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7화. 실마리 (1)
“자네와 두 분 교수님이 어렵고도 용기 있는 결단으로 큰일을 해주었네. 그 결실이 여기 적혀 있지.”
그렇게 운을 뗀 무림맹주 공손무결은 품에서 새의 다리에 매는 쪽지 두 개를 펼쳐 보이며 질문을 던졌다.
“마교의 안가가 세 개 성(省)으로 통하는 목이자, 정무학관의 지척인 죽산 인근에서 발견이 됐고, 치부책에서는 수룡방의 이름이 나왔다. 자, 그래서 이걸 백본회로 가져가면 어떻게 될 것 같나?”
그런 공손무결의 음성에 내 뇌리엔 한 가지 생각이 스쳤는데.
‘늙은 개구리들이 조막만 한 제 우물을 지키려고 온갖 명분을 들며 별일 아닌 것으로 치부하겠지.’
딱히 답을 기다리고 한 질문은 아니셨던 모양인지.
공손무결은 홀로 답을 내며 입을 열었다.
“안가를 발견한 일은 소탕했으니 된 것이고, 치부책에서 나온 수룡방은 그놈이 그놈인데 끼리끼리 어울린 게 무에 그리 대수냐며 별일 아닌 것으로 치부할 것이야. 자네 생각은 어떤가? 이게 정말로 별거 아닌 일로 보이나?”
“그럴 리가요. 장강을 타고 흐르는 물류가 조금만 더뎌져도 서로는 사천부터 동으로는 남직예까지 큰 피해가 생길 텐데요.”
원작에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산에는 왕이 있지만, 장강에는 왕이 없다.
“지금까지 수로채 하나하나가 지닌 힘이 백도 방파들에 비하면 그야말로 한 줌밖에 안 되는 데다, 그마저도 열여덟 수로채가 각자의 이해득실에 따라 견제하고 싸워대니, 막연히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고 계셨겠지만. 마교는….”
“천마의 재림을 믿으며 교주와 왕이라 불리는 휘하의 대마두들을 맹종하는 집단이지.”
“예.”
그런데 마교에서 세운 장강의 왕이 등장한다?
“그런 마교가 수로채들을 모조리 흡수하면, 전에 없던 강적이 출현할 것입니다. 당장에 무림맹의 맹원 중에 장강에 띄울 대선을 가진 문파가 몇이나 있습니까?”
애초에 물 위에서 싸우는 것은 땅 위에서 싸우는 것과 전혀 다르다고 학관에서 배웠는데.
백도무림은 그 싸움을 걸기 위한 배를 가진 문파조차 거의 없었다.
‘원작의 마교는 그 틈을 노려 수로채를 장악해서 강호의 혈관인 물류를 멈추게 만들지.’
그런저런 생각에 나는 미간을 좁혔다.
하나, 어째선지 공손무결은 빙그레 웃고 있었다.
“…웃음이 나오십니까?”
“나오지. 맨날 본인들 잇속만 챙기려는 사람들과 부대끼다가, 천하 걱정에 목에 핏대를 세우는 젊은 친구를 보게 되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네. 자네도 나중에 무림맹주 자리를 맡게 되면 느낄걸?”
“저도 제가 잘 먹고 잘살고 싶어서 걱정하는 겁니다. 마교 놈들이 득세하면 정무학관 졸업장과 학위가 있어 봐야, 어디 가서 먹고 자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무림맹주는 무슨 무림맹주입니까? 시켜주지도 않겠지만 저도 싫은걸요?”
“하하하. 뭐, 그건 두고 봐야 알 일이고. 아무튼, 백본회는 이번 일도 별일 아닌 것으로 치부할 거야. 남궁세가에서 종남파로 좌장 자리가 옮겨오긴 했지만 쇄신이 된 것은 하나도 없으니. 하나, 나는 그런 형국에서도 여러 대비와 조치를 궁리해야 하는 사람일세.”
“으휴. 그래서 싫다는 겁니다.”
극한직업도 저런 극한직업이 없다.
“하하하하. 해서 말인데, 뭐 좋은 방법 없겠나?”
“음. 그걸 저한테 물으십니까? 대군사님도 함께 내려오시지 않으셨는지요?”
“대군사님은 마방연의 연구자료를 보러 가셨지 않은가? 각자 일을 좀 보고 차차 이야기할 생각이네.”
“아하.”
“그전에 마방연 실장의 생각을 한번 들어보고 싶어서 말이야. 이번 반간계도 거의 다 자네가 계획한 것이라면서?”
“그렇긴 합니다만….”
나는 내가 공손무결이라면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지를 고민해 보았다.
‘…늙은 개구리들이 발목을 잡는 상황에서 장강의 방비를 준비할 방법이라.’
내 고민이 끝나는 덴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강남상왕을 끌어들이시죠? 그분은 조운을 비롯해서 각종 수운을 하는 분이라, 대·중·소를 가리지 않고 숱한 선박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백본회의 소회에도 이름을 올리고 계시고요.”
은 씨 남매의 아버지인 강남상왕 은세평을 끌어들이면 된다.
끌어들여서 유사시에 어떻게 하자 계획도 세우고, 배를 빌려서 합동 훈련 같은 것도 추진하면 되는 것이다.
“은 대인이라. 확실히 은휘상단을 이번 일에 끌어들이면, 선제공격은 몰라도 방비에 대한 걱정은 좀 내려놔도 되겠지, 나도 가장 처음 떠올렸던 인물이었네.”
한데 공손무결의 표정은 조금 시큰둥했다.
“하나, 그분은 대의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자식 일에도 냉정한 분이라 알고 있네만?”
“예. 그러니까 철저하게 득실로 접근해야죠.”
“이쪽에선 내어줄 게 없는데 어떻게 득실로 접근하겠나?”
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줄 게 왜 없습니까? 미래를 제시하면 되지 않습니까?”
“미래?”
“예. 우선은 백도무림의 경직된 의사결정 방식과 할거주의에 관해 언급하면서 마교와의 전쟁은 무조건 일어날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하십시오.”
그런 내 말에 공손무결이 헛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걸 막으려는 사람 앞에서 참 신랄하기도 하구만.”
“…제가 마방연에서 쓰고 있는 논문이 그에 관한 것인지라. 아, 자료 좀 드릴까요?”
“일단 그건 그렇다고 치고. 해서?”
“정말로 전쟁이 일어나고 안 일어나고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건, 마교와의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맹주님이 하고 있고. 그 사태가 터졌을 때 보급권을 은휘상단에 넘겨주겠다는 약속이죠. 맹주님도 내줄 것이 있습니다.”
하나, 내가 떠올린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나자, 골똘한 표정으로 턱을 만지셨는데.
“…이거 강남상왕도 강남상왕이지만, 백본회의 선배님들도 토를 달지 못하도록 할 수 있겠구만? 모두가 노력하면 안 일어날 일이니 사실상 무료로 강남상왕의 선박을 빌려 쓰는 건데, 왜 반대하냐고 하면 할 말들이 없겠어?”
송양자와 비슷한 부류의 양반들에게 시달리는 공손무결의 입장이 어쩐지 이입이 돼서 내 목소리가 커지니.
“그렇게까지 발목을 잡으면 사실상 명예 마교인이죠. 저라면 그런 인간은 거지들을 시켜서 친마파라고 소문 쫙 내고, 돈이랑 인력 각출하고 반대하라고 할 겁니다.”
- 그건 너무 네 방식이지 않느냐!
허리춤의 사부님께서 한마디를 전해 오셨고.
공손무결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하. 대군사님이랑 상의를 좀 해야겠구만. 뭐, 이런 이야기는 이쯤하고.”
“다른 이야기가 더 있으십니까?”
“오늘 하루 나랑 쉬는 거 어떤가?”
그리고 내게 야유를 가자는 말을 해왔다.
“예? 이 시국에 말씀이십니까?”
“이 시국이니까 가자는 거지, 자네 전혀 안 쉬더군. 그 오른손 좀 이리 내보게.”
“여깄습니다.”
“그사이 굳은살이 많이도 늘었구만, 마방연이다 뭐다 정신이 없었을 텐데, 검술 연습까지 게을리하지 않은 것일 테지? 자네 너무 안 쉬는 거야. 체력 훈련도 좋고, 검을 휘두르는 것도 좋지. 한데 사람이 쉬기도 해야 하는 걸세.”
- 그 말이 맞다. 내 누누이 말하지만 쉴 때는 쉬어야 하고, 놓을 때는 놓아야 한다. 용운이 너는 너무 지독한 구석이 있느니라!
“…….”
“다 내려놓고 등산이나 가세. 마방연의 교수님들이 느리게 올라가는 산이 그렇게 좋다고 입을 모으더만?”
아니 근데 잘 나가시다가 결론이 왜 등산인지요?
* * *
공손무결과 사부님이 동시에 성화이니, 아무리 나라도 버틸 수가 없었다.
하여 쉬기로 하고, 이것저것 필요한 물품을 챙겨 밖으로 나오니.
단출한 차림에 낚싯대 같은 막대기가 들어 있을 것 같은 행낭을 짊어진 공손무결이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더니.
“…무슨 짐이 그렇게 많나?”
“천막을 칠 수 있는 돛천, 건량이랑 육포, 피풍의랑 기타 유사시를 생각한 이것저것입니다만?”
“다 놔두고 오게. 먹을 것은 내가 학관생 식당에 부탁해서 주먹밥이랑 과일을 좀 받아 뒀고, 그냥 몸만 가면 돼.”
짐을 줄여오라는 엄명이 떨어졌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짐을 내려놓고 사부님만 챙겨서 공손무결의 뒤를 따라나섰는데.
이따금 지도를 펼쳐가며 위치를 확인하는 공손무결의 뒤를 부지런히 쫓다 보니.
촤아아아아-
어느 순간.
작달막한 폭포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가 새하얀 포말과 굽이치는 물줄기를 만들어내는 계곡이 하나 튀어나왔다.
“여기 자리를 잡으면 되겠군. 딱 봐도 목이 좋지?”
확실히 목이 좋긴 했다.
앞에 보이는 경치는 시원했고, 볕이 잘 드는 양달은 공터처럼 넓었으며.
혹여라도 비가 오면 피할만한 굴도 하나 있었다.
“제 짐은 하나도 못 들게 하셔놓고 뭔 지도를 보며 산을 타시나 했는데. 좋긴 좋네요.”
“하하하. 여기 망에 든 과일은 앞의 계곡에 담가 두고 불 피울 마른 삭정이 좀 주워오게. 그러는 동안 나는 돌멩이로 방풍막을 쌓아 불피울 터 좀 봐놓고 고기를 낚고 있겠네.”
그렇게 내가 과일을 담그고 불을 피우는 동안, 공손무결은 낚시를 시작했는데.
얼마 안 되는 사이에 손바닥만 한 물고기를 두 마리나 낚아 한 마리는 손질하고 있었다.
“도와드릴까요?”
“할 줄은 알고?”
“알죠.”
“그럼 와서 해보게.”
“옙.”
“그렇지. 그렇게 해서 내장을 뺀 배를 벌리고 나뭇가지를 끼우면 되는 거지. 오, 정말로 별걸 다 할 줄 아는구만?”
“보통 이런 상황을 두고 사돈 남 말 하신다고 하죠?”
“하하하.”
그렇게 우리는 생선도 구워 먹고, 과일도 먹었다.
촤아아-
그러고 잠시 폭포가 보이는 자리에서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멍하니 있었는데.
공손무결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떤가?”
“좋습….”
“허풍은 말고. 근질근질하지?”
“…솔직히 그렇습니다.”
“그럼 몸을 움직여 볼까? 대련이나 한번 하세.”
공손무결쯤 되는 사람과 대련할 기회는 그의 제자가 된 게 아니고서야 잘 오는 게 아니었다.
‘배분이 있고, 위치가 있는 데다 바쁘기도 하시니.’
이런 날 이런 곳이라야 가능한 것이었다.
그에 나는 좋다고 몸을 일으키며 허리춤의 회한으로 손을 가져갔다.
하나, 공손무결은 고개를 저었다.
“진검 말고 이거로 하세.”
그리고 자신의 행낭에서 목검을 꺼내 나를 향해 던졌다.
이제 보니 둘둘 말린 막대기 같은 것 중 하나만 낚싯대고 나머지는 목검이었던 모양이었다.
하나 의아함은 남아 있었다.
“진검 대련이 실전에 가깝지 않습니까? 검초도 더 살벌하고요.”
“그렇지, 하지만 수련이란 게 꼭 살벌한 상황에서만 성취를 얻는 게 아니라네. 듣자 하니 자네는 늘 실전과도 같은 대련을 고집한다지?”
“…….”
“아까 마교와의 전쟁을 예견한 것도 그렇고, 젊은 친구가 못난 어른들 때문에 너무 치열하게 사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가 않아. 그래서 오늘은 이런 수련도 있음을 알려주고자 하네.”
공손무결의 말에 따라 나는 회한을 끌러 놓았다.
그리고 목검으로 기수식을 취했다.
“우선 목검에 내력을 불어넣게. 조심해야 하네. 이건 안에 철심도 박지 않은 싸구려 목검일세, 너무 과하게 내력을 불어 넣으면 나무로 된 검신이 견디지 못하네.”
우- 우웅-
“한철검을 쉽게 손에 쥔 명가의 자제들은 몇 개쯤 깨 먹고 나서야 감을 다시 찾는데, 말 몇 마디에 그래도 검기는 씌워 내는구만. 그럼 들어오게.”
말은 들어오라 해놓고 정작 빈틈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 공손무결이었지만.
가만히 있어선 영원히 빈틈을 찾을 수 없었다.
쌔애애애액!!
나는 비영파천보를 시전하며 목검을 휘둘러 나갔고.
그런 내 검초를 공손무결이 쳐내기 시작했는데.
딱! 딱!
딱! 딱! 딱! 딱!
공손무결의 검은 허초도 변초도 큰 동작도 없이, 투박하게 내 검로를 방해해 왔다.
내가 늘어지는 시간 속에 검초에 속도를 더하면, 그 역시 딱 그 속도에 맞추어 속도를 올려왔고.
딱!딱!딱!
딱!딱!딱!딱!!!!
그러다가 내 검초가 너무 빨라지면 진하게 엉긴 검기가 빛나는 목검으로 밀어내 왔다.
따악!!!
‘이건 억지로 받아내려고 했다간 목검이 날아간다.’
그런 과정이 이어지며 땀을 비 오듯 쏟아 냈으나, 공손무결의 빈틈은 찾아낼 수 없었다.
나는 다시금 기수식을 취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마치 폭포를 상대하는 느낌이다.’
공손무결의 검 앞에 내가 휘두르는 검초는 그저 포말이 되어 흩어질 뿐이었다.
‘내 목검은 내력을 더 넣었다간 터져나갈 것 같은데, 맹주님의 목검엔 더 진한 아지랑이가 엉긴다.’
공손무결은 그 차이에 성강의 묘리가 있음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동안 내력을 넣고 또 넣어 회전시키려고만 했는데.’
아무래도 그간의 내 사고가 혈조술을 합쳐 사용하는 유사 검강에 매몰되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럼 방법을 바꾼다.
파천의 내력이 자아내는 파동과 싸구려 목검이 보내오는 파동에 오감을 기울인다.
‘목검이 버틸 수 있도록. 여기서 딱 한 겹만 더.’
우웅-
그리고 유효타를 때려보려, 억지로 폭포를 거스르려 하지 않고 그저 공손무결의 흐름에 내 검을 흘려 넣어본다.
따악!!!!!
이 순간 무아지경이 우뚝 멈추며, 시야가 확 하고 트였다.
그러자 계곡의 폭포가 만들어내는 포말 소리가 더 세밀하게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촤아아아아아아아!!
그리고 공손무결이 입을 열었다.
“눈에 초점이 돌아왔군? 성취를 본 건가?”
“성취까지는 아니고 막혀 있던 벽에 금을 더 낸 것 같습니다.”
“하하. 이거 선생이 잘난 건가 학생이 잘난 건가? 흐음. 애매하구만. 아무튼 운기를 해서 속을 고르도록 하게.”
“예.”
나는 곧바로 공손무결을 향해 감사 인사를 올린 뒤, 가부좌를 틀고 앉았는데.
그렇게 운기조식을 하고 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탓! 탓! 탓! 탓! 탓! 탓!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십여 명의 사람이 숲을 달려 오르는 걸음 소리 들이 귀에 잡혀 왔다.
“!?”
“자네도 느꼈군. 기다리던 객들이 나타난 모양이네.”
“기다리던 객이라고 하시면?”
“대군사가 안가의 규모를 보고는 분명히 인근에 다른 거점이 더 있을 것이고, 한쪽에서 수색을 시작하면 반대쪽에서 움직임이 있을 것이라고 하더군.”
“…쉬자고 하셔놓고 정말 쉬려는 생각은 아니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