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7화. 돌아온 망나니 (2)
진강장주가 방문했다는 소식에 이화 부인의 신경이 그리로 옮겨갔다.
“어디로 뫼시었나요? 사랑채엔 맹주님이 계실텐데요?”
“…그, 그것이. 무림맹주님과 도련님들이 오셨다는 이야기를 쇤네에게 들으시고는 선객이 있어 얼굴 보기가 곤란하면 다른 날 올 테니 기별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다만 그러면서도 쉽게 물러나실 것 같지 않으신 게…. 아직 대문가에 계실 것입니다요.”
“…이쪽이 곤란할 것 같으면 기별을 넣지 말고 그냥 걸음을 돌리면 되실 일인데, 그럴 생각도 없으면서 퍽이나 위해주는 척을 하시는군요.”
“…송구합니다, 마님. 쇤네가 괜히 도련님들 이야기를 한 것 같습니다요.”
“아니에요. 작은아버님께서는 애초에 다 알고 오셨을 겁니다. 상공께는 말씀을 전하셨나요?”
“예. 그리로도 사람을 보냈으니 지금쯤 전해 들으셨을 겁니다요.”
팽소진이 다른 언동생들을 이끌고 언윤각을 빠져나갔을 때.
나는 이화 부인과 단둘이 있는 것이 어색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어색했다.’
어머니란 존재를 겪어보는 게 처음이다 보니 쉽지 않았다.
‘전(前) 용운이 놈을 두고는 속을 썩이셨을 것이고, 나를 두고는 마음을 졸이셨을 텐데….’
그 모든 것을 본인 탓으로 돌리며 미안하다 하시니 어려웠고.
아버지를 박대하시는 듯하면서도, 내게는 또 오해치 말라시는 모습에서 가족을 생각하시는 마음씨가 묻어나서 민망했다.
그와 동시에, 이화 부인의 근심거리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내가 진주언가에서 쫓겨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죄송했다.
아버지의 결단이었으며, 원작의 흐름이 그러하니 언용운이 진주언가에서 쫓겨나는 것은 순리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 선택이기도 했지.’
하여 멋쩍은 표정으로 이화 부인, 아니 어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을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어머니께서 내게 보여주신 마음은 어쩐지 속을 간질거리게 했지만.
그래서 기분이 좋냐 싫냐를 묻는다면 좋았다.
‘…진강장주.’
하여, 나는 이 시간을 방해한 인간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는데.
때마침 사부님께서 질문을 던져 오셨다.
- 네 어머니 되는 사람이 진강장주라는 자를 썩 달가워하지 않는 모양새더구나. 단순히 용운이 너와의 시간을 방해받아서 그러한 것만은 아닌 듯한데. 맞느냐?
‘바로 보셨습니다.’
- 바로 봤다고? 왕서방이라는 자가 종친이라는 말을 하던데, 무슨 놈의 종친이 본가 마님의 심기를 어지럽힌단 말이냐?
‘호적상으로 저한테는 종조부(從祖父). 그러니까 돌아가신 제 할아버지의 아우 되는 분으로, 아버지께는 숙부님 되시는 양반입니다. 그런데….’
- 그런데?
‘진주언가를 차지하겠다는 야심이 있습니다.’
진강장주 언길회.
원작에서 그는 적장자인 언용운이 호적에서 파인 것을 빌미 삼아, 진강장에도 언가를 계승할 권리가 있음을 주장했다.
- 네 종조부뻘이면 다 늙어 빠진 위인일 텐데, 들어갈 관짝이나 고를 것이지 그 나이에 진주언가의 가주 소리를 듣겠다고 그런단 말이냐? 거, 욕심 한번 고약하구나.
‘정확히는 본인의 친손자를 다음 대 소가주로 삼으려는 생각을 갖고 있을 겁니다.’
이름이 용묵이였나 그랬던 것 같은데.
- 그런 생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단 말이냐?
사부님의 말마따나 생떼 같은 주장이나 다름없었지만, 우직한 성정의 언정웅에겐 정치력 같은 것이 없었다.
하여 원작에선 장로원과 종친회를 장악하고 있는 언길회의 뜻대로 진주언가의 소가주 자리가 분가인 진강장에 넘어갈 뻔했다.
그렇게 사부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때.
어머니께서 한숨을 내쉬며 말을 전해오셨다.
“아무래도 이 어미도 나가 봐야겠구나. 종조부님은 늘 네게 피곤하게 굴어오셨지, 용묵이 그 아이와 너를 비교하고 말이다. 불편하다 싶으면 예 있거라.”
“아뇨.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 * *
진강장주 언길회.
그는 대문가에서 보이는 진주언가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생각했다.
‘본디 내 것이어야 했다.’
이 진주언가는 자신의 것이어야 했다고.
‘종이 한 장 차이가 나긴 했지만, 형님과의 대련에서 패한 적은 없었다. 무위도 내가 위였고. 사람을 부리고 휘어잡는 능력은 이쪽이 몇 배는 나았지.’
한데, 어째서 아버님은 형님을 소가주로 삼으셨단 말인가?
‘한 것이라고는 효도밖에 없어 제대로 된 별호도 없고, 술친구 사귀는 능력밖에 없던 위인을….’
언용운 형제에게는 할아버지가 되는 분이자, 진주언가의 전대 가주 언광회의 별호는 진주강권 이었다.
진주가 애초에 언가의 구역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볼품없는 별호이긴 했다.
‘형님 대신 내가 가주가 됐다면 오대세가로의 복귀는 당연하고, 하북을 상징하는 세가가 팽가가 아니라 우리 언가가 되었을 것이다.’
언광회가 가주 자리를 지키던 시절, 진주언가는 별다른 도약 없이 하북의 세가방파들과 친목만 다지며 현상 유지를 하다 끝이 났다.
그런 언광회의 뒤를 이어 가주가 된 언정웅은 지닌 무재 만큼은 육십 년 내 제일 기재라 불릴 만큼 대단했으나.
언길회가 보기엔 딱 무재만 대단한 놈이었다.
‘원교근공의 원칙도 모르고 가까운 하북팽가나 석씨세가 사람들과 형님 동생하고 지내고, 모용세가 같은 곳과는 척을 지고 있으니. 원, 그런 식으로 어찌 하북의 패권을 차지할 것인가? 답답한 위인 같으니라고.’
대외활동의 기본원칙이 언강회의 시절에서 달라진 게 없었고.
특유의 꼿꼿하고 꽉 막힌 성정으로 그 기준에 어긋나는 자는 용서치 않으니, 되레 진주언가의 맹우를 자처하는 곳들이 줄었다.
‘쯧. 깨끗한 물에는 되레 고기가 꼬이지 않는 법이거늘. 뭐, 나로서는 잘된 일이지만.’
그런 언정웅의 성정은 안팎을 가리지 않았다.
언정웅은 망나니로 유명했던 언용운을 제 손으로 찍어냈다.
그 일은 가주가 후계자 교육에 실패했음을 시인하는 일이자, 스스로 직계의 정통성을 훼손한 일이었다.
그렇게 언정웅의 입지가 좁아지고, 다시 모든 것이 순리대로 자리를 잡아가는 듯싶었지만.
근래 들어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다.
언용운이 마교를 쫓으려고 일부러 망나니를 자처했다거나.
강시종을 복원했느니 하는 소식들이 연달아 진주까지 날아온 것이다.
‘괴룡이라는 이름과 함께 말이지.’
하나, 이미 장로원과 종친회는 언길회의 손에 들어온 이후였다.
천하에선 아무리 괴룡의 이름이 높아도 언씨 일족 사이에선 이미 언용묵이 후계자감으로 내정되어 있었다.
‘이런 걸 두고 하늘의 뜻이라 하는 것이지.’
일의 순서가 조금만 어긋났어도 대업이 물 건너갔을 텐데, 꼭 짜맞추기라도 한 듯이 언용운의 대두가 늦었다.
‘그 덕으로 생전에 우리 용묵이가 소가주가 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좀 많이 돌아왔지만, 천하의 강태공도 나이 일흔을 넘어서야 뜻을 펼쳤다는데 뭐 어떤가.’
그 생각을 다시 한번 상기하자 언길회의 만면에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종친회와 장로원이 한뜻으로 밀어붙이면 정웅이 녀석 성정에 받아들이겠지만, 그래서야 모양새가 좋지 않아.’
손주며느리가 용운이 걱정에 밤잠을 설친다던데.
‘용운이 놈의 복권을 시켜주는 것의 대가로 소가주 자리는 우리에게 양보하는 모양새가 나와주면 딱 좋겠는데 말이야.’
* * *
진강장주가 도착했다는 소식이 각 전각에 고르게 전해진 모양이다.
어머니와 내가 대문가에 당도할 때 즈음 가주전 방면에서 아버지와 공손무결이 나왔고, 언화각에서 용명이 녀석이 달려 나왔다.
다른 언동생들과 가솔들도 슬금슬금 대문가로 모였다.
그런 가운데 아버지와 어머니가 입을 모았다.
“작은 아버님, 그리고 두 분 장로님을 뵙습니다.”
그러자 대문가에 서 있던 사람 중 호호백발의 노인네가 만면에 미소를 띠고 수염을 쓸더니.
공손무결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진강장에서 여기 두 사람과 바둑을 두며 소일거리를 하고 있는데, 이 집에서 기름 냄새가 진동하지 뭐요. 그렇게 이곳에 오게 됐는데, 선객이 계실지는 미처 몰랐소이다. 맹주님께서 정웅이 녀석과 나누시던 말씀이 있으셨을 텐데, 늙은이가 괜한 발걸음을 하여 방해를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소이다?”
그런 언길회의 말에 공손무결은 깍듯이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후배가 이룬 것 없이 일만 바빠 이리 오랜만에 인사를 드립니다, 백산권 어르신.”
“근래 마도의 무리들이 여기저기서 설치고 다녀서 맹주께서 바쁘심을 알고 있소이다. 정웅이 이 녀석이 강직한 면이 장점이긴 한데, 대화하다 보면 답답한 구석도 있으실 것이오. 아니 그렇소이까?”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겸양할 것 없소이다. 내가 정웅이 이 녀석을 업어 키운 사람인데 그걸 모르겠소? 우리 언가가 도울 일이 있다면, 무례라 생각지 말고 언제고 진강장에 연통을 넣으시오.”
말은 집안의 큰 어른인 척 번지르르하지만.
진주언가를 대표해야할 사람은 가주인 언정웅이었다.
기실 언길회의 행동은 노골적으로 자신이 더 좋은 대화상대가 될 수 있음을 내보이려 아버지를 무시한 것이었다.
‘눈치 빠른 맹주님이 그를 모를 리 없다.’
하나, 집안 어른이라고 그런 것인지 몰라도 아버지는 가만히 계셨다.
아니, 눈이 가늘어지시는 어머니의 손을 잠시 잡아주시는 것이 주변인도 말리는 모양새였다.
상황이 그러다 보니, 공손무결도 그저 멋쩍게 웃고만 말았다.
“…하하하.”
그사이 언길회는 신이 나서 다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근래에 용운이 녀석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제법 들려오던데, 사실 우리 용묵이도 그 자질이 누구 못지않소이다. 나중에 맹주님께서 한번 봐주시겠소이까?”
“음. 예. 뭐 짬이 난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 녀석이 태몽부터가 시퍼런 청룡이….”
그 이야기라는 것은 결국 친손주 자랑이었다.
듣던 중에 짜증이 나서, 나는 닥치라는 뜻으로 포권을 하고 나섰다.
“작은 할아버님을 뵙습니다.”
그런 내 모습에 용명이 녀석이 다급히 따라 포권을 취했는데.
“…자, 작은 할아버님을 뵙습니다.”
언길회는 손바닥을 펴서 그런 용명이 녀석을 향해 비키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검지를 세워 내 가슴팍을 짚으며 입을 열었다.
“언가의 족보에는 네 이름이 없건만, 어찌 내가 네 할아버지가 되느냐?”
한데, 그러면서 정작 시선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한눈에 언길회가 보인 행동의 저의를 파악했다.
‘딱 보니까. 이 양반 이거….’
내 복권을 두고 아버지랑 어머니를 압박하려는 건가?
하기야, 아버지 쪽에서 복권 이야기를 장로원에 꺼내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산서의 일을 마치고 헤어질 때 풍기시던 분위기가 그랬고, 아까 어머니와 나눈 이야기에 섞여 있던 내 소식을 기다리신다는 말씀만 해도 그랬다.
‘조금 전의 순간도 그래서 참으신 건가?’
짜 맞춰지는 조각에, 내 입에서 절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
“하아?”
그에 언길회가 눈썹을 찌푸리고 나섰다.
나도 미간을 있는 대로 좁히며 입을 열었다.
“쓰흡. 그러고 보니 아무 사이도 아니네?”
“…뭐라?”
“잊고 있던 사실을 상기시켜주셔서 고오맙습니다, 영감님.”
“여, 영감? 이, 이놈이?! 집안의 큰 어른도 못 알아보는 놈이 아니냐?!”
“영감님이 왜 제 큰 어른입니까. 저는 족보에도 이름이 없는 놈인데요? …아직 치매가 오기에는 이른 나이 같으신데.”
“뭣이? 이놈이 이거 완전히 망나니 놈이 아니냐!”
“음? 그건 또 맞는 말이네요. 아예 총기를 잃으신 건 아닌 게, 오락가락하시는 것 같으니 이른 시일 내에 의원을 찾아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 이이! 이놈이 가문에 복귀할 마음이 없는 모양이로구나?!”
“그건 또 어떻게 잘 아셨네요.”
응.
안 하면 그만이야.
에베베벱.
“이! 이이!!”
내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는지, 언길회 본인은 시뻘게진 얼굴로 말을 더듬었고.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벌렸는데.
이 순간 언정웅이 무언가를 결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용운이는 가주 직권으로 복귀를 시키겠습니다.”
“사, 상공?”
그에 어머니께서 놀란 얼굴로 입을 여셨다.
놀라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꽉 막힌 아버지의 정치적 부담감을 줄여주려고 막 나간 것이었는데.
‘여기서 직권을 사용하신다고?’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공손무결도 한마디를 보탰다.
“무림맹에 있으면서 방파들의 송사들을 살펴보다 보면 이런 식으로 복권을 하는 일에는 보증인이 필요한 경우가 많던데, 혹 필요하다면 이 공손 모가 보증을 서겠습니다.”
그에 언길회가 악을 쓰고 나섰다.
“누구 마음대로!”
하나 아버지는 지금껏 취해오던 존중을 내려놓고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주 직권을 사용하겠다 했습니다. 진강장주.”
그에 언길회가 입술을 터지라 깨무는가 싶더니.
이내 비소(誹笑)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흥. 그렇게 어거지로 복귀를 시킨다고 하더라도 장로원에서 검증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 가주?”
그에 아버지는 시선을 내 쪽으로 옮겨오셨다.
이렇다 하는 말은 없으셨지만, 눈빛만으로도 무엇을 묻고 계시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문제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