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0화. 돌아온 망나니 (5)
종친회가 개최한 검증회는 취지만 놓고 보면 장로들에게 인정을 받아내는 자리였다.
진강장, 진성장, 진원장, 진양장, 진평장, 진청장.
진주언가의 분가 중 장로 자격을 갖춘 장원은 언길회의 진강장을 포함하여 총 여섯 가문이었다.
빡!!!
코가 깨진 진성장주를 시작으로, 차례대로 연무장 위에 올랐던 진원장주와 진양장주가 각각 피떡이 되어 연무장에 드러누웠다.
빠악!!!!!!!!!
그렇게 여섯 장로 중 세 사람이 나를 인정(?)하며 들것에 실려 나가자, 주변에서 여러 소리가 들려왔다.
“…타고난 싸움꾼이시구만.”
“그러게 말이야. 진양장주님의 마지막 일권은 꼼짝없이 들어가겠구나 싶었는데, 무릎과 팔꿈치를 붙이는 걸로 막고는 곧바로 공세를 이어버리실 줄이야.”
“…근데 저걸 언가권이라고 할 수가 있는 건가?”
“언가권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 하나, 애초에 이 검증회는 언가의 정신을 잊지 않고 있었냐는 명분으로 열린 것이지 않나, 그렇다면, 격표백산 하나만으로도 된 것 아닌가?”
“이 친구 말이 맞아. 진성장주에게 처음 시전한 초식은 격표백산이었고, 방금 진양장주의 턱을 돌린 일격은 분명히 권당갈력이었어. 강호에선 검수로 이름을 날리고 계신 분이 저 정도면…. 어? 진평장주님께서 나서시는구만.”
좌중이 웅성이는 가운데, 진평장주 언정균이 연무장에 올랐다.
‘…진평장.’
언용명이 말하기를 분가들은 보통 상계로 눈을 돌리기에 무(武)에 소홀할 수밖에 없는데, 진평장은 꾸준히 언가권을 개량해 자신들만의 길을 개척한 가문이라 했다.
‘팽소진은 진평장주 언정균이 초절정의 반열에 든지 오래되었다 했고.’
방심할 수 없는 상대를 마주하게 된 나는, 가만히 호흡을 골랐다.
“후.”
그러는 사이 진평장주 언정균이 입을 열었다.
“호흡은 다 골랐나?”
“예.”
“쉬지 않고 연달아 싸우고 있으니, 반 호흡이라도 더 돌리라는 뜻으로 이쪽에서 가도록 하지.”
그리고 땅을 박참과 동시에 권기를 쏟아냈다.
쌔액! 쌔액! 쌔액! 쌔액!
나는 바쁘게 보법을 밟으며 쏟아져 들어오는 권기를 피했다.
피할 수 있는 것은 피했지만, 어쩔 수 없는 것들은 손을 움직여 쳐내야만 했다.
‘…확실히 앞서 상대한 세 장로와는 다르다.’
일견 아버지를 마주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랄까?
물론, 아버지의 그것에 비하면 진평장주의 주먹이 훨씬 가벼웠지만 말이다.
‘아버지의 일권이 천근처럼 느껴졌다면, 진평장주의 주먹의 무게는 그 반의 반의 반도 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무위의 수준이 아버지 쪽이 몇 수는 위라는 것이겠지만.
단순히 힘의 차이로 설명하기는 어려울 듯했다.
주먹의 결 자체가 다른 느낌을 냈던 것이다.
‘…자신들만의 길을 개척했다더니.’
언정균의 주먹은 빨랐다.
그가 날리는 권(拳)은, 언가권 특유의 묵직함이 덜한 대신 날카로움을 갖추고 있었다.
휙! 휙! 휙 휙! 휙! 휙
쏟아지는 장대비처럼 날아드는 언정균의 권기.
그에 맞서기 위해 나도 권기와 장력을 쏟아냈다.
양쪽에서 뻗어낸 내력들이 맞붙으니, 귀를 때리는 굉음과 함께 연무장의 먼지들이 비산했다.
펑! 펑! 펑! 퍼퍼퍼펑!
퍼지는 흙먼지 속, 언정균이 그 틈을 해치고 달려 들어왔다.
쌔애애액!
삽시간에 지척에 이른 그는 벼락같이 오른 주먹을 뻗어왔다.
팍!
그런 언정균의 오른 주먹을 나는 팔을 들어 교차하듯 막았다.
그러자, 그가 오른 다리를 움직여 내 다리를 빗겨 차려 했다.
휙!
나는 바쁘게 오른 다리를 들었다.
그리고 발바닥으로 언정균의 정강이를 막았다.
파팍!
그렇게 언정균의 오른팔과 내 왼팔이 교차하고.
오른 정강이와 오른 발바닥이 맞붙은 상황이 펼쳐졌다.
이러다 힘겨루기로 넘어가나 하는 생각이 내 머리에 스치는 찰나.
언정균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나왔다.
“…인정한다.”
그렇게 입을 연 언정균은 정말로 손속을 거두더니.
몸을 돌려 아버지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진평장의 언정균이 가주님께 이 자리를 빌어 직언을 올리고자 합니다.”
“말씀하시오.”
그렇게 운을 뗀 진평장주는 장로들이 앉아 있던 좌석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세가의 장로는 조언자의 역할에 그쳐야 합니다. 그간 가주께서는 장로원을 방관하셨습니다.”
언정균의 말이 맞았다.
문파의 장로란 소속 사문의 살림을 챙기는 자리다.
반면 세가의 살림은 기본적으로 가주와 안 주인이 알아서 하는 것이었다.
가문의 일은 대사(大事)든 소사든 가주 내외가 도맡아 하고, 장로들은 본디 조언자의 역할만을 해야 했다.
진평장주는 본인이 장로 자격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그 점을 꼬집고 있는 것이었다.
“이는 돌아가신 전대 가주님께 효(孝)를 다하고 웃어른들께 예(禮)를 지키신 일이었으나, 그로 인해 벌어진 결과가 바로 이 자리입니다.”
하니, 예의 바른 조카가 아니라 강단 있는 가주가 되라는 것이었다.
“어수선한 시절입니다. 부디 오늘 마주하신 결과를 가슴속의 이정표로 삼아, 일족을 이끌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진평장주의 충언. 귀담아들었소.”
“진평장은 가주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 * *
세 명의 장로가 언용운의 손에 피떡이 됐고.
진평장주는 장로원을 비판함과 동시에 언용운을 인정했다.
“진청장은 나서지 않겠습니다. 가주님의 뜻을 존중해, 언용운의 복권을 인정하지요.”
다음 차례였던 진청장주는 싸워보지도 않고 언용운을 인정했다.
사실상 기권이었다.
그렇게 진강장의 차례가 되었다.
진강장의 대표로 나서기로 한 언용묵은, 연무장에 오르며 생각했다.
‘완전히 달라졌다.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눈앞의 사내는 절대로 자신이 알던 시절의 언용운이 아니었다.
하나 이제 와서 물러날 수 없었다.
‘진평장주가 공개적으로 장로원의 행동을 비판했고, 진청장주는 기권했다.’
여기서 언용묵 본인까지 기권하면, 진주언가에서 진강장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물론이요.
친할아버지인 언길회를 매장하는 일에 언용묵이 팔을 보태는 꼴이 될 터였다.
‘그래서는 진강장 안에서 조차 내가 설 자리가 없어진다.’
연무장에는 무조건 올라야 했고.
혹여 지더라도, 꼴사납게 져서는 안 됐다.
퇴로가 없는 상황에서 언용묵은 다른 활로는 없는지를 살펴보았다.
‘진평장주와의 싸움으로 지치기는 한 것 같은데….’
언용묵을 향해 기수식을 취하는 언용운은 힘들어 죽겠다는 듯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후. 후우우. 하아.”
그나마 믿을 것은 그것뿐이라는 사실에.
언용묵은 입술을 짓씹었다.
‘진평장주야 원래 저런 위인이라 치더라도, 진청장주가 제 역할만 해줬어도 언용운의 힘이 더 빠졌을 텐데! 두고 봅시다, 진평장주! 진청장주!’
그러면서 생각했다.
‘내가 이 고비를 지나 장차 언가의 가주권을 쥐게 된다면, 오늘의 일을 결단코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언용묵은 훗날 오늘의 일을 복수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기 위해선 눈앞의 언용운을 쓰러뜨려야 했다.
언용묵은 주먹을 말아쥐며 기수식을 취했다.
그런 언용묵을 향해 언용운이 땅을 박차고 들어왔다.
쌔애액!
그런데 앞선 네 번의 싸움과 달리 언용운의 신형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지친 게 확실하다.’
언용묵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일권을 날렸다.
하나 그러자마자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
가까운 거리에서 합이 교차되는 순간, 언용운의 속도가 순간적으로 빨라진 것이다.
팟!
그 바람에 언용묵의 주먹은 언용운의 몸에 정타를 먹이지 못하고 비껴갔고.
“?!”
그사이 언용운의 주먹은 언용묵의 복부를 정확하게 가격했다.
뻑!!!
“컥?!”
언용묵은 그것으로 끝이라 여겼다.
본인의 주먹은 빗나갔는데, 허용한 주먹은 신형이 흔들릴 정도로 묵직했으니까.
남은 수순은 난타를 당하는 것일 터였다.
그런데 이 순간.
언용운은 주먹을 멈춘 뒤, 신음을 흘리며 물러났다.
“큭!”
“……?”
언용묵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 자식이 나를 가지고 놀고 있어?’
지쳐 보이는 것도 연기였다.
이유야 뻔했다.
‘더 오랫동안 분풀이를 하기 위해서…?’
이 판에서 언용묵은 기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저러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언용운이 입을 뻥긋거리며 전음을 보내왔다.
[용묵아,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
[앞의 장로님들이 기권했다고 너도 따라서 그러면 안 된다?]
‘……!’
[네가 그러면 느그 할아버지가 아주 개쪽을 파는 거야.]
[지금도 많이 파셨지만.]
[너까지 기권하면 아주 똥칠을 하는 수준이겠지. 그런 짓을 하지 않을 머리 정도는 있다고 형은 믿어.]
“크윽.”
[옳지. 그래, 잘한다. 그렇게 이 딱 악물고 어떻게든 버텨봐.]
치가 떨리고 속이 뒤집힐 것 같은 심경.
하나 그런 와중에도 더 화가 나는 것은, 지금 언용묵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었다.
언용묵은 의미가 없음을 알면서도, 눈앞의 상황에 다시금 의문을 던졌다.
‘그 버러지 같던 놈이 대체… 어떻게?’
하나, 그런 생각을 계속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쌔애애액!
제 할 말을 마친 언용운이 벼락처럼 뛰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퍽! 퍼퍼퍼퍽!
퍼퍼퍽! 빠악!!!
그와 동시에 십여 합이 순식간에 교환되었다.
“막상막하로구만.”
“큰 도련님은 검수로 이름을 날렸다는데 막상막하는 아니지! 이미 조금 봐주고 시작하신 것 아닌가?!”
뭣도 모르는 가복들은 그 광경을 보며 숫제 대등한 상대 간의 난타전인 것처럼 떠들어 대고 있었지만.
실상 언용묵의 주먹은 번번이 빗겨나가고 있었고.
휙! 휙! 휘휘휙!
언용운의 주먹은 매번 적중했다.
빡! 빠악!!!
싸움의 양상을 이해하고 있는 이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들이라고 해서 나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 대련은 단순한 싸움이 아니라 본가와 진강장의 힘겨루기였고.
얼핏 언용운이 손속에 사정을 두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퍽! 퍽! 퍽! 퍽! 빠악!!
언용묵은 그저 두드려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쑤셔오는 전신과 어지러운 이지(理智) 속에 언용운이라는 존재가 한없이 크게 느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겁을 집어먹은 것이다.
‘…크으윽.’
살짝 올라간 놈의 입꼬리 때문인지 몰라도.
악귀처럼 웃는 놈의 모습에 모골이 송연할 지경이었다.
언용묵은 발아래 있는 존재라 여겼던 언용운에게 겁을 집어먹은 자신에 수치심을 느꼈다.
“버, 버러지 주제에.”
그 수치심에서 벗어나고자 언용묵은 입을 열었다.
“버러지 주제에 나를 내려다보지 말란 말이다!”
그리고 주먹을 뻗었다.
하나 이번에도 언용묵의 주먹은 제대로 닿지 않았다.
언용운은 슬쩍 몸을 틀어 본디 가슴팍으로 향하던 언용묵의 주먹을 슬쩍 피해냈다.
휙!
그리고 동시에 왼손등으로 언용묵의 전완을 가격했다.
“이렇게 처맞고도 정신을 못 차리는 새끼는 오랜만이네.”
그에 언용묵의 손이 팍! 하고 튕겨 나갔는데.
“안 되겠다 너는.”
언용운은 튕겨 나가는 팔을 가만히 두지 않고 잽싸게 겨드랑이에 끼웠다.
“벌을 줄 테니까. 달게 받아라.”
그리고 사정을 두지 않고 꺾어버렸다.
따각!!!!!
* * *
“끄아아아악!!”
언용묵의 오른팔을 본디 굽혀지지 않는 방향으로 꺾어놓자.
장로석 중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언길회가 연무장 안으로 득달같이 몸을 날려왔다.
“이 천하의 망나니 놈이!”
그와 동시에 주먹이 벼락같이 쏟아져 들어왔다.
백산권, 혼백을 흩어버린다는 주먹이라는 별호가 괜히 붙은 게 아니었다.
늙은 생강이 맵다더니, 이건 매운 정도가 아니라 잘못하면 죽을 수가 있었다.
나는 다급히 뒤를 향해 비영파천보를 시전했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항룡장을 쏟아냈다.
쌔액! 쌔액! 쌔애애애액!
언길회는 그런 나를 죽어라 쫓아오며 흉신악살처럼 일그러뜨린 얼굴로 노기 터트리며 주먹을 뻗어냈는데.
“용묵이는 어린 시절부터 제왕학을 가르쳤고! 용인술을 가르쳤다! 장차 진주언가를 하북제일 세가로 만들 아이이거늘! 누구 몸에 손을 대느냐!”
권강이 감긴 주먹 하나가 번쩍하고 들이닥친 이때.
앞뒤로 기척이 있다 싶더니.
펑!!!!
바쁘게 단상에 뛰쳐나온 누군가가 나와 언길회 사이에 끼어들어 그것을 막아주었다.
“…아버지?”
주먹을 뻗은 것은, 내 아버지 언정웅이었다.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잃어버린 균형에 내 몸이 크게 흔들렸다.
그러나 뒤이어 달려온 언동생들이 나를 부축해 주었다.
“언 소협!”
“언형!”
“형님!!”
“남의 집 일에 이러면 안 되지만, 팽가와 언가가 아주 남은 아니니 한마디 할게요.”
“합니다!”
“…진강장주님, 이건 선을 많이 넘으셨어요.”
“에헤이. 역시 이 형을 따라오는 게 아니었는데. 용운 형, 괜찮수?”
그 모습을 확인한 아버지는 굳은 얼굴로 언길회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전대 가주님께서는 정이 많아 진강장주를 그대로 두셨고, 저 또한 그 유지를 존중해 지금까지는 가만히 있었으나 더는 참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굳은 표정으로 권초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쌔액! 쌔액! 쌔애애애액!!
팍! 팍! 파파파팍!
쏟아지는 아버지의 주먹을 언길회는 곧잘 쳐내는 듯하였으나, 그것은 그야말로 잠시였다.
“!”
어느 순간 언길회의 손발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고.
빠악!!!!
삼십 합이 넘기 전에 가슴팍을 가격당한 언길회의 입에서 피거품이 뿜어져 나왔다.
일전에 자랑하듯 매만졌던 흰 수염은, 어느새 붉은색으로 물들여져 있었다.
“…쿨럭!”
그런 언길회의 옷깃을 움켜쥐어 강제로 꿇어 앉힌 아버지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일갈했다.
“하북 제일세가라 하셨습니까? 분란을 만들고, 파를 가르고, 혈족끼리 피를 봐서요? 진강장주의 탐욕이 오늘 용묵이의 팔을 꺾은 것이니 원망할 사람을 찾고 싶거들랑 스스로를 원망하십시오. 검증회는 끝났습니다. 진주언가는 용운의 복권을 공인할 것입니다.”
마른 고목나무처럼 쓰러진 언길회를 뒤로하고 아버지는 주변을 향해 입을 열었다.
“또한 이번 종친회를 소집한 일 외에도 진강장은 이적행위(利敵行爲)를 한 혐의가 있는바, 진강장에 부여된 진주언가의 장로 자격을 박탈하고 지금 즉시 조사에 들어갈 것입니다. 비언대는 가주의 명에 따라 진강장을 수색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