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3화. 회한 (1)
나는 창량에게 건네받은 동패를 살펴보았다.
‘막간산의 대장장이 소리에 덥석 챙기고 봤는데, 확실히 장인이 만든 티가 나긴 하네.’
앞면에 양각된 탁(卓)자는 힘있게 느껴졌고.
뒷면에 새겨놓은 계곡의 모습은 색감이 없는데도 절경임을 알 것 같았다.
‘막간산에서 탄생한 숱한 명검들이 연마재를 씻어냈다는 검지(劍池)인가?’
하나, 이걸 제대로 사용하려면 전후 사정을 좀 들을 필요가 있었다.
은원패라는 것은 본디 이어받은 자가 사용하더라도 효력이 있었지만.
내 경우엔 사정이 좀 달랐다.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은 야장 집단이 내 휘하에 들어와 단강구에 터를 잡는 것이니까.’
막간산이 위치한 곳은 절강성이었다.
절강성에서 단강구.
거리도 멀거니와 중원이 쪼개져 있던 시절을 생각하면 나라가 달랐으니, 이역만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살아온 터전을 떠나 이역만리로 이주하는 것은 어지간한 은원패로 될 일이 아니었다.
하여, 나는 창량을 향해 물었다.
“실례가 아니라면 이 동패의 원주인과 정확히 어떤 인연이 있으신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젊어서 표주(漂周)를 하던 시절, 탁장명이라고 녹림 무리에게 둘러싸인 대장장이가 목숨을 위협받던 걸 구해준 일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막간산에 적을 둔 탁가철방의 후계자더군.”
표주는 젊은 도사들이 세상을 익히기 위해 사문에서 나와 풍찬노숙을 하며 강호를 주유하는 것을 말했다.
그 시절이 떠오른 것인지 창량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더니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나를 향해 말했다.
“네 말이 옳다.”
물은 질문은 동패와 정확히 어떤 인연이 있느냐였는데.
갑자기 내 말이 옳다는 말을 하니, 나로서는 뜬금없이 느껴졌다.
“갑자기요?”
“악한 자를 방벌하여 의를 바로 세우지 못한다면 무를 갈고 닦는 보람이 없다. 호원단철장에서 네가 했던 이야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아.”
평소의 지론이긴 했으나, 이렇게 들으니 좀 멋쩍었다.
하여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창량의 손이 내 어깨로 향했다.
무의식적으로 격려를 하고자 두드리려는 모양이었는데.
정작 그 손이 내 어깨에 닿지는 않았다.
“…….”
“…….”
창량의 손은 내 어깨 앞에서 어색하게 멈췄다.
- 이 말코 놈은 왜 어깨를 두드리려다 저러고 있느냐?
‘그럴 사이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나 봅니다.’
내 예상이 맞았던 모양인지, 창량 은 뻗었던 손을 본인의 입가로 가져가더니 헛기침을 하며 몸을 돌렸다.
“큼. 아무튼 야장들이 골을 부린다고 들었다. 필요하다면 사용하도록.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창량은 그 말을 끝으로 쌩하고 자리를 떴다.
“요긴하게 쓰겠…. 가셨네.”
내 답도 듣지 않고.
수결을 받을 틈을 보고 있던 단강제일객잔 주인장의 가슴에 야속함을 남긴 채.
“아잇! 그냥 가셨습니까요? 차도 한잔 안 하시고요?”
그렇게 창량을 보내고 나니.
예해수 선배가 여전히 수첩에 세필 붓을 놀리고 있는 게 보였다.
“한데, 예 선배. 아까부터 수첩에 적고 계신 것은 뭡니까?”
“아, 무림맹에 파견 가 있던 동안 속기하던 게 버릇이 되어놔서요.”
“그런 것 치고는 지금도 뭘 적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 이거는 방금 대화를 토대로 소식지를 쓴다면 제목을 어떻게 뽑을까 적어봤어요.”
“제가 한번 봐도 괜찮겠습니까?”
“당연히 괜찮지요. 여기요.”
내 말에 예해수 선배는 흔쾌히 수첩을 내밀었다.
‘크. 누가 점찍었는지 진짜 적임 아닙니까, 사부님?’
나는 씨익 웃으며 수첩으로 시선을 옮겼….
『향란관의 자치회장 매진악이 피눈물을 흘리다!
언용운의 의기에 단강구 일대의 야장들이 벌벌 떨고.
향란관의 사감 교수 창량이 청죽관을 찾아온 이유!』
…다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 *
나는 주인장에게 부탁해 조촐한 환영연을 마련했다.
“이번 학기에 복학해서 공보부장을 맡게 된 예해수예요.”
“예 후배! 드디어 왔구만! 이로써 우리 청죽관의 자치회도 완벽해진 건가?”
“회장님, 오랜만에 뵈어요. 그런데 완벽이란 말은 좀 부끄럽네요. 여기 언 후배님을 필두로 다른 후배님들 덕분에 청죽관의 입지가 제가 휴학하기 전이랑은 천지 차이인걸요?”
“하하. 그 말은 맞네. 아, 여기 두 친구가 자네 직속 후배일세.”
“고, 공보차장 우소릉이에요! 잘 부탁드려요!”
“은하성입니다! 호칭은 부장님, 선배님, 누님 중에 어떻게 불러드리면 되겠습니까?”
“편하신 대로 하시면 될 것 같아요.”
“그럼 해수 누님이라고 하겠습니다!”
한데, 가만두면 인사를 하다 하루가 다 갈 판이라 내가 입을 열었다.
“자자, 오늘부터 함께 생활하면서 만날 볼 텐데 인사야 천천히 하도록 하고. 음식부터 먹는 게 어떻겠습니까? 다 식겠습니다.”
그렇게 모두가 자리에 앉아 젓가락을 놀리기 시작한 가운데.
나는 경룡이 형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오늘 회장 총회 다녀오셨지요?”
“음. 그랬지.”
“아까 소릉이가 그러던데요. 개강이 늦어질 수도 있다는 말을 하셨다고요?”
“부회장도 알고 있지 않나? 운영위원회에 갔을 때 총장님께서 말씀하셨던 것 같은데?”
“말씀은 하셨는데 당시만 해도 말끝을 흐리시지 않았습니까? 확정이 난 건가요?”
“날 것 같네. 애초부터 재건축 계획이 있었던 우리랑 달리 다른 기숙사들은 착공을 늦게 시작해서 진척이 늦은 모양이야.”
“그렇군요.”
“연기도 연기인데 개강을 아예 무림맹이 수군진을 마련한 무창에서 할 수도 있을 것 같네. 견학을 겸해서 배나 물속에서 싸우는 법을 가르치면 어떠냐 하는 이야기도 나왔거든.”
경룡이 형에게 물을 것을 다 물은 나는 은하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개강이 늦을 것 같다 하니. 장차 호원단철을 운영해줄 야장을 찾는 일을 이 시기에 해결을 봐놓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은 소저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괜찮은 생각인 거 같아요. 한데, 강남에는 딱 입맛에 맞는 장인 집단이 마땅히 없는 것 같아서, 태원상단 쪽에 문의를 해볼 참이었어요.”
이쯤 하여 당옥기가 젓가락을 들고 나섰다.
“사천의 장인들도 괜찮은데.”
그 말에 정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로부터 사천은 비단과 철기가 좋기로 유명하긴 했습니다.”
“흐흫. 만날 답답한 소리만 하는 줄 알았더니 뭘 알긴 아는구만?”
“예. 대표적으로는 포원이라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촉한의 서조연을 지내신 분으로 선주의 명으로 검을 오만 자루나….”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어.”
일장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한 정현과 젓가락을 내려놓고 귀를 막는 당옥기.
“하하하하.”
두 녀석 덕분에 한바탕 웃음이 지나간 가운데.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괜찮은 장인이야 사천에도 있고 강남에도 있지. 외조부님이 계신 산서에도 있을 것이고…. 문제는 단강구에 올 생각이 있느냐야.”
“언공자의 말에 한마디를 더하자면, 단순히 괜찮은 장인으론 안되고 단강구 야장들의 담합과 텃세를 찍어누를 실력과 명성이 있어야겠죠.”
“그래서 말인데, 오전에 창량 교수님이 이런 걸 주고 갔소.”
나는 동패를 내밀었다.
동패를 받아 앞뒤로 살펴본 은하연은 아미를 구겼다.
“흠. 탁가철방의 은원패네요?”
“그렇소. 창량 교수님께서 표주를 하시던 시절에 그곳의 후계자를 구해준 적이 있으시다더군.”
“막간산의 대장장이 중에서도 실력만큼은 최고죠. 처한 사정 자체는 단강구로 이주할 법도 할 거예요. 제가 알기론 탁가철방은 형편이 좋은 적이 없으니. 지금쯤 빚더미에 올라있을 거예요.”
“표정도 그렇고, 말투도 그렇고 남은 말이 더 있는 듯하오만?”
“창량 교수님이랑 연이 닿은 분은 여전히 후계자 신분이시고. 대야장님으로 계신 분은 탁종건 어르신인데, 고집이 여간 강한 게 아니세요. 과거에 아버님께서 제의를 한 적이 있다던데….”
“거절하셨구만.”
“예.”
은하연과 내 대화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저마다 입을 벌렸다.
“하연이 아버님이면 강남상왕 그분 아냐? 그분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보, 보통 인물은 아니신가 보네요.”
“이런 건 기록을 해놔야죠. 탁가철방의 탁종건 어르신은 강남상왕의 제안을 거절한 바 있다.”
그러고 보니 창량 교수님도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고 했는데 아마 저런 이유에서였던 모양이다.
‘흠. 그럼 이 동패는 못 써먹는 건가?’
이때, 은하연이 구기고 있던 아미를 펴며 말했다.
“그런데 한번 찾아가 보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아요.”
“대야장 어르신의 고집이 대단하시다고 초를 친 게 본인 아니오?”
“…그렇긴 한데, 가만 생각해보니 언 공자라면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르신들한테 인기 좋으시잖아요?”
은하연의 말에 듣고 있던 언동생중 몇몇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섰다.
“하기야, 약왕 어르신도 언 소협을 보시고 모습을 드러내셨고, 개방의 방주님도 마음에 들어 하셨습니다.”
“산서금붕 어르신도요!”
“…우 동생. 그분은 형님의 외조부님이시잖아.”
은하연은 피식 웃으며 못다한 이야기를 마쳤다.
“회장님 말씀처럼 무창에서 개강을 한다면 물길로 갔다 왔다 딱이잖아요. 그리고….”
“그리고?”
“이주 이야기가 잘 안 풀려도, 후계자의 구명지은인데 적어도 검 한 자루는 벼려주시지 않을까요?”
“…하기야 대군사님께 받은 만년한철 철괴도 있겠다. 검 한 자루만 벼려와도 내가 밑질 것은 없겠군.”
“근데, 혹시 모르니 저희 중에 몇 명 데려가시는 게 좋겠어요.”
“철괴를 노리는 자가 있을까 봐?”
“예. 대군사님께서 은밀하게 주셨으니 언 공자한테 만년한철 철괴가 있다는 사실은 저희 말고 아는 사람이 있을까 싶긴 한데, 혹시 모르잖아요?”
“그리하겠소. 근데 은 소저는 안 데리고 갈 거요.”
“기대도 안 했네요. 지금 벌인 일이 몇 개인데, 언 공자가 자리를 비우면 저라도 챙겨야죠. 갑자기 돈이 필요한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전표나 받아 가세요.”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나는 빠르게 나와 함께 막간산으로 갈 녀석들을 꾸렸다.
“정현.”
“예. 언 소협.”
“같이 간다.”
“예!”
“소릉이는 예해수 선배랑 좀 친해지고 있어. 직속인데 그렇게 낯을 가리면 어떻게 해? 하성이 네가 간다.”
“믿고 있었습니다!”
“…떼 놓고 싶네. 당옥기 너도 할 일 없지?”
“캭!! 왜 말을 그런 식으로 해?! 할 일 많거든!”
“연구실 불탔다는 핑계로 만날 객잔에 죽치고 있으면서 무슨 할 일이 있는데?”
“홍옥이랑 석류 밥도 주고 뭐 많아!”
“그건 우리 중에 아무나 맡기면 되는 일이잖아. 간 김에 암기 같은 거도 물어보고 하면 될 거 같은 데 안 갈 거야?”
“갈 거야!”
* * *
나는 막간산에 다녀올 계획을 학관에 신고했다.
총장님께 직접 신고를 한 터라 허락은 곧바로 떨어졌고.
대군사님께 서신을 보내 미리 도움을 구한 뒤.
무창의 수군진에서 배를 빌려 장강에 몸을 올렸다.
기후는 온화했고 바람은 순풍이었다.
얼마 전 무림맹과 사도련의 선단이 충돌할 뻔했다는 소문이 일대에 파다한 덕분에, 무림맹의 연락선 기가 펄럭이는 우리 배에 시비를 거는 자들은 없었다.
“저게 막간산이고, 저기 보이는 저곳이 은 소저가 말한 철방거리인가 보다.”
덕분에 우리는 예상했던 소요 시간보다 사흘을 앞당겨 막간산의 철방 거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인가 봅니다, 언 소협.”
“…최고라더니 허름한데요? 다른 곳은 붐비는데 손님도 없고.”
“하연이가 빚이 많다고 그랬잖아.”
“쉿. 입조심들 해라.”
나는 언동생들의 입단속을 시켰다.
그리고 철방의 문을 두드렸다.
쿵쿵!
“계십니까?”
한데, 반응이 없었다.
나는 조금 전보다 강하게 문을 두드렸다.
쿵쿵쿵!!!
“계십니까? 조금 전까지 분명 쇠두드리는 소리가 났는데 왜 반응이….”
그러자 얼굴에 검칠이 가득한 대장장이가 나와 입을 열었다.
“누구십니까?”
“탁장명 야장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제가 탁장명입니다. 처음 뵙는 분들인데, 당분간 주문은 받지 않는다고 써 붙여 뒀습니다만?”
후계자인 탁장명 본인이 직접 접객할 정도로 사정이 어려운 모양이었다.
더 말할 것 없이 나는 창량 교수에게 받은 동패와 서신을 꺼내 보였다.
“아! 창량 교수님께서 보내셨나 보군요?!”
동패를 확인한 탁장명은 화색으로 우리를 반겼다.
하나, 함께 내민 서신을 펼쳐보더니 금세 낯빛이 어두워졌다.
“괴룡이시라고요?”
“예. 그리 불리고 있습니다.”
“서신에는 야장을 찾으신다고 돼 있는 것 같은데, 맞습니까?”
“그것도 맞습니다.”
“…크흠. 이게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닌지라, 괜히 귀한 분들의 시간을 헛되이 뺐느니 바로 아버님을 만나게 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철방의 문을 닫아 걸더니.
자신의 집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렇게 도착한 탁가에서 우리를 맞은 건.
돌아앉은 자세로 호통을 쏟아내는 탁종건 어르신이었다.
“뭐? 터전을 옮겨? 구정물을 퍼붓기 전에 당장 돌아가시라고 해라!”
“아버님! 그래도 소자를 구명해주신 화산파의 창량 도장께서 은원패를 들려 보낸 분들이십니다!”
“본인도 아니고, 새파란 후기지수를 보내서 이런 말을 전해? 고상한 방식으로 모욕을 하는 것 아니더냐!”
탁장명은 그런 아버지와 우리 사이에서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도장께서 소자의 목숨을 구명해주신 게 언제인데요? 저는 저만 기억하고 있는 일이라 여길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새파란 후기지수가 아닙니다. 괴룡이라면 천하에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제가 일전에 이야기 드린 적 있을 텐데요? 그리 멀지 않은 태호에서 퇴기들의….”
그런 탁장명의 말에 탁종건은 휙 하고 몸을 돌리더니.
조금 전보다 더욱 단호한 태도로 언성을 높였다.
“기억에 없다! 장명이 네 녀석은 그런 세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니 벼려내는 검이 여즉 그 모양 그 꼴인 게다! 네 녀석의 은인이면 네가 주무른 검 몇 자루 쥐여서 돌려보….”
그런데, 하려던 말을 하다 말고 나를 보고 멍한 표정을 짓더니.
“!”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객께서 허리춤에 차고 있는 그 검, 내가 잠시 봐도 괜찮겠소?”
탁종건은 목소리는 펄펄해도 자리보전을 하고 있는 노인이었다.
나는 집째로 회한을 끌러 탁장명에게 건넸다.
그렇게 아들을 통해 회한을 넘겨받은 탁종건은 이리저리 검을 살펴보다, 어느 순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회한을 차고 다니는 검수가 있다더니….”
그러더니 나를 향해 물었다.
“…내가 이 검을 하룻밤만 빌려도 되겠소?”
천하에 파다한 언용운이라는 이름은 모르면서, 회한을 차고 다니는 후기지수는 기억하는 탁종건.
그의 눈에선 어떠한 한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꽉 막혀 보였는데. 의외로 일이 풀릴 것 같네.’
“그러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