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5화. 뭐가 이렇게 많아? (1)
산행을 떠나는 연구생들을 배웅한 나는 제갈설지를 데리고 우 연구동의 지붕 위에 올라가 은신술을 펼쳤다.
“저기 용운 님….”
“쉿.”
[저희 왜 이러고 있는 거예요?]
[두고 보면 알게 될 거요.]
그러고 있은 지 제법 시간이 지나자.
열 명쯤 되는 흑의인이 대숲에서 나와 좌 연구동으로 기어가더니, 빵빵해진 자루 두 개를 짊어지고 나오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봐, 봐도 모르겠는데요?]
하기야 아무리 제갈설지라도 모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이야기를 안 해줬으니까.’
언동생들과 다른 주인공 세대는 믿을 수 있는 녀석들이었지만.
녀석들이 감정을 통제해낼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였다.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지.’
은근히 급발진을 잘하는 언용명, 뇌를 빼놓고 다니는 하성이 놈과 소릉이.
‘어디로 튈지 모르겠는 녀석들.’
남궁윤은 어떤 의미에서는 하성이보다 어디로 튈지 예상이 안 가는 놈이었다.
‘하성이 놈은 일단 개짓거리를 하는 게 기본값이라 그러려니 하는데, 요즘은 이 자식이야말로 예상이 안 된단 말이지.’
정현은 성정이 좀 바뀌긴 했어도 여전히 범주에 넣어보면 고지식하고 뻣뻣한 녀석이었고.
은하연이나 제갈설지는 너무 꼼꼼했다.
‘때론 그런 꼼꼼함이 위화감을 만들 수 있지.’
반간계는 개복치를 키우는 것과 비슷했다.
하여, 심율과 연구실에서 부대끼는 사람들에게는 내 계획과 심율에 관한 사실을 꼭꼭 숨겼고.
한걸음 떨어져서 마방연을 총괄하는 경혜 사태와, 명의만 빌려준 노삼 교수님에게만 의견과 정보를 공유했는데.
내가 세운 계획의 토씨 하나를 경혜 사태가 고치자는 제안을 했었다.
“마인들이 정말 이렇게 움직인다고 치면, 보기 좋게 한 방을 먹여줄 수 있겠네요. 한데, 언용운 생도가 납치를 당하겠다는 부분이 조금 걸리네요?”
“음. 하지만 저쪽도 심율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아닐 테니 침투조는 몇 명 되지 않을 겁니다. 일단 놈들에게 잡혀야 놈들의 본대를….”
“계획 자체는 좋아요. 다만 잡혀가는 인물을 바꾸자는 이야기에요.”
“…누구로 말입니까?”
“이 일을 아는 사람이 이렇게 셋이니 당연히 저랑 노삼 교수님이지요?”
“제가요?”
“두 분이요?”
“저쪽도 급박하게 행동을 취해야 할 테고, 이쪽의 계획을 모르고 있을 테니 역용을 하고 있으면…. 음. 노 교수님은 살도 조금 빼셔야 하겠지만. 아무튼 이쪽이 더 안전할 것 같지 않나요, 언용운 생도?”
“예. 총장님의 생각이 더 나은 것 같습니다.”
“하면, 그렇게 하는 것으로 할까요?”
“예,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다.”
하여, 나와 제갈설지 대신 노삼과 경혜 사태가 마교의 공작조에게 납치된 상황이었으니까.
‘근데 이걸 설명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경혜 사태와 노삼이 결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고.
아무리 흐름이 뒤틀렸다 해도 지금 시점에서 마교가 호북에 대규모 인력을 주둔시킬 여건은 갖추지 못했을 테니.
‘어느 정도 여유가 있긴 해.’
하나 이 여유는 비상을 걸고, 붙잡혀간 경혜 사태와 노삼 교수님의 뒤를 받치는 데 써야 했다.
[설명할 시간이 없소.]
[아, 알았어요.]
제갈설지의 질문을 일축한 나는 잡혀간 이들에게 미리 남겨놓은 혈조술의 흔적을 가늠했다.
“계속 서쪽으로 멀어지는데.”
심율은 끄나풀의 접선지만 알고 있었지, 마교 놈들이 공작의 근거지로 삼은 곳이 어디인지는 알지 못했다.
하여, 나는 두 분 교수님과 놈들이 동서남북 어디로 향하느냐에 따라 다음 행동을 어떻게 할지 미리 이야기를 나눠둔 상태였다.
그렇게 지붕에서 뛰어내려 걸음을 옮기며 생각을 정리했는데.
“서쪽이면 산행단을 전력화해서 지원을 하기로 했는데?”
그 소리를 들은 제갈설지가 질문을 해왔다.
“산행단을 전력화한다는 말씀은 아까 출발한 연구생들을 따라잡는다는 말씀인가요?”
맞다.
그러려고 일부러 산행로를 학관에서 서남 방면에 있는 죽산을 거치는 것으로 짜놓았다.
“그래서 출발을 죽산 방면에서 하게 하신 거군요? 그런데 지금쯤이면 제법 산을 올랐을 텐데요?”
“본디 등산이라는 것이 능선을 타느냐 계곡을 타느냐에 따라 걸리는 시간이 크게는 열 배도 넘게 차이가 나는 걸 모르시오?”
“아무리 그래도 열 배까진 잘…. 어, 서, 설마 천애곡 쪽으로 올라갈 요량이신가요?”
“맞소, 그리 올라가면 딱 마주치지 않겠소? 좋은 머리로 계산을 해보시오.”
“그, 그렇긴 한데 거기는 이름만 곡(谷)이지 그냥 직각이나 다름없는 암벽인데요?”
“암벽 등반 좀 합시다.”
“…….”
* * *
나는 경혜 사태께서 빌려주신 총장 직인을 내보여 수위부에 대나무숲의 진법을 바꾸라는 명을 내린 뒤.
제갈설지를 이끌고 바쁘게 천애곡을 올랐다.
“내 발로 지원하기는 했지만, 이런 짓을 할 줄은 꿈에도….”
“응? 뭐라고 그랬소?”
뭐라고 그랬소오-
뭐라고 그랬소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니에요-
아니에요오-
그리하여 먼저 산맥을 오르기 시작한 생도들의 걸음을 따라잡았다.
부스럭.
“누구냐?!”
부스럭.
부스럭.
“나다.”
“…하, 저예요.”
“어? 언 형이랑 제갈 누님이 거기서 왜 나오세요? 요, 요즘 자주 하시던 돌발 훈련을 또 하는 건가요?”
“놀라라! 아니 뭔 절벽에서 기어 오십니까?! 귀신인 줄 알았잖습니까? 애 떨어질 뻔했네.”
“은하성 네가 떨어질 애가 어딨어? 시끄럽고. 은 소저, 정 교수님은 어디 있소?”
“남궁 소협이 갑자기 걸음을 빨리 옮기는 바람에 저희끼리 경쟁이 시작되어서 좀 아래에 계세요, 교수님은.”
“허. 하마터면 엇갈릴뻔했네. 남궁윤 너는 왜 그래? 왜 만날 산만 타면 빨리 올라가려고 지랄이야. 산이랑 원수졌냐?”
“…….”
“아무튼 다들 짐이랑 팔다리에 감은 주머니들 해제하고, 행낭에서 피풍의만 챙겨서 나 좀 따라와.”
그렇게 인솔자인 정극경 교수를 만나 총장님의 직인과 남겨주신 전서를 내보이자.
“실제 상황인가?”
“실제 상황입니다.”
“앞장서게.”
곧바로 일행의 인솔 권한이 내게 넘어왔다.
그렇게 인솔권을 넘겨받은 나는 더도 덜도 말고 딱 마인들이 나타났다는 사실만 고지한 뒤.
“마교의 무력조가 인근에서 목격되었다. 지금부터 우리는 놈들을 쫓는다.”
경혜 사태와 노삼 교수님에게 남겨놓은 혈조술의 흔적을 쫓아 질주를 시작했는데.
탓! 탓! 탓! 탓! 탓! 탓!
연구생들은 울며 겨자를 먹듯 내 뒤를 따르면서도 나름대로 볼멘소리를 내왔다.
“아니, 방위도 알기 힘든 숲속에서 이렇게 질주를 해?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 건 맞는 거야? 마교 놈들이 나타난 것도 맞고?”
“언 실장이 따라오라니까 따라가는 거지 난들 압니까?!”
“그냥 그런 사정을 가정한 훈련의 일종 아닐까요? 어, 앞에 가지 조심하십시오!”
연구생들의 반응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사정을 모르고 따라오고 있는 것이었고.
혈조술에 관한 정보는 사부님을 제외하면 누구에게도 알린 바가 없으니, 어디로 이렇게 바쁘게 가는가 싶겠지.
‘투덜거리면서도 다들 따라오는 게 훈련이 잘됐다 싶긴 하고, 어차피 가서 마교 놈들을 마주하고 나면 찍소리도 못하게 되겠지만….’
이번 일이 끝나면 정신 무장을 더 해야겠네.
‘마교 소리가 나오면.’
“으르르르.”
‘저기 용명이 녀석처럼, 어? 눈이 딱 돌아가서 미친개처럼 쫓아 와야 정상이지!’
- 제 입으로 ‘미친’개라고 해놓고는 ‘정상’ 소리가 뒤에 붙는 게 맞느냐?
바쁜 와중이라 사부님의 말은 외면했다.
아무튼 그렇게 달리다 보니.
제갈설지와 타고 올라온 천애곡 정도는 아니지만, 제법 깎아지르는 계곡이 나왔는데.
마주한 협곡에.
나를 바싹 따라붙어 달리던 은하연이 입을 열었다.
“언 공자? 기, 길을 잘못 든 것 같은데요?”
“아니, 제대로 왔소.”
“예?”
그런 은하연을 향해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구분 동작으로 이 비탈길을 내려가는 법을 설명했다.
“이렇게 아까 걸치라고 한 피풍의를 몸에 둘둘 감고, 내력을 몸 전체에 퍼트린 다음 비탈길을 굴러 내려갈 것이오.”
“예에에에?”
그런 내 말에 여기저기서 얼빠지는 소리가 튀어나왔고.
하성이 놈과 당옥기가 정현의 옆구리를 찔렀는데.
“정현 도장, 이게 도가 맞습니까? 용운 형님 좀 말려 보십쇼.”
“그래. 우리 좀 구해줘. 언용운 쟤 진짜 미쳤나 봐.”
“마교 놈들이 나왔다지 않습니까? 전례가 없지는 않습니다. 과거 서진의 등애라는 장수가 음평곡을 넘어 촉으로 직격 할 때 언 소협의 방식으로 몸에 모포를 감고….”
“캭! 진짜 이러다 제명에 못 죽지! 제명에 못 죽어!”
그런 녀석들을 정현이 계도하는 사이.
남궁윤이 앞으로 나섰다.
“내가 먼저 가겠다.”
확실히 얘는 산이랑 원수를 지긴 한 모양이었다.
* * *
그렇게 무당 산맥을 번개처럼 내려와 조금 더 달려간 지 얼마나 되었을까?
혈조술의 흔적이 슬슬 가까워지는 이때.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커먼 천을 감은 마교 놈들과 떡 하고 마주쳤다.
“!”
“?!”
그에 내 머릿속에 한가지 가능성이 스쳤다.
‘두 교수님이 당한 건가?’
하나 입으로는 빠르게 명을 내렸다.
“정현, 남궁윤, 제갈설지 너희 셋은 유기적으로 움직이면서 다른 생도들을 지원하고.”
“알겠습니다.”
“알았다.”
“그럴게요.”
“나머지는 오인 일조로, 훈련한 대로 하면 된다.”
그에 뒤따르던 연구생들이 저마다 병기를 뽑아 들고 기수식을 취했고.
“예!!!”
채채채챙!
정극경 교수님도 허리춤에서 검을 뽑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늘어선 흑의인 중 한 녀석이 ‘하!’ 하고 짧게 웃더니 입을 열었는데.
“잘됐다! 한 명이라도 저승으로 데려간다!”
그렇게 짓쳐드는 흑의인들의 공세를 우리가 잠깐 받아내고 있는 그 순간.
채챙!
챙채채챙!! 채채채챙!!!
혈조술의 흔적이 쏜살처럼 가까워져 온다 싶더니.
카랑한 목소리가 쩡 하고 울렸다.
“지금 내 생도들을 두고 감히 잘됐다는 소리를 지껄였느냐?!”
내심 그러면 그렇지 하는 생각이 스치는 이때.
피를 흠뻑 뒤집어쓴 노 여협.
경혜 사태가 흉신악살 같은 표정으로 계단처럼 펼쳐진 차밭 위에서 날듯이 이쪽으로 짓쳐들었다.
쌔애애애애액!!!
그리고 금빛 검광이 뿜어져 나오는 검으로 눈앞의 흑의인들을 말 그대로 썰어버리기 시작하는데.
촤악!!!!!!!
“컥!!”
과연 저 검이 대면식에서 은하연이 상대했던 혜정의 것과 같은 아미의 검이 맞나 싶을 정도로 살벌한 검초가 여기저기서 단말마를 동반한 사선을 그어냈다.
촤악!!!!!!!
“끄억!!”
그에 마인 중 하나가 다 틀렸으니 입으로라도 욕을 보여야겠다고 생각했는지.
경혜 사태를 향해 침을 뱉으며 이죽거렸다.
“퉤! 불가의 계집이 손속 한번 살벌하구나! 그러고도 네년이 중이라 할 수 있느냐?”
“오냐. 너희 같은 놈들을 윤회의 수레바퀴로 던져넣는 것이, 이 늙은 비구니의 일이니라.”
촥! 촤악!!
촤악! 촤악! 촤아아악!!!
그 대가는 여섯 등분이 나는 것이었다.
그에 소릉이 녀석이 한마디 말을 중얼거렸다.
“초, 총장님이 조금 무서워졌을 지도요?”
그런 녀석을 향해 나는 피식 웃으며 답을 해주었는데.
“저분이 정무학관의 총장님이라 항상 웃고 계셔서 그렇지, 한창 강호에 계실 적에 불리던 별호가 멸마(滅魔) 사태야.”
곁에 있던 당옥기가 한마디를 덧붙이자.
“그때만 해도 사천 땅에 얼씬거리는 마인은 커녕, 기를 펴고 사는 흑도도 없었다고 하더라.”
여기저기서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