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7화. 우리 집에 왜 왔니 (3)
내가 고립된 향란단의 인원을 지원하러 가겠다는 말을 한 그때.
제갈설지가 질문을 해왔다.
“용운 님, 잠시만요. 지금 그렇게 셋만 동편으로 가시겠다는 건가요?”
“그렇소만?”
“…그러니까 일단 현장으로 가서 향란단의 인원을 휘하에 넣고 부리려는 생각이신 거죠? 제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나요?”
“맞소.”
그 질문에 답을 하자.
이번엔 은하연이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맡은 바 자리를 지키라던 대원칙도 제대로 지키지 않은 사람들이 언 공자의 통제를 따를까요?”
“따르지 않을 가능성이 크겠지. 하여 총장기(總長旗)를 가져갈 생각이오.”
총장기는 단순한 깃발이 아니었다.
그 자체로 경혜 사태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런 내 말에 은하연이 고개를 끄덕였고.
“아! 총장기를 가져가시면 아무리 향란단 사람들이 고집불통이라도 따를 수밖에 없겠네요?!”
정현도 한마디를 보탰다.
“그러고 보면 총장님께서 깃발을 저희에게 맡긴 이유가 단순히 본부를 내세우는 데 쓰라는 이유만은 아니셨을 겁니다. 정해놓은 방위 계획을 지키지 않은 향란관 생도들을 구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니, 문제 될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한데, 제갈설지가 뭔가 석연치 않은 부분을 느꼈는지 한마디 말을 덧붙이려 했다.
“용운 님, 그런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전음으로 그녀의 말문을 막았는데.
[총장기를 옮겼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일에 관해서라면, 지금은 입 밖에 낼 때가 아니오.]
[아, 용운 님도 예상하고 계셨군요? 확실히 이건 입 밖으로 잘못 내면 산통이 깨지긴 하겠네요. 한데 그러면 유인을…?]
아니나 다를까 제갈 설지는 내 계획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급박한 사안이었는데, 자세한 설명은 생략해도 되니 잘된 일이었다.
하여 나는 곧바로 본부를 맡긴다는 말을 꺼낼 수 있었다.
“본부를 잘 좀 맡아주시오. 은 소저와 제갈 소저가 머리를 맞댄다면 ‘적절한 대처’를 해줄 것이라 믿소.”
두 사람에게 본부를 맡긴 나는 남궁윤과 당옥기에게 마라호초탄을 챙기라는 말을 전했다.
“두 사람은 나랑 같이 마라호초탄이 든 상자 하나씩 좀 챙기자.”
“알겠어.”
“알았다.”
그렇게 준비를 마친 우리 셋은, 마지막으로 총장기를 접어 챙겨 문제가 터진 동편 전장을 향해 내달렸다.
탓! 탓! 탓! 탓! 탓!
도착한 동편 전장의 후방에 세워 놓은 막사.
이곳에서는 우리가 당도했다는 것도 모르고 고립된 향란관 생도들을 구하기 위한 긴급회의가 한창이었다.
“당장은 남궁정호 교수님과 사번대가 분투를 해주고 있지만, 점점 우리와 멀어지고 있다. 빨리 구출해야 한다.”
마교에 대처하기 위해 급히 편성한 조직상 사감 교수는 단주, 출신 교수들은 대주, 자치회 간부들은 부대주가 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긴급회의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들을 들어보니.
‘대주 급인 교수님들은 없군.’
아마도 교수님들이 전방에서 마인들을 상대하고 있는 동안, 부대주 급인 자치회 간부들이 세부 사항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창량 교수님과 일번대가 길을 열 것이다. 하면 우리 이번 대가 그 길을 확보하고 삼번대가 방어선을 유지한다. 방어선이 좀 얇아지긴 하겠지만 신속하게 사번대를 구출하면….”
한데, 듣고 있자니 그대로 두면 구출 성공은 커녕 희대의 개삽질을 할 것 같았다.
‘저러다 잘못되면 동쪽 방위선 전체가 무너지지.’
나는 곧바로 남궁윤에게 막사의 입구에 있는 휘장을 걷어달라 말했다.
“궁윤아. 저것 좀 걷어봐.”
“…알겠다.”
그리고 안에서 진행되고 있던 회의에 제동을 걸었다.
“멈추시죠.”
그에, 상석에 앉아 있던 향란관의 자치회장 매진악이 인상을 구기며 입을 열었다.
“…남궁윤에 당옥기, 그리고 언용운? 너희가 여긴 어쩐 일인가?”
“방어선을 지키라는 명을 어긴 향란단의 사번대는 그렇다 치고, 왜 선배님들은 본부에 보고도 없이 마음대로 구출 계획을 짜고 있으십니까?”
“사번대가 방위 계획을 지키지 않고 준동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궁지에 몰린 동료를 버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런 매진악을 향해 나도 똑같이 인상을 구겨주었다.
“왜 보고를 안 하셨냐니까 뚱딴지같은 이야기를 하시네요.”
“급박한 상황 속에서 모든 것을 일일이 보고할 수는 없지. 자네가 기지라고 행한 일들도 일일이 보고를 받은 것은 아닐 텐데?”
“그럼 지금이라도 하십시오. 급박한 상황이라 이렇게 본부가 직접 옮겨왔습니다.”
그런 내 말에 매진악이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이봐 언용운 후배. 보아하니 그렇게 세 사람이 덜렁 온 것 같은데, 어찌 본부가 옮겨왔다고 말하는가? 이쪽은 다섯 분의 교수님이 계신다. 편제상 별동대가 향란단보다 위에 있다고 하여 자네가 우리 위에 있는 게 아니야. 총장님을 모시고 오던지 그에 준하는….”
그런 매진악의 말에.
나는 챙겨온 총장기를 꺼내 깃대에 매달았다.
그리고 그 기를 어깨에 비스듬히 걸친 뒤 입을 열었다.
“뭐, 이런 거 말씀이십니까?”
“…….”
그런 내 모습에 말문이 막혀버린 매진악.
나는 그를 향해 따져 물었다.
“향란단의 매진악 부대주님. 이제 보고를 해주시겠습니까? 왜 독단적으로 구출 계획을 짜고 있었는지를요?”
그것으로 끝이었다.
매진악은 뭐 씹은 표정을 짓긴 했지만, 그러면서도 내 요청에 제대로 응답했다.
“…창량 교수님께서 본부도 여력이 없을 것이라 하셨고, 사안이 급박해서 향란단이 단독 작전을 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말씀하신 대로 사안이 급박하니 자잘한 실책에 관한 것은 나중에 이야기하고, 지금부터 구출 작전은 제가 지휘를 하겠습니다. 이의 있으십니까?”
“…이의. 없다. 본부의 뜻에 따르겠다.”
총장기의 효과는 강력했다.
* * *
매진악을 필두로 한 향란단의 부대주급 인사들은 내가 자신들을 지휘하는 것을 인정했다.
그렇게 향란단의 지휘권을 장악한 나는 새로운 구출 작전을 하달했다.
“일번대와 이번대는 기존의 자리에서 본래의 역할을 맡을 것입니다. 사번대의 구출은 본부에서 나온 저희 세 사람과 삼번대가 맡습니다.”
다만 내 작전에 매진악이 의문을 표하긴 했다.
“우리는 백 명이 넘는 인원을 동원하려고 했는데, 그 절반도 안 되는 사십 명 남짓한 인원으로 하겠다고?”
향란단의 삼번대는 당옥기의 오빠인 당준기가 부대주로 있는 대였다.
나는 긴 설명을 할 것 없이 당준기를 불러냈다.
“당준기 선배가 나오셔서 남궁윤과 당옥기가 짊어지고 온 함에 든 물건을 확인해 보십시오.”
걸어 나온 당준기는 우리가 가져온 물건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내 계획을 파악했다.
“마라호초탄? 독공을 쓰자는 건가?”
독은 쓰기에도 비싸고 대처하기에도 비쌌다.
한 줌의 맹독을 만들어 내려면 엄청나게 많은 독물을 갈아 넣어야 했고.
독공에 대처하게 해주는 방편들도 여간 비싼 것이 아니었다.
불침의 몸을 만드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피독주만 해도 비쌌다.
한데, 마교 놈들의 군세 중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자들은 잠폭단의 효험을 본 흑도인이거나 영약의 부작용으로 괴인이 된 자들이었다.
마교가 그런 놈들까지 피독주를 보급했을 리 없으니.
기실 마교의 흑도병이 쥐라면 독공은 쥐약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부로 독공을 사용할 수 없는 이유는 딱 하나.’
“하나, 적아가 뒤섞인 상황 아닌가?”
당준기의 말처럼 아군도 당할 수 있다는 점이 때문이었다.
하나, 이번에 고립된 사번대와 마라호초탄에 한해서는 그 점이 딱히 문제 될 게 없었다.
‘여기 모인 부대주들이 이끄는 향란관 생도들이 그나마 사수하라는 자리는 지켰다면, 사번대는 그걸 어길 정도로 아집과 쓸데없는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놈들이라는 것이니까.’
마라호초탄의 맛을 좀 봐도 싼 놈들이었다.
“에이, 마라호초탄이 어떻게 독입니까? 그냥 눈물이랑 콧물이 조금 나는 향일 뿐이죠. 안 그러냐 당옥기?”
그러니까 정당히 우기고.
“…어? 뭐, 그렇다고도 볼 수 있으려나?”
“옥기 너. 저 녀석에게 완전히 물이 들었….”
또 이거보다 나은 대안이 없음을 상기시키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게 분류상으로 독이든 아니든 여럿 죽고 다칠 것 같은 작전보다는 이쪽이 낫지 않겠습니까?”
더 이상의 반론은 없었다.
내 작전대로 다른 부대주들은 본래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돌아갔다.
저마다 피독주를 꺼내 문 삼번대는.
치지직-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매캐한 연기를 내뿜기 시작한 마라호초탄을 우리와 함께 던져 넣기 시작했다.
“켘! 커흐흨!”
“어흨! 어흐흐흨!”
그로 인해 펼쳐진 눈물 콧물의 도가니 속에서 사부님께서 한마디를 해오셨다.
- 마교의 졸개 놈들과 향란관의 청개구리들에게 동시에 참교육하다니, 이거야말로 일석이조가 아니더냐?
‘일석이조라뇨. 엄연한 구출 작전입니다.’
- 음? 근데 저기 저놈은 그 운혁인가 뭔가 하는 놈 아니냐? 만날 정현에게 시비를 걸던 무당파의 말코 놈 말이다.
눈물과 콧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녀석들 중에 낯이 익은 말코 놈이 보였다.
‘오. 맞는데요?’
그러고 보니 아까 회의장에 운혁 일당이 없긴 했다.
‘매진악의 기를 꺾는다고 정신이 그쪽에 가 있었는데 저 인간이 향란관의 공보부장이었지?’
대주는 남궁정호, 부대주는 운혁으로 이루어진 향란단의 사번대.
‘왜 기어들어 가서 고립되셨는지 알만하구만.’
나는 이를 악다문 채로 운혁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감정을 실어 뒷목을 내려쳤다.
빠악!!!
“케흑?!”
그렇게 운혁을 비롯한 향란관의 사번대 대원들의 덜미를 하나둘 잡아채며,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송길준. 보고 있나?’
너 이런 거 못 참잖아?
남자답게 드루와 보시지?
* * *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전황을 응시하며 낭중마군 송길준은 턱을 매만졌다.
‘이득을 볼 수 있는 틈이 잘 보이지 않는데, 굳이 주력을 투입할 이유가 있나?’
계속해서 지지부진한 공방전이 이어진다면, 무당파와 제갈세가의 지원군이 정무학관 쪽에 합세할 터였다.
‘흠. 그럼 이쯤 하여 물러나야 하는가?’
사실 최초의 계획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는 성과이긴 했다,
‘계획에 들인 시간과 비용을 치면 기실 손해를 본 꼴이지.’
하나, 그래도 백도무림의 요람이라 불리는 정무학관에 큰 흠집을 냈다.
‘사마외도가 넘어선 일이 없다고 자랑하던 외벽과 기관진식을 무용지물로 만들었고, 놈들이 자랑으로 삼는 사대기숙사를 불살랐지.’
이 정도만 되어도 약간의 소문을 곁들이면 무지몽매한 양민들과 흑도 놈들의 뇌리엔, 정무학관이 무너졌다고 인식할 터였다.
‘백도 무림의 힘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알게 될 것이야.’
그럼 자연히 놈들이 주도하는 질서에도 금이 갈 것이었고.
그렇게 되면 천마신교가 중원에 뿌리내릴 수 있는 토양이 생성됨과 동시에, 백도무림 내부에 자중지란이 일어날 터였다.
‘더욱이, 큰 피해를 입힌 게 아닌 만큼 백도무림이 똘똘 뭉치는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
그 와중에 주력이라 할 수 있는 흑선궁의 병력은 피는커녕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건재한 상황.
대략 육십 년 만의 기지개로는 그리 나쁘지 않은 성과였다.
‘나쁘지는 않은데.’
아쉽기는 했다.
본디 중원 침공의 화수분이 되어주어야 했을 태원상단을 얻지 못한 상황에선, 좀 더 큰 이득을 보거두고 싶었던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나, 여기서부터는 모험이다.’
외벽과 기관진식이 무용지물이 되면 혼비백산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방비가 제법 꼼꼼하게 되어 있었고.
주공과 조공의 흐름을 쉼 없이 바꾸고 있는데, 그 대처가 깔끔했다.
‘아슬아슬하게 흐름에 대처해내는 별동대 같은 놈들이 있어, 저게 마방연인가? 그나마 향란관 놈들이 지키고 있던 동편이 이쪽의 수에 말려들었는데. …흠. 동편의 싸움이 어찌 되는지 보고 일의 진퇴를 정할까?’
고립된 향란관의 인원이 송길준의 눈에는 바둑판 위의 대마로 보였다.
‘저걸 따내면 만형을 풀어놔도 되겠고, 그렇지 못한다면 퇴각을….’
송길준의 뇌리에 그런 생각이 스치고 있던 그때.
동편의 전장에서 정무학관의 총장기가 불쑥 솟아올랐다.
‘총장기?’
갑작스레 동편에서 솟아 나부끼는 총장기에.
송길준의 미간이 자기도 모르게 좁아졌다.
‘경혜 그 비구니는 얼굴이 곧 증표일 테니 굳이 저걸 내보일 필요가 없다. 하면 그 권위를 빌려 쓰는 누군가가 저곳에 있다는 이야기인데?’
그 순간.
정파 놈들의 방위선에서 뚝 떨어져 나와 흑도병에게 둘러싸여 고립돼있던 향란관 인원들의 틈바구니에서 희뿌연 독연 같은 것이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흑도병은 물론이오, 정파의 핏덩이들까지 주저앉아 콜록거리기 시작했다.
그 광경은, 송길준의 얼굴에 파안대소가 걸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 하하. 하하하하하. 정파를 자처하는 놈들이 저런 식으로 독공을 써?”
언용운이라는 놈이 저곳에 있는 모양이었다.
“진짜 물건이구만. 이거 아무래도 여기서 죽이든 사로잡든 해야겠는데?”
송길준의 눈이 호선을 그으며 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