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220화 (220/444)

제220화. 호원단철 (1)

등장한 선단에 백광호의 수하들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련주님! 동편에 선단이 나타났습니다!”

그중 몇몇은 원숭이라도 되는 양 기민하게 돛대를 기어올라 목청을 높였다.

“기함(旗艦)에 나부끼는 깃발은 좌견천리 제갈혜라 되어 있습니다! 다른 배들에는 무림맹의 깃발이 달려 있습니다!”

“선수에는 학창의를 입고 백학선을 든 사람이 서 있습니다. 무림맹의 대군사라는 여자가 직접 온 모양입니다!”

나머지들도 일사불란하게 흩어져 밧줄을 쥐거나 북채를 잡았다.

그도 아니면 병장기를 뽑았다.

백광호의 지근거리에 서 있던 순우욱은 미간을 좁혔다.

“최소한 이틀은 더 걸릴 것이라 보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빠르게?!”

그에 백광호가 입을 열었다.

“명수잔도(明修棧道) 암도진창(暗度陳倉).”

“예?”

“제갈혜 본인은 다른 배를 수배해 미리 출발을 했겠지. 무창 수군진의 배들은 다른 사람을 시켜 뒤늦게 띄우는 것으로 우리의 오판을 유도한 거고. 제갈혜라는 여자가 꾀를 부렸….”

그러더니 나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아니지. 내가 찾아오자마자 패룡도가 튀어나온 것을 보면, 이미 입수(入手)를 해놓고 시간을 끌었다는 거군. 언용운 네 녀석의 꾀인가?”

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린 것 같은데. 저 같은 무림말학은 겁이 많아서 말입니다.”

“혼자서 나를 만나러 온 간덩이를 가진 놈이 겁이 많기는. 꾀 자체는 누구라도 생각해볼 만한 것이었으나, 패룡도에 사로잡힌 내 사각을 절묘하게 찔렀군.”

백광호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나저나 엉덩이 무거운 백도 놈들이 이렇게 기민하게 움직일 줄이야. 정말로 우리 손에 네 녀석이 죽었으면 하오문의 할망구 말마따나 정사대전이 일어날 수도 있었겠는데?”

“칭찬으로 들으면 되겠습니까?”

“그래. 이 백광호가 네 놈에게 한 방 먹었다.”

말을 마친 백광호는 주변을 향해 입을 열었다.

“뱃머리를 돌린다! 우리 우군이 여기서 무림맹과 피를 흘려봐야, 사도련의 다른 간사들만 쾌재를 부를 뿐이야! 철수한다!”

끼걱- 거리는 노 젓는 소리와 함께 몸체를 돌리기 시작한 대선.

그렇게 멀어져가는 와중에 백광호는 나를 향해 한마디를 뱉었다.

“앞으로 볼일이 ‘한 번’은 있겠군. 또 보도록 하지.”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나는 백광호를 향해 포권을 취하며 생각했다.

‘한 번을 은근히 강조하시네.’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되고 그러는 거지.

‘일단 빨대는 꽂아놨으니, 꼭 그렇게 되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기를 잠시.

춘앵이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언 대협?”

“?”

“저도 이만 사도련주님을 쫓아가 보겠습니다.”

“아, 그러셔야지.”

나는 춘앵을 향해 소매를 붙여 들었다.

“고마웠소. 춘앵 대행수 덕분에 날벼락을 맞을 뻔한 일을 피할 수 있었소. 하오문주님께도 감사하단 인사를 전해주시오. 덕분에 유혈사태로 번질뻔한 일이 어떻게 잘 마무리된 것 같소.”

“아닙니다. 천녀가 감사하지요. 대협을 돕겠다고 나선 일이었는데, 되레 대협께 목숨을 빚졌네요. 이 은혜는 언제고 갚도록 하겠습니다.”

“또 봅시다. 살펴 가시오.”

춘앵을 태운 배는 그렇게 사도련주의 선단을 쫓아 서서히 멀어져갔다.

제갈혜의 선단이 우리 앞에 도착한 것은 그쯤이었는데.

덜커덕-

가장 먼저 당도한 기함이 발판을 내리자.

하얀 학창의 차림에 머리는 틀어 올려 윤건으로 고정하고, 손에는 백학선을 쥔 제갈혜가 내려와 모용린을 향해 예를 표했다.

“검후님. 무탈하셨군요.”

“대군사께서 제때 와주신 덕분입니다.”

그런 제갈혜를 따라 무림맹의 맹원복을 입은 무사들이 따라 내렸다.

그중엔 반가운 얼굴이 둘이나 있었으니.

다름 아닌 당옥기와 제갈설지였다.

“언용운! 하연아!”

“용운 님!”

나는 녀석들에게 눈인사를 보낸 뒤.

모용린과 인사를 마친 제갈혜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대군사님을 뵙습니다.”

나를 따라 다른 언동생들도 입을 모았다.

“대군사님을 뵙습니다!”

“다들 무사했네. 늦지 않아 다행이다.”

제갈혜는 우리가 시간을 끌기 위해 차려놨던 제단과 하고 있는 행색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제사를 지내는 걸로 시간을 끌고 있었던 거니? 행색들이 그럴싸하네?”

“그러는 대군사님이야말로 그럴싸하신데요? 제갈가의 군사님 하면 생각나는 복장 그 자체이시군요. 무척 잘 어울리십니다.”

내 말에 제갈혜는 붉어진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큼. 노파심에 말하는데, 흑도인들에게 잘 먹히니까 이러고 나온 거지. 내 취향이 이런 게 아니야. 악주검벌 녀석들이 도망가는 거 못 봤니?”

하기야, 제갈혜의 차림을 보고 대군사가 직접 왔느니 어쩌니 호들갑을 떨긴 했다.

일리가 있다 싶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는데.

이 순간.

제갈혜가 나를 향해 눈을 흘겼다.

“그나저나 엿새 안에 사도련주가 꼬리를 말고 돌아갈 정도의 군세를 만들어서, 들키지 않게 와달라니. 너는 내가 무슨 신선 지팡이인 줄 아니?”

“애초에 대군사님께서 챙기고 계신다는 말을 믿고 그렇게 한 겁니다. 그리고 실제로 조건을 다 갖춰서 제때 오셨지 않습니까?”

“갖춰서 오기는? 저기 있는 배들? 기함 한 척만 진짜고 나머지는 깃발만 꽂은 가짜야. 맹에서 데려온 무사들은 한 명씩밖에 안 탔다고. 진짜로 싸움이 났으면 큰일 났었어.”

그녀의 말대로 제갈혜가 이끌고 온 배들은 깃발만 펄럭이고 있었지 타고 있는 무인들이 없었다.

아마 기함 하나만 이끌고 내려오다가 인근에서 징발한 배들에 깃발만 꽂고 이리로 온 모양이었다.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백광호의 인물됨을 잘 아시고, 이렇게 오신 것 아닌지요? 때만 맞추면 싸움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것을 다 내다보시고요?”

“…….”

“결과적으로 대군사님의 신산귀모에 흑도놈들이 모두 줄행랑을 친 게 된 것이죠.”

그러자 제갈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언동생들을 측은한 눈빛으로 쓱 훑으며 입을 열었다.

“…넉살은 좋아서. 이런 녀석을 주군으로 모시면 진짜 힘든데.”

그러자 언동생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야 그 끄덕거리는 고개들은?”

- …몰라서 묻느냐?!

* * *

우리는 제단을 정리하고 제갈혜의 기함에 올랐다.

기함의 선실에서 그녀는 우리에게 차를 대접했다.

“이만하면 그윽하네. 설지야, 다들 한 잔씩 따라주렴?”

“예, 고모님.”

나는 차례차례 차를 따르고 있는 제갈설지를 향해 물었다.

“하성이랑 궁윤이가 없는데?”

한데, 제갈설지가 당옥기에게 차를 따라주고 있던 터라.

나랑 눈이 마주친 당옥기가 입을 열었다.

“몰라? 나는 설지 편지 받고 사천에서 장강 타고 무창까지 왔다가, 대군사님이 도와달라고 하셔서 오게 된 건데? 남궁세가에 있지 않을까?”

그리고 뒤에 있던 제갈설지가 답을 주었다.

“맞아요. 하성 님이랑 윤 님은 남궁세가에 있을 거예요. 거기는 애초에 암어를 숨긴 서신도 보내지 않았으니까요.”

“하기야 남궁세가만큼 안전한 곳이 없긴 하지. 그럼 두 사람은 그냥 대군사님이랑 있다가 오게 된 건가?”

이 물음엔 제갈혜가 답을 주었다.

“그래. 옥기랑 설지는 나랑 같이 있다가, 용운이 네가 갑자기 계획을 바꾸자고 하는 바람에 급한 대로 고사리손이라도 빌려야겠다 싶어 함께 오게 된 거다. 네가 부탁한 기한이 원체 짧아야지.”

그런데 말미가 쉽지 않았다는 투로 끝나자.

듣고 있던 정현이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는 경황이 없어 그냥 지나왔는데 대군사님의 말씀을 듣고 나니, 이끌고 오신 선단에 백광호와 사도련의 우군이 물러가던 모습이 다시 한번 생각이 납니다. 촉박한 시간과 부족한 인력 속에서 허장성세를 펼치시어 흑도인들을 물리치셨으니. 가히 물 위에서 재현한 제갈무후의 공성계 아니겠습니까?”

용명이 녀석과 소릉이도 맞장구를 치고 나섰다.

“스무 배는 족히 넘는 우위를 저쪽이 점하고 있었는데 물리치셨으니 대단하시긴 합니다.”

“맞아요!”

하나 제갈혜 본인은 분하다는 듯 입술을 씹었다.

“공성계는 무슨. 고육지책이겠지, 무림맹의 정예 전력과 이끌고 와서 위엄을 보였어야 했는데.”

그 와중에 소천이 형이 천장호를 향해 큼지막한 몸을 기울여 귓속말을 했다.

“뭔 소리를 하시는지 모르겠군. 우린 그냥 가만히 있자, 천장호.”

하지만 다 들렸다.

“이 형은 뻑하면 나를 동급으로 보시네. 나는 다 알아들었수! 성공계!?”

“이보게 장호. 성공계가 아니라 공성계일세….”

“그래! 공성계!”

그 바람에 한바탕 웃음이 터진 가운데.

제갈혜가 손사래를 치며 입을 열었다.

“그 이야기는 그쯤하고 경위나 들어보자. 상주부에서부터 차근차근 이야기 좀 해주겠니?”

“예.”

제갈혜의 부탁에 나는 춘앵을 다시 만났던 순간부터, 백광호를 만난 것과 패룡도에서 눈알 한쪽을 뽑아 둔 일까지 쭉 늘어놓았다.

“…그걸 한눈에 알아보고는 저쪽에서 공격을 하려 할 때 대군사님이 딱 와주신 겁니다.”

내 말에 당옥기는 입을 쩍 벌렸다.

“…사도련주한테 사기를 쳐서 벗겨 먹은 정파인은 언용운 네가 처음 아닐까? 그리고 뭐? 사도련의 신표에 박혀 있는 용의 눈알을 뽑아? 진짜 미쳤나 봐. 간도 크다!”

“사기라니. 백광호 같은 양반이랑 구두로 맺은 약속을 어떻게 믿냐?”

모용린은 그 순간이 생각나는지 헛웃음을 지어 보였다.

“비구니는 아니라도 보타문의 검을 수련하며 불가에 발을 디뎌, 욕을 잊은 지 오래되었는데…. 그 순간엔 저 아이가 미쳤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스치더구나.”

그리고 이야기를 해달라던 장본인인 제갈혜는 단호한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그 순간에 있지 못해서 분위기를 모르니 판단이 안 서는데…. 패룡도에서 뽑은 녹옥은 정말 괜찮은 거니?”

“괜찮을 것 같습니다. 저희끼리야 입단속을 할 거고. 저한테 한 방 먹은 게 퍼져봐야 본인 권위만 떨어질 테니 사도련 쪽은 백광호 본인이 단속하겠죠.”

“하기야 악주검벌은 백광호를 향한 충성심이 대단하니, 이야기가 나돌지는 않겠지. 시원하게 긁자니 부스럼이 되어 정사대전으로 번질 것이고, 내버려 두자니 후기지수 중 누구 하나는 반드시 죽어 나갈 일이라 그야말로 난제였는데…. 이 문제를 이렇게 해결을 보았네. 당분간 사도련 쪽은 잠잠하겠어.”

“그럴 겁니다. 패룡도를 앞세워 반목하던 자들을 찍어누르느라 당분간은 바쁠 테니까요.”

“그래, 덕분에 한시름 덜었다. 고생 많았어. …하, 근데 너는 진짜 군사부에 와야 하는데?”

나를 보며 입맛을 다시던 제갈혜는, 문득 생각난 게 있었는지 입을 열었다.

“용운이 너 검 좀 보자. 검명이 회한이라지?”

뜬금없이 왜 검을 달라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지만.

이유가 있겠거니 싶어 나는 회한을 뽑아 제갈혜에게 내밀었다.

스렁-

회한을 받아 슬쩍 가늠해본 제갈혜는 검병을 내게 돌려주며 말했다.

“얼마 전에 빙궁에서 사절이 와서, 검 한 자루 벼릴 정도는 되는 만년한철 철괴를 선물로 받았는데. 나는 필요가 없어서….”

“주시겠다고요?”

“…갑자기 왜 주기 싫은 마음이 들지?”

“그런 심마는 속히 떨쳐내셔야 합니다.”

“참 나. 원래는 군사부에 오겠다 하면 주려고 했는데. 공은 너무 크고, 대놓고 치하도 해줄 수 없으니. 줄 수밖에 없겠다. 무창에 가는 대로 사람을 시켜 보내주도록 할게.”

* * *

장강을 거슬러 올라온 우리는 무창을 거쳐 북상 정무학관에 이르렀다.

뚝딱! 뚝딱!

쾅! 쾅! 쾅!

개학이 보름 정도 남은 시점에 도착한 학관은 막바지 재건 공사가 한창이었다.

하여, 연이 깊은 단강제일객잔을 숙소로 삼은 그날.

어쩐지 눈동자가 깊어진 은하성과 남궁윤이 복귀했다.

“너네 왜 우리 파양호에서 죽네 사네 하고 있을 때 안 왔어?”

“예?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어. 있었어. 왜 안 왔어?”

“모르는데 어떻게 가요!”

“…오히려 내 쪽에서 묻고 싶다. 왜 안 불렀지?”

그렇게 일상에 복귀한 나는 기숙사 신축현장이 설계대로 지어지고 있는지를 살폈고.

소식지 사업도 챙겼다.

소식지는 주필 겸 공보부장을 맡기로 한 선배만 복학하면 될 정도로 일의 진척이 막바지였다.

“후. 이 학기부터는 소식지 사업을 시작할 수 있겠군. 은 소저, 고생 많았소.”

“언 공자의 외조부님이 꼼꼼하게 챙겨주셔서 가능했네요.”

“그런데 호원단철 쪽은 어찌 돼가는 것이오? 왜 말이 없지?”

“아. 그게 일단 대장간 쪽이 정상화가 돼야 불하하는 과정을 거칠 수 있는데, 방학 기간 내내 지지부진한가 봐요.”

“이상한 놈들이 꼬인 건 아니고?”

“사마외도가 꼬인 것 같지는 않은데, 이해관계가 좀 얽혀있는 것 같아요.”

“…한번 알아봐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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