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6화. 우리 집에 왜 왔니 (2)
경혜 사태가 말씀하시는 동안 나와 사대 기숙사의 자치회장들은 생도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여, 내 눈에는 고요히 끓고 있는 다른 생도들의 눈동자가 또렷이 보였다.
‘사기가 고양됐다.’
나도 나름대로 정파인으로 거듭나긴 한 모양인지 가슴 한쪽에 고양감이 차오르기는 마찬가지였다.
“…….”
한데, 이 순간 허리춤의 사부님께서 한마디를 해오셨다.
- 경혜라는 비구니가 한 말은 따지고 보면 그냥 정파니까 이긴다는 말인데, 흠. 저런 근거 없는 자신감은 독이 될 수 있을 텐데? 이거 괜찮은 것이냐?
‘괜찮습니다.’
- 괜찮다고? 저런 생각으로 내게 덤벼들었던 자들 중 온전히 돌아간 자가 없거늘?
사부님의 말마따나, 경혜 사태의 말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우리가 정파니까 이긴다.’였다.
그 말만 떼어놓고 보면 그야말로 근거 없는 자신감의 발호 그 자체라 할 수 있었다.
‘예. 보통은 그런 자신감으로 행동하는 자는 백이면 구십구가 망하죠.’
내 경험은 물론이고.
수없이 많은 역사적 사건이 증명했다.
‘해서 저 스스로는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도 경계하도록 해온 것이지만.’
하나, 지금은 저 방식이 맞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마방연에 적을 둔 몇몇 연구생들과 언동생들을 제외한 대다수 생도는 마교라는 족속을 마주하는 것이 처음이었다.
‘오늘은 미지의 존재를 갑자기 마주하게 된 것에서 오는 당혹감과 두려움부터 걷어내야 하니까요.’
그걸 걷어내려면 결국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하나, 후기지수들이 그런 확신을 가지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경혜 사태께서 그걸 역사와 근본에서 끌어와 해결한 것이다.
‘분명 과하면 독이 되겠으나, 독도 때에 따라 약이 될 수 있듯 지금과 같은 상황에 꼭 필요한 조치인 것 같습니다.’
마교 놈들의 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두려움을 내려놓는 것도 중요했다.
하지만 실질적인 조직 개편도 필요했다.
‘정무학관의 조직들은 초점이 전투가 아닌 교육에 맞춰져 있는 만큼 이런 사태가 발생했을 때 기민한 대처가 불가능하니까.’
아니나 다를까.
좌중이 고양감으로 벅차 있는 가운데, 경혜 사태께서 곧바로 학관의 편제 개편에 관해 입을 여셨다.
“그럼 전시에 따른 정무학관의 긴급 조직 개편이 있겠습니다. 모용린 교수와 대학원생들은 인근의 민가 보호를 맡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대 기숙사는 지금 즉시 자치조직이 아닌 학관 총장의 지휘를 받는 단으로 개편합니다.”
모용린 교수가 맡은 대민 방호 인력을 제외한 나머지 전력은 기본적으로 출신 기숙사를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팽재혁 교수님을 필두로 한 운매단은 본관과 양호처를 중심으로 한 서쪽 방어선을 맡을 것입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창량 교수님을 필두로 한 향란단은 동쪽 방어선을 맡을 것입니다.”
“예.”
“제갈민 교수님은 남쪽이십니다.”
“숙지했습니다.”
“수위부는 정극경 교수님이 지휘합니다. 맡을 방위는 북쪽입니다. 한영 교수님은 지타에서 막 당도한 거지들과 함께 외부 연락 업무를 맡습니다.”
한데, 매, 난, 국.
단으로 거듭난 세 기숙사의 역할이 발표된 직후 청죽의 이름이 아닌 다른 부서들의 이름이 불렸다.
“풉.”
“큽.”
그에 몇몇 생도들은 이 와중에 청죽관은 홀로 한 개 방위를 맡을 수 없는 곳이구나 하며 비웃거나, 우쭐대는 표정을 짓는 자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청죽단과 마방연 그리고 양호처 이 세 부서는 총장 직속의 별동대 전력으로 삼아 사방을 지원하는 역할과 양호 역을 맡길 것입니다.”
하나, 맨 마지막 차례에 이르러.
“획일화된 지휘와 원활한 지원을 위하여 이 별동대는 편제상 다른 단보다 명령 체계를 높이 둘 것이니, 상황 발생 시 별동대의 말은 곧 제 명과 같다는 생각으로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마방연과 청죽관이 주축인 별동대가 명령 체계상 자신들보다 윗줄에 놓이자.
조금 전까지 우쭐한 표정을 짓고 있던 생도들이 얼빠진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청죽관 녀석들이 우리한테 명령을 내리는 지위로 간다고?”
“신입생들이 춘계대항전에서 지기야 했다지만, 이게 말이 되는 처사인가?”
하나 경혜 사태께서 곧바로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여셨고.
“비상 상황이고 교직원 회의를 통해 의결된 사안인 만큼 그 효력은 지금부터 곧장 발효될 것이니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어서 창량 교수도 한마디를 보태니.
“총장님의 말씀대로 비상 상황에 정무학관의 이름으로 결정된 사안이다. 기강을 해치는 생도는 군율로 다스릴 것이다.”
잠시 웅성거리던 좌중에 고요가 찾아 들었다.
* * *
그렇게 정무학관의 전력이 편제대로 흩어졌다.
하나, 당장 마교의 군세가 쳐들어온 것은 아니었기에 맡은 방위가 없는 별동대에는 약간의 여유가 있었다.
별동대 역할을 맡게 된 청죽단은 그 여유를 활용해 책걸상 같은 것을 가져와 방벽을 치고 또 각종 함정을 설치한다고 여념이 없었는데.
향란관 생도 중에 몇몇이 우리를 보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창량 교수님의 말 때문에 잠자코 있었지만, 청죽관 녀석들이 왜 우리보다 위에 있는 것인지 나는 아직도 받아들일 수가 없네.”
“말로만 위지 약해서 뒤로 뺀 거 아니겠나? 사실상 부상자를 양호처로 옮기는 임무를 맡은 거라고 봤는데 나는?”
마음 같아서는 항룡장이 됐든 파천검법의 초식이 됐든 한방을 크게 먹여주고 싶었으나.
당장은 저런 놈들의 손도 빌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적의 습격이 임박했는데 여기서 자중지란을 일으킬 수야 없지. 딱 봐놨다. 나중에 보자.’
언제 한번 날 잡는다 진짜.
하여, 함부로 주둥이를 나불거린 향란관 선배들의 인상착의를 머릿속에 박아 놓고 걸음을 돌리려는데.
“여긴 다 됐으니 이제 저쪽으로 가시죠, 경룡이 형.”
“어?”
경룡이 형이 딴생각을 했는지 굼뜨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아, 다 됐으니 가자고? 그래, 그러세.”
“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아, 별거 아닐세.”
“언제 마교의 두더지 새끼들이 공격을 시작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별거 아닌 걸로 넋을 놓으셨으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인데요?”
“아, 그냥 우리가 이렇게 막중한 역할을 맡아도 되는가 싶어서 말이야.”
“…….”
그런 경룡이 형의 말에 나는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향란관 놈들이 지껄인 말 때문에 그러십니까? 그건 제가 조만간에….”
“그 친구들이 또 뭔 소리를 했나?”
한데, 경룡이 형은 딱히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럼 맡게 된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지 그 자체를 고민하고 계시는구만.’
그에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경룡이 형. 우리가 맡아도 되는가가 아니라, 우리니까 맡는 겁니다.”
“…….”
“이런 상황에 가장 준비가 되어있는 곳이 저희 청죽 아닙니까? 이번 학기, 절대 녹록하지 않았잖습니까? 그걸 다른 교수님들도 인정하신 겁니다.”
“하기야. 내내 합격진을 수련하고 유사시를 대비한 훈련을 해왔지. 내심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던 나날도 있었는데, 이제 보니 그게 다 이런 날을 위한 대비였구만. 언 부회장 자네의 선견지명이었어.”
…이야기가 또 그렇게 되나.
선견지명이라고 하지만, 원작 덕에 마교의 발호를 알고 있던 나였기에, 이런 이야기를 듣는 건 조금 머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 중요한 건, 다가올 전투에 어떻게 대처하냐는 거겠지.
“뭔, 또 선견지명까지.”
하여, 나는 이만하자는 생각으로 멈췄던 걸음을 다시 뗐는데.
경룡이 형은 내가 뱉은 말을 가만히 읊조리는가 싶더니.
“…우리니까 맡는다.”
어느 순간 바쁜 걸음으로 내 뒤를 따랐다.
“같이 가세!”
* * *
그렇게 이런저런 방비를 하고 있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단강구 일대의 백성들을 보호하는 임무를 받고 학관 밖으로 나간 모용린 교수님이 신호를 보내오셨다.
그 신호에 은하연이 아미를 좁히며 입을 열었다.
“언 공자! 스승님의 신호에요!”
그런지 얼마 되지 않아 일대 곳곳에서 시커먼 연기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 연기를 보며 제갈설지가 역시를 외쳤다.
“저건 땅굴의 환풍구에서 새어 나오는 것 같은데요?!”
“그런 것 같소.”
“역시! 저희 생각이 맞았네요!”
그런지 얼마 되지 않아.
지진이라도 난 듯 지축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쾅! 쾅!!!!!!
콰릉 콰르르릉!!!!!!!!!!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학관의 외벽이 무너진 건 그 순간이었다.
벽이 무너지며 자욱한 먼지가 시야를 가리는 듯싶더니, 곧 마교의 군세가 그것을 뚫고 개미 떼처럼 등장했다.
그 개미 떼의 선두에는 웬 노마두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는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끌끌끌. 백도무림의 요람에 신교의 위대함을 새겨라! 신교불패!!!”
“만마앙….”
하나 놈들의 구호가 완성되기 전. 나는 내력을 실어 빠르게 일갈을 내질렀다.
“멸절!!!”
“멸…?”
“만마멸절이다 이 새끼야!”
“……!”
“청죽단, 발검!!”
마교 놈들은 총 두 번을 흠칫했다.
마교의 구호에 절묘하게 일갈을 끼워 넣어 엿을 먹인 내 행동에 상전의 눈치를 살핀다고 한 번.
그리고 자욱했던 먼지가 흩어지며 눈에 들어온 학관의 방비에 또 한 번.
하나 이제 와서 퇴각한다는 선택지가 있을 리 없었다.
앞서 입을 열었던 노마두가 내가 있는 방면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노성을 토했고.
“방금 만마멸절이니 어쩌니 지껄인 자는 내가 혀를 뽑을 것인즉. 살려서 데려오도록 하고 나머지는 모조리 도륙을 내라!”
“죽여라!!!”
동시에 사방을 맡은 정무학관의 조직들이 발검을 선언하는 것을 시작으로 정무학관과 천마신교 간의 전쟁이 발발했다.
“수위부! 학관을 지켜냅시다!”
“운매단! 발검!! 운매의 이름을 등에 지고 물러서지 마라!!!”
“총장님이 말씀하셨듯 마(魔)는 감히 정을 넘볼 수 없음을 저 아둔한 작자들에게 다시 한번 일깨워줄 뿐이다! 향란단! 발검!”
“윤국단도 발검합시다. 한 뼘의 땅도 한 방울의 피도 내어주지 않는 겁니다?”
챙! 챙!!!
채채챙!!!!!
그에 사방에서 날붙이들이 요란하게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어지러이 검광을 뿌려대기 시작했고.
“커흑!”
“으아아앜!!!”
저편에서 단말마가 들려오는 가운데.
여러 곳에서 부상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에 청죽단을 중심으로 한 별동대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당장 전황이 우리에게 유리해 보이지만, 저게 놈들의 주전력이 아닐 거야. 낭중마군의 수법은 하급 교인을 앞세워 여기저기 두드려보다가 약해 보이는 곳에 주력을 밀어 넣거나 꾀어내는 술수를 부리는 식이야. 방심하면 안 돼. 은하성, 우소릉.”
“예, 형님!”
“네! 언 형!”
“방금 내가 한 말 돌면서 전하고.”
나는 사방이 내려다보이는 본관에서 별동대의 인력을 지휘하기 시작했는데.
“용운 님! 내사급 마두가 있는지, 윤국이 있는 남문이 가장 몰려 있어요.”
“나도 봤소. 제갈설지, 정현 각각 조를 이끌고 가서 도울… 필요가 없겠군. 총장님이 가셨다. 너희는 일단 대기하고, 경룡이 형이랑 서진효 선배가 일개 조만 이끌고 가서 부상자 좀 양호처로 데려오십시오.”
“알겠네.”
“용명아, 너는 서편으로 가서 재혁 숙부한테 적이 도망친다고 해서 쫓아가선 안된다고 한 열 번 정도 말하고 와. 아니다, 그냥 거기 붙어서 계속 말해.”
“예! 형님!”
나름의 준비가 빛을 발한 것인지.
정무학관의 방어선은 제법 공고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채챙! 채채채채챙!!!
특히나 향란단의 분전이 대단했다.
촤악! 촤악!!!
촤아악!!!!
향란진이라 이름 붙은 합격진을 토대로, 맡기로 한 동쪽 방어선을 도화지 삼아 검과 피로 난을 치듯 마교의 군세를 헤집어 버리고 있었는데.
사면의 방어선 중 가장 빠르게 적을 줄여나가고 있었다.
‘명문이니, 혈통이니 평소에 하는 짓들이 고깝긴 하지만. 명문 대파에서 조기교육을 거친 녀석들이니까.’
어린 시절부터 잘 먹고 잘 큰 놈들이 향란관에 들어가 익힌 합격진과 자신들이 백도 무림의 기둥이라는 자신감이 저런 위력을 내는 모양이었다.
‘저런 게 또 백도무림의 저력이긴 한데 말이야.’
뭐, 아무튼.
전황은 우리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지금 이쪽은 마교도를 잡아 죽이는 게 목표가 아니라 생도들과 방어선을 지켜내는 게 목적이라 전력들이 수세에 집중하고 있어 백중세 양상을 띠지만.’
시간은 우리 편이었다.
‘곧 지원군이 올 테니까.’
본인들의 장원과 도관 그리고 권역을 책임져야 하니 대병력을 보낼 수야 없겠지만, 무당과 제갈세가 그리고 기타 백도의 방파들이 지원군을 보내올 터.
‘그때까지만 버티면 대역전의 기회가 온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그때.
기숙사가 있는 방면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아니 저 인간들이?’
그러자 기숙사가 위치한 곳과 가까운 동편을 지키던 향란관의 방어선이 크게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향란관 쪽 생도들이 치솟는 불길에 자리를 지키라는 명을 망각한 모양이었다.
‘하여간에 이뻐할 수가 없어요.’
분명히 마교 놈들이 불을 낼 것이니 신경쓰지 말라고 몇 번이고 말해 주었는데.
저 지랄이 나네.
저게 바로 자신감이 독이 된 경우였다.
‘머저리들 같으니.’
하나, 저런 놈들이 뒈지고 뒈지다 보면 결국 우리의 패배가 되는 것이었고.
창량 교수 혼자 저놈들을 구하려다 잘못해서 당해버리면 그 순간 전황이 나락으로 가게 되는 것이었다.
“당옥기, 남궁윤. 나랑 같이 동편으로 간다.”
그런 내 말에 남궁윤이 눈을 크게 뜨며 중얼거렸다.
“…지금 고립된 향란관 생도들을 구하러 가자는 거냐?”
“보면 몰라? 너는 학과 성적도 좋은 놈이 가끔 멍청하게 굴 때가 있더라.”
“…머, 멍청. 그런 게 아니라. 우리 향란관은 너한테 좋은 소리라고는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직접 구하러 가겠다고 나서니까 말이다.”
“그거랑 관계없이 저 새끼들은 무조건 살려야 해.”
“…역시 너는!”
“살려서 내 손으로 죽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