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5화. 우리 집에 왜 왔니 (1)
내 의견을 들은 경혜 사태는 결심을 굳히셨는지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여셨다.
“방어선은 그럼 어디를 기준으로….”
하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어차피 학관 전체를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라 교직원 회의를 소집해야 하니, 그 이야기는 거기서 해야겠군요.”
저 말이 맞았다.
따지고 보면 마방연은 학관에 소속된 숱한 연구실 중 하나일 뿐이었다.
‘학관의 결정은 교직원 회의나 운영위원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까.’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난 경혜 사태는 참석하고 있던 지도 교수님들에게 이런저런 명을 하셨다.
“한영 교수님은 교수 연구동으로 가서 교수님과 실장급 연구생들을 본관의 대회의실로 오라고 전해주세요.”
“예. 그리하겠습니다.”
“정극경 교수님은 수위부에 가서 비상을 걸어 주시고요.”
“알겠습니다.”
“노 교수님은 기숙사로 가서 다른 사감 교수님들께 같은 말을 전해주세요.”
“옙.”
그렇게 교수님들이 급히 자리를 뜬 가운데.
경혜 사태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여셨다.
“제가 회의를 소집하고 있는 동안, 언용운 생도는 마방연의 연구생들과 방위 계획에 관한 논의를 끝내고 본관의 대회의실로 오도록 하세요. 빈니는 언용운 생도의 혜안과 마방연의 결정을 믿겠습니다.”
“예? 아, 예!”
그리고 내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마방연을 떠나가셨다.
그런 경혜 사태의 모습에, 허리춤의 사부님께서 입을 여셨다.
- 저 경혜라는 비구니의 말은, 용운이 네가 하자는 대로 하겠다는 것 아니냐?
‘…음. 그런 것 같습니다.’
물론, 교직원 회의라는 절차를 거치긴 해야겠지만.
어차피 이런 비상시국에서는 의견이 갈리는 것을 피하고자 총장에게 권한을 집중한다는 학칙이 있었다.
그러니 결국 경혜 사태의 의중이 정무학관의 대처방식을 결정할 터였다.
- …허, 어찌 보면 학관 전체의 운명을 네게 맡긴다는 것인데. 간이 크다고 해야 할지, 너를 향한 신뢰가 크다고 해야 할지.
‘소금 낀 흑도 놈의 옷을 입고 뒹군 보람이 있긴 하네요.’
- ……? 뭔 소리냐?
‘그런 게 있습니다.’
뭐, 아무튼.
그렇게 마방연에서 행해진 긴급 보고가 끝이 났다.
나는 곧바로 언동생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뭐해? 움직여야지?”
“뭐부터 하면 될까요, 언 공자?”
“은 소저는 나랑 방위 계획 짜는 거 고민 좀 합시다. 제갈 소저도.”
“예!”
“네!”
“당옥기 너는 네 개인 연구실로 가서 거기 홍옥이랑 석류 비롯해서 집기들 챙기고.”
“알겠어.”
“나머지는 마방연의 자료들 본관 행정처 창고에 옮겨. 만년한철로 만들어서 거기가 제일 안전해. 시간 없다. 빨리빨리들 움직여.”
* * *
나는 은하연과 제갈설지의 도움을 받아, 학관의 약도를 그려 놓은 흑판 위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려 넣었다.
쓰윽-
“그럼 이 정도를 방어선으로 삼으면 되겠구만.”
특이하게도 방어선 안에 사대 기숙사가 포함되지 않았다.
땅굴에서 가늠했던 보폭, 그리고 심율을 통해 넘겼던 기숙사 쪽의 정보를 고려해보니.
기숙사를 포기하는 쪽이 도리어 안전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괜한 욕심을 부려서는 안 돼.’
하여, 과감하게 빼버린 것이었는데.
나와 고민을 함께한 은하연은 그 결정에 여러 생각이 드는 모양이었다.
“저희 청죽관이야 노 교수님이 언 공자의 생각을 전폭적으로 지지해주시는 데다, 사실… 음 이건 상관없는 이야기고. 아무튼 다른 기숙사가 이 결정을 받아들일까요?”
- 하연이 이것은 왜 말을 중간에 하다 마는 것이냐?
‘아마 청죽관의 재건축 계획을 말하려던 걸 겁니다.’
그랬다.
청죽관은 어차피 오는 방학에 건물을 허물고 새로 올리려 하고 있었다.
즉, 방위선에 기숙사가 포함이 되든 되지 않든 상관이 없었는데.
이때, 우리의 생각을 이해한 제갈설지가 입을 열었다.
“청죽관은 어차피 새로 짓기로 해서 타격이 없긴 하겠네요, 하연 님?”
“뭐, 그렇죠?”
“아마 윤국관은 동의할 거예요. 주판 없이도 사람이 귀하다는 것을 이해할 테니까요. 문제는 운매와 향란이겠죠. 용맹과 전통. 이런 걸 신념으로 삼은 분들이 많으시니까요.”
녀석들의 음성에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받아들이게 해야지.”
“하기야 언 공자는 그쪽으로는 도가 트셨으니까. 그럼 저희도 이만 다른 연구생들이 하는 일을 도우러 가볼게요.”
“그리하시오. 좀 이따 봅시다.”
그렇게 구체적인 방위 계획을 정리가 끝났다.
나는 교직원 회의가 소집된 본관의 대회의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당도한 대회의실에서는 이런저런 웅성거림이 한창이었는데.
“총장님께서 비상을 선언하셨다고 하여 부리나케 오기는 왔습니다만, 마교의 습격이 있은 것도 아니고 예정돼 있다니? 당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장내에 내가 들어서자 경혜 사태께서 좌중을 환기하셨다.
“정숙. 정숙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본인의 옆에 세워둔 흑판을 가리키며 내게 입을 열었다.
“마공방어학 연구회의 언용운 실장은 현재 정무학관이 처한 상황에 대해 발표하도록 하세요.”
그 말에 따라 나는 우선 호원단철에 잠입하게 된 계기와 과정, 그리고 지금 학관이 처한 상태에 관해 말했다.
“…하여 빠르면 오늘 밤, 늦어도 내일 아침까지는 적의 움직임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 말이 끝나자마자, 향란관의 사감 교수인 창량이 벌떡 일어나더니 경혜 사태를 향해 언성을 높였다.
“총장님! 이런 작전을 허락하시다니요! 마방연? 예 좋습니다. 절차와 법도를 비껴가는 조직이라 하더라도 시국이 시국이니 꼭 필요한 연구이고 조직이지요. 하지만, 이건 선을 넘어도 너무 넘었습니다.”
“…….”
“정무학관이 왜 정무학관입니까? 절차와 법도가 왜 중요한지 모르십니까? 장차 학관의 다른 생도들이 모두 언용운 생도를 본보기 삼아 행동한다면 어찌하실 요량이십니까?”
“…하나, 그 덕에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지 않았습니까.”
“총장님!”
“물론 빈니가 잘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지금은 처한 상황에 관한 논의가 먼저이지 않겠습니까 창량 교수님?”
“하…. 일단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경혜 사태께서 적절한 말로 그런 창량 교수를 일단 자리에 앉혔다.
“그럼 이어서 방위 계획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나는 방위 계획을 늘어놓았는데.
“…하여 양호처와 본관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이 정도로 잡고 대비하는 게, 여러 상황에 가장 기민하게 대처할 수 있어 인명피해가 적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방위선을 그림과 동시에 내 발표가 끝나자.
운매관의 사감이신 재혁 숙부가 긴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흐음. 싸워보지도 않고 마교 놈들에게 기숙사를 내어준다니.”
아무래도 용기와 무퇴를 숭상하는 운매관의 신념이 걸리는 모양이셨는데.
이 순간 향란관 출신인 남궁정호 교수가 헛웃음을 지으며 한마디를 보탰다.
“기숙사를 방위선에서 제외하자니, 누구 머리에서 나온 생각인가? 역사와 전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인데 그걸 그냥 내주자고?”
“…….”
“듣자 하니 청죽관은 새 건물을 올릴 것이라던데, 그래서 저런 방위선이 나온 건 아니고?”
그에 내 이가 절로 빠득하고 갈렸다.
‘일심이 되어 뭉쳐도 모자랄 판에 또 이렇게 지랄을 하시는구만.’
딱밤 마렵네.
하나, 남궁정호가 해온 말도 일단은 질문의 형식을 띠고 있으니 답을 해야 했다.
하여, 답변하기 위해 입을 열려던 그때.
창량 교수가 혀를 차고 나섰다.
“쯧쯧.”
저 인간은 또 뭔 트집을 잡으려고 저러나.
한데, 놀랍게도 창량 교수가 하려는 말의 초점이 남궁정호 교수에 맞춰져 있었다.
“남궁 교수님도 참 답답한 소리를 하십니다.”
“…예? 창량 교수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역사는 그렇다 쳐도 전통을 어찌 그깟 건물에서 찾으십니까? 선대를 기억하여 전통을 잇는 것은 결국 후기지수들입니다. 우선할 것은 생도들의 안위입니다. 일의 경중을 좀 신중하게 보십시오.”
“…흠. 흐흐흠.”
그렇게 남궁정호 교수를 꿀 먹은 벙어리로 만들어버린 창량 교수는 ‘후.’하고 잠시 숨을 내쉬더니, 나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총장님, 저는 저 방위 계획에 찬동하겠습니다. 그리고 언용운 생도.”
“예?”
“나는 여전히 자네가 기지랍시고 마인들의 소굴을 헤집고 다닌 행동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
“하나, 그건 자네도 내 울타리에 들어 있는 생도라 생각하여 그러한 것이고, 향란관의 사감으로서는 그 용기와 기지에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
창량 교수는 그렇게 말하고는, 내게 포권을 취해왔다.
* * *
교직원 회의에서 내가 할 역할은 보고와 방위 계획에 관한 발표까지였기에.
할 일을 마친 나는 마방연과 청죽관을 챙기기 위해 본관을 나왔다.
‘마방연은 업무 분장을 했으니 일단 청죽관부터.’
그렇게 청죽관의 자치회실 문을 드륵 열었는데.
하성이 녀석이 각종 장부를 하나하나 꺼내 쌓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디 보자, 이게 먼저 와야 하고.”
그런 녀석의 행동에 나는 꽥! 하고 소리를 질렀다.
“야!”
“엄마 깜짝아!”
“휘주에 잘 계실 어머니는 그만 찾고. 그걸 왜 그렇게 순서대로 쌓고 있어?”
빨리빨리 하라니까.
“…이게 개판 되면 나중에 다시 정리할 때 엄청 힘듭니다 형님.”
그런 하성이 녀석의 음성에 나는 한숨을 쉬며 손을 슬쩍 들었다.
머리를 긁으려는 요량이었는데, 하성이 녀석은 자신을 후려칠 것으로 생각했는지 움찔했다.
“!”
나는 기왕 들어 올린 손으로 그런 녀석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하성아. 그건 나중의 일이잖아. 이럴 땐 한 치 앞만 생각해야지.”
“……!”
“일단 닥치는 대로 들고 가서 다 때려 박아.”
“…옙!”
그러고 있는데.
우측 복도 쪽에서 당옥기가 웬 보따리들을 이고서 끙끙거리며 조심조심 걸음을 옮기고 있는 게 보였다.
“당옥기 넌 뭘 또 그렇게 바리바리 이고 가? 전쟁 났냐?”
“……? 났잖아?”
“아, 났지 참. 내 말은 중요한 거 먼저 옮기라는 거지.”
“다 중요한 거거든?!”
한데, 녀석을 보자 한가지 생각이 스쳤다.
“생각해 보니 너는 지금 그런 거 옮길 게 아니네. 마라호초탄, 그건 식당이랑 양호처에서 재료만 가져오면 금방 많이 만들 수 있지?”
“어, 그렇긴 하지?”
“그거 나 주고 지금부터 그것 좀 만들어.”
화생방 훈련을 받은 녀석들은 사용할 수 있겠지.
독 자체가 치명적이지는 않아도 찰나의 순간을 만들어내는 데는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알았어. 근데 내 짐이랑 물건들 막 아무렇게나 던지고 그러면 안 된다?”
“어.”
“건성으로 대답하지 말고 진정성을 보여! 보지도 않고 어 하지 말고!”
“어?”
“캬악!!!!”
“아, 잠시 마라호초탄의 활용처 좀 생각하느라. 조심히 옮기라고? 알겠다니까.”
그렇게 마방연과 청죽관의 일을 동시에 챙기며 각종 자료와 장서들을 바쁘게 옮긴 지 얼마나 되었을까?
“언 형! 본관에서 여기 명령서가 나왔어요! 다른 기숙사의 생도들과 대학원생 선배님들이 지금 본관 앞 광장으로 모이는 중이에요!”
교수회의에서 의결된 결정문이 생도들은 광장에 집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우리도 가자.”
“예!”
그에 나도 광장 앞으로 향했다.
“운매관 열외 없습니다.”
“향란관 열외 없습니다.”
“윤국관 열외 없습니다.”
“청죽관 열외 없습니다.”
그리고 사대 기숙사의 자치회장들에 이어 마방연의 실장 자격으로 총원 신고를 마쳤다.
“마공방어학 연구회 열외 없습니다.”
그러자 단상에 올라선 경혜 사태께서 엄숙한 어조로 입을 여셨다.
“마인들이 학관을 넘보고 있습니다.”
그런 경혜 사태의 음성에.
아직 제대로 된 제반 사정을 듣지 못한 다른 생도들 사이에선 작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마인들? 마교 놈들이 학관을 넘본다고?”
“맹주님께서 오셨을 때 소탕이 된 거 아니야?”
“훈련 상황 같은 것 아닐까? 왜, 언용운이 실장으로 있는 연구실에선 그런 훈련을 맨날 한다잖아?”
그에, 각 기숙사의 자치회장들이 몸을 돌려 생도들을 조용히 시키려 했으나.
경혜 사태의 음성이 울린 것은 그보다 먼저였다.
“그냥 두세요. 당황스러운 것이 사실이고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당황해도 좋습니다.”
담담히 이어지는 경혜 사태의 음성에 좌중이 빨려들 듯 고요해졌다.
“하나 이는 실제 상황입니다. 정무학관은 지금 마인들과의 전투가 임박한 상황입니다. 그렇기에 빈니의 말이 끝이 났을 때 당황하는 사람이 남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고요 속에서 경혜 사태는 계속해 말을 이었고.
“물론 무지는 당황과 두려움을 부릅니다. 그것을 막아보고자 부랴부랴 마공방어학 연구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그치들이 과연 어떤 자들인가에 관해 알아보았으나, 여전히 우리는 그자들에 관해 잘 알지 못합니다.”
마침내 말을 맺었다.
“하나, 빈니도 여러분도 한 가지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사필귀정이라는 말이 어찌하여 생겨났는지를요. 사마외도는 감히 정을 넘볼 수 없음을 오늘 우리가 보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