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8화. 패룡도를 찾아라 (1)
내가 포권을 취하며 이름을 밝히자.
백광호는 뽑아 들려던 검에서 손을 뗐다.
하나, 곁에 있던 민머리가 그를 대신해 섬전 같은 일검을 내리그어 왔다.
쌔애애애액!!
‘머리에서 시작해서 목 등까지 이어지는 화상자국.’
짓쳐 드는 민머리는 백광호의 심복이자, 사도련의 우군총사를 맡고 있는 순우욱이라는 자로 보였다.
‘백광호 본인이 애병에서 손을 뗀 것을 보면, 조금 전에 술잔을 날린 것처럼 나를 시험해 보는 것 같긴 한데….’
이 순간 내 뇌리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떠올랐다.
그중 하나는 가만히 있는 것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저 검이 아슬아슬하게 목덜미 앞에서 멈추고, 기개가 있니 어쩌니 하는 인물평이 뒤따르는 무협지들 많이도 봤지.’
하나, 백광호는 오롯이 믿어서는 안 되는 상대였다.
동정총호(洞庭冢虎).
동정호에 엎드려 때를 기다리는 호랑이라는 별호가 괜히 붙은 게 아닐 테다.
‘은 소저와 천장호도 거듭 경고했다.’
나는 주저 없이 두 번째 선택지를 골랐다.
두 번째 선택지는 나도 회한을 뽑는 것이었다.
그 선택이 틀리지 않았는지 순우욱의 검은 내 목덜미 바로 앞에서 회한에 가로막히며 불꽃을 튀겨냈다.
챙!!!!!
귀를 때리는 날붙이 부딪히는 소리에.
삼면에 놓인 미닫이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선실 밖에 대기하고 있던 사도련의 친위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련주님! 무슨 일입니까?!”
그제야 백광호는 입을 열었다.
“별일 아니다. 다들 물러가. 우군총사도 검을 거두고.”
친위대를 물린 백광호는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백도 무림의 공자님들은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을 신봉하는지 본인들이 예를 표하면 이쪽에서도 예를 다할 줄 알고, 이런 상황에 보통 가만히들 계시던데…. 자네는 맹탕은 아니구만?”
“웃는 얼굴에 왜 침을 못 뱉습니까? 침이 아니라 검도 꽂을 수 있죠.”
“그래. 가만히 있었으면 목이 떨어졌을 거야.”
백광호는 잠시 홀로 킬킬거렸다.
“재밌네. 재밌어.”
그러더니 살기를 내리깔며 춘앵을 응시했다.
“이거 내가 한 방 먹었구만. 느슨해진 사도련의 지도부에 긴장감을 주기 위해 목 문주께서 이런 식으로 에둘러 경고를 하시는 건가?”
만약 춘앵이 데려온 사람이 내가 아니라 특급 살수였다면 백광호는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백광호는 그 점을 비꼬며 춘앵을 압박하는 것이었다.
‘나는 너를 신뢰하여 내실까지 들였는데, 허락도 없이 외부인을 데려왔느냐는 거지.’
사도련 입장에서는 충분히 공적(公敵)으로 삼을 만한 일이긴 했으니까.
“하오문이 앞으로 내 뜻에 전적으로 협조해 준다면 없었던 일로 해줄 수 있긴 한데?”
하나, 춘앵 역시 하오문의 대행수가 되기까지 산전수전을 다 겪어본 여인이었고.
이번 일에 투신하는 순간 이미 목숨을 내놓을 것을 각오한 사람이었다.
백광호의 음성에 춘앵은 깍듯이 소매를 붙여 들며 답했다.
“이번 일은 천녀가 홀로 생각하고 결행한 것으로 어머님께서는 무관하십니다.”
“글쎄? 다른 사도련의 식구들도 그렇게 볼까?”
“그건 천녀가 모셔온 언 대협과 련주님의 이야기가 어떻게 결론이 나느냐에 달려 있겠지요.”
춘앵의 말에 백광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 친구의 인물됨을 내게 보이고서 언용운이 우리 손에 죽으면 정사대전이 일어날 것이니 좌군을 말려달라는 주장을 하려는 줄 알았는데…. 다른 이야기가 더 있나?”
백광호의 물음에 춘앵은 다시 한번 소매를 붙여 보였다.
그리고 말없이 빗겨 섰다.
이야기는 나와 나누라는 표현이었다.
그에 백광호가 피식 웃으며 나를 향해 물었다.
“그래. 백도 무림의 기린아(麒麟兒)께서 나 같은 사람과 나눌 이야기가 무엇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련주님과 거래를 하고 싶습니다.”
“거래? 아까 우군총사가 자네에게 검을 휘둘렀을 때, 우리를 신뢰하지 못하고 검을 뽑더니만 무슨 거래를 한다는 건가?”
“그러는 련주께서는 방금 가만히 있었으면 목이 떨어졌을 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내 말에 백광호는 이죽거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나도 자네를 신뢰하지 않아.”
그런 백광호를 향해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꼭 신뢰해야 거래를 틀 수 있는 것은 아닐 텐데요? 련주님께서는 흑도인답게 달면 삼키고 쓰면 뱉으시면 되는 거죠.”
“…뭐라?”
“저도 망나니답게 그렇게 하겠습니다.”
내 말에 백광호는 파안대소를 지었다.
“하하하하. 언용운. 그 이름이 많이도 들려온다 싶더니만, 허명이 전해진 것은 아니었군.”
하나 만면에 걸렸던 웃음도 잠시.
그는 차가운 표정을 지은 채 입을 열었다.
“근데 자네가 내게 줄 수 있는 단물이 달리 생각이 나지 않는데?”
“그러신가요?”
“그래. 미리 말하지만 나는 정사대전의 위기라는 것도 사실 가슴에 썩 와닿지 않아. 근데 자네가 내게 줄 단물이 뭐가 있나? 진주언가가 사도련에 가입이라도 하시려는가?”
그런 백광호를 향해 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사도련주의 신표. 패룡도(覇龍刀)를 찾아 드리면 어떻습니까?”
* * *
내 입에서 사도련주의 신표인 패룡도 이야기가 나오자.
시종일관 여유가 있던 백광호의 표정이 바로 굳었다.
“…….”
그리고 순우욱이 재차 검을 뽑았다.
그는 춘앵을 겨누며 이를 갈았다.
“백도 무림의 기생오라비 놈에게 사도련의 내부 사정을 아주 미주알고주알 다 고해바쳤나 보구나? 처음 내실에 들면서 인연 어쩌고 하던데, 오늘 그 인연을 죽음으로 막을 내려주마!”
하나, 백광호가 손을 들어 순우욱을 막았다.
“우군총사.”
“예, 련주님!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뭐 대단한 비밀이라고. 동정호에 있어야 할 동정총호가 파양호에 처박혀 있은 지가 벌써 얼마야? 당장에야 파양흑도회의 잔당을 흡수하는 중이라고 둘러대고 있었지만, 우리가 신표를 잃어버렸다는 소문이 드문드문 퍼지고 있었잖나.”
“하오나….”
백광호의 말에 순우욱은 무슨 말을 더하려 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는 나도 알아.”
하나, 백광호가 손사래를 치며 그 입을 막았다.
그는 춘앵을 응시하며 헛웃음을 흘렸다.
“하오문주님의 따님이 이렇게 내 입지를 걱정해주고 계신 줄은 미쳐 몰랐구만.”
그리고 나를 보며 말했다.
“확실히 패룡도라면 구미가 당기긴 하는군. 근데 파양호의 물길은 우리가 더 잘 안다고 자부하네만?”
백광호는 계속해 말을 이었다.
그러면서 생각을 정리해보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 우리가 가용할 수 있는 인력을 다 동원하고 나까지 이렇게 파양호로 와서 챙기고 있는데도 찾지 못하는 것을 자네가 찾아주겠다고? 나를 놀리는 거라면….”
나는 백광호가 생각 정리를 끝내기 전에, 그가 잊고 있던 사실을 짚었다.
“련주님께서 물길에 익숙하시다면 저는 혼령들에 익숙하거든요. 듣자 하니 련주직을 계승하는 과정에서 파양호에서 숨을 거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던데,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이 모산파의 도사 일곱을 홀로 눌렀다고 했지? 패룡도와 함께 파양호에 수장된 원혼들에게 직접 듣는다, 라….”
떠오른 사실에 백광호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사이.
잠자코 있던 춘앵도 한마디를 거들었다.
“예. 모산의 상청검수 일곱을 홀로 누르시고 괴룡이라는 별호를 얻으셨지요.”
그러자 백광호의 입에서 비로소 건설적인 이야기가 나왔다.
“…나한테 원하는 게 뭔가? 단순히 좌군의 행동을 멈춰달라는 거만으론 패룡도와 급이 안 맞는 거 같은데?”
“한 번. 제가 요청할 때, 딱 한 번만 힘을 빌려주십시오.”
“백광호의 힘이 아니라, 사도련주의 힘을 말하는 것 같은데.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나?”
“예.”
내 답에 백광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백도무림의 개 노릇을 해달라는 건가? 권위와 입지를 다지자고 패룡도를 찾는 건데, 빈말로라도 그런 약속을 해줄 수는 없지.”
“마교.”
“……?”
“련주님도 눈이 있고 귀가 있으시면 마교 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알고 계실 겁니다. 놈들의 해악은 어쩌면 사도련에 더 치명적일 텐데요?”
하나, 내가 마교의 이야기를 꺼내자 백광호의 어조가 바뀌었다.
“놈들을 상대할 때 힘을 빌려달라는 거군.”
마교가 세를 불림에 따라 흑도인들이 피해를 보고 있음을 그도 알고 있는 모양이었는데.
“예. 그때에 한해 힘을 빌려달라는 겁니다. 나쁜 제안은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조건을 명확히 하자.
사실상 수락을 뜻하는 말이 나왔다.
“부탁은 그게 끝인가?”
공적인 부탁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하나, 사적으로 뜯어내야 할 것이 남아 있었다.
“부탁은 그게 끝인데, 위령제를 지내려면 은자가 좀 필요합니다.”
나는 씨익 웃으며 백광호를 향해 말했다.
“한이 많은 원혼이라면 좀 많이 필요하고요?”
* * *
백광호는 내달라는 은자를 두말없이 내주는 대신 순우욱을 비롯해 자신의 수하들을 내게 붙였다.
받아 간 은자의 용처를 확인하려는 목적이라기보다는, 패룡도를 찾았을 때 확실하게 확보하려는 것으로 보였다.
‘예상했다.’
하나, 패룡도를 찾으려면 백광호의 부하들을 떼어 놓아야 했다.
물론, 수하를 붙일 것은 예상했기에.
놈들을 떼어 놓을 방법도 있었다.
나는 일단 군말 없이 붙여준 수하를 데리고 인근의 수역 중 사도련의 전(前) 소련주와 그의 심복들이 실종된 곳으로 향했다.
“이곳이오.”
“확실히 사기가 가득하군.”
뱃사람들에게 용왕묘 수역이라 불리는 곳으로, 호리병 모양으로 생긴 파양호의 허리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이곳은 폭이 급격하게 줄어 물살이 빨라지는 지점이었다.
그렇다 보니, 소련주가 아니라도 사람과 선박의 실종이 잦은 곳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그냥 물귀신들이 많은 곳이라 할 수 있었다.
“일어나라!”
크어어어!!
나는 우선 물속에서 썩어가던 시체를 하나 일으켜 수면 밖으로 나오게 했다.
“말 좀 묻겠소. 혹 파양흑도….”
그리고 말을 섞는 척하다가, 시체 지배술을 슬쩍 풀어버렸다.
그리고 순우욱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쯧. 이래서야 될 일도 안 되겠소.”
“무슨 말이냐?”
“당신들이 뒈졌다고 칩시다. 그럼 당신들을 죽게 만든 인간들이 버젓이 살아 숨 쉬며 쳐다보고 있는데, 신표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겠소?”
“…….”
“돌아가시오. 돌아가서 련주님께 아무리 우리 사이에 신뢰가 없어도 내가 신표를 먹고 나르지는 않을 거라는 말을 전해주시오.”
“…끙. 알겠다.”
“그리고.”
“그리고?”
“당신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원혼을 불러내니 화들이 많이 났소. 원한이 너무 짙어 비용이 더 들 것 같소. 이 부근에 제단을 차릴 예정이니 조속히 천 냥을 더 가져다주시오.”
“…….”
그렇게 사도련의 졸개들을 돌려보낸 나는, 미리 약속해둔 신호를 보내 언동생들을 인근의 물가로 불렀다.
내가 시킨 대로 천막과 돗자리 등의 제사용품들을 지고 나타난 언동생들.
그중에 언용명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형님, 대행수님. 무사하셨습니까. 이야기는 잘 된 것입니까?”
“잘 됐으니 이리로 불렀지.”
“예.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언 대협께서는 신임련주를 들었다 놨다 하시더군요. 천녀는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천장호는 특유의 소신 발언을 해왔다.
“진짜 용운 형 따라다니다가는 제 명에 못 살지. 후, 사파랑 손을 잡는 건데 이래도 되나 모르겠네.”
정현은 그런 천장호를 향해 말했다.
“사도 혹은 흑도라 하여 함께 일을 도모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여기 계신 춘앵 대행수님도 흑도인이시지 않습니까. 또 오월동주(吳越同舟)라는 고사도 있습니다. 과거 춘추시대에 오나라와 월나라는….”
“정현 도장. 나 소천이 형 아닙니다? 오월동주 정도는 나도 알아요!”
“나 뭐.”
“내 말은 그 약속이란 게 결국 나중에 힘을 빌려달라는 건데. 그걸 믿어도 되냐 이거요!”
사부님께서도 한마디를 하셨다.
- 이건 나도 어린 거지 놈과 동감이니라. 백광호라는 놈이 신표를 잃어버린 경위 자체가 그 소련주를 살려주기로 했다가 죽이면서 벌어진 일 아니더냐?
천장호와 사부님의 우려에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따로 생각해 둔 게 있으니 걱정들 붙들어 매시고.”
그리고 은하연을 향해 백광호에게 뜯어온 은자가 든 궤짝을 내밀며 말했다.
“생각해보니 돈도 좀 뜯을 수 있을 거 같아서 뜯었소.”
“오, 정말요? 둘네여서여덟…. 좀이 아닌데요?”
“조금 이따 천 냥이 더 올 거요.”
여기서 천 냥이 더 온다는 소리에 침을 꼴깍 삼키는 은하연.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부탁한 일은?”
“제갈 군사님께 따로 연통은 했고. 그 외 다른 것들은 우 소협께 물으시면 될 거예요.”
“그렇군. 그럼 다들 여기다 제단 좀 차리고 있어, 용명이 너랑 정현 네가 잘 알 테니 주도하고.”
나는 언동생들에게 역할을 부여하며, 우리가 선 자리의 맞은편에서 빛나는 사당을 응시했다.
벽에 금칠이 돼 있는 저 사당은 용왕묘(龍王廟) 혹은 노야묘(老爺廟)라 불리는 사당이었다.
‘사도련의 신표인 패룡도는 저곳에 있다.’
백광호에게 살해당한 소련주.
그가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보험의 성격으로 남몰래 저 사당에 시주의 형식으로 미리 패룡도를 맡겨둔 것이었다.
‘그랬다가 본인이 죽어버리며 오리무중이 된 것으로 원작에 나오지.’
백광호 휘하의 악주검벌 출신의 우군은 눈앞에서 소련주가 탄 배가 가라앉는 것을 봤다.
하여, 물속만 뒤지다 보니 정작 저 사당을 찾을 생각을 못 한 것이다.
‘그야말로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인 거고.’
거기다 저 용왕묘가 흑도인들이 설칠 수가 없는 곳이라는 것도 한몫했다.
그도 그럴 것이.
파양호는 홍무제 주원장과 인연이 깊은 곳으로, 저 용왕묘는 홍무제의 명으로 중건한 사당이었다.
‘하여, 금군이 지키고 있다.’
함부로 뒤질 수 있는 곳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내겐 소릉이가 있었다.
함부로든 몰래든 뒤지는 일이라면, 중원을 다 뒤져보아도 이만한 녀석이 없었다.
“가자.”
“예! 언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