이 파리해졌는데, 개중에 하성이 놈은 어떻게 은하연이랑 연계해서 이 상황을 탈피해 보려고 했으나.
“누님도 아까 ‘저는 살았네요.’라고 했는데요?!”
“내가 언제? 언공자 저 안 그랬어요. 그리고 그런 소리를 하면서 누님 소리가 나오니? 이보세요 성휘당주님, 저 아세요?”
“누, 누님!”
접근 방식이 글러 먹어서 본전도 찾지 못했다.
“시끄럽고. 착석해. 이제 남궁윤의 차례다. 보고 배울 게 많을 거야.”
그렇게 하성이 녀석을 객석에 주저앉히고 나니.
종남파의 대표로 학관을 방문한 백본회 부회주 장손립이 입을 열었다.
“종남의 장손립이외다. 추구하는 검의 묘리가 비슷하기도 하고, 제가 남궁욱 어른의 부회주 자리를 승계한지라 일찍이 천하제일 후기지수 소리를 들은바 있는 남궁세가의 비룡검을 지목하였습니다.”
그에 향란관의 객석에서 남궁윤이 걸어 올라왔는데.
어째선지 녀석의 시선이 단상에서 내려오는 종남의 검수 임백우가 아니라 나를 향했다.
“…….”
그런 녀석을 향해 나는 입을 벙긋거렸다.
‘어쩌라고.’
내가 그렇게 나오자 남궁윤이 홱 하고 고개를 돌렸는데.
그사이 연무장에 다다른 종남의 임백우가 입을 열었다.
“시작하면 되겠나?”
“예.”
그러자마자 두 검수가 팟! 하고 땅을 박찼다.
쌔애애애액!!
그에 허리춤의 사부님께서 두 사람의 검을 가늠하셨다.
- 종남의 말코 놈이 휘두르는 검의 근간은 천하삼십육검이고, 궁윤이 쪽은 창궁무애검법이로구나. 양자 모두 무거움과 강함을 좇는 검이로다.
사부님의 말마따나 각각 강검을 좇는 두 검이 공기를 찢어발기며 맞닿아 불꽃을 튀겨대니.
캉! 캉! 카카캉!!!
여기저기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저마다 감탄을 하면서도 승패를 점쳐댔는데.
“떨어져 있어도 공기에서 전해지는 박력이 내 뺨에 와 닿는 거 같아.”
카캉!
카카카캉!!
“그러게 말이야. 한 치의 양보도 없네. 자네 생각에는 누가 이길 것 같나?”
“이거 어렵네. 임백우 선배도 본인 기수에서는 검으로 적수가 없던 사람이라고 알고 있는데. 천재 중의 천재들의 싸움이란 어렵구만.”
같은 주제로 사부님도 내게 문제를 내오셨다.
- 용운이 네가 보기엔 누가 이길 것 같으냐?
나는 그런 사부님을 향해 곧바로 생각을 전했는데.
‘남궁윤이 앞으로 대여섯 초식 안에 이길 것 같습니다. 녀석의 걸음은 종횡무진인데, 임백우 선배는 한 번 붙었다 떨어질 때마다 걸음을 반의 반보씩 손해를 보고 있네요.’
- 호오. 거기까지 보았느냐?
그사이 내가 예견했던 대로 다섯 초식이 흘렀다.
그리고 남궁윤의 검면이 임백우의 목에 닿았다.
“종남파의 임백우와 향란관의 남궁윤 생도의 신구대면식의 승자는 남궁윤 생도외다!”
그에, 행정처장님이 남궁윤의 승리를 외쳤고.
“남궁윤!!!”
“역시 비룡검이다!!”
내게는 미치지 못하지만, 이쪽저쪽에서 남궁윤의 이름을 연호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나 정작 남궁윤 본인은 정작 그런 연호가 탐탁지 않다는 듯.
미간을 구기는가 싶더니, 또 한 번 내 쪽을 바라봤다.
그런 녀석을 향해 나는 다시 한번 아까 했던 말을 던졌다.
‘어쩌라고.’
그러자 녀석이 또 홱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향란관의 객석으로 내려갔다.
‘저 새끼는 저번부터 왜 저래?’
뭐, 아무튼.
그렇게 크고 작은 대면식의 대련들이 치러진 끝에 어느덧 딱 한 사람, 정현만이 남게 되었다.
‘이런 행사에선 원래 주인공이 맨 마지막에 나서는 게 국룰인데, 이건 또 어떻게 아귀가 맞았네.’
아마 참석한 명숙 중에 화산파의 장문인인 성민자가 가장 배분과 끗발이 높기 때문이었는데.
명숙 중 맨 마지막으로 엉덩이를 일으킨 성민자는 더함도 뺌도 없이 속내를 시원하게 드러냈다.
“화산은 예로부터 천하제일 검문 자리를 두고 무당과 경쟁을 해왔소이다. 금년 신입생 중에 무당의 검수가 있다기에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이리 걸음을 하였소이다.”
그리고 나설 제자의 도호를 말했는데.
“진관은 나서라.”
그렇게 불려 나오는 진관은 졸업생이 아니었다.
향란관의 이학년으로 이 대진 또한 원작과 그대로였다.
‘하기야. 천하제일검문을 노리면서 졸업생을 내세우면 면이 안 살지.’
우연과 백도 무림인들의 체면이라는 것이 묘하게 얽히며 참 신기하게도 이 대목에선 원작과 궤가 딱 맞아떨어졌다.
‘그럼 진관이 원작에서 했던 말을 여기서도 그대로 할까?’
제법 인상적인 장면이었기에 뇌리에 강렬하게 남아 있는 기억을 토대로 나는 그 순간의 대사를 속으로 읊조려 보았는데.
‘무당의 수치를 꺾는 게 화산의 명성에 무슨 보탬이 될지 모르겠지만….’
“무당의 수치를 꺾는 게 화산의 명성에 무슨 보탬이 될지 모르겠지만. 시작하지.”
아니나 다를까.
챙! 채채챙!!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말을 진관이 토해내는 것으로 두 검수의 검이 어지럽게 얽히기 시작하더니.
채챙!!!
채채채챙!!!!
원작대로 정현의 검이 진관의 목덜미에서 멈추….
빠악!!
빠아악!!!
…지 않았네?
그에 입이 나도 모르게 열렸다.
“…저, 저 녀석이 사람을 패네? 왜 사람을 패고 그러지?”
그에 주변인들이 동시에 입을 모았는데.
“저도 놀랍긴 한데, 언 공자가 하실 말씀은 아니지 않나요?”
- 네가 할 소리냐?
“맞아요!”
“용운 형님은 그럼 왜 사람을 패시는데요?”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정현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그, 정현 도장? 대관절 무슨 도로 사람을 그렇게 후리셨습니까?]
[…태극이 그저 유유히 흐르는 것만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음이 강하면 양을 강하게 주입하고, 양이 강하면 음을 강하게 주입해야 하더군요. 언 소협을 보며 배웠습니다.]
…음.
그래, 그렇구나.
그렇게 내가 황당한 얼굴로 조금 이상하게 커버린 원작의 주인공을 보고 있는 사이.
입관처장의 발표와 함께 우렁찬 함성이 들려왔다.
“화산파의 대표로 나선 진관 생도와 청죽관의 정현 생도의 신구대면식의 승자는 정현! 정현 생도외다!”
객식구들은 제외하고.
마지막 주자로 나선 정현까지 포함하여 42전 29승 13패.
만년 꼴찌만 했던 청죽관이 보여준 이번 대면식은 가히 쾌거라 부를 만한 성적으로 막을 내렸다.
‘기특하니까. 팔 번 체조는 빼줄까요?’
-…퍽이나 좋아하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