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5화. 어디로 (2)
최초에 학관에서 시행되었던 화생방 훈련은 백독단을 섭취한 이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반면, 향란관 올빼미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화생방 훈련은 백독단 섭취 없이 그저 마라호초탄의 농도를 극도로 낮춘 상태에서 행하는 것이었다.
“쿨럭! 쿨럭! 당옥기 너는 향란관 녀석이… 왜 여기서?!”
“누가 교관의 이름을 부릅니까아!”
농도를 극도로 낮췄다 하더라도 독은 독.
혹시 모를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마라호초탄을 피우는 현장에는 즉각적인 증상 확인과 조치가 가능한 당옥기가 들어가기로 했다.
덜커덕-
“컥! 커흐흑!”
“물, 누구 물 좀 주게! 얼굴이 녹는 것 같아! 빨리 이걸 씻어내야….”
자연히 나와 다른 언동생들은 실습을 마치고 나온 생도들을 진정(?)시키는 역할을 맡게 되었고.
“안 녹습니다! 본 훈련에 사용된 독에는 그런 효과가 없습니다! 혹여라도 얼굴에 손을 댔다간 더 큰 고통을 맛보게 될 겁니다!”
“쿨럭! 그, 그럼 어떻게?!”
“날려버리는 게 최선이니 방금 화생방에서 나온 올빼미들은 지금 즉시 본 교관 앞에 열을 맞춰서 팔 벌려 높이뛰기를 실시합니다! 실시!”
“커흑! 시, 실시!”
그 역할을 한창 수행하던 때.
경혜 사태 밑에서 일을 보는 대학원생 선배님이 찾아와 말했다.
“자네는 항상 바쁘구만.”
“일복이 많나 봅니다.”
“…일 뒤에 복이라는 말이 붙어도 되는 걸까?”
그 말을 하는 선배님도 눈 밑이 시커먼 게 어지간히 갈리는 모양이었다.
“한데, 어쩐 일이십니까?”
“총장님께서 자네를 좀 보자고 하셨네. 자네가 편한 시간에 찾아오라고 하셨는데, 바쁘면 나중에 기별을 주거나 괜찮은 시간을 내게 알려줘도 될 것 같네.”
화생방 훈련은 시작 전에 기강을 잡는 것과 독을 피우는 현장 관리가 중요했는데.
기강은 충분히 잡았고, 저번에 한 번 해봐서 그런지 몰라도 현장관리는 당옥기가 잘하고 있었다.
독을 날리는 일을 감독하는 거야 언동생 중 누가 해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닙니다. 지금 바로 가시죠. 은 소저, 잠시 본관 좀 다녀올 테니 여기 좀 맡아주시오.”
“예, 언 공자! 걱정 마세요!”
걱정하지 말라는 은하연이었지만.
이글거리는 그녀의 눈동자는 나로 하여금 향란관 놈들을 잠깐이나마 걱정하게 했다.
“…….”
뒷일을 언동생들에게 맡겨놓은 나는 곧바로 본관으로 향했다.
그렇게 당도한 총장실에서, 경혜 사태께서 차를 권하며 말씀하셨다.
“언용운 생도도 나만큼이나 바쁠 텐데, 빈니가 시간을 빼앗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총장님 핑계로 좀 쉬는 거죠. 저는 오히려 좋습니다.”
“으흠. 언용운 생도는 한마디를 해도 참 사람 마음을 편하게 해준단 말이죠?”
그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경혜 사태는 작은 목함을 내 쪽으로 미셨다.
“그건 그렇고 이거 받으세요.”
스르륵- 전해진 목함을 열어보니 언젠가 마주한 적 있는 금색 환단이 보였다.
“이건?”
“아미파의 보리심환이에요.”
아미파의 보리심환.
입학했던 시점에 장학생에 선정되며 받은 적 있던 영단이었다.
“언용운 생도가 세운 공이 작지 않으니 크게 치하를 해야 마땅하나, 다친 사람이 많다 보니 공연히 공을 치하하고 상을 내릴 수가 없는 형국이라 어영부영 넘어가게 되었어요. 하여 개인적으로나마 언용운 생도를 치하하고자 이렇게 준비를 해봤습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어휴. 뭘 이런 걸 다 준비하셨습니까. 송길준 패거리들을 쫓아낸 날 총장님과 여타 교직원분들께서 저 같은 말학에게 정식으로 예를 표하신 것으로도 충분했는데요.”
- 말은 번지르르한데, 입술에 침을 바르면서 그런 소리를 하니까 이상하지 않느냐! 언행일치를 좀 시키거라! 그 각탁 아래서 손을 비비고 있는 것도 좀 그만두고!
…아, 내가 그러고 있었나?
사부님의 말씀에 자세를 고치고 있자니, 경혜 사태께서 말씀을 이어가셨다.
“그건 학관의 총장으로서 한 거고, 이건 경혜라는 비구니가 개인적으로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하세요.”
“감사히 받겠습니다.”
“감사랄 것까지야. 사실 언용운 생도는 정진 장학생으로 선정되며 이 환단을 받은 바 있으니, 그걸 삼켰다면 그저 내상을 치료하는 약효밖에 없을 텐데요. 빈니가 평생 재물 모으는 일과는 척을 지고 살아와서 줄게 이것밖에 없어 미안하군요.”
경혜 사태는 미안하다는 투로 말씀하셨지만,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입학 당시 받은 보리심환은 천독단을 중화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하니, 이 보리심환만 따로 삼킨다면 오롯이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내력 증진을 꾀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경혜 사태께서 미안해하시는 게, 겸사겸사 마음의 빚이 더 늘어나신 것 같고?’
나도 모르게 또다시 손을 비빌뻔한 나는 군침을 삼키며 보리심환을 품 안에 갈무리했다.
* * *
굵직한 일거리 몇 개를 쳐내고 나자,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그사이 시간이 흘러, 어느새 방학이 코앞이었다.
‘정무학관의 방학은 수강 신청을 한 과목의 기말시험을 끝내는 순간 곧바로 시작이니까.’
슬슬 행선지를 정해야 했다.
하여 밥 한 끼 하면서 그 이야기를 좀 하려고, 언동생들을 단강제일객잔으로 불러 모았다.
운매관 녀석들이 좀 늦는 와중에 화젯거리는 남궁윤이었다.
“하핳! 어떻게 자진해서 언용운이 실시하는 교육에 참여할 수가 있어? 다른 향란관 사람들은 모르니까 그럴 수 있다 쳐도 남궁윤 너는 충분히 겪어봤잖아?!”
“…향란관 전체가 참여한다는데, 빠진 네가 이상한 거다. 당옥기.”
“내가 이상한 거라는데? 너희 생각은 어때?”
“옥기 네가 정상이고 윤 님이 이상한 거지.”
“맞아요, 남궁 형이 이상한 사람이신 게 맞죠.”
“큽. 나는 다른 향란관 생도들은 몰라도 남궁 소협은 이제 인정하기로 했어.”
“거봐 설지도 소릉이도 하연이도 네가 이상하다잖아 남궁윤! 아, 정현 네 생각은 어때?”
“…빈도는 말을 삼가겠습니다.”
“하하핳. 얘가 말을 삼간다는 것 자체가 남궁윤 네가 이상하다는 거잖아! 도가 아니니 어쩌니 안 하곸!”
“…….”
“다들 궁윤이한테 왜 그러냐.”
“…그, 용운 형님은 이름이나 똑바로 불러주시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게 맞지 않을까요?”
그렇게 남궁윤을 두고 다들 웃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소천이 형을 필두로 용명이와 천장호, 운매관 식구들이 객잔 안으로 들어왔다.
“소천이 형, 좀 늦었다? 신체 단련하다 늦은 건가?”
“나 때문에 늦은 게 아니다. 용명이한테 진주에서 서신이 와서, 답장 쓰는 거 기다리느라고 늦었다. 그사이 나는 쪼그려뛰기를 하고 있긴 했지만. 아, 너한테도 한 장 왔다던데?”
“나한테?”
내 되물음에, 용명이 녀석이 소천이 형을 대신해 품에서 서신을 한 장 꺼내 내밀었다.
내민 서신을 봉투에서 꺼내 읽어보니 아버지가 보낸 것이었다.
내가 훑은 편지를 다시 봉투 안에 넣자, 몇몇 언동생들이 마른침을 삼키며 한목소리를 내왔다.
“뭐라 쓰여 있습니까?”
“괜찮다면 방학 동안 진주에 한 번 들러 달라고 하시는데?”
그리고 용명이 녀석은 조금 더 구체적인 질문을 던져왔다.
“형님의 복권에 관한 이야기는 없던지요?”
“그건 없는데?”
그에 용명이 녀석이 급격히 의기소침해지는 가운데, 나는 입을 열었다.
“복권과 상관없이 진주에서 방학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다들 어떻게 생각하나? 사실 오늘 부른 게 그 이야기 하자고 부른 건데.”
내 말에 방금까지만 해도 풀이 죽어 있던 용명이 녀석이 반색하고 나섰다.
“저는 좋습니다! 복권과 상관없다는 말씀까지 해주시다니. 형님께서는 역시 누구보다 언가를….”
그런 녀석의 입을 손사래로 막은 나는 정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저야 달리 갈 곳도 없고. 제가 따라가는 것이 폐가 아니라면 감사히 따라가겠습니다.”
“폐는 무슨, 그럼 일단 정현은 같이 가는 걸로 하고. 소릉이랑 천장호는?”
“저도 정현 도장과 같아요.”
“용명이 이 친구나 소천 형 말을 들어보면 어머님 음식솜씨가 그리 대단하다던데, 거지새끼가 그걸 마다할 수는 없죠.”
“그럼 내 왼편에 있는 사람은 다 가는 거네?”
“용운아, 나는 따로 대답을 안 했다만?”
“형은 애초에 하북사람이잖아.”
“아.”
정현, 우소릉, 언용명, 천장호, 팽소천이 진주행을 결정한 가운데, 나는 오른편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가장 먼저 은하연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마음은 따라가고 싶은데, 사부님과 함께 보타암의 검각에 가기로 결정이 됐어요. 사문에 인사도 드리고 가서 수련도 하자시네요?”
“그럼 그리로 가야지.”
“예, 장강을 통해서 갈 것 같은데 겸사겸사 아버님을 뵙고 강남의 전서구망 구축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고 올게요.”
그렇게 은하연이 이야기를 마치자, 얼결에 시선이 얽힌 남궁윤이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큼. 나는 근래 스스로의 부족함을 느껴서 본가에 가서 수련을 좀 할 생각이다.”
“…어. 뭐, 그래라. 제갈 소저는 어찌할 생각이오?”
“저도 요즘 제 부족함을 느끼는 중이에요. 융중의 본가에서 검을 좀 가다듬으려고요. 학관이랑 지척이기도 하니 겸사겸사 마방연도 챙기고 있을게요.”
“좋소. 당옥기 너는?”
“나는 사천에 가야지? 당가타에 가서 약방의 할아버지들한테 백독단 보여주고 오려고.”
그렇게 은하성을 제외한 모든 사람의 의견을 듣게 되었다.
하성이 녀석이야 굳이 물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안 묻기도 그래서 나는 형식적으로 입을 열었다.
“하성이 너는 나 따라올 거지?”
한데 녀석이 머리를 긁는가 싶더니, 예상치 못한 답을 내놨다.
“저는 남직예로 갈까 합니다.”
그에 나는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왜? 고향 가서 금의환향 놀이라도 하게? 헛짓거리하지 말고 그냥 따라오지?”
“아뇨. 휘주 말고 안경으로 갈까 합니다.”
음?
은휘상단이 있는 휘주가 아니라 안경을 간다고?
- 안경이면 궁윤이네 본가가 있는 곳 아니냐?
사부님의 의문에 따로 답을 하는 대신 나는 곧바로 하성이 녀석을 향해 물음을 던졌다.
“안경? 궁윤이네 가려고?”
그러자 녀석이 답지 않게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중에 가장 부족한 사람이 저니까요.”
하성이 녀석의 의지가 묻어나는 말에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말의 대견함이 가슴속에 피어났으나, 구태여 말을 하진 않았다.
“그렇게 해라.”
* * *
쳐내야 할 일거리들을 모두 마무리하고.
종강 선언을 하지 않은 몇 안 되는 과목의 기말고사를 치러냈다.
그것으로 여름방학이 시작됐다.
언동생 중 따로 행선지가 있는 녀석들은 그곳을 향해 떠나갔고.
진주로 가기로 한 녀석들은 나와 함께 마차를 타고 하남으로 북상했다.
낙양 곁에 붙어있는 포구인 맹진항에서 배를 타고 황하를 따라 하북까지 갈 생각이었는데.
여기서 일행이 두 명 추가됐으니.
다름 아닌 팽소진과 공손무결 이었다.
“안녕, 얘들아.”
“다들 진주로 간다지? 요즘 모용세가가 속을 썩여서 나도 마침 들여다보러 가려 하북으로 가려던 길이었네, 겸사겸사 소진이 다음 학기 이야기도 팽 선배와 좀 하려 했고. 그래서 둘이서 길을 나서려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된 거 함께 가겠나?”
무림맹주가 합석을 하자는데 말학들이 어찌 거절할까.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하나, 공손무결과의 동행이 꼭 나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녀석들은 어지간히 불편했는지 돌아가며 식체를 호소하긴 했지만.
나는 이래저래 많이 부대껴봐서 그런지 불편하지도 않았고.
‘관문이란 관문은 별다른 기다림이나 검속도 없이 하이패스처럼 통과.’
공손무결이 지나간다는 소식이 전해졌는지 산적이고 수적이고 덤비는 자들도 없었다.
‘비용도 본인이 다 내시니 돈도 굳고?’
하여, 우리는 당초의 예정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진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쿵. 쿵.
“뉘십니까?”
“나다.”
“엇?! 용명 공자님? 벌써 도착하셨습니까요?”
“그래, 어서 가서 소식을 전해라. 형님이 오셨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