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215화 (215/444)

제215화. 제갈설지의 서신 (2)

다시 한번 서신을 훑어본 나는 용명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용명아.”

“예, 형님.”

“아버지께 가서 서신이 이렇게만 왔냐고 여쭤보고 와라.”

“그렇게만 여쭈면 되겠습니까?”

“어. 함께 온 물건이나 통 같은 거 없었는지 여쭤봐.”

“예.”

내가 단호한 어조로 용명이에게 심부름을 맡기자, 정현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언 소협. 서신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입니까?”

그런 정현을 향해 나는 서신을 건네주었다.

“직접 봐봐.”

내가 건넨 서신을 정현이 받아 들었다.

다른 언동생들도 정현 곁으로 모였다.

서신을 쓱 훑어본 천장호가 나를 향해 말했다.

“그냥 안부 인사 아닙니까?”

“보낸 사람을 봐라. 제갈 소저잖아. 이상한 거 못 느끼냐?”

“……흠.”

정현과 우소릉은 고개를 끄덕여왔다.

“언 소협의 말씀을 듣고 보니 확실히 좀 이상하긴 합니다. 제갈설지 소저가 문장력이 없는 분이 아닌데, 서신의 내용이 눈에 단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답지 않게 간체로 쓴 부분도 있어요. 은 누님이라면 모를까 제갈 누님은 간체를 안 쓰지 않나요?”

“그도 그렇습니다. 마방연에서 업무를 볼 때 항상 정자로 쓰셨습니다. 자간까지 딱딱 맞춰서. 그러고 보니 자간도 미묘하게 안 맞습니다?”

“그렇네요? 원래 여백의 너비까지 딱딱 맞춰서 쓰는 분인데요?”

“나는 아직도 뭔 소린지 모르겠다. 너도 그렇지, 천장호?”

“…모르겠어도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는 건데. 애꿎은 나는 왜 끌어들이쇼?”

팽소천과 천장호 덕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진 이때.

우소릉이 나를 향해 질문을 해왔다.

“그래서 제갈 누님은 서신에 무슨 말씀을 숨겨두신 건가요?”

“그건 일단 용명이가 와봐야 알겠는데?”

호랑이도 제 말을 하면 온다더니.

때마침 심부름을 마친 언용명이 돌아왔다.

“형님. 아버님께 여쭤봤습니다만, 딱히 함께 온 것은 없었답니다. 서신이 담겨온 통은 통상적으로 전서응의 다리에 매다는 서통 정도라고 보면 될 것이라 하셨고요.”

“그래?”

“예. 형님이 단호하셔서 일단 다녀오긴 했는데, 이건 왜 알아보라고 하신 겁니까?”

용명이 녀석에게도 서신을 건네주라는 뜻으로 정현을 향해 턱짓을 했다.

그러면서 말했다.

“제갈 소저가 뭔가 따로 할 말을 숨겨놓은 거 같은데, 합자봉(合字棒) 같은 게 있나 싶어서 알아보고 오라고 했다.”

이 시대에 암어 혹은 암호를 사용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새나 사람이 서신을 옮기는 시대라 일단 붙들기만 하면 내용이 그대로 적의 수중에 들어가는 만큼, 보안을 요하는 내용을 담기 위한 고민은 많았다.

대표적으로 특이한 성질을 가진 약품이나 종이를 사용하여, 물에 넣거나 불에 가까이하면 글자가 나오거나 사라지면서 진의가 드러나는 수법이 있었다.

한데, 손으로 살짝 비벼본 결과 종이나 먹물은 평범한 것 같았다.

‘그래서 떠올린 게 파자법인데.’

파자법은 말 그대로 글자를 풀어써 놓거나 인위적으로 떨어뜨려 놓은 서신을 합자봉이라는 막대에 감으면 드러나게 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목(木)과 자(子)를 전혀 상관없는 듯이 풀어서 배치해 둔 서신을 특정한 너비와 각을 지닌 막대에 감으면 이(李)자가 드러나는 식이었다.

그런데 정작 합자봉이 없었다.

나는 턱을 싸쥐며 미간을 좁혔다.

“제갈소저답지 않게 간체나 부수로 사용되는 글자가 많은 것도 그렇고, 미묘한 여백도 그렇고. 분명히 파자법이 맞는 거 같은데.”

“빈도가 보기에도 그러합니다.”

“그러게요. 제갈 누님은 어떻게 알아보라고 서신을 이렇게 보낸 걸까요?”

그런 내 혼잣말에 정현은 맞장구를 쳤고, 우소릉은 한숨을 쉬었다.

한데, 우소릉의 한숨 소리에 무언가가 번뜩하고 스쳤다.

‘…어떻게 알아보라고?’

합자봉.

독특한 각을 지닌 막대.

‘그러면서 내가 어지간해선 떼어놓지 않는.’

동시에 내 눈에 허리춤에 걸려 있는 회한이 들어왔다.

스르렁-

나는 곧바로 회한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육각형을 이루고 있는 검날에 맞추어 제갈설지의 서신을 조심스럽게 가져다 대 보았다.

그러자 글자 몇 개가 절묘하게 접히며 다른 글자가 되는 게 보였다.

‘맞네.’

이후로는 과감하게 감았다.

그러자 서신이 회한의 날에 베이고 접혔다.

그러면서 흩어져 있던 글자들이 오른쪽 날 부근에서 절묘하게 합쳐졌다.

“상주부를 경유하라, 사도련의 조짐이 심상치 않으니?”

제갈설지가 숨겨둔 뜻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 * *

내가 회한을 합자봉 삼아 제갈설지의 서신을 풀어내자, 언동생들이 하나같이 호들갑을 떨었다.

“엇?”

“와아!”

“오?”

“아니, 암어가 숨어 있다고 하셔놓고 검날에 서신을 가져가시길래 저러다가 갈가리 찢기기만 하고 아무것도 못 건지면 어떡하나 했는데. 허, 저게 정말로 답이었네? 어지간한 간덩이론 종이를 검날에 대는 생각을 못 할 텐데?”

“언 소협을 믿고 그리하신 모양입니다. 근데 상주부를 경유하라는 거면 귀로를 바꾸라는 이야기 아닙니까?”

정현의 말이 맞았다.

우리는 본디 이곳에 왔던 때의 역순으로 황하를 따라 낙양까지 가고, 거기서 남하하여 단강구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한데, 상주부를 경유하면 남하하여 장강을 이용하라는 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언용명이 어두운 낯빛으로 입을 열었다.

“혹 남연방을 없애버린 일로 이러는 것이겠습니까? 괜히 형님께서 언가와 진주의 안녕을 위해 일벌백계로 삼으시려다가 표적이 되신 것은….”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절대로 아니지. 생각을 해봐라. 남연방이 사라진 지 겨우 이틀 됐다. 사도련이든 호북이든 이제 막 소식이 들어갔을 거야.”

“아, 그건 또 그렇습니다. 하면 왜 표적이 된 걸까요?”

“그건 모르지. 손은 제갈설지의 것을 타긴 했지만, 생각 자체는 무림맹의 대군사님한테 나온 것 같은데. 상주부에 가보면 알게 되겠지.”

“그렇군요.”

“그래. 중요한 건 서두르는 게 좋겠다는 거다.”

대화는 여기까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지금 바로 부모님께 이 사실을 알려야겠다. 용명이 너는 이화전에 가서 어머니를 모셔오고.”

“예!”

“나머지는 짐 좀 싸고 있어.”

나는 곧장 가주전을 찾아가 제갈설지에게서 온 서신을 어머니와 아버지께 보여드렸다.

그리고 두 분 앞에서 서신을 태우며 사태가 급박함을 설명했다.

“두 분 모두 이 일에 관해 알아보시면 안 됩니다. 저희가 진주언가에서 머무는 것처럼 행동해 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여, 벌써 간단 말이냐?”

어머니는 진주에 머물기로 한 기간을 다 채우지 않고 우리가 돌아간다는 사실이 못내 서운하신 모양이었다.

하나, 일의 경중을 모르시지는 않았다.

“아니지, 아니야. 내가 이런 소리를 하고 있어선 안 되지. 그래. 서둘러 나서는 게 좋겠구나.”

기실 아버님도 비슷한 마음이셨는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동행을 해주면 어떠하냐.”

그런 아버지의 제안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맹주님께서 부탁하신 일이 있지 않으십니까? 기강을 잡으신 김에 장로들도 어르셔야 하고요. 남연방을 박살 낸 일도 아버지께서 당분간 진주에서 버티고 계셔 주셔야 일벌백계가 될 것입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내 생각이 짧았다. 너도 강호에 나와 별호를 얻은 어엿한 무인임을 내 잠시 잊었구나.”

내가 아버지의 제안을 물리자.

어머니께서 질문을 해오셨다.

“정확히 언제 떠날 것이냐?”

“오면서 동무들에게 짐을 싸라고 했으니 돌아가자마자 바로 떠날 생각입니다.”

그게 생각보다도 너무 빨랐던 모양인지 어머니께서는 눈을 크게 뜨셨다.

하나,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래. 조금이라도 빨리 움직이는 것이 너희들이 안전해지는 길이겠지…. 어미는 슬퍼하지 않으마.”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의 손을 쥐시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잘 도착하거들랑 어머니께 서신을 보내거라.”

“쓰는 김에 아버님께도 쓰거라. 한 곳에 써도 좋고.”

“…크흠.”

그런 두 분을 향해 나는 절을 올렸다.

“또 오겠…. 아니, 다녀오겠습니다.”

* * *

진주에서 상주로 향하는 길은 내가 집에서 쫓겨났을 때 택했던 길이었다.

초행길이 아니었기에 나와 언동생들은 빠르게 남하를 할 수 있었다.

우리가 아직 진주언가에 있는 것처럼 행동해 달라고 부탁드렸던 게 효과가 있었던 모양인지, 딱히 우리를 쫓는 무리도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상주에 도착했다.

“어흑. 진짜 내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달렸네. 후우. 거, 용운 형. 근데 생각해보니까 그 서신에 상주를 경유하라고만 돼 있었지, 어디로 가라는 말은 없지 않았습니까? 우리 이제 어디 갑니까?”

그랬다.

제갈설지의 서신에는 상주부를 경유하라고만 되어 있었다.

북경, 개봉, 금릉 같은 곳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상주도 큰 도시였다.

하나, 목적지는 분명했다.

서신을 풀었을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접근하면 됐다.

‘언동생들과 내가 공유한 이야기들.’

언동생들과 상주에 대해 나눈 이야기는 은하연과 내가 처음 만났던 때의 이야기 말고는 없었다.

“은휘상단의 상주분타로 간다.”

물론 분타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제갈설지가 보낸 서신은 검후 교수님과 함께 있는 은하연과 합류하라는 뜻 같았는데.

내가 아는 은하연이라면 나와 같은 서신을 받았을 때, 분타로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서 옵쇼!”

“이 층의 창가 자리로.”

하여, 상주분타가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한 객잔에 자리를 잡으려는데.

면사가 달린 죽립을 쓴 여고수 둘이 보였다.

- 하연이와 검후로구나.

‘그런 것 같습니다.’

은하연과 검후 교수님이 우리보다 먼저 객잔에 들어앉아 있었다.

“저기 계신 두 분과 일행이요.”

“아이고, 그러십니까요? 접시와 잔을 더 가져다 드리겠습니다요.”

상황이 상황인 만큼 서로 간의 예의나 그간의 회포는 제쳐두었다.

“언 공자라면 분타로 들어가기보다는 일단 이리로 오실 것 같았는데 제 생각이 맞았네요.”

“그랬소? 우리는 이리 오라는 말만 딱 들었는데, 혹시 더 들은 말은 없소?”

우리는 가볍게 눈인사를 나눈 뒤 본론으로 들어갔다.

[사도련이 언 공자를 잡으려고 움직이려는 것과, 이게 제갈혜 대군사님에게 나온 소식이라는 정도요?]

[사도련이 그렇게 단합이 되는 조직이 아닐 텐데, 정확히 누가 나를 노린단 말이오?]

[죄송해요. 저도 지금으로서는 그것밖에 모르겠네요.]

하기야, 은하연의 사문은 절강성 앞바다를 건너야 닿을 수 있는 주산군도(舟山群島)에 위치한 보타암이다.

아무리 은휘상단의 줄기가 남직예와 강소 절강까지 뻗어 있다 하더라도, 섬에 들어가 있다가 신분을 숨기고 상주로 왔을 테니 자세한 소식을 알 리 만무했다.

[죄송할 일은 아니고.]

나는 잠시 팔짱을 끼고 생각을 거듭해 보았다.

‘일단 검후 교수님이 합류하셨으니 든든하긴 한데….’

사도련은 쉽게 말해 흑도인들의 무림맹 같은 것이었다.

다만, 흑도의 생리 속에 살아가는 놈들은 개인의 영달이 우선이었다.

꼰대들의 집합이긴 해도 일단 대의명분을 세웠다 하면 무거운 엉덩이를 떼는 무림맹과 달리, 단합이 잘 되는 곳은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하나 만만히 봐선 안 돼.’

그런 놈들이지만 만에 하나 뭉칠 수만 있다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로 대표되는 백도무림인들의 머릿수를 몇 배를 웃도는 게 그들이었고.

핵심 전력은 어지간한 대파 몇 개와는 충분히 견줄만한 전력을 가지고 을 정도였다.

그러니 토벌은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것이었다.

백도의 힘이 강하기는 해도 흑도와 정면으로 부딪친다면, 어마어마한 피해를 떠안아야만 했으니까.

‘…물론 저쪽도 잘못 개기면 뿌리가 뽑힐 수 있음을 알고 있어서, 아무리 간이 큰 흑도라 해도 함부로 백도 무림을 향해 눈을 부라리진 않는데…. 사도련의 숱한 방파 중에 누가 이런 짓을 벌인 거지?’

…마교?

내게 일격을 맞은 마교 놈들인 만큼 벌써 사도련을 장악할 수는 없었을 텐데?

그렇게 머릿속에서 생각이 맴돌던 그때.

얼굴에는 면사를, 몸에는 허름한 무명옷을 걸친 여인 하나가 바구니를 들고 왔다.

“공자님, 이 떡 하나만 사주십시오. 제가 지아비를 잃고 낮에는 허드렛일을 하고, 밤에는 이런 것이라도 팔려 이렇게 돌아다니….”

나는 그런 여인의 소매를 움켜잡으며 입을 열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것 같은 사람이라 가까이 오는 것을 막지 않았는데…. 허드렛일을 하는 손이 아니신데?”

한데 여인은 당황하는 기색 없이, 되레 한마디를 속삭여 왔다.

“…사도련의 좌군이 직접 나서서 공자님을 잡으려고 하고 있어요.”

그러더니 내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슬쩍 면사를 들어 올렸다.

“춘앵?”

얼굴을 보니 떠올랐다.

과거 사부님을 찾으러 태호에 왔을 때, 퇴기촌을 안내해줬던 기녀가 분명했다.

슥-

스윽-

갑작스러운 만남에 놀라던 찰나.

그녀는 손가락으로 식탁 위의 물잔을 찍더니 상위에 더러울 오(汚)자를 썼다.

아무래도 그녀는 하오문(下汚門) 소속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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