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8화. 전화위복 (2)
눈 덮인 산들이 켜켜이 둘러싼 어느 산장.
화려한 궁장을 차려입은 여인이 바늘을 놀리고 있었다.
달빛을 벗 삼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바늘을 놀리는 그 모습은.
“으흥.”
일견 지체 높은 가문의 규수가 소일거리 삼아 수를 놓는 것으로 보였다.
하나, 실상은 기괴하기 그지없었다.
푹!
여인은 손에 든 바늘로 수를 놓는 게 아니라.
팔이 없는 시퍼런 시체와 피로 물든 시뻘건 팔을 잇고 있었으니 말이다.
“으흐흥.”
여인의 이름은 연옥란.
역천괴마의 둘째 제자이자, 천마신교의 교단으로부터 마옥군주(魔鈺郡主)라는 군호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렇게 연옥란의 손이 정성스레 바늘을 놀린 지 한참.
시체와 팔 사이에 늘어진 천잠사가 거미줄처럼 빽빽해진 이때.
방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군주님, 조겸입니다.”
들려온 기척에 연옥란은 반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조 내사? 돌아왔군요? 들어오세요!”
조 내사라는 중년인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연옥란은 발랄한 목소리로 물었다.
“짜잔. 조 내사가 본단에 다녀오는 동안 만든 건데 어때요?”
“경 노야로군요?”
“맞아요. 결국 이렇게 내 사람이 될 거였으면서, 살아생전엔 왜 사홍이 녀석에게 붙어서 미운 짓만 했는지. 생각하니까 열 받네? 바늘로 찔러야지!”
푹! 푹! 푸푸푸푸푹!
큭큭거리며 바늘로 시신을 사정없이 찌르는 연옥란의 모습은 흡사 광인처럼 보였지만.
널을 뛰는 그녀의 성정은 괴왕부의 궁인들에겐 익숙한 일상이었다.
조 내사는 연옥란의 광기 어린 행동에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한데, 군주님. 마땅히 달아줄 만한 팔이 없다고 고민하시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저 없이 그 팔은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조 내사. 말이 좀 그런데? 내가 당신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라는 건가요?”
방글거리던 게 언제냐는 듯 순식간에 얼굴을 굳힌 연옥란.
그 모습에 조겸은 지체없이 머리를 조아리고는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속하가 구해 드리려던 것이라 궁금증이 생겨 말이 그리 나갔을 뿐입니다.”
“아하. 초원의 전사들에게서 구했어요. 체질적으로 딱 들어맞는 팔은 아니지만, 원혈(怨血)에 담가 혈강시화를 거쳤으니 맞을 거예요. 그래서 본단에서는 뭐라던가요?”
연옥란의 물음에 조겸은 다시 한번 자세를 고쳤다.
교주와 천마신공에 관해 고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교주님께서 칠 단계에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오. 그럼 우리도 그에 맞춰 준비해야겠네요?”
“예. 역천괴마님께서 이르시기를 군주님께 일임한다고 하셨습니다. 한데….”
“한데?”
“그 이야기 외에 본단에서 알아 온 다른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요?”
“언용운의 이야기입니다.”
흥미가 동하는 이야기였다.
연옥란은 바늘을 내려놓고 몸을 돌려 앉았다.
“언용운? 진주언가의 망나니?”
“예. 낭중마군 송길준이 천살막을 고용하여 언용운을 어찌 해보려다 잘 안 된 모양입니다. 천살막 쪽에서 큰 피해를 입고 의뢰를 물렸답니다.”
그 말에 연옥란은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아하하하! 송길준 그 자식, 밥맛이라 언젠가 한 번은 혼쭐을 내주려고 했는데! 언용운이 그걸 대신해줬네?”
그러다 우뚝 웃음을 멈추고 턱을 만졌다.
“마뇌님의 제자라는 녀석이 두 번이나 물을 먹었으니, 우리 사홍이가 죽을 만도 하네? 안 그래요, 조 내사?”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로서는 나쁠 거 없는 소식이네요? 천살막이 무슨 피해를 입었는지는 알 바 아니고. 본교가 입은 피해는 없고, 산서의 실패를 스승님 탓으로 돌리던 인간들은 할 말도 없어졌겠네.”
“그렇습니다. 한데 천살막에서 의뢰를 파기하면서 한 말이, 언용운의 사령술법에 당했다고 그랬답니다.”
“흐음?”
“제가 들은 표현을 정확히 옮기면…. 강시가 아니라 시체를 그냥 일으켰다고, 백귀야행을 목도한 것 같았다 그랬답니다.”
조겸의 말에 연옥란은 아미를 좁혔다.
“…백귀야행이라. 스승님의 술법에나 따라붙는 표현인데. 술법에 대해 알지도 못하는 놈들이 아무렇게나 가져다 붙였다 치더라도…. 뭐가 있기는 있다는 거네요?”
“예. 그 천살막이 의뢰를 파기한 것도 그렇고, 괴룡이란 칭호를 얻은 것을 봐도 그렇습니다.”
“그럼 경 노야가 스승님 앞에서 자결하기 직전에 했던, 저주를 풀었느니 해괴한 재주가 있느니 하는 소리가 사실이라는 소린데….”
연옥란은 피식 웃으며 강시가 된 경 노야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억울하셨겠네, 우리 경 노야? 근데 애초에 저를 따랐으면 억울할 일이 없었잖아요? 자업자득이지 뭐.”
그리고 자리에 일어나 책장으로 향하더니.
‘언가제혼술’ 이라는 제목이 쓰인 책을 펼쳐 들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별 내용 없는데?”
이걸 기반으로 다른 한 권을 복원한다고 쳐도, 그런 술법이 적혀있지는 않을 것 같았다.
“복원이 아니라 재창조를 해냈다는 건가? 그럼 천재 중의 천재라는 건데…. 한번 만나보고 싶긴 하네.”
* * *
이런 것을 두고 전화위복이라고 하는 걸까?
천살막의 급습에 대처한다고 얕은 내상을 입게 된 나였다.
하나, 그 덕분에 경혜 사태께 받았던 아미파의 보리심환을 알차게 흡수할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습격사건은 호원단철 인수 사업 측면에서도 전화위복이 되었다.
살수 조직이라는 것은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천하에 모습을 드러내고 나면, 증발한 것처럼 종적을 감추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천살막도 그렇게 종적을 감췄다.
‘천살막이 의뢰인이 누군지 밝히지 않고 그렇게 종적을 감춰버리니….’
이 사건을 두고 배후가 누구일지 천하 사람들이 알아서 떠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용의선상에 오른 것은 최근까지 나와 대립하고 있던 단강구의 야장들이었다.
습격의 순간, 탁가철방의 야장들도 함께 있었기에 그 주장엔 힘이 더해졌다.
하여 요즘 호북사람들은 모일 때마다 단강구의 야장들을 두고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단강구의 야장이라는 것들이 돈맛을 보더니 미쳐버린 거지! 탁가철방의 전임 대야장 어르신 같은 분이 진짜 장인이지!”
“자네도 소식지를 봤나 보구만?”
“봤지! 강남상왕의 제안도 거절한 그 탁가철방이 왜 언용운 공자를 따라왔는지 구구절절하게 나와 있더구만! 그게 장인이고 그게 협이지!”
덕분에 똥줄이 탄 단강구의 야장들이 백기를 들고나왔다.
그들은 전과 달리 호원단철의 정상화에 적극적으로 협조를 했고, 인수과정에도 딴죽을 걸지 않았다.
그리고 호원단철의 현판을 내리고 탁가철방의 현판을 내걸기로 한 오늘.
- 응? 저거 단강구의 야장 놈들 아니냐?
‘그렇네요?’
그들은 무창에서 올라온 우리를 맞이하러 직접 나오기까지 했다.
“…저희 단강구 야장 일동은 탁가철방의 입점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려 탁가철방과 언용운 공자가 함께한 여정에서 생긴 불미스러운 사건에 있어 결백함을 밝히는 바입니다.”
“거, 환영하신다는 분들이 왜 그렇게 뭐 씹은 표정들이십니까? 목소리도 작으시고. 이거 서운해서 ‘살 수’가 없겠는데요?”
“아하하! 화, 환영합니다!!”
“좀 낫네. 이따가 박수 소리가 얼마나 큰지도 들어보겠습니다. 딱 보고 있을 겁니다?”
나는 그렇게 단강구 야장들을 놀려준 뒤.
“자, 그럼 우리는 제를 올릴 준비 합시다.”
탁가철방의 야장들과 청죽관의 간부들, 그리고 제사떡을 얻어먹으러 온 다른 언동생들과 함께 경건하게 고사(告祀)를 지냈다.
그렇게 제를 올리고 탁가철방의 현판을 내건 이때.
“용운 형. 이제 고사 음식 집어 먹어도 되는 거지요?”
“어련히 안 줄까? 거지냐?”
“거지 맞는뎁쇼?”
“…그렇긴 한데, 그릇에 덜어 먹자는 말이지.”
“뭘, 모르시네. 이건 이렇게 바로 집어서 뜯어먹는 게 제맛입니다. 소천 형. 형도 하나 뜯으쇼.”
“가슴살로.”
깨방정을 떠는 천장호를 상대하고 있자니.
탁장명이 다가와 입을 열었다.
“공자님. 저, 이름을 정했습니다.”
“이름? 탁가철방 그대로 가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현판도 짊어지고 와서 방금 건 것이고요.”
“제 아들 이름 말입니다.”
갑자기 이름을 정했다길래 무슨 소리인가 싶었는데.
얼마 전에 태어난 아기 이름을 정한 모양이었다.
“아하. 아이 이름은 보통 좀 자라고 짓는다고 들었습니다만…. 잡귀들이 질투해서는 안 될 일 아닙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이 이름이라면 잡귀들이 얼씬도 하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뭐라고 지으셨길래?”
“아버님의 이름에서 건, 공자님의 이름에서 운을 따와 건운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대야장 어르신의 이름은 이해가 가는데… 제 이름을요? 부인과 상의도 없이 그리하셔도 됩니까?”
“언 공자님처럼 자랐으면 싶어서요. 오히려 부인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더군요.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나는 묘한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탁장명이 질 좋은 종이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내 내게 내밀었다.
아이의 이름을 직접 적어달라는 것이었다.
“…서예는 저보다 저기 있는 당옥기나 궁윤이가 낫습니다만.”
“당 의원님도 좋고 남궁 공자님도 명필로 유명하신 모양입니다만, 언 공자님께 받는 게 더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하여, 탁건운 세 글자를 적고 있는데.
뒤쪽에서 언동생들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언 형이 두 명?”
“용운 님이 둘…. 뭐, 미래의 일이니까….”
“미래고 현재고 쟤만큼 지독한 사람은 천하에 한 명이면 충분한 거 같은데….”
“그래도 언 공자의 이름은 한 글자만 쓰니까 중화가 좀 되지 않을까?”
“누님, 제가 보고 왔는데 돌아가신 대야장 어르신도 한 성깔 하셨습니다.”
“그럼 큰일이네.”
“다들 왜 그러십니까. 조금 집요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호협함과 도기는 천하에 따를 후기지….”
“이거 봐. 정현도 아니라고 못 하는 거에서 결정이 난 거지. 안 그래, 남궁윤?”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한다.”
“캭!”
그사이 탁장명에게 이름을 써준 나는 언동생들에게 돌아와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다 들렸다. 내가 뭐 어때서?”
- 진정으로 몰라서 되묻는 것은 아니겠지?
여론을 주도했던 당옥기는 내 눈을 어색하게 피하며 단강구의 야장들을 가리켰다.
“근데, 우리 습격당한 거 정말로 저 인간들이 사주한 거 아냐?”
한데, 화제를 돌리려고 한 말 치고는 진심이 담긴 의심이 제법 섞여 있었다.
당옥기는 습격을 당했던 당사자 중 하나였고, 평소 의심이 많은 녀석인 만큼 무리는 아니었다.
“나도 그 생각을 해보긴 했는데 대군사께서 아니라시더라. 생각해보면, 저 인간들에게 그 정도 돈과 배포는 없을 거다.”
“흐음.”
“딱 담합하고 텃세나 부리는 수준이지. 그러니 배후는 아마 마교 놈들일 거다. 길준이 이 새끼가 뒷공작을 했겠지.”
내 입에서 나온 마교 소리에 주변 사람들이 저마다 미간을 좁히는 가운데, 나는 계속해 말을 이었다.
“결국 우리가 강해져야 되는 일이야. 그런 의미에서, 은 소저. 맹주님이 이번에 뭘 크게 추진한다고 하지 않았소?”
“예. 원래 재학생 대표들만 뽑아서 하는 소림과의 교류전의 규모를 확대하실 거래요. 각 방파에서 영약들도 내걸고요. 백본회에서도 통과가 됐다던데요?”
“…소림이라. 안 그래도 몸보신의 필요성을 느낀 차였는데, 싹 쓸어야겠군.”
그런 내 말에 어째선지 사부님께서 침음에 잠기셨는데.
- …….
그러고 보니 경룡이 형도 낯빛이 어두워 보였다.
“회장님,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소림 하니까 안 좋은 추억이 생각나서 말일세.”
“아, 그러고 보니 경룡이 형은 작년에 교류전을 해 보셨겠네요?”
“나야 뭐 완전히 꿔다놓은 보릿자루였지. 내가 진 것도 진 거지만, 다른 사람들이 진 게 충격이었네.”
“매진악 선배랑 호연찬 선배 말씀하시는 거죠?”
“맞네. 자네가 입관하기 전만 하더라도 향란관의 자치회장인 매진악, 운매관의 자치회장인 호연찬 이렇게 두 사람이 기숙사 대항전에서 붙었다 하면 구름 관중을 모으는 맞수였지. 매호대전이라고 부를 정도였는데…. 그 두 사람이 소림의 무승들에게 제대로 손도 못 쓰고 지고 말았다네.”
“와.”
“…뭔가? 그 와는?”
“아시지 않습니까?”
내가 그렇게만 말하며 웃자.
언동생들은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내게서 슬금슬금 물러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중에서도 멀찌감치 도망치고 있는 우소릉을 콕 짚어 말했다.
“우소릉!”
“네, 넵!”
“청죽관 생도들한테 전해.”
“…집합하라고 할까요?”
“아니.”
“아, 아니면요?”
“제일 늦게 오는 놈은 뒤진다고.”
오랜만에 붉은 모자를 쓸 때가 온 듯했다.