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9화. 신구대면식 (4)
신구대면식의 본행사가 끝나고, 명숙들의 환송연과 생도들의 뒤풀이를 겸한 연회가 개최됐다.
“승패에서 비롯된 감정은 부디 모두 내려놓고, 대련에 참여하고 또 지켜보며 얻은 경험을 소중히 여겨주기 바랍니다.”
한데, 신입생들 쪽은 활기가 있었지만, 고학년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고.
명숙들의 표정은 말 그대로 좋지 않았다.
- 푸하하. 당도한 날에 으스대던 모습들은 어디 가고, 늙은이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꽁하구나.
‘그럴 수밖에 없죠.’
백도무림의 건재함을 내보인다는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워 행사에 참여했지만.
결국 속셈은 ‘자신들의 방파를 중심으로’ 그 일이 이루어지길 바랐을 것이다.
그런 목적으로 주인공 세대를 지목했으나 하나같이 패배를 당했다.
“청죽관에도 사람이 있었구려.”
“사람들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소. 당금수석, 아니 이제 괴룡이라고 해야 하나? 언용운 생도도 대단했지만, 눈여겨 볼만한 생도들이 제법 있더이다.”
“그건 그렇소. 춘계대항전에서 청죽관이 우승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만 해도 애들끼리 공이나 차는 행사이니 그렇게 되었나보다 했는데. 다시 봤소이다.”
되레 그 과정에서 이름이 높아진 것은 나와 청죽관이었다.
‘죽을 쒀서 우리한테 주고 본인들은 쪽만 팔았으니 속이 편할 리가 없지.’
그런고로 이른바 명문대파 명숙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는데.
아직 학관에 입관하지 않은 검수였다거나, 본래의 규정을 준수했다거나 하는 식으로 변명거리가 있는 곳은 그나마 나았지만.
‘그렇지 못한 모산파는….’
한마디로 처량했다.
장문인과 장로를 필두로 상청검수들까지, 제법 위용을 자랑했던 어제의 환영연과 달리.
오늘의 모산파는 참석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상청검수들은 피떡이 되어 양호처로 실려 갔고.’
송양자는 핑계인지 정말인지 모르겠지만, 병이 났다고 참석하지 않았다.
하여, 이 자리엔 근 반나절 사이 폭삭 늙은 송청자 뿐이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본디 명숙들의 들러리로 따라왔던 군소방파의 내빈들이 주판을 새롭게 굴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한데, 괴룡의 이름을 진주언가에서 가져가면 백도 무림의 퇴마 전선 판도가 어찌 되는 것입니까?”
“진주언가로 가게 되는 거 아닐까요? 방술의 방도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언용운 생도의 술법은 격이 다른 것 같던데요?”
“그래도 당장은 모산이 주가 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어찌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일단 저 친구의 현재 적이 진주언가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강시종의 맥이 복원됐다손 치더라도 당장은 본인 혼자이기도 하고요. 예컨대 언용운이 하북에 있을 때 저 멀리 사천이나 광동 같은 곳에서 일이 터지면 어찌하겠습니까? 천하의 일을 한 사람으로 도모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기야 그도 그렇군요.”
“물론, 당장에 그렇다는 것일 뿐입니다. 저 친구가 진주언가에 복귀하고 더 이름을 떨치게 되면, 진주언가에 구름처럼 사람들이 모이게 되겠지요. 그렇게 되면….”
“되면?”
“오대세가의 한 자리가 바뀜은 물론이고, 구파에도 여파가 미치게 되겠지요.”
* * *
그렇게 주판을 굴려대던 사람 중에 몇은 은근슬쩍 청죽관의 자리로 찾아와 내게 말을 걸었다.
근데 와서 하는 말이라는 게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자네 혹시 정해둔 혼처가 있나? 우리 가문에 참한 처자가 있다네. 든든한 처가가 있으면 복권도 빠를 것이야.”
본인들 가문의 앞날을 생각하며 주판을 굴리는 건 가문의 수뇌라면 응당 해야 할 일이었지만.
‘때와 장소는 가려야지.’
지금이 마지막 저점이라 생각하고 나를 자신들의 울타리 안으로 넣어 보겠다는 심산이 참으로 꼴불견이었다.
‘이러니까 마교가 고개를 쳐들 틈이 생기는 거지.’
그야말로 날파리 같이 느껴지는 양반들이라 상대하는 것 자체가 싫었다.
“저는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술병을 들고서 말인가? 아, 검에 술을 치러 가는가 보구만?”
“뭐, 예.”
“다녀오세요 언공자.”
하여, 몇 사람쯤 돌려보낸 나는 경룡이 형과 은하연에게 생도 관리를 맡기고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본관의 뒤쪽에 놓인 회랑을 지나쳐 뒤뜰이 있는 곳으로 향했는데.
‘그러고 보니 이 근처에 양호처가 있는데?’
그렇게 양호처가 본관의 뒤뜰에 있다는 생각이 내 뇌리를 스치자마자.
“응?”
“!”
상청검수라는 이름의 패잔병들이 퉁퉁 부은 얼굴로 서로서로 부축하며 양호처를 나서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에 놈들과 나 사이에 잠시간의 정적이 흘렀는데.
절뚝.
절뚝.
- 저놈들이 왜 네 쪽으로 오는 것이냐? 아직 덜 맞았나?
뜰이라는 것이 본디 아무렇게나 움직이면 길이 되는 곳이니.
사부님 말마따나 굳이 이리 올 필요는 없는데 상청검수들이 쩔뚝이는 걸음으로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게요? 그래도 양호처가 가까우니 여기서 처맞으면 산지 직송이긴 하겠는데요?’
그렇게 사부님과 몇 마디를 나누고 있는 사이, 내 앞에 다다른 상청검수들이 걸음을 멈췄다.
나는 헛소리를 하면 곧바로 보충 수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주먹을 쥐며 입을 열었다.
“뭐, 하실 말씀이라도?”
그런 내 물음에.
상청검수 중 유일하게 나한테 맞지 않고 연무장을 내려갔던 형운이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그런데 주먹이 아깝게도 형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사과였다.
“나도 학관의 졸업생이라, 신구대면식이 끝나고 행해지는 연회는 대회에서 비롯된 감정은 내려놓고 다시금 화합을 도모하자는 뜻으로 행함을 알고 있다. 모산과 너 사이의 앙금은 이 자리에 내려놓았으면 좋겠다.”
“그게 모산의 뜻입니까? 선배님 개인의 뜻입니까?”
“일단은 개인적인 생각이다.”
“일단은?”
“…장로님은 심마에 드셔서 누워계시고, 장문인은 아직 못 뵈었다. 우선 영환 사숙 하고만 이야기를 했다. 웃어른들은 사숙과 함께 내가 설득해볼 참이다.”
흠.
늙은 고집이라는 게 쉬이 꺾이는 것이 아닐 텐데?
나는 형운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영환 교수님. 그리고 모산파의 제자들이라.’
곽사홍을 내가 제거하긴 했지만, 그놈이 역천괴마가 이끄는 괴왕부의 주전력은 아니었다.
‘끽해야 유망주지.’
마교의 방사들은 백도무림의 도사들보다 질과 양 모든 면에서 앞서 있었다.
그런데 중원은 광활하기까지 했다.
‘거기다 교통수단도, 통신수단도 열악하니.’
나 혼자서 놈들을 다 상대하는 건 말도 안 되었다.
‘할 수 있다 치더라도, 최소한 버티고 있을 수 있어야 하고.’
그런데 후학 양성도 당분간은 요원했다.
‘내 사령술 중 일부는 이 시대의 방술을 기반으로 재정립을 할 수 있겠지.’
하나, 진주언가가 혈족을 기반으로 한 세가라는 것과 이 시대에 사령술 공부를 하고자 하는 정신머리가 똑바로 박힌 놈이 있을까? 하는 논제는 미뤄 두더라도.
사령술에 입문하려면 상단전을 열 수 있는 재능까지 갖추고 있어야 했고.
재능이 있는 자를 찾더라도 길러내려면 오랜 시간과 많은 비용을 투자해야 했다.
‘그런데 닥쳐올 위난은 코앞이야.’
하니, 모산파의 도사들을 고쳐서 쓸 수 있다면 최선이었다.
‘그러면 내가 귀찮은 일을 떠맡는 빈도가 줄 거고, 비용도 이쪽이 훨씬 싸게 먹히겠지.’
하나 그 전에 선행돼야 할 게 있었다.
나는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불량한 태도로 귀를 후비며 입을 열었다.
“근데, 사과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산속에 오래 들어계셔서 잘 모르시나요?”
“……?”
“대저 사과라 하면 받는 사람이 받아주는 건 둘째고. 일단 무릎을 꿇고 시작하는 겁니다.”
단순히 내 기분을 푸는 게 아니라, 이건 하나의 시험이었다.
우선 그저 영환의 말에 단순히 따르는 것인지, 적어도 일곱 도사는 진심이 있는지 확인하는 거였고.
아래 배분인 내게 자존심을 굽히고 배움을 청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시험이었다.
‘모산파의 늙은이들이 혹여 제자들과 다른 마음이라면, 그 뜻을 거스르고 배움을 청할 각오가 있는지 확인하는 거지.’
* * *
시간을 조금 거슬러.
언용운이 아직 본관의 연회장에 자리하고 있던 시점.
남궁윤은 청죽관의 자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입관할 때만 하더라도 다른 기숙사에서 떨어진 생도들이 가는 곳이었는데. 춘계대항전에 이어 이번에도 우리 향란보다 청죽의 승률이 높았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두 가지였다.
‘…언용운의 곁에 있으면 성장한다. 그건 녀석이 단순히 닥친 행사나 성적이 아니라 그 너머의 천하를 보고 있기 때문이겠지.’
그런데 왜 이번에는 나를 부르지 않았지?
남궁윤은 항상 가슴에 천하를 두라는 심계천하가 가훈인 남궁가의 검이야말로 천하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검이라고 생각했다.
하여, 산서에서 언용운이 마교도와 싸웠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자리에 본인이 없었음을 한탄했다.
하나 그건 남궁윤 본인이 원오원인가 뭔가 하는 것에 참가하지 않았으니, 절차상 언용운이 자신을 데려갈 명분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 수련회에는 왜 나를 안 불렀나, 언용운.’
나는 네가 맡겨 놓고 간 은하성도 성심성의껏 가르쳐 줬는데.
‘언용명은 그렇다 치고, 천장호나 팽소천도 불렀으면서 나는 왜?’
정작 그 수련에 참여한 사람들이 남궁윤의 말을 들으면, 검지를 관자놀이에서 빙빙 돌리며 돌았냐는 소리를 하거나 그렇게 오고 싶으면 네 발로 오면 된다는 소리를 했을 것이다.
하나 남궁윤의 진심이 그러했고 성정이 그러했다.
남궁윤도 제 발로 가볼까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초대를 받지 못하면 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위인인 것이었다.
‘녀석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가서 뭐라 말을 한단 말인가.’
그러다 문득 남궁윤의 뇌리에 아까 한창 신구대면식이 치러지던 순간이 떠올랐다.
‘천하제일후기지수, 비룡검.’
스스로가 인정을 못 하게 된 이상, 그런 소리를 아무리 들어봐야 기분이 좋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분이 나빴다.
‘버젓이 언용운이 있는데 대관절 그런 소리가 왜 나오는 것인가.’
언용운 주변에 모여드는 명숙들만 봐도 자신보다 녀석에게 그런 이름들이 어울린다는 것을 증명했다.
한데, 이 와중에 언용운은 그런 관심이 필요 없다는 듯 술병 하나를 챙겨 회장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래. 너도 그런 것에 관심이 없지.’
그 모습을 보며 남궁윤은 남몰래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그 의식을 하러 가는 것인가?’
언용운의 검명은 회한.
그 검명처럼 녀석은 이따금 스스로의 과오를 뉘우치며 검에 술을 붓는다고 했다.
‘한때는 지난날의 망나니짓을 참회하는 것인가 하던 때도 있었지만.’
저번 산서행에서 언용운이 사실 남몰래 마교를 쫓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그 행위는 아마 협을 위해 무라는 이름의 폭력을 사용하는 것 자체를 뉘우치는 것일 것이다.’
그에 남궁윤은 허심탄회하게 심계천하에 대한 생각을 나누는 자신과 언용운의 모습을 상상했다.
‘…….’
언용운이 남궁윤에게 따라오라는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연회장의 분위기가 탐탁지 않은 사람이 바람을 쐬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마주한 동기생끼리 술 한잔을 나눠볼 수도 있을 터였다.
‘따라가 본다.’
물론, 향란관의 경우 약간의 절차가 필요했다.
하여 그 절차를 거치다 보니 뒤뜰에 도착한 시간이 조금 늦었는데.
‘모산파의 선배님들?’
그사이 언용운을 찾은 선객이 있었다.
“대저 사과라 하면 받는 사람이 받아주는 건 둘째고. 일단 무릎을 꿇고 시작하는 겁니다.”
”이 친구들은 몸이 불편하니 내가 대표로 꿇어도 괜찮겠나?“
그리고 선객들과 언용운이 나누는 대화 내용이 남궁윤의 폐부를 찔렀다.
‘…….’
그러고 보니 남궁세가도 녀석에게 잘못을 한 일이 있었다.
이후에 딱히 녀석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한 적은 없었다.
자처해서 무림맹의 뇌옥에 들어갔으니 죄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남궁윤은 잠시 자신의 무릎을 내려다봤다.
‘…….’
한데 그러는 중에 언뜻 반대편 회랑의 기둥 뒤에 다른 사람이 서 있는 것이 보였으니.
‘!?’
다름 아닌 제갈설지였다.
언용운과 모산파의 도사들에게 집중하고 있어서 몰랐는데, 그녀도 언용운을 따라 나온 모양이었다.
‘제갈설지, 너도 나왔나.’
‘뭐요. 말 걸지 마세요.’
* * *
나는 모산파의 제자들이 한 사과를 조건부로 받았다.
조건은 다른 것은 아니었고, 영환 교수님과 상의해서 뜻이 같고 당장 모산파에서 요직을 맡은 게 아니라면 노삼 교수님의 연구실에 들어와 있으라는 것이었다.
“노삼 교수님의 연구실에서 무슨 연구를 하길래?”
“딱히 하는 연구는 없습니다. 실질적인 연구는 영환 교수님의 연구실에서 하게 될 겁니다.”
“그런데 적을 왜 그쪽으로?”
“저희 소속으로 계시는 게 서로 의견을 교환할 때 편할 것 같아서요.”
“…그런 이유라면 알았네.”
그렇게 신구대면식의 밤이 막을 내렸고.
이튿날 떠나가는 명숙들 뒤에 남은 형운과 형준 두 명의 상청검수가 우선 노삼의 연구실에 지원서를 냈다.
삑삐빅! 삑삐빅삐빅!
나는 새로이 입소한 두 명의 도사와 솔거 거지들 그리고 납득이 가지 않은 패배를 한 동기생들과 몇몇 괘씸이들을 이끌고 심신을 새로이 다지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는데.
삐이빅! 삑삐빅삐빅!
한창 호각을 불고 있는 와중에, 총장님의 조교수로 있는 선배님 한 분이 피곤에 찌든 얼굴로 나를 찾아오더니.
구르고 있는 생도들을 보고도 별 감흥이 없는 표정으로 내게 입을 열었다.
“언용운 생도, 여기 있었나.”
그에 나는 불던 호각을 입에서 떼고 입을 열었다.
“예. 어쩐 일이십니까?”
“학관의 운영위에서 이번에 마공 방어학이라는 과목을 정규화하기 위한 연구를 하기로 했는데, 교수님들이 특별 연구생으로 자네를 지목했네.”
연구생이면 대학원?
“아니, 무슨 그런 무서운 말씀을? 농이 지나치십니다.”
“농이 아닐세. 일단 나와 같이 본관으로 좀 가세.”
그런 나를 보며 한창 쪼그려 뛰기를 하고 있던 하성이 녀석이 정현에게 배운 단어 하나를 뱉어냈다.
“…적악여앙.”
“…으으으. 그게 무슨 뜻이었지요?”
“…악행의 대가는 반드시 찾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