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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언가 망나니-224화 (224/444)

제224화. 회한 (2)

탁종건의 방에서 나온 우리는 탁장명이 기거하는 독채로 향했다.

대장장이의 집 아니랄까 봐 그 짧은 거리에도 여기저기 벼려놓은 날붙이와 숫돌들이 널려 있었는데.

“음?”

그중에 하나는 제대로 된 검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호기심이 동한 나는 탁장명을 향해 말했다.

“야장님이 만드신 검입니까?”

“아, 예. 맞습니다.”

“뽑아봐도 괜찮을까요?”

“서투른 솜씨인지라 눈만 버리실 겁니다.”

하나, 검을 뽑아보니 방금의 말은 겸양이었음이 드러났다.

스르렁-

검병이 손에 착 감기는 것은 물론이고.

잘 벼려진 검에서 드러나는 특징인 구름 문양까지.

곁에서 함께 그것을 확인한 정현이 입을 열었다.

“허, 검 중의 검은 막간산의 대장장이 손에서 벼려진 검이라더니. 춘추시대 간장과 막야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명성이 여전히 강호에서 통용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정현의 말에 탁장명은 머리를 긁었다.

“과찬이십니다. 아버님께서 제가 벼린 검을 두고 호통을 치시는 걸 함께 들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대야장님의 눈이 워낙에 높으신 탓일 겁니다. 언 소협. 같은 백령정강 검인데도, 맹주님께 얻은 것보다 훨씬 좋아 보이지 않습니까?”

“내 눈에도 그래 보이네.”

“그리 금칠을 해주시니 부끄럽습니다.”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었지만, 부끄러운 것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탁장명은 그쯤 하라는 듯,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만 안으로 드시지요. 마침 저녁때이니, 들어가 계시면 상을 봐서 올리겠습니다.”

그 말에 따라 방에 들어가 기다리기를 잠시.

돌아온 탁장명이 부끄러운 표정으로 밥과 찬거리를 식탁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귀인이 오셨는데. 대접이 변변치가 않습니다.”

그렇게 상에 오른 음식들은 볶은 청경채와 죽순 같은 파릇파릇한 채소들이었는데.

이 순간 은하성이 사람 좋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변변치 않기는요, 충분합니다! 초원이 생각나고 좋은데요?”

녀석 딴에는 부끄러워하지 마시라는 뜻으로 말한 것 같았으나, 넉살이 과했다.

‘사람 봐가면서 해야지.’

나는 집었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하성이 놈의 이마에 딱밤을 갈겼다.

따악!

“앜! 형님! 저는 그냥 분위기 좀 바꿔보려고….”

은하성은 이마를 싸쥐며 변명을 하려 했다.

한데, 방문이 열리더니 남산만 한 배를 한 탁장명의 부인이 빼꼼 얼굴을 비췄다.

“서방님. 이것도 가져가세요.”

탁장명은 부인에게로 향했고.

두 사람은 자기들끼리만 이야기를 나누려는 듯 속삭였다.

“부인? 양고기가 갑자기 어디서?”

“앞집에서 빌려왔어요. 귀인이신데 어떻게 볶은 채소랑 두붓국만 드려요.”

하나, 오감이 발달해 귀가 밝은 우리에겐 다 들렸다.

나는 은하성을 향해 이마를 대라고 손가락을 까딱였다.

평소 말대답을 버릇처럼 하곤 하던 은하성도 묵묵히 이마를 깠다.

딱! 따악!

그러는 사이 구운 양고기가 담긴 그릇을 들고 돌아온 탁장명을 향해, 당옥기는 말했다.

“보니까 부인께서 산달이 다 되어가는 것 같은데. 의원은 불러보셨나요?”

“초기에 진맥할 때랑 이후에 한번. 그렇게 두 번을 모시긴 했는데, 근래에는 형편이 좀 좋지 않아서 부르지 못했습니다.”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이 친구가 이래 봬도 의원입니다.”

“…이래 봬도?”

“약왕 어르신께서 칭찬한 솜씨를 가지고 있고요.”

“…흐흥. 그 말부터 할 것이지.”

“맥을 좀 봐 드리면 어떻겠습니까?”

“아이고. 그래 주시면 저희 내외로서는 너무 감사한 일인데, 죄송해서….”

“허락하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당옥기.”

“알았어.”

그렇게 부인을 쫓아나간 당옥기는 잠시 뒤 진맥을 마치고 돌아와 입을 열었다.

“산모도 태아도 모두 건강해요. 아이가 근데 좀 큰 거 같은데, 고기는 저희가 먹는 게 낫겠네요. 지금 시점에서 보양은 좋지 않아요.”

그런 당옥기를 향해 나는 조심스럽게 전음을 보냈다.

[하성이 녀석처럼 고기반찬 먹고 싶어서 그런 소리 하는 건 아니지?]

[사람을 뭐로 보는 거야?]

[농담이다.]

나를 향해 살쾡이 눈을 떠 보인 당옥기는 탁장명을 향해 말했다.

“부인께도 말했는데, 자칫 난산이 될 수 있으니 기름진 음식은 피하고 틈틈이 걷기라도 해주시면 좋을 거 같아요.”

“예. 꼭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조만간 몸을 푸셔야 할 것 같으니, 얼마간이라도 일이나 거동을 도와줄 사람을 들이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이거 감사해서 어떡하지요. 여기 계십시오. 제가 아는 분들께 닭이라도 좀 얻어서….”

탁장명은 우리를 향해 연신 인사를 하더니, 밖으로 나갈 태세를 취했다.

나는 그런 탁장명의 소맷자락을 잡으며 말했다.

“됐습니다. 그보다 회한은 어떤 사연이 있습니까? 보아하니 대야장께서 만드신 것 같은 분위기던데…. 괜찮으시다면 그 이야기나 좀 해주시죠?”

“아, 회한 말씀이시군요. 근데 저도 아버님께 직접 들은 이야기가 아니고, 인근의 야장 숙부들께서 하시는 이야기를 얼결에 듣게 된 것이라 확실치는 않습니다.”

“감안하고 듣겠습니다.”

“어머니께서 저를 낳고 돌아가셨는데, 그즈음 만드신 검으로 압니다.”

* * *

탁가철방의 대야장 탁종건.

근래 들어 기력이 쇠해 앉거나 서 있는 시간보다 누워 있는 시간이 훨씬 많아진 그였다.

“…회한.”

한데, 손에 들린 검을 마주하자 어째선지 정신이 또렷해지고 전신에 기운이 돌아왔다.

그 기운에 힘입어 탁종건은 노구를 이끌고 집 안에 있는 사당으로 향했다.

도착한 사당에서 향을 피운 탁종건은 숱한 위패 중 오래전에 세상을 저버린 부인의 것을 집었다.

그리고 물었다.

“회한이 내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은 무슨 이유요?”

그런다 한들 대답을 할 리 없는 위패였으나.

탁종건은 위패를 향해 넋두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 검이 어떤 검인 줄 아시오? 모르고 갔으니 알 리가 없겠지. 당신 장례 치를 비용을 마련하려고 만들었던 검이오.”

젊은 날의 탁종건은 자신이 막간산 대장장이들의 적자라 여겼다.

“오만했소.”

농기구의 주문 같은 것은 애초에 받지도 않았고.

무구(武具)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도 가려 받았다.

됨됨이가 되지 않는 자에겐 검을 줄 수 없다는 치기 어린 소리를 지껄이고 다녔더랬다.

하여, 탁가철방은 궁핍했다.

“그러다 당신이 세상을 떠났소.”

그 궁핍함에 짓눌려 탁종건의 부인은 명을 달리했다.

“장례비가 필요해졌지. 살아 있을 때도 제대로 해주지 못한 지아비 노릇을 하겠다고 검을 벼려주기로 약속하고 선대를 받아 당신을 꽃가마에 태워 보냈소. 살아 있을 때나 잘해줄 것을….”

그렇게 장례식을 치르고.

탁종건은 정신없이 한철을 두드렸다.

평생을 지껄여 온 신념들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약속했으니 만든다는 심정으로 억지로 검 한 자루를 벼려내고 나니, 새겨놓은 검명이 회한이었다.

“회한은 당신에게도, 이 검을 거쳐 간 주인들에게도 부끄러운 검이오.”

하여, 탁종건에게 회한은 부끄러운 검이었다.

장인으로서도 지아비로서도 말이다.

“…나더러 어찌하라는 것이오.”

이후의 삶에서도 탁종건은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다.

하나, 그 자존심은 젊은 날처럼 치기 어린 오만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발버둥이라는 표현이 어울렸으리라.

탁가철방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장인의 자존심을 지켜냈을 때.

그것을 지켜냈을 때, 내세에서 지난날의 과오에 대해 할 말이라도 있을 테니 말이다.

그것이 만회할 길이 없어진 미안함에 대해, 탁종건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였다.

“나더러….”

탁종건이 그렇게 넋두리를 쏟아낸 지 한참.

어느덧 아침이 밝아왔다.

이제 회한을 주인에게 돌려줘야 할 시간이었다.

“…….”

탁종건은 평생 풀무질을 하느라 불편해진 다리를 이끌고 터덜터덜 사당을 나왔다.

한데, 사당 밖으로 나와보니.

멀찍이 떨어진 사당의 문가에 회한을 차고 다니던 검수, 언용운이 있었다.

탁종건은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거기 계시었소?”

“저녁을 먹고 나서부터 있었습니다.”

“장명이가 손님 대접을 소홀히 했나 보오.”

“아뇨. 대접은 충분했습니다.”

“하면?”

“그냥. 저한테도 소중한 검이라서 지키고 있었습니다.”

“…….”

* * *

밤새 사당을 지키고 있었다는 내 말에.

탁종건은 홀로 시간이 정지한 듯 우뚝 멈춰 섰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회한을 자연스럽게 건네받았기에 난 사부님과 다시 재회할 수 있었다.

- 구정물을 뿌린다느니 열받는 소리를 하길래 고루한 늙은이인 줄 알았더니, 나름대로 딱한 구석이 있더구나.

그렇게 운을 뗀 사부님은 탁종건이 위패를 붙들고 털어놓은 넋두리를 전해주셨다.

- …그렇게 되어서 내가 들어 있는 이 회한이라는 검이 만들어졌던 것이더구나.

‘…음. 그렇군요.’

탁장명에게 전해 들은 말에, 사부님의 이야기까지 듣고 나자.

내 입에서는 이런 말이 나갔다.

“일행 중에 의원이 있어서 며느님의 진맥을 해드렸습니다.”

내 목소리에 멈춰있던 탁종건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그래 주셨구려.”

“예. 며느님과 복중의 손주 모두 건강하답니다.”

“아들놈의 목숨을 구해준 은원패를 가져오신 분을 체통 없는 늙은이가 박대하였는데도, 며느리와 손주의 안위까지 봐주시다니. 막간산의 탁 모가 이리 감사를 표하오.”

탁종건은 나를 향해 깍듯이 포권을 취하며 어제의 무례를 사과했다.

하나, 그러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받은 것이 많은데, 미안하지만 나는 단강구로 갈 수가 없소.”

음?

우리가 아니라 나는?

“그러십니까?”

“그렇소. 은혜를 모르는 인간이라 손가락질을 하더라도 별수가 없소. 나는 이 땅에 뼈를 묻어야 할 과오가 있기 때문이오. 어차피 이 늙은 몸으론 공자를 따라가도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을 것이오.”

탁종건의 말은 얼핏 내 제안을 거절하는 것으로 들렸다.

하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대상을 ‘우리’가 아니라 ‘나’. 그러니까 본인에게 국한하는 투였다.

‘…나중에 탁장명을 데려가라는 투이신데?’

그 나중이라는 것은 아마 본인이 죽고 난 이후를 말하는 것 같았다.

느껴지는 속뜻에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던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어르신의 사정이 이해가 갑니다.”

어차피 이 집엔 만삭 상태인 탁장명의 부인이 있었다.

애초에 당장 단강구로 데려갈 여건은 아닌 것이다.

가타부타 무슨 말을 하는 것보다 그냥 인연을 만들어 뒀다고 생각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탁종건은 그런 내 말에 다시 한번 포권을 취하며 입을 열었다.

“공자님의 아량에 기대 한 가지 부탁을 더 드리고 싶소.”

“부탁이요?”

“괜찮다면 그 회한을 며칠 더 빌려주시오.”

뜨거운 고로를 가까이 해왔기 때문인지 몰라도 탁종건의 한쪽 눈은 혼탁했다.

“새로 벼려드리고 싶소. 정신이 없던 시절에 아무렇게나 벼린 검이라 미흡하기 그지없는 검이라오. 그걸 바로잡고 싶소. 이 무례한 늙은이의 청을 들어주시겠소?”

하나, 이 말을 하는 순간만큼은 그 혼탁한 눈동자가 이글이글 끓는 것 같았다.

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 되레 제 쪽에서 부탁을 드리고 싶었던 겁니다.”

“공자의 눈에도 회한의 미흡함이 보였던 모양이오. 부끄럽소.”

“그런 건 아니고. 제 수중에 모종의 일로 무림맹의 대군사께 얻은 만년한철 철괴가 있습니다.”

“만년한철?”

“예. 이것을 더해서 벼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만년한철로 무구를 만드는 것은 야장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인데 어찌 마다하겠소?”

회한을 며칠 더 빌려달라는 탁종건의 부탁을 내가 막 수락한 그때.

- 진정한 고수는 무기를 가리지 않는다지만, 명검은 그 값어치를 하는 법이지. 네게 만년한철 검이 생기는 것은 우리 파천검문의….

내게 좋은 검이 생겨 잘 되었다며 덩달아 흡족해하시던 사부님께서 무언가 잘못되었다 느끼셨는지 갑자기 말을 멈췄다.

- …가만.

‘?’

그리고 황망한 어조로 말했다.

- 회한을 녹이면… 나는 어찌 되는 것이냐?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한데, 사부님을 놀려볼 기회가 자주 오는 게 아니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사부님.’

- 뭣이?! 만년한철에 눈이 멀어 사부를 보내려는 것이냐?

‘예. 파천검문은 이 제자에게 딱 맡겨 놓으시고 부디 극락으로… 가셔야 하는데, 생전에 불가는 질색하셨죠? 쓰흡. 그럼 어디로 가셔야 하죠?’

- 예끼! 네 녀석이 나를 놀리고 있는 것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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