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198화 (198/444)

제198화. 우리 집에 왜 왔니 (4)

- 가만 보니 주변보다는 먼 곳을 더 경계하고 있구나? 뭘 기다리는 것이냐?

‘마교의 주력이 이리로 오지 않을까 해서요.’

- 흠. 이 전장을 바둑판이라 치면, 향란관의 사번대 놈들이 대마(大馬)에 해당했다. 사번대가 전멸을 했다면 모를까, 용운이 네 기지로 모두 구출한 상황인데 녀석들이 그런 무리수를 두겠느냐? 낭중마군이라는 자의 일 처리 방식이 상당히 신중한 것 같던데?

‘제가 꾀를 냈거든요. 장담은 못 하지만 높은 확률로 주력을 밀어 넣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 …꾀? 가만, 총장기를 가져온 것이 단순히 향란관 놈들을 찍어 누르기 위해서만은 아니었구나? 마라호초탄을 사용한 방식도 그렇고, 사실상 미끼를 자처한 것 아니냐?

‘예. 정확하십니다.’

- 굳이? 전황이 정무학관 쪽에 유리하다 하지 않았더냐?

‘그랬지요.’

하나, 전황이 정무학관이 쪽에 유리하다고 본 이유는 이쪽의 목표가 지원군이 오기 전까지 최소한의 사상자로 버티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본부에서 양호처로 옮겨오는 사람들을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있을 때만 해도 중상자로 분류되는 녀석은 있어도 일단 죽은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래서 우리 쪽이 유리하다 말한 것이었다.

‘경혜 사태를 비롯한 학관의 운영위원들의 지론이 생도를 우선한다는 것이니, 정무학관 입장에서는 잘 싸우고 있는 게 맞지.’

하지만 이 싸움을 평가하는 기준을 백도무림과 신진 마교의 전초전이라고 본다면?

‘그럼 조금 애매해지지.’

말이란 것이 본디 퍼지면서 살이 붙기 마련이다.

정무 학관의 외벽이 내려앉고 사대기숙사가 불탔다.

이 소식이 몇 다리만 걸쳐 넘어가도 백도무림의 요람이 마교에게 유린당했다는 식으로 바뀌어 퍼져나갈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당장 전투는 우리가 이겼어도, 천하의 주도권을 놓고 펼쳐질 정마 간의 전쟁에선 마교가 판정승을 가져가게 되는 것이었다.

‘교활한 토끼는 빠져나갈 굴을 세 개는 파 놓는다더니, 이 판국에서도 마교가 승리를 거두는 각이 살아있어?’

나로서는 그 점이 못내 아쉬웠다.

심어 놓은 간자를 찾고.

숨겨 놓은 안가를 찾고.

놈들이 흩뿌려놓은 실마리를 줍고 주워 여기까지 왔는데.

‘그 결과가 마교의 판정승으로 끝난다니.’

아까웠고.

또 원통했다.

‘과거 천하를 오시하셨던 사부님 같은 강함이 내게 있었다면….’

호원단철장에서 낭중마군 송길준과 흑선마군 만우를 마주쳤을 때.

놈들은 저승길을 떠나게 되었을 테니까.

‘처한 상황마다 최선의 선택을 해왔다고 자부하지만, 아까운 것은 사실이야.’

근데 이 아까움은 나만 느끼는 것일까?

아닐 것이다.

학관 밑에 굴을 판다는 기상천외한 계획이 끝마무리 단계에서 완전히 헝클어졌다.

말 그대로 다 된 밥에 재가 뿌려진 상황.

송길준도 내심으론 아쉽고 원통할 것이다.

물론, 놈은 그런 상황에서도 퇴각한다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녀석이긴 했다.

하여, 기왕지사 동쪽 방위선이 흔들린 김에 나는 한가지 꾀를 냈다.

‘나를 미끼로 송길준의 다음 수를 끌어내 본다.’

송길준은 표면적으로 들어난 학관의 사정에 대해 어지간한 것은 다 알고 있을 터였다.

특히나 마방연이라는 조직이 이쪽에 있다는 것과 향란관과 청죽관이 견원지간이라는 정보는 습득이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거기다 심율을 통해 정보를 흘리기도 했다.

‘이 상황에서, 눈에 띄는 병력이동 없이 총장기만 옮겨 세운다면?’

총장기라는 상징적인 물건을 차지해야겠다는 생각을 넘어.

마방연을 지휘하고 있는 나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송길준의 머릿속에 들 것이고.

그렇다면 높은 확률로 퇴각 대신 더 큰 성과를 내기 위한 움직임을 보여오지 않을까 했다.

“어? 기숙사 쪽에서 마교 놈들의 지원 병력이 오는 거 같은데?!”

“…같은 게 아니라 분명히 오고 있다. 두 자루 도끼. 언용운 네가 말했던 흑선마군이라는 자가 선두에 있는 거 같군?”

“캭! 그 말이 그 말이잖아 이 답답아!”

그런데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

그에 내 입꼬리가 귀에 걸리며 웃음이 새어 나왔는데.

“월척이 미끼를 물었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당옥기도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아무튼. 이거 언용운 네가 또 무슨 사기 같은 거 친 거지? 무슨 계획이 있는 거지 그치?”

“계획은 있지.”

“휴. 그럼 안심해도 되겠….”

“근데 그 계획에서 살아남는 건 전적으로 우리 몫이다.”

“?”

“얼빠진 표정은 그쯤하고 일단 내 뒤로 빠져봐. 새로 방어진 좀 짜게.”

그런 내 말에.

남궁윤이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여기서 말이냐? 독을 마시지 않은 향란관의 병력은 다 뒤쪽에 있지 않나?”

“향란관 병력은 내 밑에 들어오는 것보다 창량 교수나 매 회장 같은 사람이 지휘할 때 더 큰 힘을 내. 그러니까 그대로 둘 거다.”

이어진 내 답에 정신을 차린 당옥기도 입을 열었다.

“그, 그럼 뭘 어쩌려고?”

“내가 복원한 언가의 제혼술이란 건 사실 발동 대상이 강시에게만 국한되는 게 아니거든.”

그런 녀석들의 물음을 뒤로하고.

나는 흑도인들의 시신이 가득한 주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일어나라.”

* * *

같은 시각.

사방이 내려다보이는 본관에 차려진 별동대 본부.

“어? 어어어어? 은 누님! 제갈 누님! 동편에 못 보던 마교의 군세가 출현했는데요?!”

우소릉의 외침에 동쪽 방위선에 몰려들기 시작한 마교의 주력이 확인됐다.

그에 정현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질이 좀 다른 녀석들 같습니다. 한 개 대가 과신하여 고립돼서 그렇지, 가장 잘 싸우고 있었던 향란관의 방어선이 속절없이 찌그러지고 있습니다.”

그에 제갈설지가 입을 열었는데.

“용운 님의 생각이 딱 맞아떨어졌네요. 이러면 동쪽 방어선의 싸움이 이번 사태의 승패를 결정짓게 될 거예요.”

그런 제갈설지의 음성에, ‘적절한 대처를 부탁한다’라는 말 외에는 달리 들은 바가 없던 은하연이 입을 열었다.

“언 공자의 생각이라면 따로 나누신 이야기가 있으신 건가요? 구체적인 계획을 알아야 대처를 할 것 같은데요?”

“아, 따로 계획에 관한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니고. 아까 총장기를 챙겨가실 때, 그런 걸 챙겨가 세우면 자칫 적의 표적이 될 수 있음을 짚어드리려고 했는데 이미 알고 계시더라고요.”

“…그러니까 언 공자께서 마교의 주력 군세를 끌어내 보시려고 미끼를 자처하셨다는 거군요?”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에 정현과 은하성이 인상을 구기고 나섰다.

“…산서에서도 그러시더니 또 그런 행동을 하셨단 말입니까? 제갈 소저는 이번에도 알고서 가만히 계셨고요?!”

“용운 형님은 맨날 이런 순간에선 사람을 떼놓는다니까요! 정현 도장은 그나마 산서에 따라가기라도 갔지!”

일말의 야속함이 섞여나온 두 사람의 음성에.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제갈설지가 짐짓 단호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용운 님과 나눈 이야기가 있긴 하네요. 떠오른 생각을 입 밖에 내지 말라고 입단속을 하셨어요. 미리 말을 했으면 저희가 본부의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었을까요, 정현 님?”

“근처에 병력을 보내놓는 정도는 대처는 할 수….”

“그럼 적의 주력이 끌려 나오지 않았을걸요?”

“…….”

“그리고 동편에서 사태가 벌어져서 그렇지, 다른 쪽에서 치고 들어올 확률도 있었어요.”

제갈설지의 논리적인 반박에 두 사람은 더는 입을 열지 못했다.

은하연이 말을 보탠 건 그 순간이었다.

“제갈 소저의 말이 맞아요. 두 사람 모두 서운해할 거 없어요. 산서 때와는 상황이 다르죠. 오히려 언 공자께서 우리를 믿으니까 이런 계획을 실천에 옮긴 거라 생각해요.”

“…….”

“…….”

“어차피 사방의 전력중 어느 곳도 동편으로 덮어놓고 몰 수가 없어요. 결국 저희가 해야 합니다. 적절한 대처를 해달라는 그 말이 사실상 저희에게 목숨을 맡기겠다는 말과 다름없는 거죠.”

“하연님의 말씀이 맞아요.”

그렇게 정현과 은하성을 가라앉힌 은하연은 곧바로 지휘를 시작했다.

“우소협은 지금 즉시 남쪽으로 가세요.”

“가서요?”

“남쪽 방어선이 마교의 군세를 밀어내고 있는 것을 보니 고비는 넘긴 모양입니다. 하나, 언제 상황이 바뀔지 모르니 가서 현장을 확인하고 괜찮다 싶으면 총장님을 모시고 동편으로 가세요. 다른 생도들이 동요할 수 있으니 자세한 사정은 동편에 다 와 갈 때 말하고요.”

“예!”

“하성이는 북쪽에 계신 노삼 교수님한테 가서 똑같이 하고.”

“옙!”

“나머지 청죽단은 일개 대만 남고 나머지 모두 동편으로 갑니다. 진 회장님이랑 정현 도장 그리고 제갈 소저가 이끌어주세요. 저는 본부를 맡겠….”

그런 은하연의 지휘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이때.

제갈설지가 의견을 제시했다.

“아뇨. 동편으론 하연 님이 가세요. 본부는 제가 맡겠습니다.”

“네…? 제갈 소저가 저보다 무위가 더 높으시잖아요?”

그간 마방연에서는 늘 제갈설지와 티격태격해온 은하연 이었지만, 기실 누구보다도 제갈설지를 인정하고 있는 사람도 은하연이었다.

하여, 제갈설지를 동편으로 배치한 것이었지만.

상대방을 높게 평가하고 있는 것은 은하연만이 아니었다.

“맞아요. 하지만 청죽관의 힘을 더 잘 끌어낼 수 있는 분은 하연 님이니까요.”

“…….”

“이건 개인이 어찌할 수 있는 싸움이 아니라 집단의 힘이 필요한 상황이에요. 저보다는 하연님이 가시는 게 맞아요.”

“…일리가 있네요. 그렇게 하죠.”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향해 짧게 미소를 짓고는, 맡은 바를 수행하기 위해 흩어졌다.

* * *

크어어어어!

내가 일으켜 세운 시체 병사들은 흑선마군 만우가 이끄는 마인들의 걸음을 잠시 멈춰 세우는 것에는 성공했다.

하나, 딱 거기까지였다.

‘마음먹고 시체 군단을 계속해 일으키면 아주 약간은 더 시간을 끌 수 있겠지만.’

만우라는 녀석과 내사 격으로 보이는 노인네들이 병장기를 휘저을 때마다 시체들이 토막이 나버리는 상황에서 미련하게 내력을 탕진할 수는 없었다.

‘일으켜 세운 녀석들만 유지하고, 검을 쓸 준비를 해야겠어.’

하여, 나는 향란단의 방어선이 적절히 가다듬어진 시점에서 시체 병사를 늘리는 것을 멈추고 회한에 검사를 감았는데.

더 이상 새로 일어나는 시체 병사가 없자, 마인들은 기다렸다는 듯 날뛰기 시작했다.

“지친 모양이군!”

“하기야, 이런 술법이 끝도 없이 가능할 리가 없지! 돌파한다!”

나는 그런 놈들이 더 가까이 다가오길 기다린 뒤.

당옥기에게 신호를 보냈다.

“온다.”

픽! 픽!

피피피픽!!!

신호에 맞춰 흩뿌려진 당옥기의 암기는 제법 많은 마인들이 피거품을 물며 쓰러지게 만들었다.

“컥!”

“케흑!?”

하나, 그중 선두에 있던 노마두는 날아든 암기를 여유롭게 퉁겨내고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티티팅!

“끌끌끌. 오냐, 왔느니라. 네 놈이 언용운이로구나? 본교의 이름에 멸절이란 글자를 가져다 붙인 그 혓바닥을 썰어내면 과연 몇 조각이 나오는지 내 오늘 확인을 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전에 없던 살기가 우리를 휘감기 시작한 이 순간.

창량 교수가 난초문이 새겨진 새카만 장포 자락을 휘날리며 허공을 밟아 내려서더니.

휘리리릭-

피 묻은 검을 털어내며 입을 열었다.

“썩어가는 몸을 이끌고 묫자리나 찾아다닐 것이지, 감히 정무학관을 넘봐? 늙은 마두는 더 입을 열지 말라. 단강구의 공기가 아깝다.”

“화산백미. 창량. 하긴, 네놈들은 장유유서를 따지는 종자들이지. 순번이 그러하다면, 네놈부터 먼저 보내줘야겠구나?”

“공기가 아까우니 입을 열지 말라 하였을 텐데?”

챙! 챙!!

두 사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흐드러진 매화를 뿌려내는 창량의 검과 사특한 기운을 뿜어내는 노마두의 검이 정신없이 섞이기 시작했다.

채채채채챙!!!

그런 창량의 싸움을 돕고 싶은 마음이야 간절했으나, 그럴 여유는 없었다.

노마두가 시체 벽을 가르고 튀어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들소처럼 시체벽을 헤치고 나타난 흑선마군 만우가 쌍도끼를 휘둘러왔기 때문이었다.

쌔애애액!

쌔애애애액!!

그런 만우의 도끼가 펼쳐내는 투로 중 한 곳에 나는 회한을 끼워 넣으며 급히 입을 열었다.

챙!

“남궁윤 네가 왼쪽.”

“알았다!”

채앵!!!

“옥기 너는 다른 놈들이 방해하지 못하게 견제하면서 이쪽저쪽 거들어! 팀킬 조심하고!”

“팀? 그게 뭔데?!”

챙!!!

“같은 편한테 독침 쏘지 말라고!”

“아!”

채챙!

채채채챙!!!

그렇게 순식간에 십여 합을 섞어내고 나자.

직접 겪은 마군이라는 존재에 충격을 받았는지 남궁윤이 경악하며 중얼거렸다.

“…비슷한 연배 같은데 나와 언용운을 동시에 상대해?”

하나, 정작 낭중마군 만우는 그런 남궁윤에게는 관심이 없다는 듯.

나를 향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나를 만난 적이 있나? 눈동자가 낯이 익은데?”

뭐, 슬쩍 스친 적이 있긴 하지.

이쪽은 변장 중이었지만.

‘진짜 짐승 같은 촉이네, 살짝 스쳤는데 그 느낌이 남았어?’

굳이 답을 해줄 필요는 없어서 나는 가만히 숨을 고르고 있었는데.

그러는 사이 만우는 혼잣말을 이어가더니.

“…흠. 분명 어디서 봤는데. 뭐,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근데 이거 살려가기가 힘들겠는데? 낭중도 살려올 수 있으면 살려오라고 했으니, 그건 죽여도 된다는 거겠지?”

다시금 도끼를 고쳐잡으며 땅을 박찰 태세를 취했다.

그러자, 만우의 기세가 한층 더 흉포해졌다.

하지만, 해볼 만했다.

“언 소협!”

이 순간.

우리 쪽에 정현이 합세했으니까.

나는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만우야, 우리 집에 왜 왔니?”

만우야 뭐하냐?

내가 선창을 했으면 너는 ‘뒈지려고 왔단다 왔단다.’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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