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2화. 마공방어학 연구회 (3)
심율은 같은 배분의 곤륜파 제자 중 무재는 중간 정도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하나, ‘복마선봉(服魔先鋒)’이라는 곤륜의 기치(旗幟)를 누구보다 숭고하게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지!”
“그렇지만 이자가 말도 안 되게…. 컥!”
“빌려 갈 때는 좋다고 빌려 가 놓고 갚을 때 되니 뭐 말도 안 되는 이자? 내가 억지로 빌려줬나?”
하여, 곤륜의 경내를 순시하던 중 마교의 무리가 패악을 부리는 모습을 발견했을 때.
“평범한 고리대 꾼이라기엔 대동한 무사들의 기도가 심상치 않은데? 못 보던 얼굴이기도 하고?”
“고리대 꾼이 마교의 교인을 고용한 모양이군. 사형들이 경내의 외곽으로 갈수록 그런 경우가 왕왕 나타난다고 하지 않았나?”
스르렁-
“이보게 심율. 뭐 하는 건가 검은 왜?”
“보면 모르나? 막으려는 거지.”
“…어른들은 물론이고 사형들도 마교 놈들과 시비는 주의하라고 하지 않았나? 자칫 큰 싸움으로 번질 수 있다고!”
“우리는 곤륜파일세. 어찌 마를 보고도 눈을 감는단 말인가?!”
“하나, 이 땅은 엄밀히 따지면, 곤륜의 경내라고 하기도 뭣한 곳이네.”
주저하던 다른 도사들과 달리 지체없이 검을 뽑았다.
상대는 심율보다 강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곤륜의 기치를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었으니까.
설령 자신이 이곳에서 잃는 게 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이가 자신의 행동을 칭송하리라 믿었다.
하나, 그가 받게 된 결과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너무 깊게 베였습니다.”
심율이 받게 된 대가는 우수에 큰 상처를 입어 검을 쥐지 못하게 되는 것.
그리고 곤륜의 제자가 한심하게 마교 놈에게 우수를 잃었다는 말과 함께 찾아온 외면이었다.
“수양이 부족한 녀석이 마음만 앞서면 저리되는 것이다. 모두 심율의 예를 반면교사로 삼도록 해라.”
그러다 보니 독주(毒酒)가 없으면 잠이 들 수 없는 나날이 계속되었고.
그 나날이 오래되자, 말을 듣지 않게 된 오른손은 이제 떨려오기 시작했다.
심율의 모습이 그렇게 폐인과 같아지니, 곤륜파의 일원 중 몇몇은 그런 심율의 파문을 주장했는데.
그 소리를 뒤로하고 독주를 구하러 도관을 빠져나온 어느 날.
“이 사람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예로부터 신의(神醫)라 불려온 명의들의 비전을 이은 사람입니다. 강호낭중이라 무시 말고, 주저 또한 하지 말고 이 사람에게 몸을 맡겨 보십시오. 어떤 병이든 뿌리째 뽑아드리겠습니다.”
웬 헛소리를 나불대는 떠돌이 의원을 마주하게 된다.
‘돌팔이가 허풍도 적당히 쳐야지. 저러니까 손님이 없지.’
하나, 이어서 나온 돌팔이의 말은 심율이 가던 길을 멈추고 놈의 멱살을 쥐게 만들었다.
“아이고, 곤륜의 도사이신 것 같은데, 오른손이 불편하신가 봅니다? 한데 검은 왼 허리에 차고 계신 것을 보니 미련이 남아…. 켁.”
“어디 계속 지껄여 봐라!”
“…케켁. 이것 보세요. 왼손으로 제 목을 틀어쥐시는군요? 곤륜파 특유의 긴 소매로 가려져 있어도 명의의 눈은 못 속입니다.”
“이 돌팔이 놈이 어디서 내 이야기를 듣고 조롱을 하나 보….”
“딱 봐도 폐인 같은 도장을 조롱해서 제가 얻을 게 뭐가 있습니까요. 이렇게 목숨이나 위험하죠.”
“…….”
“속는 셈 치고. 이 사람의 치료를 한번 받아보시면 어떻습니까?”
심적으로 몰려 있던 심율은 그런 돌팔이를 향해 홀린 듯이 우수를 내밀었고.
장침을 몇 대 맞고 뜸 몇 개를 뜨는 것으로 떨리던 손이 멈추는 것을 확인하곤, 끊어진 우수의 힘줄을 붙여준다는 약을 받아 의원의 말대로 칠 일간 달여 먹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손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른손이?!”
하나, 기쁨은 잠시였다.
“!”
이윽고 골수에 스미는 격통이 찾아들었다.
심율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의원을 찾아갔다.
“이보시오 의원. 뭔가 이상하오. 지금은 잠시 멎었는데 조금 전만 해도 엄청난 격통이….”
“오. 격통이 느껴졌습니까? 그럼 약이 잘 들었군요!”
“아, 치료하는 과정인 거요?”
“아니, 독이 잘 듣는다는 증거요.”
“…독?!”
“그래. 독. 일정 주기를 두고 해약을 먹지 않으면 격통이 느껴지고, 그 주기가 짧아지다 죽음에 이르는 독.”
“…그걸 왜 나 같은 사람한테?”
“그야. 당신이 본교의 계획에 필요하니까?”
심율은 강호낭중의 멱살을 다시 쥐려 했다.
“본교? 네놈 설마?”
하나 처음과 달리 잽싸게 심율의 손길을 피한 강호낭중은 이죽이며 입을 열었다.
“워워워. 그렇게 열을 내지 마시오. 서로 간에 신뢰가 없어 독을 좀 섞었다뿐이지, 우수를 고치는 효과만큼은 진짜니까.”
“네놈들이 이렇게 만든 장본인이지 않으냐!”
“에이, 강호에 나오면서 칼 맞을 각오도 안 했소? 그리고 말은 똑바로 해야지. 우리 교인이 당신의 손에 칼침을 놓긴 했으나, 그걸 방관한 건 당신의 사형제와 사문이잖소? 주독에 빠져 산 것은 본인이고?”
“이!”
“격통을 느꼈으면! 약효도 봤을 텐데?”
“…….”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약효는 진짜요. 병 주고 약 주는 모양새긴 하지만, 우리는 당신에게 약을 드리려 하고 있소. 하나 곤륜은 당신을 외면하다 이젠 치워버리려 하지. 선택은 당신의 몫이오.”
그리고 본론을 말했다.
“우리와 손을 잡으시오. 어려운 부탁을 하려는 것도 아니오. 지금 정무학관에서 우리를 막겠다고 마방연인가 뭔가 하는 연구실을 마련했소.”
“그곳에 지원하라는 것이냐?”
“맞소. 본교에 의해 부상을 당한 전력이 있으니, 적당한 구실을 든다면 도장은 쉽게 합격할 거요.”
“…….”
“거기 지원해서 도장이 보고 들은 것을 말해주기만 하면 되오. 그럼 그때마다 해약을 드리다가 종국에는 완전한 해독제를 드리겠소.”
* * *
곤륜이 자신을 외면하다 이젠 치워버리려 한다는 말은 심율의 가슴을 정확하게 찔렀다.
심율은 마교와 손을 잡았다.
그런 심율에게 강호낭중은 완전한 해약의 일부를 넘겨주었다.
“신뢰를 보이고자 드리는 것이니, 곤륜에서 학관으로 가는 길에 복용하시오. 격통이 찾아오는 주기가 점점 길어짐을 느끼게 될 것이오. 그렇게 해약을 받아먹다 보면 어느 날 격통은 씻은 듯이 사라지게 될 거요.”
“알겠소.”
“단, 복용을 멈추거나 잘못된 약방문으로 된 약을 해약이라고 삼켰다간, 다시는 해독할 수 없을 것이니 허튼 생각은 접어두고 반드시 접선 일자를 지키시오.”
그리고 경고와 함께 임무를 줬다.
임무는 마방연의 구성원을 속속들이 파악하는 것.
행해지는 연구 내용을 알아보는 것.
그리고 학관의 방비가 느슨해지는 시간 같은 것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뭐가 많은 듯해도 결국 ‘보고 들은 것을 말해달라.’는 것이었다.
‘합격만 한다면 어렵지 않은 일이지.’
해약의 효과를 확인했을 때만 해도 심율은 그렇게 생각했고.
면접을 보러 오는 길에 보았던 연구생들의 훈련이나, 실장인 언용운이 언급한 ‘심신 단련’이라는 말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공백기를 거쳐서 그렇지, 심율도 곤륜의 제자 중에서 가려 뽑는 순시조에 속했던 무인이었다.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보았고, 면접장에서야 빡빡하게 굴어도 아래 배분인 실장이 어련히 편의를 봐주겠거니 했다.
하나, 그런 생각이 완전히 틀려먹은 것이었음을 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삑! 삐빅!!
삑삐빅삐빅!!!
울려 퍼지는 호각 소리 속에 입소식을 겪으며 깨달았고.
“이보게 언 실장. 이걸 반 시진 안에 끝내라는 것은 무리일세.”
“제가 해서 되면요?”
“응?”
“심율 연구생이 하는 일을 제가 같은 조건으로 해볼게요. 그렇게 해서 제가 반 시진 안에 해내면 어떡하실래요? 저 빨간 모자 씁니다? 은 소저, 여기 내 업무 좀….”
“그, 그냥 내가 해보겠네!”
“해보겠네가 아니라 해오세요.”
살인적인 업무량에 치이며 또 한 번 깨달았다.
‘언용운 저놈은 미쳤어! 속에 마귀가 든 것인가?! 사람들의 고통이 보이지 않나?!’
그런데 언용운도 미친놈이지만, 선임 연구생들이라는 그놈의 동기생들도 미친놈들이었다.
‘이건 봉기를 일으켜도 열두 번은 더 일으켰어야 할 업무 강도인데, 왜 경쟁하듯 불이 붙는 것인가?’
심율이 맡은 일은 일종의 허드렛일로, 종이를 책의 크기에 맞게 작두로 썰고 먹을 가는 일이었는데.
다용도실에서 행해지는 결과물을 본 연구실에 가져다줄 때마다.
서로 업무량을 자랑하듯 견주고 있는 은하연과 제갈설지의 모습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하연 님? 책을 보는 속도가 좀 더뎌지신 거 같은데요? 피곤하시면 기숙사에 가서 쉬고 오시죠. 제가 하연 님의 업무까지 대신해 드릴게요.”
“전혀요. 그러는 제갈 소저야말로 지치신 거 같은데요?”
“제가요?”
“예. 여기 이 글자를 보세요. 힘이 드신 건지, 본(本)인지 비(㔻)인지 헷갈리게 쓰셨네요. 문맥상 본 같으니 제가 고쳐 드릴게요. 피곤하면 쉬시지 그래요?”
“…하연아, 설지야. 제발 그만해, 이러다 우리 다 죽어.”
그런 연구실 전경도 미친 것 같았지만, 어쨌거나 다른 세상의 일이라 치고.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위인은 심율과 함께 허드렛일을 하고 있는 남궁윤이었다.
‘이 녀석은 남궁세가의 적장자라는 놈이 뭔 허드렛일을 이렇게 열심히 하지?’
천하제일세가라 불리는 남궁가의 대공자로 나고 자랐으니, 이런 일이라곤 난생처음일 녀석이 눈에 불을 켜고서 종이를 썰고 온몸에 먹물을 튀겨가며 먹을 갈고 있었는데.
적당히 눈치를 봐서 쉬어도 될 순간에 번번이 자진신고를 해대고 있었다.
“여기 다했다! 심율 선배님도 새로이 자를 종이가 필요하신 듯싶다!”
그러면 심율의 혀끝에서 ‘저 죽일 놈.’ 소리가 맴도는 와중에 정현이라는 녀석이 오는 것이었다.
“남궁 소협, 아주 열심이십니다? 처음 언 소협께서 이 일을 남궁 소협께 맡기신다 했을 때, 소협의 성정으로 먹물이 튈 수 있는 일을 잘하실까 싶었는데, 빈도의 생각이 완전히 틀렸습니다.”
“나를 어떻게 보는 거냐, 정현.”
“음. 어떻다기보다는 호랑이 똥 사건 때 학을 떼던 소협의 모습과 주름이 진 옷은 절대 입지 않는 평소의 모습이 떠올라서 말입니다.”
“흥. 그때는 언용운이 그저 나를 곤혹스럽게 하려고 그러는 줄 알고 그랬던 거고. 지금은 녀석이 내게 이런 일을 시키는 연유를 아니까.”
“달리 이유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이 연구의 끝은 편찬으로 이어진다. 그 작업은 내가 간 먹에서 시작되고, 결국 천하를 지키는 일이 내 행동에서 시작되는 것이지.”
“오, 확실히 언 소협이라면 그런 도를 떠올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종이를 썰고, 먹을 가는 일에 무슨 도가 있고 천하가 있어.
이놈들은 미친놈들이었다.
* * *
마방연이라는 현판이 내걸린 연구소는 능력을 증명하면 일이 더 늘어났다.
그렇다고 태업을 하여 작업량이 부족하면 정신상태가 해이하다고 특별 수련에 동원됐다.
대학원이라는 곳이 원래 사람이 갈리는 곳이라고 알고 있긴 했지만, 이건 정도가 달랐다.
그 바람에 심율은 교인들이 원하던 정보를 하나도 얻지 못했다.
‘종이만 자르고 먹만 가니.’
무슨 연구가 진행되는지 글자 하나 읽어보지를 못했고.
아침저녁으로 그놈의 유격 체조와 수련 시간을 갖다 보니 시간이 다 갔다.
‘곧 있으면 해약을 받아야 하는데.’
해약을 받으러 가기로 한 날짜를 맞추는 것조차 위기였다.
하나,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다행스럽게도 기회가 왔다.
“교수님들이 진척 상황이 너무 좋다고, 기분전환 삼아 내일모레 무당산에 등산을 가자고 하시네요? 그날은 필수 인원만 제외하고 연구동 문 닫겠습니다. 아, 강요는 아닙니다. 참여하고 싶은 사람은 여기에 이름을 적으면 됩니다. 붙여 놓겠습니다.”
이놈은 마귀다.
강요가 아니라고 했지만, 안 가면 안 될 것이다.
하나, 이 마귀 앞에서 발작이 일어나 마교의 끄나풀임이 밝혀지는 게 더 두려웠다.
심율은 용기를 냈다.
“…마음은 굴뚝 같으나, 나는 불참 해야겠네.”
“무슨 일이라도?”
미리 준비해둔 변명거리도 있었다.
“곤륜에서 가져온 약이 다 떨어졌네. 그래서 근방의 약령시에 좀 다녀와야겠어.”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니, 사람의 속을 꿰뚫는 거 같은 언용운의 눈빛에도 당당할 수 있었는데.
그런 태도가 통한 것인지 언용운은 웬일로 부드럽게 넘어갔다.
“그럼 별수 없죠. 언제든지 마음이 바뀌시면 참가하셔도 됩니다.”
그러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불참을 하겠다는 다른 사람도 나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서 심율은 안도감을 느꼈다.
그렇게 찾아온 마방연이 무당산을 등산하기로 한 당일.
심율은 약속된 접선지로 향했는데.
“음? 낭중이 아닌데?”
“그분은 한가한 분이 아니오. 그리고 당신을 맞으러 오는 사람은 매번 바뀔 것이오. 해약은 가지고 있으니 그간 마방연에서 알아낸 정보나 말씀하시오.”
막상 도착하고 나니 교인들에게 들려줄 말이 없음을 새삼 깨달았다.
“…허드렛일만 시키는 통에 자료에는 접근을 못 했고. 알아낸 것은 그놈들은 죄다 미친놈들이라는 것뿐이오.”
“?”
* * *
교수님들이 주최하여 등산을 가기로 한 것은, 내가 몇몇 교수님을 동원하여 미끼를 던져 본 것이었다.
그런데 마침 심율이 움직였고, 나는 일찍이 녀석의 몸에 묻혀둔 혈조술의 흔적을 따라 은밀히 녀석을 쫓았다.
‘수상하죠?’
- 수상하구나?
심율과 접선한 보따리상이 시장이 문을 닫으려면 멀었고, 제 놈의 보따리도 빵빵한데 시장 너머로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그런 보따리상을 내가 바라만 보고 있자.
사부님께서 한마디를 전해 오셨다.
- 한데, 왜 저 보따리 장수는 내버려 두는 것이냐 안 잡냐?
‘어차피 심율 저 양반이 알아간 게 없습니다.’
종이 자르기, 실 꼬기, 먹 갈기 이런 것만 시켰는데 뭘.
‘저 보따리상도 결국 끄나풀이고요. 그런 끄나풀들 말고 줄기 밑에 달린 덩어리를 끄집어내야 하는데.’
끄나풀을 건드리는 것보다 심율이라는 미끼를 잘만 이용하는 게, 굵직한 놈을 끌어낼 수 있을 것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