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0화. 실마리 (4)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통틀어 흔히 의식주란 말을 한다.
하지만, 무림인의 경우 거기다 무기를 추가해야 했는데.
일정 수준 이상의 무림인들이 애용하는 무기는 주로 한철과 현철로 만든 것이었다.
‘거기서 여유가 있으면 만년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한철과 현철을 쓰는 거고, 여유가 부족하면 백련정강 무기를 쓰는 거지.’
여기서 여유란 경제적 여유뿐만 아니라 지닌 무위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급도 안 되는 자가 좋은 무기를 차고 다니면 무기를 노리는 자들의 표적이 되니까.’
그런 무기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재료중 현철과 화정은 서쪽의 대막과 남쪽의 남만으로 산지가 나누어져 있었지만.
한철과 빙정은 북해빙궁 일대가 유일한 산지였는데.
‘북해빙궁의 산물이 중원으로 오는 길은, 산서를 통하는 것과 요동을 통하는 것뿐.’
한데, 산서가 어지러워지며 한쪽 길이 반쯤 막힌 상황에서.
요동 방면의 터줏대감인 모용세가가 강짜를 부리고 나서버렸다.
‘뭐라고 그랬다더라? 시국이 어지러우니 모용세가가 살길은 검문검색을 강화해서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나?’
듣기는 그럴싸해 보여도 허울 좋은 명분일 뿐.
실상은 이 기회에 모용세가가 크게 한몫을 챙기려는 것일 뿐이었다.
‘북해빙궁의 상인들이 한철과 빙정을 내어주고 바꿔 가는 물품은 곡식과 옷감이니까.’
무림인의 필수품인 무기는 공급이 늦으면 가격이 좀 올라갈 뿐이지만.
의와 식은 정말로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다.
빙궁 쪽 상인들은 요동에서 산물을 바꿔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빙정과 한철 사재기로 돈도 벌고, 겸사겸사 하북의 무가(武家)들도 길들여 보겠다는 심산인데.’
마교의 등장을 제 잇속을 챙기는 데 쓰는 모용세가의 괘씸함은 일단 제쳐두고.
그 결과로 정무학관이 위치한 호북에서 빙정과 한철의 값이 상당히 많이 올라버렸다.
‘그런데 이 가격에 수선을 해줘? 자잿값과 인건비를 제외하면 남는 게 없겠는데?’
나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뇌리에 스치자마자 은하연을 찾았다.
“은 소저?”
“예, 언 공자. 말씀하세요.”
“여기 백련검의 수리를 맡기는 ‘호원단철’이라는 대장간 말이오.”
그런 내 음성에 은하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저번에 이야기 나누지 않았나요? 그곳 대야장이 노환으로 물러나서, 일감이 다른 대장간에 다 넘어가니까 아들 내외가 가격을 낮추더라고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품질은 괜찮아요.”
“하나, 그때에 비하면 한철과 빙정 값이 많이 올랐잖소?”
“그렇긴 한데, 원래 상계에서는 당장 손해를 보더라도 미래의 단골을 확보하기 위해 출혈을 감수하기도 해요. 제가 주로 그렇게 해서 사업을 많이 키웠는걸요? 그 방법을 쓰기엔 이런 시절이 오히려 적기죠.”
“그건 당장의 손해를 감수해도 망할 일이 절대 없는 은휘상단을 등에 업고 있던 시절에 은 소저가 쓴 방법 아니오?”
“아?”
“내가 볼 땐 이건 일반적인 대장장이의 생각이 아니오. 빙궁 쪽 산물의 수급난이 언제 풀릴 줄 알고 그런 배짱을 부린단 말이오?”
그런 내 말에 은하연은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설마, 마교의 개입을 의심하시는 건가요?”
“생각해 보면 마교 놈들이 단철 기술이 제법 있었소. 곽사홍이 차고 있던 검도 그렇고, 얼마 전에 내가 발견했던 약재 창고의 문에 사용된 한철도 그렇고.”
“하지만 단강구 일대에서 장사를 하려면 제법 까다로운 검증을 거쳐야 하는데요?”
은하연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단강구 일대는 백도무림의 요람이라 불리기에, 상점을 열려고 해도 여러 가지 검증이 따랐다.
‘나름대로 텃세도 있고.’
하나, 그렇기에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라는 말에 안성맞춤인 곳 일 수가 있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넘어가기에 너무 좋지 않소? 당장 은 소저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고.”
“아! 어?! 그럼 제가 지금껏 마교 놈들에게 일감을 던져줬다는 건가요?”
“그건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당장은 찝찝하니까 확인해 보자는 거요.”
“아, 예.”
“나는 일단 거지들을 시켜서 은밀히 주변 평판 모아오라고 시킬 테니까. 은 소저는 언동생들 소집해서 호원단철이라는 업장이 학관과 백본회의 검증을 어떻게 통과했는지와 기타 제반 사항을 먼저 모으고 계시오.”
“알겠어요!”
* * *
나는 솔거 거지 삼인방을 시켜 무기점 골목 인근에서 나도는 호원단철장에 관한 이야기들을 수집해오라 시킨 뒤.
곧바로 연구실에 딸린 회의실로 돌아왔다.
그간 마방연에서 만날 하던 것이 자료 검토와 정리였기에 호원단철장에 대한 자료조사는 상당히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누님들, 여깄습니다.”
“여기도요!”
하성이와 소릉이가 자료를 찾아서 은하연과 제갈설지의 책상에 가져다주었고.
“어, 하성아. 이건 언 공자 책상으로.”
“소릉 님, 이건 서기들한테 전해주세요.”
“예!”
은하연과 제갈설지는 받은 자료를 빠르게 검토했다.
그 결과, 판단이 필요한 자료는 내 책상으로 옮겨졌고.
그저 사실이 나열된 것은 서기 역할을 하고 있는 당옥기와 남궁윤이 있는 곳으로 보내졌다.
“아이! 남궁윤! 그래서 언제 다할래!? 뭔 보고서를 그렇게 정자로 써?!”
“당옥기. 글씨는 마음의 거울이라 했다.”
“빈도도 그런 말을 들어보기는 했습니다.”
“캬악!”
그런데 서기들의 차례에서 약간의 병목현상이 있었다.
원인은 꼿꼿하게 앉아 정자로 서류를 작성하고 있는 궁윤이 놈과 그 곁에서 먹을 갈고 있는 정현의 맞장구 때문으로 보였는데.
“마음의 거울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필체가 좋아서 서기 시켜놨더니만, 안 되겠다. 남궁윤 너 정현이랑 자리 바꿔.”
나는 우선 남궁윤에게 잔소리를 한 뒤.
“…….”
“정현. 알아볼 수 있게만 빨리 써.”
“그리하겠습니다!”
서기 중 한 명을 바꿔 일의 능률을 높였다.
그리고 나도 내 책상으로 오는 서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흠.”
마교의 일인 데다 내가 신속을 강조하기도 했고.
자료조사 범위도 최근 오 년을 기준으로 삼았기에.
보기 좋게 요약된 서류가 나와 언동생들 앞에 한 장씩 놓이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호원단철장과 무기점에 관한 건.
노환으로 은퇴한 대야장 원륭과 그 아들 원홍이 오 년 주기로 갱신되는 학관과 백본회의 검증과정을 작년에 재통과함.
이후 원씨 가문은 며느리를 맞음.
혼인 전의 원홍은 대장간 일을 아비에게 맡겨 놓고 본인은 음주가무나 도박을 즐김.
원홍은 혼인과 아비의 노환이라는 곡절을 겪으며 주변에서 사람이 바뀌었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대장간 일을 열심히 하기 시작함.
원홍의 호원단철장은 대장간의 일을 폐쇄적으로 하지는 않음.
인근에서 일꾼을 뽑아갔으며, 뽑아갔던 일꾼들은 제대로 복귀를 함.』
그 자료를 보자 내 고개는 절로 갸웃해졌다.
“애매하군.”
그러자 허리춤의 사부님께서 음성을 전해오셨다.
- 애매해? 그 원륭이라는 대장장이가 노환이 왔다는 소리에 나는 용운이 네 외조부가 떠오르는데? 며느리로 들어온 여인이 마교의 여인이라고 생각하면 앞뒤가 딱 맞지 않느냐?
‘사부님께서 인간사에는 둔하셔서 그렇지, 의외로 혼인하고 사람이 바뀌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 흐음.
‘그리고 대장장이란 불 앞에서 풀무 밟으면서 망치를 두드리는 직업입니다. 눈 어깨 무릎이 동시에 닳는 직업인지라 나이가 많은 대야장들은 실제로 오늘 다르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 정도로 노환이 하루아침에 오는 직군이기도 하고요. 또, 외부 일꾼 모집이 이따금 이루어진다지 않습니까? 이 같은 정황이 있는 만큼, 사건을 신중하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 하여, 아닌 것 같다고?
‘아니라기보다는 더 알아봐야겠습니다. 그냥 덮기도 애매하네요.’
섣불리 들이 칠 수는 없었다.
만에 하나 내 추측이 틀렸다면, 인근의 대장장이들이 집단행동을 해올 수가 있었다.
‘그래서야 무인에겐 어떤 의미에서는 의식주보다 소중한 무기에 문제가 생긴다.’
이 시국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거야말로 마교 놈들이 바라 마지않는 학관이 혼란해지는 상황이 될 수가 있었다.
뭐, 생각은 여기까지.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이건 제대로 탐문을 해봐야겠다.”
“제대로 된 탐문이라면?”
“호원단철장에 일꾼으로 잠입을 해봐야겠소. 나는 총장님께 허락을 받으러 다녀올 테니까. 제갈 소저?”
“예, 용운 님?”
“융중의 세가 쪽이든 제갈민 교수님이든 힘 좀 써서 이 근방 출신으로 그럴싸한 신분 하나 빌려오시오.”
“그렇게 할게요!”
“당옥기는 정교수님한테 가서 사정을 말하고 내가 역용할 준비 좀 해놔 주고. 나머지는 은 소저 지휘 아래 원자료는 제자리에 다 가져다 놓고 만든 자료는 다 태워. 이거 한 개만 있으면 되니까.”
그렇게 일거리를 재분배한 나는 정리된 자료를 들고 총장실을 찾아가 내 추론에 대해 말했다.
“…그런 생각으로 이렇게 자료를 조사해 봤는데, 정리한 자료를 봐도 뭔가 애매한 것 같습니다.”
그런 내 말에 경혜 사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턱을 매만졌다.
“빈니가 보기에도 확실히 애매해 보이기는 합니다. 한데, 빈니도 대군사님이 다행이라 생각지 말고 경계를 하시라기에, 수위부의 사람들을 시켜 단강구 일대를 수색하게 해보긴 했습니다. 그중엔 무기점과 단철장들도 있었죠. 하나, 별다른 이상한 점은 찾지 못했어요.”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콕 집어서 호원단철장의 업장을 조사한 것은 아니시진 않습니까?”
“그야 전반적으로 조사를 하기는 했…. 음? 언용운 생도의 말은 조사한다는 이야기가 돌면 저쪽에서 흔적들을 숨겼을 것이라는 거겠군요?”
“예.”
“일리가 있습니다. 하여, 어찌하고 싶은 건가요?”
“단철장은 보통 외부 일꾼도 불러다 씁니다. 사철을 캐는 작업 같은 단순 잡무가 많거든요. 보여드린 자료에도 나와 있지만 호원단철장에서도 사람을 데려다 쓴다더라고요? 제가 잠입을 한번 해볼까 합니다.”
그런 내 말에 경혜 사태는 미간을 좁혔다.
“하나, 언용운 생도의 추측이 맞다면 너무 위험하지 않나요? 저나 다른 교수님들이….”
“교수님들은 이런 일에선 티가 나실 거로 생각합니다. 일하는 사람들이랑 제대로 어울려 보신 적 없으시지 않습니까?”
“…할 말이 없네요. 민초를 위한다, 협을 행한다는 말을 평생 입에 올리며 살아놓고 정작 그런 사람들의 삶을 제대로 겪어본 일은 없으니. 언용운 생도는 망나니 노릇을 하던 시절에 일부러 어울려 봤나 보군요?”
사실 망나니 시절에 그런 것은 아니고 전생의 초년에 짐꾼이다 뭐다 해본 것이었지만.
딱히 정정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 나는 그저 미소를 지었다.
* * *
그래도 혹시 모르니 근처에 노삼 교수님이 대기하는 조건으로 경혜 사태는 내 잠행을 허락했다.
그에 노삼 교수님은 툴툴거리시면서 마방연으로 향하는 나와 함께 걸음을 옮기셨는데.
“생도가 교수를 대기시키는 게 옳게 돌아가는 집구석이 맞냐?”
“교수님은 거지 같은 티가 너무 많이 납니다.”
“……?”
“저번에도 혈도 대충 푸시다가 역용 풀리셨다면서요?”
“…….”
그렇게 돌아와 보니 당옥기를 비롯해 몇몇 언동생들이 어쩐지 조금 신이나 보이는 얼굴로 빙글거리며 나를 반겼다.
“왔다!”
“오셨다!”
“뭐야? 갑자기 왜 신들이 났어?”
“자자, 옷이나 빨리 갈아입고 와. 이거 급한 일이잖아? 그렇게 닦달하더니 그런 거 물을 시간이 있어?”
그에 내 고개가 절로 갸웃했지만.
바쁜 것은 사실이라 청죽관의 무복을 벗어놓고, 색이 바랜 무명옷을 입고 나왔는데.
당옥기와 은하성이 역용 물품들을 각탁 위에 깔아 놓고 나를 맞은편에 앉히더니 역용을 돕기 시작했다.
“참, 설지 누님이 신분 구해오셨습니다.”
“아, 그래?”
“예. 용구라네요?”
그리고 배를 잡고 웃어댔다.
“용구. 앜. 용궄킄킄킄. 아하핰.”
그에 내 가슴속에 절로 살심이 치솟았다.
“뒤질….”
한데 목에 땟국물 자국을 만들고 있던 당옥기가 ‘씁.’ 소리를 내왔다.
“어허, 용구야. 몰입해야지?”
“너는 또 뭔….”
“나는 단단이 할 때 꼬박꼬박 도련님이라고 했다? 너라고 하지 말고 아가씨라고 해라?”
‘사부님. 저 얘네들 다 없애고 지옥 갈래요.’
- 지옥에서 받아는 준다더냐?
‘?’
- ?
‘???’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호북성 당양현 출신 용구로 거듭난 나는, 이런 수모를 겪게 한 마교에 복수심을 불태우며 ‘호원단철’으로 향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